제목 : 룬의 아이들 윈터러 4권 사라지지 않는 피
초판발행:2001년 12월 20일
저자:전민희
펴낸이 서인석
펴낸곳:제우미디어
출판등록:제3-429호, 등록일자:1992년8월17일
121-829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 324-1한주빌딩 5층
Tel:02)3142-6845, Fax: 02)3142-4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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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제우미디아 기획팀
표지 및 내자편집:제우미디어 디자인팀
로고디자인,일러스트레이터:나영학
촬영:포토 인 스튜디오
도움주신 분:김창원 ㈜소프트맥스
저자소개: 전민희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역사와 문학,신화등을 비롯하여 최근 철학의 신조류까지 섭렵한 지식광이며, 판타지 동화에서 남미 환상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판타지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연구원을 거쳐 1999년 출간한 장편 판타지 소설 "세월의 돌"은 통신 연재사상 전설적인 400만회의 조회수와 더불어 전국 판타지 독자들의 입문 필독서로 자리잡았다. 4대 통신망과 유명한 인터넷 커뮤니티들마다 작가의 팬클럽이 빠짐없이 결성되어 있으며, 현재 ㈜이삭커뮤니케이션에서 <아룬드 온라인>이라는 이름의 3D 오라인 게임으로 제작이다. 또한 "세월의 돌"은 총 5부작으로 예정된 <아룬드 연대기 Arund Chronicles>의 9부로서, 1부 격인 "태양의 탑"이 이듬해 출간되었다.
㈜소프트맥스의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4Leaf>의 제작에 참여, 배경세계와 스토리, 캐릭터 설정을 담당하였으며, 곧 출시될 온라인 게임 <테일즈 위버>에서도 동일한 설정을 사용하게 된다. 현재 100만 명에 육박하는 회원들이 이용하고 있는 <4Leaf>의 아바타 캐릭터들이 직접 등장하여 지금까지 감춰졌던 이야기들을 펼치게 될 연작 소설 시리즈가 바로 "룬의 아이들"이며, 그 가운데"룬의 아이들-윈터러"는 첫 번째로 공개되는 매력적인 비밀이 될 것이다.
룬의 아이들 윈터러
겨울을 지새는 자여, 그것은 아주 길고 긴,
결코 끝나지 않는 겨울일지도 모른다.
서리와 눈보라를 이기고
바람과 눈물을 견뎌
마침내 찾아올 그 봄은
네 시체 위에 따뜻한 햇살이 되어 내릴 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음을 푸른 칼날처럼 세워
천년의 겨울을 견딜 수 있도록 대비하라.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Contents
사라지지 않는 피 4
1장 Days of the Wilderness
1. 망자의 땅에서 길을 잃어 8
2. 엔디미온 31
3. 우회전략 66
4. 소풍 86
5. 하얀 조개껍질, 초록 솔방울 104
2장 Rage of the Winter
1. 함정이 예고된다. 120
2. 함정에 빠지다. 144
3. 그 정체 164
4. 반전 187
5. 겨울의 핵 208
3장 Maze of the Windward
1. 희생, 또는 갚을 수 없는 빚 224
2. 미로를 들여다보며 240
3. 대륙에서 불어오는 바람 263
4. 부서진 돌 280
[부록] 299
1장 Day of the Wilderness
1. 망자의 땅에서 길을 잃어
식은땀이 등을 타고 느리게 흘러내렸다.
안개처럼 곧 흩어져 버릴 듯한, 그러나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은 채 그를 쏘아보고 있는 눈동자들이었다. 바람이 불었지만 흔들린 것은 다프넨 자신의 머리칼뿐이었다. 머리 위에는 낯선 달, 그들의 여왕이자 때로는 보고도 매정스레 못 본 체 하는 여인이 흰 김을 내뿜으며 타올랐다. 자신의 입에서도 하얀 입김이 나왔다.
겨울일까, 갑작스런.
모든 것이 얼어붙었고, 녹아 깨어난 것은 그들뿐일까.
다프넨은 왼손으로 윈터러를 감싼 천을 걷어 검자루가 있던 위치에 천천히 감았다. 천에 가려졌던 칼날이 드러나 싸늘한 공기에 닿았다.
물론 이 따위 상태로는 제대로 된 검격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정하고 검을 고쳐 쥐기 시작하자 블레이드만 남은 윈터러에서 희미한 빛이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칼집에서 윈터러를 마지막으로 뽑았던 것이 이미 1년 정의 일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쥔 검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1년 동안 스스로의 의지로 봉인하기는커녕, 날마다 생사를 같이했던 검처럼 매끈하게 달라붙는 감촉이었다. 게다가 그는 공격의사를 품었다. 분명히, 그 날 이후 처음으로.
유령 소년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반투명한 몸이 오벨리스크 속으로 들어가더니, 겹쳐지면서 그 뒤로 사라졌다. 갑자기 조그마한 속삼임 같은 것이 사방에서 울리며 순식간에 커졌다. 그러다가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조용해졌다.
다프넨은 윈터러를 꽉 쥐며 중얼거리듯 나직이 말했다.
"유령이라면 썩 사라져라. 유령 따위 좋아하지 않아."
다시 한 번 속삼임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러더니 등 뒤에서 새된 여자 목소리가 외쳤다.
[우리 세상에 들어와 있어!]
그에 화답하듯 수많은 목소리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따가운 울림을 막으려 다프넨은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누구지? 누구의 핏줄이지?]
[어떻게 들어왔지? 어떻게 내보내지?']
[말을 걸어 봐! 네가 걸어 봐!]
순간 다프넨은 이들이 자기를 해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저들 쪽에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령이라면 살아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것라고 생각해 왔는데, 사실은 달랐단 말인가?
다프넨은 몸을 홱 돌려 뒤를 보았다. 대여섯 명의 유령들이 그의 시선에 놀라기라도 한 듯 재빨리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그 가운데 좀 전에 소리쳤던 소녀 유령이 손가락을 쭉 뻗었다.
[네 정체를 밝혀!]
다프넨은 당황하기도 하고 겁도 났지만 실은 그보다 어이가 없었다. 그들 말대로 여기가 유령들의 '우리 세상'이라면, 자기가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건지 묻고 싶은 것은 오히려 다프넨 쪽이었다. 길을 잘못든 것도 아니고 이상한 문을 열고 들어온 것도 아닌데, 잘 아는 집들 사이를 걷다가 어느새 들어와 버리지 않았나.
다프넨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저쪽에서 계속해서 말을 건다면 이쪽에서 대화에 응하기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경계심은 풀지 않은 채 빠르게 그들을 흝어보았다.
모두 20여 명 가량이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 말이야. 너흰 누구지? 왜 마을 한 가운데에 이런 이상한 곳이 있는 거지? 그리고 왜......."
그제야 생각난 사실이었다. 다프넨은 약간 긴장한 어조로 말꼬리를 끌며 말을 맺었다.
"...너희는 모두 아이들인 거지......?"
갑자기 섬뜩한 생각이 연이어 일어났다. 혹시 이곳은 아이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마법 결계의 공간이고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다시는 빠져나가지 못해 결국 저렇게 죽어 유령이 되어버린다거나.......
유령들은 한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투명한 얼굴들을 저들끼리 마주 갸웃거리면서. 그들 사이를 헤치고 한 소년 유령이 걸어나왔다. 그는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 서더니 다프넨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듯 두 손을 펴 밀어내는 동작을 했다.
[우린 산 자와 싸우고 싶지 않아. 너 역시 싸움을 원치 않는다면 손에 든 검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겠어? 그러고 나서 무엇이든 대화를 해보자.]
"......."
다프넨은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겉모습은 다프넨과 비슷한 또래로 보았다. 그러나 유령인 이상 실제로는 얼마나 오래 전에 죽었을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반투명한 가운데서도 색깔이 느껴질 수 있음을 알고 놀랐다. 소년 유령의 머리카락에는 엷은 금빛이 서려 있었다. 뺨은 파리했지만, 살아 생전의 것과 같은 얼굴 윤곽은 뚜렷하고 힘이 있었다. 엷은 달빛이 한 겹 씌워진 긴 목과 흰 팔, 날아갈 듯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나 그는 죽은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는 없어 보이는 순한 눈빛이었다. 정말로, 이 유령 소년은 지금껏 섬에서 만난 그 어떤 아이들보다도 온화하고 선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가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눈빛으로 누군가를 해코지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프넨은 입을 꽉 다물었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희 말대로 살아 있는 나는 죽은 자를 믿지 않아. 따라서 검은 내려놓지 않겠어. 너희가 날 여기로 불러낸 것이 아니라면 나가는 길을 알려줘. 그러면 우리는 다시 마주치지 않아도 되게 될 거야."
아이 같은 외모라 해도, 나쁜 의도는 없어 보인다 해도 함부로 믿을 수 있는 상대란 없었다. 저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정신이 아닐 것이 틀림없듯, 상냥한 얼굴이라 해도 그 뒤엔 깊은 원한이 있겠지. 아이 모습의 유령이란 그 나이에 본의 아니게 죽었다는 뜻일 것이다. 어른이 되어보이지 못하고 소중하게 품고 있던 미래를 다 잃었겠지.
그런 존재에게 원한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어린 유령이란 대부분 원령이고, 그래서 오랫동안 산 자의 땅을 못 떠나고 있기 마련인 것이다.
[......유감이네. 넌 이해심이 별로 없구나.]
생전에 금빛 머리칼을 가졌을 소년 유령은 입가를 굳히며 한 발짝 물러났다. 유난히 크고 맑은 눈이 회의주의자의 그것처럼 살짝 가늘어졌다.
다프넨은 눈을 떼지 않고 그를 쏘아보았다. 말갛게 빛나는 눈동자는 섬뜩했지만, 동시에 가장 깊은 미로를 품은 숲처럼 서늘한 광채조차 머금은 무엇이었다. 비난도, 원망도 아니고 단지 실망했다고 말하는 듯한 그 눈빛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다프넨은 마음을 다 잡았다.
"그래, 내겐 그런 것 없어. 그러니 그냥 날 마을로 돌려보내 줘."
유령 소년의 매끈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넌 이미 마을에 있어. 처음부터 쭉, 거기에만 있었지. 그리고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마을에서 살고 있어. 예전부터 늘.]
"무슨 소리지?"
다프넨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대뜸 되물었다. 소년은 한쪽 손바닥을 펴 보이고, 다시 다른 한쪽을 펴며 말했다.
[마을은 하나이면서 두 개였어. 너의 마을과 나의 마을은 같은 땅 위에 있었지만 항상 별개의 공간이었다는 말이야.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저 땅의 사람인 네가 경계를 뚫고 여기로 들어와 버린 거야. 내게 방법을 묻지 마. 우리에게 넌 낯선 침입자야. 난 널 도울 방법을 알지 못해.]
다시 한 번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 말은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의미인가?
유령들은 저들 동료인 소년의 말을 들으며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곤경에 빠진 것은 저들이 아니라 인간 소년인 다프넨이며, 여긴 저들의 공간이니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 듯했다.
다만, 누가 약자고 강자였든 뭔가 문제가 생긴 것만은 틀림없었다. 한 명의 유령 소녀가 그들의 대변인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움을 청할까?]
[안 돼.]
물러섰던 소년 유령은 강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 갑자기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이며 두 손을 특이하게 움직였다. 다프넨은 그것이 수인(手印)의 일종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마법을 쓰려는 것인가?
"그만둬!"
그러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유령들의 표정이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금빛 머리의 유령 소년을 주시했으며, 뭔가 의견을 말하기라도 하듯 입술들을 움직였다.
계속, 계속해서.
"무슨 일을 하려는 거야!"
그제야 다프넨도 자신이 이곳에서는 약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고 새삼 두려워졌다. 이곳에는 저들 유령들끼리 통하는 어떤 의사 소통 수단이 있는 모양이었다. 자기는 끼여들 수 없었고, 물론 끼여들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저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알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자 이제는 무슨 행동이든 해야만 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다프넨은 윈터러를 앞으로 내뻗었다. 검의 끝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유령 소년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로 무언가 말하려 하기도 전에, 놀라운 일이 벌어져 버렸다.
파바바밧!
흰 광채가 윈터러 전체에서 물줄기처럼 솟아나더니 순식간에 그와 유령들 사이에 반원형의 보호막을 형성했다. 그러고도 검에서는 계속해서 쉿쉿거리는 뱀처럼 하얀 빛이 너울거렸다.
[멈춰!]
유령들보다 먼저 충격을 받은 것은 다프넨이었다. 그는 멍해진 눈으로 눈앞에 나타난 놀라운 것을 쳐다보다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검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웅웅거리는 울림이 오른팔 전체를 감싸며 밀려들어 순식간에 심장까지 강타해 왔다.
"흡~"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감싸쥐고, 다시 두 손으로 검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5미터는 넘는 높이로 솟아오른 금속성 광채의 보호막을 올려다보았다. 보호막 뒤로 유령 소년의 얼굴이 반쯤 비껴 보였다. 좀 전과는 다른 차고 매서운 눈매였다.
[해보겠다는 거야?]
그가 반투명한 손을 앞으로 내미는 순간 십여 가닥의 광채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솟아올랐다. 저마다 다른 곡선을 그리며 달려 보호막에 충돌했고, 그때마다 다프넨의 손에는 무시 못할 충격이 왔다. 단순히 물리적인 울림만이 아니라 심장을 움켜쥐고 뒤흔드는 듯한 강한 타격이자 압력이었다. 억지로 버티느라 애쓰던 다프넨이 외쳤다.
"그만둬! 그만두라고! 내가, 내가 이렇게 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 누가 그랬단 말이야!]
유령이 만들어 낸 빛의 곡선들은 이제 한 곳으로 머리를 모으며 증폭된 일격을 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프넨의 변명을 들을 마음이 있다는 듯 두 손을 모으며 빛 곡선들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말해보라는 것처럼 턱만을 약간 움직여 보였다.
[할 말이 있다면 해. 무엇이 잘못되었지?]
겨우 맥박을 추스를 수 있게 된 다프넨은 숨을 몰아쉬며 상대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검을 상대에게 겨누지 않고 바닥으로 내려보려 했다. 그러나 정체 모를 거대한 힘의 자기장(磁氣場)에 휘말린 것처럼 어림없었다.
"이 검... 이 검이 문제야. 어쩌면 내가 여기 오게 된 것도... 이 검 때문인지도 몰라. 내 실력으로는 결코 가눌 수 없는 힘이 이 안에 있어. 난, 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것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른다고!"
거대한 은빛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며, 허공으로 오르려 용트림하는 빛이 보였다. 그 너머에서 유령들은 이번에야말로 실로 유령처럼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저들끼리만 통하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무언의 속삭임이 퍼져나갔다. 그러더니 유령들은 세 명만 남고 스르르 뒤로 물러서며 어둠 속에서 녹아버렸다.
다시 말해서 사라져 버렸다.
[다가오지마.]
그건 유령이 한 말이었다. 인간 쪽에서 유령에서 한 말이 아니었다.
"알...았어."
다가갈 생각은 없었다. 저들을 믿지 않는다 해도 일부러 위협할 필요는 아직 느끼지 않았다.
세 유령이 차례로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면 우리 쪽에서도 다가가지 않을 테니까.]
[싸우기를 원치 않아.]
[네 소개를 해 주겠어?]
그건 '넌 뭐야?'하고 외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어감이었다. 남은 유령들 가운데 한 명은 오벨리스크 앞에서 최초로 보았던 그 꼬마 유령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소녀였다.
다프넨은 약간 망설였지만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마음을 고쳐먹고 말했다.
"난 다프넨이야. 본래는 이 섬에 살지 않았어. 아직도 견습 순례자지만 앞으로 정식 순례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말하고 나니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더 생각하기 전에 아직도 손에서 광채를 없애지 않고 있던 소년 유령이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어쩐지 네가 낯설다 했어.]
그 말은 묘했다. 다프넨이 물었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니?"
대답이 들려왔다.
[서로 아는 사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일방적으로 알고 있지.]
갑자기 소녀 유령이 끼여들어 말했다. 그 목소리는 몹시 맑고 경쾌했다.
[그건 우리의 즐거운 놀이거든.]
놀이? 무엇이 놀이지?
다프넨은 혼란스러워지는 머리를 다잡으려 애쓰며 다시 물었다. 그러는 동안 윈터렁에서 뻗어나간 보호막의 빛이 점차 엷어지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 말은 너희가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즐기고 있었다는 건가? 마치 인형극을 보는 것처럼?"
그 순간 다프넨의 몸 속에서 예지가 한 줄기 솟아오르며 자신이 방금 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런 강렬한 예지는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것이라 스스로도 약간 놀렸다.
소년 유령의 손에서 번쩍이던 광채도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한 번 저으며 대답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겠지. 우선 묻겠는데 네가 섬 밖의 다른 나라에서 왔다면 네 손에 든 검도 네가 가져온 것이니?]
다프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 쪽에서 물었다.
"너희는 언제부터 여기서 살고 있었지? 본래는 섬사람이었는데 죽어서 이렇게 된 거야?"
말을 맺고 나서야 약간 무례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유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린 이 섬에 살았던 적이 없어.]
"그러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아니... 본래는 사람이었던... 것은 맞는... 그런 건가? 혹시 나무의 정령이라든가 그런 것은 아닌지......."
짧고 간단한 대답이 울렸다.
[아니.]
잠시 후 얕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맨 처음에 본 꼬마가 낸 소리였다.
[웃기는구나. 우리가 나무의 정령이라면 왜 사람 모습을 하고 있겠어? 나무 모습을 하고 있어야지.]
듣고 보니 그렇구나 싶었지만 실은 생전 처음 해본 생각이기도 했다. 나무 정령은 나무 모양을 하고 있다고? 그럼 바다나 강의 정령은 물 모양이겠네? 그러면 바다나 강 자체와 영 구별되어 보이지 않을 테니까 알아보기 힘들 테지만... 사실, 정령 입장에서 볼 때 꼭 인간 눈에 띄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존재할 뿐이잖아?
만일 나무의 정령과 강의 정령이 만났는데 서로 인간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가장 행렬이라도 하고 있는 꼴이 아니겠는가. 전혀 엉뚱한 제3자가 끼여들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아니면 나무의 정령이 보기에는 강의 정령도 나무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일견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낯설고 엉뚱한 생각이라 당황하고 있는 다프넨에게 소년 유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서로에 대해 궁금한 게 많구나. 하지만 그런 것은 나중에라도 차근차근 물어나갈 수 있는 걸 거야. 그보다 중요한 건 첫째로 널 어떻게 산 자들의 세상으로 돌려보내느냐 하는 거고, 둘째로는 이런 일이 왜 불어졌는지 이유를 아는 것이겠지.]
그 말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제야 다프넨도 윈터러가 만들어냈던 보호막이 거의 다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나 해서 손을 만든 광채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조금이라도 짐작 가는 것이 있어?"
[한 가지는 확실하지. 널 여기로 데려온 것은 네 검이라는 사실.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네 검을 바닥에 내려놔. 그검에는 이곳, 우리들의 세계와 맞지 않는 기운이 서려 있어. 방금 전처럼 네 의지와 관계 없는 일들이 멋대로 벌어지는 거지. 그러다 자칫하면 우리를 다치게 할 지도 모르고, 그렇게 된다면 나 역시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겠지.]
협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상대방은 실로 진지하고 솔직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싸움의 요인을 만들지 말라는, 그러나 싸우게 된다면 양보는 없을 거라는 의지가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다프넨은 억지로 고개를 흔든 다음 말했다.
"내가 널 믿어도 좋을 근거는 뭐지?"
[내가 널 해치고자 한다면 지금 이 순간보다 좋은 때가 있을까? 넌 네 검을 네 의지로 다루지 못하지만, 난 내 능력을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어.]
"......."
이해할 수 있었다. 유령 소년의 능력은 그가 짐작할 수 있는 깊이 너머에 있을 지도 몰랐다. 사서 싸움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손을 떼며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언제고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검을 다시 집을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상대를 보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른 것이 보였다. 다프넨은 약간 당황했다. 어째서 벌써부터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거지?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그리고 자신이 아주 간단한 것 하나를 묻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네 이름은 뭐니?"
공회당에서 열린 사제들의 긴급 회의는 새벽 3시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나우플리온은 지친 몸을 이끌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의 태도가 과연 옳았던 것일까 반문해 보았다.
모르페우스, 저 물귀신 같은 꼴통 사제가 결국 다픈네을 끌고 들어갔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회의에 참석한 모르케우스 사제는 입 꾹 다물고 모르는 체 시치미를 뗐지만. 그는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을 본 순간 딱 하나 윈터러, 그 외의 것은 떠올릴 수도 없었다. 물론 섬 안에 그가 모르는 뜻밖의 비밀이 있을 가능성으러 배재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인지하고 있는 섬 안의 가장 큰 잠재적 위험은 바로 윈터러의 존재였다.
그건 분명, 나우플리온처럼 특이한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다프넨 같은 아이에게 맡겨둘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프넨의 결정을 존중해서 그에게서 검을 빼앗지 않았다만 충고를 했을 따름이었다. 함부로 뽑지 말고 기다리라고.
그런 그가 섬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 모르페우스에게 무심코 다프넨이 가진 검에 대한 이야기를 발설하고 말았다. 깊은 흥미를 보이는 모르페우스를 보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주워담을 수 없는 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스포이나 사제로부터 모르페우스가 다프넨의 검에 관심을 가져서 그를 자주 찾아오게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다프넨 자신으로부터 사실도 확인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벌어졌다.
"정말이지......."
내일은 반드시 진상을 확인하리라고, 그리고 저 꼴통한테 단단히 주의를 줘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리라고 굳게 다짐하면서 나우플리온은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안은 어두웠다.
더듬더듬 침대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다프넨이 옆 침대에서 자고 있을 거란 점은 의심하지도 않은 채였다. 겉옷을 벗어 의자 위에 대강 던지고 자기 침대를 찾아내어 천천히 기어 들어간 다음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갑자기 다시 떴다.
나직이 소년을 불렀다.
"보리스!"
대답이 없었다. 한 번 더 불러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나우플리온은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다프넨의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더듬어 보았다. 예상대로 그곳에 소년은 없었다.
"보리스! 어디 있지!"
급히 램프를 찾아내어 불을 켰다. 그리 넓지도 않은 집 구석구석을 비춰 보았지만 소년이 들어온 흔적은 없었다. 당연히 원터러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이런!"
그가 다시 겉옷을 걸치고 검을 움켜쥔 채 문밖으로 튀어나오는 데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고, 소년이 오다가 멈췄을 법한 곳 여러 군데로 달려가 보았다. 빠른 걸음으로 길을 따라 걷던 그는 달 하나만 동그라니 떠 있는 캄캄한 하늘 아래서 우뚝 멈춰 섰다. 길에는 없다. 어디로 가야 할까. 그거야 당연히 모르페우스의 집이겠지!
나우프리온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문을 세게 두드리며 상대방을 부르려다가 주위를 시끄럽게 해서 좋을 것이 없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도 마음이 덜 진정된 그는 창문을 거치게 몇 번 쳤다.
예상외로 창은 금방 열렸다.
"누구... 나우플리온이군? 이 시간에 무슨......."
모르페우스 사제는 말을 맺지 못했다. 나우플리온의 억센 손이 창 밖으로 머리를 내민 그의 멱살을 단박에 움켜쥐었다.
"문 여시오. 내 소년을 찾으러 왔소."
"이걸 놔야 문을 열지."
모르페우스는 별로 당황하지도 않은 채 잠시 안으로 사라졌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나우플리온은 아직도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그의 쑥대밭 연구실을 휘 둘러본 다음 사납게 물었다.
"보리스... 다프넨은 어디 있소?"
모르페우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 아이는 자네 집에 있을 텐데?"
"없소이다. 당신이 다른 곳으로 보낸 것 아니오?"
"그 애가 집으로 가겠다고 여길 나간 지 벌써 몇 시간이 흘렀는데? 정말로 자네 집에는 없는가?"
사제들 간에는 나이에 관계없이 경어를 쓰는 것이 관례였으나 둘은 예전부터 워낙 흉허물없이 지낸 사이라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모르페우스는 나우플리온의 얼굴이 점차 굳어지고, 이윽고 굳어지다 못해 사납게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이번 상황이 과거의 친분으로 쉽게 넘어갈 만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없어졌습니다. 그 애가......."
갑자기 고함치는 듯한 목소리가 연구실을 울렸다.
"사라져 버렸다고요! 아무 데도 없단 말입니다! 그런 위험한 꼴을 하고서!"
모르페우스도 사태를 눈치챘다. 그는 다시 한 번 '정말인가?'하고 묻는 식의 어리석은 태도는 취하지 않았다. 두말 않고 문을 열어 제쳐 밖을 내다보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다시 들어가 쑥대밭 연구실 한구석에서 짤막한 막대 하나를 찾아내어 쥐었다. 그가 손에 힘을 주자 막대 전체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나가세. 짐작 가는 곳들로 서둘러 가보세나."
날이 샐 무렵, 행방불명된 소년 하나를 찾아 나섰던 두 명의 사제는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한 채 다시 처음의 집 앞에 돌아와 서 있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대륙 한구석에 자리잡은 마을이 아니라, 거친 바다로 둘러싸여 외따로 떨어진 섬 가운데 유일한 마을이었다. 탈출하고 싶다 해도 달리 갈 곳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이미 선착장에 가 보았고 아무도 배를 타지 않았다는 것도 확인했다. 가까운 산자락 모두를 헤집고 다니는 동안 의술과 기술을 담당하는 서클렛의 사제 모르페우스가 마법을 불어넣어 만든 감지(感知)의 지팡이가 내내 빛을 발했다. 그러나 평소에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쉽게 눈에 띄지 않던 희귀한 약초니 버섯이니 하는 것드이 숱하게 감지되는 가운데서도 오갈 데 없는 소년 하나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해."
모르페우스는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 일부러 밝혀 뒀던 램프를 껐다. 기름이 귀한 섬에서 밤새 램프를 켜 놓는다는 것은 큰 낭비였지만 그는 자신이 평소처럼 연구실에서 밤샘을 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다.
나우플리온은 따라 들어왔으나 여전히 앉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연구실 한 구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검의 사제였고, 따라서 사람을 찾는 데 있어서는 타고난 체력 외에는 사용할 것이 없었다. 그것조차도 그를 화나게 하는 요인이었다. 더불어 미칠 듯 걱정스러웠다. 밤새 돌아다니는 동안 모르페우스로부터 대강의 이야기를 들었고, 절반 가량의 힘이 개방된 그 위험천만한 검을 들고 사라진 제자를 생각하니 자기 숨통이 죄여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무능함에 대해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모르페우스는 나우플리온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의자에 몸을 던지며 불쑥 말했다.
"이 사실을 숨겨야 해."
나우플리온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과거 어느 적을 대했을
때보다 더 형형하게 번들거렸다.
"무슨 소리십니까. 이 상황이 되어서도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이 걱정스러우신 겁니까."
모르페우스는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내뱉었다.
"모르는 소리는 집어치워. 이 꼴통 사제는 내일 섬에서 쫓겨나도 별로 아쉽지 않은 인간이야. 그러나 다프넨 녀석은 아니지 않나?"
"......."
침묵하는 상대방을 보며 모르페우스가 말을 이었다.
"다프넨 녀석이 사라진 것이 알려진다. 섬 전체가 찾으러 나선다. 그러면 혹시 녀석을 찾아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커질지는 모르지. 그러나 내 생각에는, 지금 상황 해결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데시 사제님밖에 없어. 그 애가 사라진 것이 검의 마법적인 힘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아무런 소용도 없이 실종 소식이 널리 퍼지고 나면 녀석이 돌아오든 안 돌아오든 이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는 모두가 알게 되어버려. 너도 사제 회의의 분위기는 잘 봤을 거고, 지금 상황에서 모든 원인이 녀석의 검이었다는 게 알려지면 그 녀석이 무사할 수 있을 성싶나? 사제들에게도, 섬사람에게도, 섭정 각하에게도 용납되지 못할 테지. 결론은 딱 둘이야. 검이 끝장나던가, 검과 녀석이 동시에 끝장나던가."
갑자기 모르페우스는 의자에서 잡아 일으켜졌다. 나우플리온의 억센 손이 두 번째로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고, 다른 손은 어깨를 쥐고 있었다. 모르페우스는 나우플리온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보았지만 반항할 마음은 없는지 그대로 있었다.
터억!
모르페우스의 몸은 다시 한 번, 훨씬 강한 충격에 밀려 의자에 내던져졌다. 그러나 턱이 돌아갈 정도로 심하게 얻어맞았음에도 모르페우스는 화를 내지도, 아픈 시늉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내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입을 열었고, 피 섞인 침과 함께 부러진 이를 하나 뱉어냈다.
나우플리온이 그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짓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다프넨이 돌아오면...... 그 이빨은 제 것으로 도로 갚지요."
이윽고 해가 높이 떠올랐다.
2. 엔디미온
해가 중천에 오른 정오, 한적한 마을길을 사뿐사뿐 걸어가는 소녀가 있었다. 아직 스콜리의 수업이 끝나지 않았을 때라 마을 안에는 소녀 또래의 아이가 거의 없었다.
소녀의 손에는 연보랏빛 풀꽃으로 만든 동그란 화관이 하나 들려 있었다.에젤다라고 불리는 이 꽃의 뿌리를 끓여 우린 물은 섬사람들이 해열제 대신 흔히 사용했다. 그 때문에 이 꽃은 아이들의 문병을 갈 때 선물로 인기가 있었다.
소녀의 한 집의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문밖에 붙은 팻말을 들여다보았다. 전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문병은 사절합니다.
간단한 글귀였다. 나무판에 칼끝으로 새긴 글자를 못내 아쉽게 들여다보다가 손가락을 내밀어 슬쩍 문질러 보던 소녀는 등 뒤에 드리워져 오는 그림자를 느끼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힌 남자의 정면으로 마주쳤다.
소녀는 생긋 웃었다.
"마침 오셨네요!"
나우플리온은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 보였지만 그리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그쯤은 소녀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오랜만구나, 리리."
"네, 다프넨은 많이 아픈가 보네요?"
"......그렇단다."
"정말로 문병은 안 되나요?"
나우플리온은 리리오페의 손에 들린 에젤다 꽃을 보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라. 내가 전해 주마."
리리오페는 화관을 든 손을 뒤로 빼며 응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전해 주면 안 돼요? 이거 만드는데 한 시간이나 걸렸단 말예요. 꽃을 따러 다닌 시간까지 합하면 두 시간."
"그래서 스콜리도 빼먹었군."
"아픈 친구의 말동무를 해 주려고 그랬죠."
"감동적인 마음씨로군 그래."
"비꼬는 거예요?"
얘기를 일부러 엉뚱한 공방으로 끌고 가려 애쓰는 리리오페에게 나우프리온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리 주거라. 지금 주지 않으면 그냥 갈 테다."
"치이......."
나우플리온의 말투에 파고들 구석이 없음을 느낀 리리오페는 아쉬운 얼굴로 화관을 내주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얼른 나으라고 꼭 전해주세요. 나흘이나 안 나오니 제가 몹시 보고 싶어한다구요. 아셨죠?"
나우플리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리리오페는 몸을 돌려 오던 골목으로 사라졌다.
리리오페의 마지막 말은 절반 장난이었지만 어쩐지 진지함도 함께 들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한두 마디 지분거리며 놀렸겠지만 지금의 나우플리온에게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닫힌 문에 천천히 기대섰다.
손에 들린 화관이 내려다보였다. 가늘지만 질긴 꽃줄기들이 소녀의 매운 손끝으로 곳곳에서 단단히 맺어지고, 그 위에 벌의 날개 같은 작고 야들야들한 꽃잎들이 곱게 덮여 있었다. 리리오페 또래의 소녀들이 머리에 얹으면 딱 맞을 법한 자그마한 것이라, 그의 손에서는 더없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
나우플리온은 방금 열고 들어온 문의 손잡이에 화관을 걸었다. 그리고 침대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쯤 모르페우스 사제는 데스포이나 사제를 만나고 있을 것이었다. 나흘이 지났지만 그의 소년은 돌아오기는커녕 남긴 흔적 하나 없었고, 두 사제가 할 수 있는 일도 한계에 달했다. 모르페우스는 웬만해서는 사과하는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날 아침 나우플리온을 만나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데스포이나 사제를 찾아가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고 했다. 이 상황에서 그들을 이해해줄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거니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그녀뿐이라는 것을 둘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섬사람들에게는 다프넨이 좀 아파서 집에서 쉬고 있는 것으로 해두었다.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이 섬사람들의 호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줄 알았다. 그러나 첫날 다프넨이 스콜리를 빠지자 당장 그 날 저녁에 꼬마 오이지스가 어머니가 구워 주셨다는 과자를 가지고 찾아왔고, 그 다음날에는 스콜리의 교양 선생인 제네시가 안부를 물으러 왔다. 책 안 읽는 아이들에게 은근히 질려 있던 제네시 선생이 스콜리의 책을 한 권씩 두 권씩 읽어나가는 다프넨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제네시 선생은 검의 사제인 나우를리온의 권위를 생각해서 다프넨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그에게 별다른 항변은 하지 않았지만 의아하게 생각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셋째 날, 탑의 은둔자로만 알았던 제로 씨가 머뭇거리며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된 나우플리온은 놀랍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해서 한참이나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친구가 앓고 있다고 하는데 별로 가져올 것도 없고 해서, 많이 아프지 않다면 침대에서 무료할 때 읽으라고 책이나 가져왔습니다."
제로는 나우플리온보다 한 연배 이상 나이가 많았지만 사제직을 갖고 있는 그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지켰다. 그러나 그 역시 다프넨을 만날 수는 없었다. 나우플리온은 모르페우스 사제가 안정을 취하라고 했다는 얘기를 핑계삼아 겨우겨우 그를 돌려보냈다. 그나마 아픈 사람을 돌보는 임무를 맡은 서클렛의 사제가 공모자인 모르페우스여서 다행이었다.
"들어가도 되나?"
문 밖에서 들린 것은 모르페우스 사제의 목소리였다. 얼른 일어나 문을 열고 보니 밖에 선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완전히 뜻밖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죄책감 때문에 나우플리온은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이런, 데시 사제님이 여기까지......."
지팡이의 사제 데스포이나, 그녀였다. 그녀는 미소도 짓지 않고 고개만 한 번 숙여 보인 뒤 안으로 들어왔다.
세 사제가 마주앉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데스포이나였다.
"모르페 사제한테 이야기는 다 들었다. 참... 어려운 일을 저질렀더구나."
일을 저지른 것은 나우플리온이 아닌 모르페우스였다. 그러나 나우플리온은 한때 큰누나나 다름없이 자신을 돌봐 주었던 데스포이나 입에서 꾸중듣는 소년처럼 입을 다물었다.
모르페우스가 말했다.
"예, 큰일을 저질렀지요. 나우플리온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제탓입니다."
"일단은, 그 아이가 아직 섬 안 어딘가에 있다면 반드시 찾아낼 수 있는 주문을 써 보도록 하마. 사람들의 눈에 띄어선 안 될 테니까 밤을 기다려야겠구나. 물론 지체하는 것 역시 위험할 수 있지만... 내 생각에 그 아이는 아무래도 검의 힘에 이끌려 이공간(異空間)의 경계를 넘어간 것 같다. 달리 위험한 존재들이 그 안에 살고 있지 않다면 아마 조용히 잠들어 있을 테지."
나우플리온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데스포이나 사제는 나우플리온과 모르페우스의 고민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 일이 섬사람들에게 새어나갔다가는 다프넨이 무사하지 못할 거란 문제에 대해서.
데스포이나는 이공간이라는 것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 효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경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섬의 이공간에 어떤 것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는 몰랐다. 그녀로서는 이 섬이 그들 순례자들이 오기 전데 비어 있었으니 그 위에 덧씌어진 여러 개의 차공간(次空間)들도 아마 비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공간은 아예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인 이계(異界)와는 달리 현실 세계의 모습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데스포이나가 모르페우스 쪽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모르페 사제, 만일 이번에 다프넨이 무사히 돌아온다면 그 검의 비밀을 밝히려던 실험을 중단할 건가요?"
나우플리온도 모르페우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답이 얼른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좀더 침묵이 흐르다가 결국 나우플리온이 입을 열고 말았다.
"왜 대답하지 않으십니까, 그 아이를 얼마나 더 위험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그러더니 나우플리온은 데스포이나 사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프넨이 돌아오다면 전 제 의사를 분명히 그 아이에게 전하겠습니다. 더 이상 그런 위험한 일에 연루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다프넨이 자신의 의사를 가지고 행동을 결정하는 모습은 나우플리온에게 있어 더없이 큰 기쁨이기도 했기에, 그런 권리를 빼앗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때 모르페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면목 없는 소리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실험을 중지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모르페우스는 손을 들어 잠시만 말할 수 있도록 부탁한다는 듯한 손짓을 했다. 그리고 데스포이나 사제를 향해 계속해서 말했다.
"이번 일로 다프넨이 위험에 처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저라고 안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은 결국 그 검이 제 본모습을 숨긴 채 어린 소년의 손에 있었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나우플리온은 문득 섬뜩함과 같은 것을 느끼며 그 말을 들었다. 그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숨긴 채 소년의 곁에서 잠든 체 하고 있는 미지의 힘이었을까, 그런 것일까.
"다프넨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번 일이 없었다 해도 그 자체로 이미 처음부터 위험했다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제가 섣불리 건드리는 바람에 그 검은 자신의 본체를 절반 가량 되찾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게 절반인지 어떤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겠죠. 말씀드렸다시피 그로 변했습니다. 흡사 사악한 뱀,,, 같았죠."
'사악한 흰 뱀'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데스포이나의 표정이 싹 변했다. 나우플리온의 눈에는 힘이 들어갔다.
'사악한 흰 뱀'이란 그들 달의 순례자들이 옛 왕국을 떠나오기 전에 보았다던 불길한 징조의 괴물을 뜻했다. 비록 그 흰 뱀으로 인해 왕국이 멸망한 것은 아니지만, 그 뱀이 나타난 후로 잇따라 벌어진 무서운 일들이 결국 그들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우플리온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고, 다시 들이쉰 다음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내뱉고 말았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오! 왜 그런 불길한 것을 그 아이와 연결시키는 거지!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모르페우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난 단지 그 물건의 가공할 만한 잠재력에 대해 환기시키고자 했을 뿐이야. 결코 그 아이를 모함할 생각은 없었어."
"없었다 해도, 지금 한 말로 이미 그렇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요!"
"됐다, 그만 , 그만."
데스포이나가 나우플리온의 손목을 잠시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따뜻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달래고 돌보아야만 했던 반항적인 어린 소년이 어느새 자라 또 다라은 아이를 감싸고 보호하려 한다는 것에 대해 묘한 향수 같은 것을 느꼈다.
"모르페 사제의 말이 지나쳤다. 흰 뱀에 대한 것은 잊어버리자.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모르페 사제의 말에 찬성한다."
나우플리온은 애써 숨을 고르다가 흠칫 놀라 데스포이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립니까? 그의 무슨 말에 찬성하신다는 겁니까?"
나우플리온의 말대로 모르페우스는 아직 본론을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결국 검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계속 연구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에 대해서.
그러나 데스포이나는 이미 다 짐작하고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 검의 잠재적 위험에 대해서, 그대로 방치하는 것만이 올바른 해결책은 아니라는 의견 말이다. 모르페 사제의 방식이 좀 지나쳤을 수 있으나 근본적인 접근은 옳아. 다프넨이 돌아온다면 나 스스로 나서서 그 검의 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하지만......."
나우플리온의 얼굴을 본 데스포이나는 약한 미소를 지었다.
"나우플리온 사제, 당신은 그 아이 다프넨이 섬에서 쫓겨나기라도 할까봐, 또는 어떤 처벌을 받거나 격리를 당할까봐 걱정하는 거지요?"
갑작스런 존대에 나우플리온은 약간 움찔했지만 곧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더불어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그 아이로부터 검을 빼앗는 것도 안 됩니다."
"안 된다고요? 왜지요?"
나우플리온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랐다. 데스포이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 검의 힘을 연구하겠다'고 한 말은 아마도 다프넨과 윈터러를 떼어놓겠다는 의미였음에 분명했다.
"그건... 그런 것이 그 아이의 방식이기 때문이죠."
말해 놓고도 설득력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쩔 도리 없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물러설 수 없는 보루이기도 했다.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이 남의 명령이나 제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랬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발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기를 바랬다. 다프넨, 아니 보리스 진네만은 그 검 윈터러를 죽은 형의 분신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지켜내는 일이야말로 너무 어렸던 자신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던 형에게 작게나마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다른 사람이 억지로 빼앗아서는 안 되었다. 소년 자신이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전에는, 그 짐에는 떠나서는 안 되었다.
물론 나우플리온은 소년을 사랑했다. 그러나 소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물건, 그것이 설혹 악마의 물건이라 해도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인간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평생에 걸쳐 애써 부인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달의 섬에서 순례자로 자란 그는, 현실보다 의지와 이상을 중시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거짓보다는 위기를 택하는 정신이었다.
소년은 그의 거울이었다. 자신이 얻어내지 못한 삶을 걸어갈 사람이었다. 그는 최대한 그것이 이룩되도록 돕고 싶었다. 위기는 제자리에서 달아나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방식......."
데스포이나는 나무 들보들이 나란한 직선을 긋고 있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우플리온, 너는 아마 무서운 스승일 게다. 또는 기어코 상대를 빛나게 하고야 마는 강한 동료이겠지. 확실히, 네가 그 애의 아버지였다면 이런 결론을 쉽게 내리지는 못했을 터이다. 아이가 있는 나는 잘 알 수 있는 일이고말고. 분명 너는 내게 그 아이가 대륙에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어왔노라고 이야기했지. 그러나 그 애가 더 다치고 더 아프게 깎여나가, 결국 진짜 보석이 되기까지 한시도 내버려두려하지 않는구나."
"아닙니다."
나우플리온은 고개를 젓더니 데스포이나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전 그 아이가 모든 것을 알아서 결정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단지,아직 어린 그에게 닥쳐오는 방해를 막아줄 바람벽이 되어주고 있을 뿐입니다. 좀더 빨리, 그가 단 한 명의 스승 같은 것은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자신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세상 모든 인간사가 다 스승일 테죠. 그 아이는 분명 지금 저를 의지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끝날 때가 곧 올 것입니다. 제가 그를 거절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저를 떨치고 일어서 가게 되겠지요."
녹색 풀밭 가운데 불쑥 튀어나온 하얀 바위가 햇빛을 받고 있었다. 이미 오후이니만큼 따끈따끈하게 데워졌을 듯했다. 손을 대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냥 눈이 아플 정도로 흰 바위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싫증도 내지 않고 죽 계속해서.
바위는 비어 있었다.
첫날에는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나보다 생각하고 말았었다. 이틀째에도 약간 기분이 이상하네, 싶었을 따름이었다. 익숙한 일이 한 가지 사라져서 그런 걸까. 그냥 조금 허전했다.
빈 바위를 바라보고 있다가 입술만 움직여 몇 마디 노랫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며칠 전에 가르쳐 주려 했던 찬트(chant)의 일부였는데 이날 불러 보니 약간 메마른 듯 들렸다. 오늘은 노래가 잘 안 되는 날인가.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겠다고 하지 않았어?"
누구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내어 말했다. 방금 전 노래와는 달리 이 순간의 목소리는 조금 낯설다 싶을 정도로 뚜렷하게 들렸다. 상대 없는 곳에서 혼자 연극하듯 말했을 뿐인데, 오늘 내내 한 일 그 무엇보다 생생한 어조로.
다시 한 번 불러 보았다.
"대답해 봐."
다프넨은 눈을 떴다.
[내 이름은 엔디미온이야.]
귓가에서 맴도는 한 마디였다. 방금 전에 들은 것 같으면서도 아주 오랜 과거에 들었던 이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와 지금 사이에는 긴 꿈이 가로놓여 있었다.
자신이 되물었던 말도 생각이 났다.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되니?'
섬사람들이 버릇처럼 이름을 줄여 부르는 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무심코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엔디미온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엔디미온이라고 부르지,뭐 또 다른 게 필요해? 별명?]
어쩌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살아 생전 그들의 이름은 결코 줄여지지 않는,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엔디미온이 놓고 간 물건이 저만치 발치에서 좀 떨어진 젖은 동굴벽 언저리에 놓여 있었다. 널찍한 청동 그릇이 있었고, 그 안에는비둘기 알만한 동그란 돌들이 십여 개 들어 있었다.
그 곁 어디에선가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며 흡사 시간을 재는 듯했다. 그는 둥글게 뚫린 입구 너머로 검은 밤하늘이 내다보이는 동굴 안쪽에 누워 있었다. 주위의 공기는 약간 축축했다. 마치 비라도 내린후인 양.
다프넨은 자신이 얼마 동안 여기에 있었을까 궁금했다.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을 보면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끊임없이 계속되는 저 물방울 소리 외에는 어느 것도 흘러가는 것이 없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발치에 놓인 청동 그릇을 당겼다. 그릇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파르스름한 광채와 자잘한 은빛이 섞여 곱게 발린 희한한 돌이었다. 그는 손바닥 사이에 돌을 넣고 굴려 보았다. 그러면서 서서히 기억을 되살려 냈다.
유령 소년 '엔디미온'과 그의 친구들은 다프넨의 존재가 이공간 안의 다른 '어른 유령들(그들은 다프넨이 이해할 만한 방식으로 설명하려 애썼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본디 갈라져 있어야 할 두 공간을 임의로 뚫고 들어올 수 있는 검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고, 따라서 검을 빼앗기거나 너 역시 붙잡혀 영영 나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다프넨이 모든 것을 수긍하고 엔디미온이 내민 손끝을 잡았을 때, 주위의 모습은 바뀌고 그는 이 동굴 안에 서 있게 되었다. 그는 동굴밖에 뜬 달을 보며 본래의 세계에서 그가 보던 달과 같은 모습임에 안도했다. 달은 하현이었다.
[여기서 잠시 잠을 자는 것이 좋겠다. 넌 이곳의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이곳을 밤 이외의 다른 때로 느끼는 것도 불가능해. 그러니 잠을 자라. 그러는 편이 네 몸을 위해 안전할거야. 그동안 난 네가 돌아갈 수 잇는 방법을 찾아볼게.]
왜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걸까. 다프넨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동굴의 짚자리 위에 누웠고, 곧 깊이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엔디미온의 말에 의하면 그 꿈들은 그가 다프넨의 발치에 갖다놓은 구슬들에서 하나씩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첫째로 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캄캄한 암흑이었다. 그리고 이어 하얗게 빛나는 사막이 떠올랐다. 사막은 본 일이 없는 다프넨은 그것이 왜 그렇게 빛나는지 몰랐다. 다가가 만져 보니 아주 고운 모래였다.
또 다른 꿈을 꾸었다. 처음 섬에 도착해서 보았던 환각과 비슷한 폐허의 풍경 가운데 낡은 우물이 있었다. 다만 폐허의 모습은 그때처럼 심하게 손상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비어 있고, 삭아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우물로 다가서서 그 주위를 먼저 살펴보았다. 검은 이끼가 자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어디선가 본 듯했다. 이윽고 그는 우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우물 안은 무였다. 그리고 어딘가로 까마득히 통해 있었다.
[깨어났구나.]
꿈을 하나씩 되살려 보고 있는 다프넨에게 문득 목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낯설지 않은 모습이 서서히 빈 공간 위에 그려졌다. 완벽한 모습이 되었을 때 엔디미온은 이미 다프넨의 자리 앞까지 걸어와 앉고 있었다. 반투명한 머리카락이 아지랑이처럼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꿈 꿨지?]
"응."
엔디미온은 다프넨의 손에 쥐어진 구슬을 보더니 거기에 손가락 하나를 댔다. 그러자 팟, 하며 눈앞에 작고 하얀 영상이 떠올랐다가 스러졌다. 거기에는 우물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꾼 꿈이 이거였구나. '늙은이의 우물'이라고 해.]
"그게 뭐니?"
[그 속을 들여다본 사람을 늙은이로 만들어 버리는 우물이지. 아아, 물론 늘 그랬던 것은 아니고, 어떤 특별한 날에만, 어떤 사람은 얼굴이 늙어버리고, 어떤 사람은 마음이 늙지. 노인은 지혜를 얻고자 들여다본 자는 주름투성이 얼굴을 얻게 되고, 빨리 어른이 되고자 한 아이는 세상사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나.]
"그렇다면 왜 우물을 들여다보지?"
[절대 잃어선 안 되는데 잃어버렸던 것들, 그런 것들이 모두 그 안에 있거든.]
엔디미온의 얼굴을 보려다 문득 동굴 밖의 지는 달을 보게 되었다. 그 달빛에 얼굴을 맡긴 혼뿐인 소년은 잃어버린 시체를 찾고 싶어하는 듯한 눈빛으로 다프넨을 바라보고 있었다.
홀릴 듯한 푸른 눈동자였다.
현실 세계에는 이제야 밤이 찾아왔다. 섬의 세 사제는 한밤의 공회당에 모여 짧은 의식을 치렀으며 답을 기다리기 위해 데스포이나만 남고 나머지 두 사제는 각자 집으로 돌아왔다.
나우폴리온은 낮과 마찬가지로 '문병 사절'의 안내판이 붙어 있는 자신의 집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위치에서 램프를 찾아내어 불을 붙이자 방이 밝아졌다.
그리고 우뚝 멈추어 서 버렸다.
방안에는 뜻밖의 방문객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방문을 거절하는 주인의 글귀를 보고도 대담하게 들어와 있다는 점에서 놀라야 했겠지만 그는 그보다 다른 사실 때문에 당황해 있었다. 그의 집에 결코 찾아올 사람이 아니었다. 7년 전의 사건 이후로 그들은 존재하되 서로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양 살아 왔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솔렛이었다.
"오랜만...이군."
"무엇이 오랜만인가요?"
이솔렛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맞은편 문고리에 걸려 있는 에젤다 꽃 화관을 흘끗 바라보았다. 나우플리온이 약간 맥빠진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날 찾은 것이."
같은 섬 안에 살면서 종종 얼굴을 마주칠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누가 피했다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은 빠르게 스쳐지나갔을 뿐이었다. 가끔 말을 했다고 해도 언제나 필요에 의한 것들 뿐, 그녀가 이렇게 찾아와 그의 집 안에 앉아 있는 것이 실로 얼마 만이던가.
아아, 정말로 7년 만인가.
"사제님을 찾아온 전 아니에요."
나우플리온은 의자에 도로 앉으라는 듯 가볍게 손짓해 보였다.
"응, 그럴 것 같았어."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둘은 어색하다기보다 갑자기 할 말이 다 떨어진 양, 처음부터 할 말 따위는 없었던 양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다. 버릇처럼, 버릇이 되어버린 대로 스쳐지나가려 했지만 이곳은 집 안이었다. 그들은 방문객과 주인이었다.
보통의 주인처럼 마실 것이라도 권해볼까, 또는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 7년만의 만남에 대한 것은 없었던 일인 양 비껴보내 버릴까, 계속 기다려 볼까,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모르는 체, 아무렇지 않은 채 해볼까.
"다프넨은 어디로 간 거죠."
침묵은 길지 않았다.
"여기 없어."
"산책이라도 나갔다고 말할 참은 아니겠지요."
"아니......."
말하고자 한다면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가진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주보며 선 채 둘 다 앉지도 않았다. 아솔렛은 흰 무명 치마에 달린 넓은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 나우플리온을 향해 정면으로 시선을 보냈다.
"무언가 숨기고 있군요."
나우플리온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네가 평생 지킬 줄 알았던 금기를 그 아이를 위해서 깼구나."
이솔렛은 금빛 눈썹을 약간 움직이더니 말했다.
"난 다프넨을 가르치는 선생이에요. 그리고 그 날 오전까지도 멀쩡했던 아이가 닷새 동안이나 문밖으로 나오지도 못할 정도로 앓고 있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결론은 얻었어?"
이야기는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다프넨의 행방을 걱정해야 마땅할 텐데, 자신들의 모습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에 더 신경 쓰여 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 무엇인가 비밀이 있었다.
"말 돌리지 마세요. 무슨 일이 생겼죠?"
"걱정돼?"
"물론. 그게 이상한 일이라도 되나요?"
"아아, 참, 너는 그 애의 선생이었지."
"......."
대화는 자꾸만 빗나갈 따름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우플리온은 갑자기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버리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몇 번 쓸어 넘겼다. 곧 그의 얼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