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권. 3장. Ever Rose (9/21)

3장. Ever Rose

1. 마법의 계단

  다프넨이 이솔렛과 잘 지내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스콜리에서 힘겹게 버티느라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된 채로 그녀와 수업을 하는 풀밭으로 올라오면, 이솔렛은 언제나 미리 와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를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본래부터 이 풀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편이었다.

  다프넨이 오면 그녀는 바위에 앉은 채 한참이나 말없이 있다가 가끔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노래를 한두 곡 불렀다. 노래들은 신성 찬트가 아닌 그냥 보통 노래였다. 어떤 때는 다프넨이 눈앞에 있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가끔 대화가 오갈 때도 있지만 언제나 이솔렛 쪽에서 먼저 말을 중단하고 일어나 버렸다.

  식당에서의 일이 있은 후 아이들이 오이지스를 괴롭히는 빈도는 눈에 띄게 줄었다. 그리고 다프넨에게는 더더욱 접근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헥토르가 없을 때 에키온 일당이 가끔 다가와 기분 나쁜 말을 던지고 가곤 했다. 또한 리리오페가 가끔씩 스콜리 안에서 그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그러면 모든 아이들이 쳐다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못 견디게 답답해질 때가 있었다.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나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나우플리온은 검의 사제이면서도 5년씩이나 섬을 비웠던 터라 오랜만에 섬 전체를 돌아보기 위한 여행을 떠나 있었다. 기억섬뿐 아니라 보초들 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침묵섬도 둘러보고, 상실섬과 기원섬에도 들를 예정이었다. 꽤 긴 일정이었다. 따라서 다프넨은 집에서도 혼자였다.

  이솔렛과 헤어져 혼자 집에 돌아와 있노라면 저녁 만들어 먹을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자리에 누워서 생각하곤 했다. 나우플리온, 아니 이실더와 렘므를 여행하던 시절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렇듯 많은 사람의 존재조차도 그의 외로움을 한시도 덜어주지 못하다니.

  오이지스조차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어느 날, 하루 종일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못한 다프넨은 몹시 지친 기운으로 이솔렛을 찾아갔다. 그리고 여전히 침묵하는 그녀 앞에서 잠시 앉아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세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고는 도저히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머리가 뜨거워지고, 가슴 속에 뭉쳐져 있던 단단한 응어리 같은 것이 목을 타고 솟아 나오려 했다. 숨을 죽여 그것을 억눌렀다. 말없는 사람들,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 아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그를 비참하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심장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쳤다.

  이솔렛이 그를 한참 전부터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벌떡 일어났고, 인사도 없이 산비탈을 내려가 버렸다.

  그러고서 며칠 동안 그는 이솔렛을 찾아가지 않았다. 이솔렛 역시 그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찾는 일은 없었다. 그가 수업을 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교장도 몰랐다. 이대로 영원히 받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집에 혼자 틀어박혀 있던 그의 눈에 문득 책 한권이 띄었다. 오이지스와 함께 갔던 장서관에서 가져온 책이었다. 그는 책을 집어 무작정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결코 친구는 될 수 없었던 소년, 란지에와 나누었던 모든 대화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그리워졌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비밀을 들킬까봐 긴장하더라도, 말을 하고 싶었다. 그는 지금도 여동생을 돌보고, 벨노어 저택에서 누군가를 시중들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전에 말했던 대로 다른 삶을 택해 그곳을 떠났을까.

  흐려진 눈을 닦고 십여 페이지나 읽고 있던 것이 무엇인가 그제야 살펴보았다. 겉표지에는 제목이 없었지만 안쪽에는 있었다.

[가나폴리 이주의 역사]

  <역사>라는 단어를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는 눈물을 닦으면서 동시에 웃음도 터뜨렸다. 란지에가 있었다면 이 책도 권해 주었을까. 아마 그랬을 지도 모른다.

  그날 저녁때까지 그는 열렬히 그 책을 탐독했다. 어두워지자 달빛에 비추어서라도 마저 읽고 싶어질 정도였다. 책은 그리 두꺼운 편이 아니었기에 다음날 스콜리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한 권을 완전히 독파할 수 있었다. 그런데 끝이 조금 이상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맨 끝장 십여 페이지가 뜯겨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옆구리에 낀 채 스스로 장서관을 찾아가게 되었다.

  “아, 다프넨이 왔구나.”

  제로 아저씨는 별로 놀란 기색이 없이 그렇게 반겨 주었다. 오이지스는 오늘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프넨은 책을 내밀며 말했다. 

  “전에 주신 책인데 뒷장이 찢어져 있어서요. 이 책 뒷부분을 읽고 싶은데요.”

  제로는 책을 받아들며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그에게 사닥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자고 손짓했다. 앞서 올라가는 아저씨를 따라 사닥다리 위로 오르니 놀라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원뿔형이라고 밖엔 표현할 수 없는 방이었다. 그가 선 곳에서부터 원뿔 끝에 해당하는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원형 벽 전체가 모두 계단식 책꽂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 책꽂이에 수천 권도 넘을 듯한 책들이 가득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흡사 머리 위로 솟은 책의 첨탑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방이란 딱 두 개 분이었다. 처음에 들어왔던 아랫방과 지금 서 있는 윗방. 그리고 윗방의 천장이 꼭대기까지 솟아 있는 셈이었다. 이 많은 책들을 꺼내고 넣고 하기 위한 방편으로 두 사람 정도가 바짝 붙어 걸어갈 수 있을 듯한 너비의 나무 계단이 벽을 친친 감으며 올라갔다. 그렇게 빽빽한 책꽂이 사이사이에 일부러 비운 듯한 공간이 있고, 창문이 뚫려 있었다. 

  벨노어 백작의 서재에도 이 정도로 많은 책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세로로 쌓여 한 눈에 들어오는 책들의 육중한 무게감은 실로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한참 만에 다프넨은 겨우 말을 할 수 있었다.

  “저...창문으로 비바람이 들이치지는 않나요?”

  스스로 생각해도 난데없는 질문이었지만 정말로 그는 그것이 걱정 되었다. 제로 아저씨는 싱긋 웃더니 방 한쪽으로 걸어가 매듭지어진 붉은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모든 창의 덧문들이 일순간에 닫히는 것이 아닌가. 

  “아...대단하군요.”

  윗방에는 바닥에 편안히 앉거나 누울 수 있도록 곳곳에 방석이나 쿠션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별로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다프넨은 개의치 않고 한쪽에 앉았다. 제로 아저씨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더니 헤매지도 않고 다프넨이 원하는 책을 딱 찾아 빼어 들고 다시 내려왔다. 그가 올라가는 내내 계단 곳곳이 삐걱거렸다.

  책을 넘겨준 제로는 쿠션 몇 개를 쌓아 놓고 방바닥에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자주 이렇게 하고 지내는 듯 상당히 익숙한 태도였다. 그런 다음 책으로 벽을 쌓은 자신의 성채를 만족스러운 얼굴로 감상했다. 다프넨은 결국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말이죠, 아저씨. 아무래도 제가 보기에 이 건물은 좀 위험스러워 보여요. 여기 앉아 있다가 자칫 약한 지진이라도 났다간 떨어지는 책에 깔려 죽겠는걸요. 게다가 나무 건물에 종이 책이라 불이 나기도 쉬울 것 같고요.”

  제로는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건물은 내 꿈의 결정체야.”

  제로는 이야기해주었다. 과거 그들이 살았던 땅에는 이 탑의 수십, 아니 수백 배나 되는 거대한 장서관이 있었고 자신은 그 모양을 조악하게 본뜬 것뿐이라고. 물론 제로가 옛 왕국의 장서관을 보았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대대로 책을 수집해 온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던 그는 결국 그 장서관의 구조에 대해 적은 책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 후로 그는 위대한 장서관을 자기 눈으로 다시 보는 것을 평생의 꿈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한 사람, 아니 수백 사람의 힘이라 해도 옛 왕국의 장엄한 장서관을 다시 재현할 수는 없었다. 장서관의 아름다움과 정교한 구조, 그리고 규모는 지금 섬 안에 있는 모든 건물을 합쳐도 모자랄 정도로 대단했다고 말하는 제로의 눈은 아이처럼 순수한 열정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냈다. 이 자그마한 나무 탑을 설계하여 세우고 흩어진 책들을 모아 이만큼 채워 넣는 일에 그의 반생이 소비되었다. 남은 반생 역시 이 꼬마 장서관을 좀더 안전하게 만들고, 더 많은 책을 모으는 일에 바칠 생각이었다. 대륙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잊지 않고 꼭 책을 부탁했다.

  “왜 하필 나무였나요?”

  “섬에는 석재가 모자라거든. 이 섬에 있던 쓸만한 석재의 거의 전부는 공회당을 짓는 데 사용했어. 공회당은 우리 순례자들이 달 여왕을 위해 반드시 지어야만 하는 건물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물론 산과 절벽에 돌이 널려 있긴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런 것을 뜯어낼 만한 기술이 없어. 더구나 장서관 같은 건... 이제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

  섬은 언제부턴가 본래의 왕국으로부터 지리적, 혈연적으로 떨어진 것뿐 아니라 정신적 문화에 있어서도 분리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학문과 예술, 그리고 말할 나위 없이 마법을 가장 숭상했던 옛 왕국의 문화는 점차 무, 그 가운데서도 특히 검을 지향하는 것으로 변질되어갔다.

  학문과 예술 같은 분야들이 그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고수준의 비평가와 많은 관중들을 필요로 하는 반면, 검은 서로 겨루기만 하면 손쉽게 승패가 갈라졌다. 섬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인구는 쉽게 늘어나지 않았다. 겨우 몇 백, 가장 많았을 때조차 천여 명에 불과한 구성원을 가진 사회에서 사람들의 관심사는 생활과 생존에 밀접한 것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새로 자라나는 아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강한 전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런 식이니 검의 사제 아래로 모여든 아이들의 과열된 경쟁은 이미 정도를 넘었다. 균형 따위는 예전에 사라졌다. 마법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전승들이 겨우겨우 명맥만 유지해 나가는 동안 검의 경쟁에서 밀려나 농사라든가 염소치기, 사냥 따위를 하게 된 사람들의 불만은 점차 커져만 갔다. 심지어 신성 찬트와 같은 전승은 계승자가 겨우 이솔렛 한 명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미 사라져버린 전승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제로는 그것을 퇴보라고 단언했다.

  “이미 한껏 발전시킨 바 있던 고도의 문화를 내팽개치고 도로 야만인들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짓이지. 하지만 내게는 그것을 되돌릴 힘이 없어. 겨우 오이지스 같은 아이 한둘을 바라보고 이렇게 책을 모아 이어져가도록 하겠지만,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토록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읽지 않아.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고 있지. 나중에 너희가 어른이 되었을 무렵엔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칠 스콜리의 선생님 한명도 구할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제로는 어깨를 움츠렸다가 말을 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두렵군.”

  어쨌거나 제로의 이야기를 들은 다프넨은 왜 헥토르를 비롯한 많은 아이들이 자신을 그토록 심하게 질투하고, 또 괴롭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대륙에서 온 낯선 소년 다프넨>보다 <검의 사제의 첫 번째 다프넨>을 더욱 미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전에 오이지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지금까지 헥토르는 스물을 넘기지 않은 섬 안의 젊은 소년 소녀들 가운데 단연 최강의 실력자로 인정받던 소년이었다고 했다. 그런 헥토르를, 비록 몇 가지 운이 겹쳤다고는 해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다프넨은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시에 불쾌함의 원천이었다.

  이미 섬 안에서 섭정 각하 다음으로 존경과 선망의 눈길을 받게 된 검의 사제가 가장 아끼는 소년, 그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첫 번째 제자. 그들이 싫어해 마지않는 대륙에서 왔으니 그들의 친구도 아니며, 심지어 <산 아래의 공주>라고 불리는 리리오페에게 여러 번의 친절을 받은 일이 있기까지 한 그 자신......

  어쩌면 모든 조건이 이렇게 공교롭게 겹쳤을까.

  푸훗......

  다프넨은 소리 없이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로가 벌써 가겠느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웠던 듯, 아쉬워하는 눈치가 분명했다. 

  “또 올게요. 책 빌려 읽을 수 있지요?”

  “물론이지. 책을 읽은 사람은 모두 내 친구야. 언제든지 놀러 오너라.”

  장서관을 나서며 다프넨은 흐릿하던 것들이 많이 맑아지고, 분명해 졌다고 생각했다. 언제 그에게 호락호락한 세상이었던 적이 있었나. 한 번도, 단 한번도,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면, 그 미움을 뚫고 살아남는 것도 자신의 임무였다. 하고 싶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긴, 적어도 속마음을 숨기고 겉으로만 친절한 체 하는 자들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리하여 닷새 만에 다프넨은 이솔렛을 다시 만났다.

  그가 비탈을 올라오자 바위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이솔렛은 약간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가 다가와 맞은편 바위에 앉을 때가지 말없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정 이야기도 없이 오랫동안 수업을 빠뜨려서 죄송합니다. 어떤 벌이라도 내리시는 대로 받겠어요.”

  이솔렛은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풋, 하고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프넨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왜 웃으시죠?”

  “푸후후훗......”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그 비슷한 웃음소리를 내며 혼자 웃어댔다. 웃음이 그치자 그녀는 다시 한 번 다프넨의 얼굴을 구석구석까지 뜯어보았다. 다프넨이 말했다.

  “선생님도 잘 웃으시네요.”

  마음을 달리 먹은 다프넨은 이제 쌀쌀맞음이나 불친절함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솔렛이 아무리 그를 외면한다 해도 다 참아내고, 대답할 때까지 끝끝내 말을 붙이리라고 마음먹고 올라왔었다. 그러나 이건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무슨 뜻이지?”

  “사실은 말이죠.”

  다프넨은 솔직하게 씩 웃으면서 대꾸했다.

  “당신을 무시무시한 전설 속에 나오는 미녀처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이솔렛은 투명한 분홍빛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물었다.

  “내가 무시무시하다고?”

  “아, 아뇨. 무시무시한 건 전설이고 미녀는......”

  “그러니까 <무시무시한 전설>에 나오는 미녀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건데?”

  “......무시무시한 거죠.”

  똑같은 결론이 나 버렸다. 그러나 이솔렛은 화를 내거나 웃는 대신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 동안 왜 오지 않았지?”

  “뭔가 잘못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이제는 마음을 고쳐먹었으니 다시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빠지지 않고 늘 오겠다고? 내게서 얻어 가는 것도 없으면서?”

  “아뇨. 얻어 가고 있습니다.”

  다프넨은 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도 저는 침묵하는 상대를 견딜 수 있게 되겠죠.”

  “......”

  이솔렛은 대꾸 없이 일어나 잠시 풀밭 위를 왔다 갔다 했다. 다프넨은 저도 모르게 종아리를 덮는 바지 아래로 드러난 흰 발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복사뼈의 곡선이라는 것도 참 미학적이구나, 하고 혼자 생각하면서.

  “뭔가 다르구나.”

  그것은 혼잣말이었다. 다프넨이 쳐다보자 이솔렛이 이번엔 그를 보며 말했다.

  “난 네가 나우플리온 사제님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했었어. 그 사실이 나를 몹시 불편하게 했지. 하지만 넌 어딘가 다르구나. 그 분이라면 침묵 따위 시시한 시위를 꾸준히 참아주는 일은 없었을 테지. 꺾일지언정 휘어지는 법이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넌 몇 번이고 휘어지더라도 끝내 꺾이지는 않는 사람 같구나.”

  어떤 심증을 굳어지게 하는 말이었다. 다프넨이 말했다.

  “당신도 저와 비슷한 데가 있는걸요, 이솔렛.”

  “어디가 비슷하지?”

  다프넨은 약간 도박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과거를 잊지도 못하고, 잊어버리려 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요.”

  그 과거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대담하게 해 버린 말이었다.

  이솔렛은 갑자기 걸음을 딱 멈추더니 몸을 돌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하던 말에는 대꾸하지 않은 채.

  “난 그리 좋은 선생이 못될 거야. 왜냐면 한 명도 가르쳐 본 일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리 친절한 사람도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아무도 내 곁에 접근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잖아? 그래도 나하고 잘 지낼 수 있겠어? 그럴 자신이 있어?”

  다프넨은 잠깐 생각한 다음 대답했다.

  “아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어째서?”

  예전 <보리스>라고 불리던 시절처럼, 다프넨의 눈이 살짝 깊어졌다. 

  “지금가지 좋은 조건에서 뭔가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이솔렛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6월이 왔다.

  비교적 순조로운 수업을 하게 된 후로 열흘정도가 흘렀다. 이제는 스콜리에 가지 않는 날에도 종종 이솔렛을 찾아갔다. 6월 초순의 어느 날 아침, 다프넨은 스콜리 수업을 빠뜨리고서 그들만의 교실인 산 중턱 풀밭으로 올라갔다. 어쩌면 날씨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는 이솔렛이 자리에 없는 걸 보고 약간 당황했다. 항상 그녀가 먼저 와 있었고, 이곳은 본래 이런 수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녀의 놀이터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솔렛?”

  몇 걸음 더 걸어가자 그들이 늘 앉곤 하던 바위들이 보였고, 그 뒤로 솟은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본래는 중앙 봉우리로 연결된 절벽인데 중도에 불쑥 튀어나온 평지가 있어서 풀이 약간 자라고 있었다. 전에 이솔렛은 거기에 샘이 있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해가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샘에서 반사된 햇빛이 눈부신 광채로 변해 감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다, 잠시 후 다프넨은 자기가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수십 마리는 되어 보이는 하얀 새였다.

  꿈인가......

  이곳에 선 채로도 넓은 날개와 순백색 깃털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새들의 온 몸에는 후광이 깃들여 있었다. 또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정말로 환각을 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새들은 날개 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오고, 빙글빙글 맴돌거나 바닥으로 내려앉거나 했다. 거기엔 새들 외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새들은 무언가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으며, 떠날 듯 하다가도 다시 되돌아왔다. 

  의문이 점차 확신으로 변해갈 무렵, 새 한 마리가 높이 떠오르더니 그가 있는 쪽으로 쏜살같이 날아 내려왔다. 다프넨은 당황하여 한 발짝 물러섰지만, 새는 허공에서 머물며 그의 눈앞에 황금빛 부리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접혀진 쪽지가 물려 있었다.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펼쳐보았다.

  <오늘 수업은 여기서 하자.>

  적힌 말은 그 한 마디 뿐이었다. 다프넨은 쪽지를 든 채 어이가 없어서 하, 하는 소리를 냈다. 저 절벽 위로 올라오라고? 길도 가르쳐주지 않고서?

  “혹시 넌 저리로 올라가는 방법을 아니?”

  대답할 거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관념 속에서 새란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하도 기가 막혀서 해본 말에 불과했다. 그런데 뜻밖으로 새가 머리를 까딱거리는 것이 아닌가. 마치 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긴가민가하면서 다프넨은 다시 물었다.

  “정말로 알아?”

  다시 한 번 끄덕, 하고 고개가 움직였다. 이렇게 신기할 데가.

  “그럼 가르쳐 줘.”

  갑자기 새가 날개를 펴더니 조금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다프넨의 눈에 명백히 보이도록 고갯짓을 해 보였다. 한 마디로 이거였다.

  싫어.

  “......”

  새는 그 자리를 떠나 다시 절벽 위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새한테까지 놀림을 당하고 나니 다프넨도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이솔렛이 저런 곳에 올라가서 여기서 수업을 하자는 둥 하는 것은 역시 그를 가르치기 싫어서 그런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했다.

  실제로 6월이 오기까지 그들이 한 거라고는 시시한 노래 연습밖에 없었다. 대화는 순조로웠지만 이솔렛은 결코 신성 찬트의 한 소절 반 토막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 노래는 한 번 끝까지 들려주지도 않았으면서 계속해서 다프넨에게 노래를 시키고는 틀린 점만 지적했다. 시범을 보여주지 않으니 제대로 해내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벨노어 저택에서 월넛이라고 불리던 시절 지독히 그를 가르치기 싫어했던 나우플리온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답답해지는 스콜리에 비하면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훨씬 즐거웠다. 아니, 시원했다.

  이솔렛은 보기보다 대단히 직선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생각이나 감정을 숨기는 법이 없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바로 말했다. 그것이 섬의 관습에 관련된 것이라 해도 때로는 서슴없이 비난해 버렸다.

  다프넨은 언제부턴가 그녀가 말하는 방식을 상당히 즐기고 있었다. 치기 어린 소녀처럼 도도하게 떠들어대는 것을 듣고 있으면 지금껏 자신이 너무 소심하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평소 차가운 태도로 모든 문제를 외면하는 듯 보이는 그녀의 내면에는 적으로 간주된 자를 벼랑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박살내어버리는 격렬함도 숨겨져 있었다.

  그나저나 저길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으면서도 다프넨은 절벽 주위를 살피며 어딘가 통할만한 길이 없나 찾아보았다. 처음엔 아무 것도 안 보였는데 좀더 자세히 보니까 수풀로 가려진 절벽 구석에 야트막한 동굴 입구가 보였다. 허리를 한껏 구부려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생긴 동굴이었다.

  하긴, 저런 동굴이 그리로 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솔렛이라고 해도 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로 기어서 올라갈 수는 없었을 테니까.

  “으음......”

  결국은 들어가고 말았다. 절반은 오기, 절반은 호기심으로.

  동굴 안은 의외로 어둡지 않았다. 몇 걸음만 들어가니 금방 바깥쪽으로 통하는 통로가 보였다. 길은 정확히 절벽 뒤편, 그러니까 그들의 풀밭 교실에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을 곳으로 통해 있었다. 동굴이라기보다는 두 개의 문을 연결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 보니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였다.

  위험천만하게도 길은 절벽을 빙글빙글 돌아가며 나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기도 했거니와 반드시 평평하기만 한 길도 아니었다. 주위에는 거머잡을 만한 것도 없었다.

  다 좋다고 쳐도, 다프넨에게는 윈터러가 있었다. 그것은 가로로 매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 걸려 발이라도 허공에 헛디뎠다가는 그대로 끝장날 것이 뻔했다. 동굴로 돌아온 그는 궁리 끝에 윈터러를 풀고 띠를 이용해서 그것을 등 뒤에 잡아맸다. 상당히 고심해서 떨어지지 않도록 잘 묶었다. 잘못했다간 이번엔 검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버리는 일이 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도로 주우러 내려갈 수 있을 만한 골짜기는 절대 아니었다.

  그런 다음 그는 드디어 그 절벽 길에 도전했다.

  몸을 바짝 붙이고 조심조심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언뜻 발아래를 내려다보자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길은 절벽 중간 정도까지는 잘 통했다. 이런 길을 도대체 누가 만들어 놨을까 하는 생각이 들 즈음 길은 점차 좁아지더니 갑자기 끊어져 버렸다.

  “이런......”

  몸을 돌리기조차 힘든 상황인데 눈앞에 길이 없으니 당황도 이런 것이 없었다. 길만 보고 걷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눈앞에 까마득한 허공이 펼쳐지자 더럭 겁까지 났다. 왜 여기까지 왔을까. 이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조금도 없었잖아.

  그때였다.

  조금 전의 새와 비슷한 다른 새 한 마리가 사뿐히 날아 내려오더니 눈앞의 허공에서 멈춰 퍼덕거렸다. 다프넨의 눈이 따라가자 새는 살짝 움직여 약간 멀어졌다. 그제야 그의 눈에도 보였다. 발밑만 내려다보고 걷느라 지금까지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말문이 막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어떻게, 저럴 수가......있지?”

  허공에 바위가 떠 있었다.

  천지사방에 닿는 것 하나 없는데 그냥 우뚝 떠 있었다. 손이 떨려서 눈을 비비기도 힘들었다. 그것은 실로 섬뜩한 광경이기까지 했다. 마치 들어와서는 안 되는 비밀스런 마법의 영역에 잘못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서 다프넨은 바위를 관찰해 보았다.

  둥근 바위를 반으로 자른 듯 위쪽은 평평한 바위였다. 대략 사방 1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공간이 거기에 보였다. 그곳까지의 거리는 7미터 가량. 그가 있는 위치와 비교해서 바위는 약간 위쪽에 있었다. 그냥 뛰어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고...아니, 누가 저 위로 가라고 한 건 아니잖아?

  퍼득......

  세 마리 새가 다시 그가 있는 곳으로 내려와 작은 포물선을 그렸다. 모두 네 마리가 된 새들은 허공에서 퍼덕이다가 날개를 접더니 마치 어딘가에 발을 딛고 앉은 듯한 자세로 멈췄다. 네 마리가 세로로 줄지어, 흡사 자신들을 하나씩 밟고 바위가 있는 곳으로 가라는 것처럼.

  뗏똑.

  새 한 마리가 가볍게 뛰더니 한 뼘 옆으로 옮겨갔다. 날개를 펴지 않은 그대로 똑같은 자세였다. 다른 새들도 비슷한 동작을 취하며 좌. 우로 움직였다. 그제야 다프넨도 깨달았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저곳에는 발판이 있다!

  허공에 떠 있는 바위와...보이지 않는 계단?

  이쯤 되자 자신이 시험받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머리를 파고들었다. 돌아서고 싶지 않다는, 불합리한 감정이 서서히 스며 올랐다. 이렇듯 자신을 오만하게 시험하는 소녀가 낸 문제, 그걸 풀어내어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았다. 왜 그랬을까. 본래 그는 남의 평가 따위에 마음 쓰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는데.

  한숨을 한 번 내쉰 다음, 다프넨은 대담하게 허공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 순간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마법이라고 믿었다. 그를 데려가 줄 것은 마법이라고.

  발이 닿았다.

  “......”

  다시 한 발, 그리고 한 발을 디뎠다. 예외 없이 그가 디딘 것은 돌처럼 단단한 계단이었다. 그 투명한 계단을 걸어서 그는 드디어 바위 위에 도착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젖혀 저 위를 바라보았다. 빛나는 햇빛이 만드는 오묘한 그림자와...계속되는 마법의 계단......

  계단의 정체는 허공에 떠 있는 투명한 돌들의 연속이었다.

  그는 다시 올랐다. 새들이 계속해서 옮겨 앉으며 그의 발걸음을 인도했다. 이미 신비로운 감정에 사로잡힌 그는 이 새들이 어째서 인간의 일을 이토록 잘 해내는지에 대해 의심하지도 않았다. 그저 오를 따름이었다.

  점차 그는 햇빛 가운데로 나아가고 있었다.

  절벽 위를 날고 있는 수십 개의 날개, 수천의 깃털을 보았다. 천사의 백색이랄까, 사방에 나부끼는 광채의 깃발들 가운데 축복처럼 빛이 쏟아졌다. 투명한 샘물도 보였다. 그리고 모든 것에 둘러싸인 사람을 보았다.

  기원을 드리듯 높이 쳐든 두 손, 요정의 것인 양 빛나는 광채 속의 짧은 금발, 날리는 긴 소맷자락, 대리석을 깎은 듯한 목선을 가진 가장 비현실적인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내민 손가락 끝에 올라앉았던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새를 올려다보느라 가볍게 들린 턱이 수려한 빛의 곡선을 그렸다. 이솔렛은 처음 보는 희고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반짝이는 바람이 치맛자락을 휘감아 갔다. 그녀가 다프넨이 올라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아......”

  무엇 때문에 당황한 것일까.

  “!”

  그의 발은 허공을 딛고 말았다. 비틀, 하며 쓰러지는 순간 지금까지 그가 딛고 오던 계단이 세차게 얼굴에 부딪쳐 와 입술이 찢어졌다. 분명 그걸 밟으며 왔는데도 무심코 존재를 불완전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의 손이 간신히 돌 하나를 부여잡는 데 성공했으나 그 순간, 네모진 돌이 불안정하게 휙 돌았다. 그는 그만 손을 놓치고 말았다.

  작은 돌처럼...떨어져 가고 있었다.

  무엇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귓가의 세찬 바람도, 멀어져 가는 빛도, 죽음에 대한 공포조차도.

  그것이...느려진다고 생각한 것은 단순한 착각인 것일까.

  “아아......”

  자신의 몸이 흡사 방금 전에 허공에 떠 있던 돌들처럼 멎어 버렸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서서히 위로 들어올려지기 시작했다. 속도는 느렸다. 하지만 분명하게 그는 떠 있었다...날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무엇도 잡지도 딛지도 않은 채 떠 있었다!

  귓가로 파고드는 소리가 있었다. 노래였다.

  라라라라라......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 때문일까, 단지 그렇게만 들리는 노래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성한 음향으로 변했다.

  푸르라, 무의 꿈속에서

  기억 밖의 것을 열어 보이라

  그것은 이솔렛의 목소리였다. 처음으로 듣는 그녀의 신성 찬트였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음색이 그의 귀는 물론 드넓은 사방을 가득히 채우며 널리 퍼져나갔다. 수천의 합창인 양 증폭된 음향, 그것은 한 인간의 목에서 나올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또한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둘러싼 모든 자연이 거기에 귀 기울이며 멈춘 것 같았다.

  닿아라, 바람의 깃이여

  하프와 같은 날개를 펴고서

  평소에 듣던 그녀의 목소리, 약간 낮은 듯하던 허스키함은 완벽히 새로운 풍부함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수천의 빛깔이 섞여든 듯 찬란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마법이 깃들이지 않으면 세상에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신성한 것, 귀한 것, 드높은 것, 그 모두가 하나의 노래와 목소리에 융화되어 있었다. 뜻을 알 수 없는 그 노래가 자신이 허공에서 떠오르고 있다는 신비로움보다도 더한 감동으로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드디어 절벽 위까지 떠오르고...발이 닿는 곳에 이르러 내려놓아졌다.

  이솔렛은 아직 노래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놀라운 신성 찬트가 그를 살려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아니라는 생각은 할 수조차 없었다. 그 순간만은 백 명이 아니라 말한다 해도 그만은 그것을 믿었을 것이었다.

  노래는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감격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채 다프넨은 손을 내밀었다. 이솔렛의 목이 있는 곳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 목에 두 손가락을 댔다. 

  “계속, 그대로 조금 더 노래해 줘요.”

  따뜻함, 그리고 가느다란 떨림이 손가락을 통해 전해져 왔다.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녀의 마력이 그에게로 이어져 오는 것처럼, 가누기 힘든 감정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

  이솔렛은 두 소절 정도 더 노래하다가 천천히 멈추었다. 그리고 투명한 분홍빛이 감도는 눈동자로 소년을 응시했다.

  다프넨은 띄엄띄엄, 그러나 솔직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아름다워요...정말로......”

  당신의 목소리가 아름답다, 라고 말하려 했었다. 그러나 <목소리>라는 단어는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흘러버리고 나온 것은 그 말뿐이었다. 이솔렛은 눈을 약간 크게 떴다가, 입술을 오므리고, 그리고 한 발짝 물러섰다.

  푸드덕......

  흰 새들이 날아와 그녀의 주위를 감쌌다. 아무런 대답 없이 그녀는 샘가에 앉더니 두 손을 담갔다. 그 곁으로 새들이 모여들어 날개를 접고 물을 쪼았다. 다프넨은 절벽 아래로 멀어져 가는 광막한 협곡과 띠처럼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밟고 올라온 투명한 돌들이 그림자를 떨어뜨릴까 생각하면서.

  이솔렛이 한 번 노래한 것은 몇 십일 동안 안 되는 가락을 억지로 연습하며 실랑이한 것보다 훨씬 큰 효과가 있었다. 본래는 너무 일찍 와서 혼자 있던 그녀를 방해한 셈이었는데도 그날의 그녀는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 날 절벽 위에서 그들은 번갈아 가며 나직이 노래 불렀고, 이솔렛은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새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이 흰 새들은 섬의 전령들이었는데 때로는 먼 대륙까지도 갔다.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물론, 스스로의 의사를 표현하거나 심지어 충고조차 할 수 있다고 했다.

  이 현명한 동물들의 조상은 그들의 먼 고향 왕국에서 온 몇 마리의 새였다고 했다. 그들의 정확한 지능은 쉽게 단언하기 힘든 것이었다.

  물론 이솔렛 혼자만의 새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섬에서 단 하나 남은 신성 찬트의 전승자인 이솔렛의 목소리에 새들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요즘의 섬은 온통 육체적으로 겨루어 강해지는 것만이 최고로 여겨져 그녀에게 노래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명 그런 성격이 아닌데도 일부러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아 온 그녀는 굳이 그걸 누구에게 가르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섬의 사제들로서는 그런 중요한 것이 전승자 없이 사라져 버리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두 사람의 수업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실은 이솔렛이 누군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을 냈다는 것부터 대단한 일이었다. 아직 정확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겨우 열일곱 살인 이솔렛은 <공주>라고 불릴 정도로 섬의 나이 많고 현명한 자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다프넨은 그녀가 일부러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혼자 사는 것도 이런 대접들이 불편하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저 보이지 않는 계단은 아버지께서 발견하셨고, 오직 내게만 알려 주신 거야. 그러니 너도 비밀을 지켜 줘.”

  이솔렛은 한 마리 새를 무릎에 앉게 해서 그 깃털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이 새의 동그란 머리에 갸웃이 닿아 있었다.

  “오직 아는 자라면 이 새들뿐이랄까.”

  “그런 것을 왜 제게 알려 주셨죠?”

  “새들이 알려준 거지.”

  그녀는 새들더러 다프넨을 이곳으로 인도하라고 말한 일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 새들은 그를 도와줬을까?

  “이 새는 요즈렐이야. 흰 새 가운데 공주라고 불리지.”

  “당신과 같네요?”

  그녀 앞에서 그 별명을 언급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그 순간 깨달았다. 이솔렛은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 하지만 이 새는 진짜 공주인걸. 옛 고향 땅에서 온 조상새들 가운데는 <왕>이 있었고, 이 새는 그 조상새의 후손이야.”

  “섬까지 온 건 몇 마리뿐이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직계가 한 마리뿐일 수 있지요?”

  “그건 이 새들이 정말로...자신의 왕위를 물려주는 의식을 행하기 때문이지.”

  요즈렐의 목에 새의 눈빛과 똑같은 빨간 루비 한 알이 목걸이에 꿰어져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아.”

  다프넨은 문득 회상에서 깨어나 자신을 부른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긴 집 안에서 그를 부를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뭘 그리 생각 하냐?”

  “이솔렛이......”

  거기까지 말하고 다프넨은 급히 말을 멈추었다. 그녀와 분명히 약속을 한 터였다. 나우플리온에게 라고 해도 계단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이솔렛이 뭘?”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나우플리온은 침대 위에 앉아 사과를 하나 들고는 장난스레 그것을 갉아대고 있었다. 그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는 약간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이제 나한테도 숨기는 비밀이 생기는 거구나. 아, 왠지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한테 따돌림 당하는 아버지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젠장, 말도 안돼. 결혼도 못해 본 주제에 왜 이런 궁상스런 생각만 드는 거지?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 나쁜 녀석아.”

2. 두 가지 음모

  트라바체스의 수도 론.

  트라바체스 안에 존재하는 열다섯 명의 선제후들 가운데 단지 두 명만이 수도 안에서 살 수 있었다. 하나는 통령 자리에 앉은 사람, 또 하나는 평의회의 의장.

  트라바체스의 신분, 즉 계급은 <의원>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습적인 의원은 트라바체스 전체에 약 150여 명인데 가끔 줄어들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했다. 줄어드는 것은 주로 항쟁으로 인한 가문의 멸망 때문인지라 비교적 빈도수가 잦았다. 그러나 늘어나는 것은 기존 이원 30인 이상의 추천을 받아내야 했으므로 대단한 뇌물이 오가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이런 까닭에 나라의 사정이 좋지 않은 최근에는 계속해서 의원들이 줄어들고만 있었다. 흡사 배가 고파진 짐승들이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하는 것처럼, 트라바체스 전역에 항쟁이 불붙고 있었다.

  의원들은 그들이 속한 지역 내에서 선제후를 선출할 자격이 있었다. 이 과정에도 수많은 비리가 개재되었다. 선제후는 세습직은 아니었지만 대신 종신직이었으므로 기존의 선제후가 죽고 나서 잠깐 동안 힘의 공백이 생기면 새로이 선제후가 되려는 자들이 갖은 모함과 술수를 다 동원하여 덤벼들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내에는 죽은 선제후의 자식이 새 선제후가 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결국 가장 효과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것은 선제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제후들은 역시 종신직이자 세습은 아닌 통령을 선출할 권한이 있었다. 그 자신들 중에서.

  선제후의 세력이 강대할 때는 비록 그가 죽는다 해도 감히 새로 선제후가 되겠다고 나서는 자가 드물었다. 이반 일렉터(Elector) 칸 역시 그런 선제후였다. 그는 열다섯 선제후들 가운데 열한명이라는 유례없는 지지를 업고 트라바체스의 새로운 통령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이반 치프 일렉터(Chief Elector) 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4익, 유리히 프레단, 지금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것은 스물 서넛 남짓해 보이는 후리후리한 키의 미남자였다. 알현실의 높은 의자에 앉은 칸 통령은 뚱뚱한 몸을 불편하게 일으키며 턱을 약간 긁었다.

  “고향에는 별 일 없느냐.”

  “물론입니다.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유리히라는 남자는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입가에는 장난기가 있는 미소가 엿보였다.

  칸 통령이 손짓하자 유리히는 몸을 일으켜 왼쪽으로 가 섰다. 그곳에는 이미 검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꼬마는 잘 크고?”

  “누님 염려 덕택에.”

  여자는 창백한 뺨을 부채로 살짝 가리며 미소 지었다.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나이는 서른이 넘어 보였다.

  잡담이 그치자 칸 통령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네 날개가 다 모였군.”

  유리히와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맞은편에는 두 명의 남자가 이미 도착해 서 있었다. 칸 통령의 말이 떨어지자 그들은 동시에 똑같은 동작으로 허리를 굽혔다. 칸 통령의 입가에 만족한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내가 무슨 일로 오랜만에 너희 모두를 소집했는지 짐작이 가느냐?”

  오른쪽 첫머리에 서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서른 후반에서 마흔 정도로 잡아볼 수 있는 우울한 눈빛의 남자였다.

  “결국 윈터바텀 킷입니까.”

  네 개의 날개, 스스로를 1익, 2익, 3익, 4익으로 부르고 있는 이들은 칸 통령이 선제후였던 시절부터 그를 보좌해 온 심복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심복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칸 통령의 은밀한 지시만을 받는 암살자들이었으며, 결코 공식적인 자리에는 나타나는 법이 없었다.

  트라바체스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일은 이런 암살 조직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했다. 때로는 이런 암살자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한 대세를 판가름 하게 되기도 했다. 

  여자가 불평을 했다.

  “어쩐지 이렇게 될 것 같았다고요. 꼬마를 뒤쫓는 일이라니 졸리고 한심할 텐데. 그런 것을 꼭 가지셔야 해요, 우리 통령 각하?”

  그들 가운데 4익인 유리히를 제외한 세 명은 칸 통령이 아버지 선제후의 여섯 아들 가운데에서 후계자로 낙점 받고자 모함과 암살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던 소년 시절부터 그를 도와 왔다. 그래서 말하는 것에도 별로 거리낌이 없는 편이었다.

  칸 통령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져야겠다. 마리노프, 내가 너희를 굳이 부르게 된 것은 소년이 렘므 땅으로 도망쳤다는 소식이 들어와서다. 너희는 신출귀몰한 솜씨와 더불어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으니 외국으로 달아난 자를 추적하기에 적격이겠지, 유리히, 렘므 국적을 만들 수 있겠지?”

  “저는 렘므의 항구도시 나르싯사 출신인걸요.”

  내키기만 하면 조작 따위는 문제도 아니라는 의미였다. 유리히의 능청스러움을 보며 다섯 사람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극히 권위를 세우는 칸 통령도 이들 앞에서는 담백한 태도를 보였다. 아니, 실은 그럴 필요가 있었다.

  “그래, 그러면 일단은 너와 류스노가 가라. 같이 행동해도 좋고, 어쨌든 렘므에서 소년의 자취를 찾거든 연락을 보내는 거다. 만일 소년이 아직 혼자이고 보물도 가지고 있다면 너희가 빼앗아 공을 세우는 것도 좋겠지만, 그런 어린아이가 보호자도 없이 지금껏 혼자 버텼을 리가 만무하겠지. 그러니 섣불리 행동하지 말고 정확한 정보를 얻거든 곧장 지원을 요청해라.”

  류스노와 유리히를 보내는 것은 치밀함과 속도를 택했다는 의미였다. 나머지 두 사람은 그들에 비하면 주로 전투에 강했다.

  유리히가 대답했다.

  “하긴, 그런 식이라면 벌써 다른 녀석에게 물건이 넘어가 버렸을 수도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이번엔 물건 갖고 달아나면 안 돼.”

  마리노프가 농담조로 경고를 보냈다. 유리히는 전부터 오래된 물건에 대한 애착이 유별나서 일을 다 잘 처리해 놓고서 은근슬쩍 몇개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는 버릇이 있었다. 유리히는 약간 당황한 빛을 보였으나 곧장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누님도 참. 제가 언제 푼돈이나 챙겼지 그런 중요한 걸 집은 적 있습니까? 통령 각하께서 이번 일을 얼마나 중대하게 생각하시는지 모를 제가 아니잖아요?”

  우울한 낯빛의 남자, 1익으로 불리는 류스노 덴이 말했다.

  “그러면 저희는 일단 출발입니까. 오랜만에 임무를 주셨으니 나름대로 정보를 모아 오겠습니다.”

  그라 <정보를 모으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흔히 하듯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수소문이나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보통 그가 의도를 내보여 말했을 경우, 결과의 완벽함과 정밀함은 수십 명을 보내어 조사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칸 통령도 그에게 시시한 일은 절대 맡기지 않았다. 그런 건 그의 능력에 대한 모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람인 그가 좀더 정치 감각이 있었더라면 정치꾼들의 나라인 트라바체스에서 크게 출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큰 그림을 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주어진 일은 잔인하리만치 치밀하게 처리하지만, 임무가 없을 때는 한가하게 꽃이나 가꾸고 옷이나 재단하며 나날을 보내는 희한한 남자였다. 그는 본래 재단사의 아들이었다.

  2익인 마리노프 캄브는 아름다운 얼굴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전투용 도끼를 수집하는 무시무시한 취미를 갖고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이런 궁성에 나올 경우 여름에도 긴 팔 드레스를 입었는데 그건 그녀의 팔이 워낙 근육질이어서 보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도 소녀처럼 천진난만한 성미였고, 그런 성격은 자기가 죽인 사람의 머리카락을 잘라 기본에 묶어 보관하는 엽기적인 버릇으로 발전했다. 

  내내 말이 없는 3익은 톤다라고 하고 네 날개 가운데 유일하게 트라바체스가 아닌 레코르다블 출신의 남자였다. 그 나라 사람이 흔히 그렇듯 피부가 약간 검고 머리는 회색이었다. 그가 마리노프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3익이 된 것은 칸 통령의 밑에 들어온 시기가 늦기 때문이었다.

  평소 그는 밧줄과 그물 같은 특이한 무기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정말로 상대가 강하다거나, 또는 그를 화나게 했을 경우에는 끝이 셋으로 갈라진 창을 들었다. 이 창을 들면 반드시 적을 창끝에 꿰어서 죽이곤 했다.

  마지막으로 4익인 유리히 프레단은 아직 젊어서인지 까불기도 좋아하고 놀기도 좋아하는 청년이었는데 고향 땅에 아들을 하나 두고 있었다. 이 꼬마는 그의 친아들이 아니라 길에서 주워서 입양한 아이였고, 나이로 보아도 아들이라기보다는 동생이라는 편이 알맞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는 놀랍게도 아이에게 지극 정성이어서 요즘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의 장기는 날랜 몸과 빠른 말, 그리고 팔랑개비처럼 돌리는 강철 모닝스타(morning star)였다. 그의 가늘고 약한 몸매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는 동료들조차도 의문이었다. 아무래도 여기엔 모종의 비밀이 숨겨져 있음이 틀림없었다.

  “저희 말고 또 누군가 같은 임무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류스노가 신중하게 이야기를 꺼내자 다른 세 사람은 약간 긴장했다. 그러나 칸 통령은 상관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지. 다름 아닌 그 애의 삼촌이야.”

  류스노 역시 말을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질문했다.

  “그 사람 하는 일이 신통찮습니까?”

  “후훗, 그 자에게는 그 자 나름대로 맞는 일이 있는 거지. 혈연이라는 이점이 있어서 지금까지는 잘 해 왔지만 지금쯤 아이에게 후견인이 있을 것이 거의 자명한 만큼 이제부터는 너희가 더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자는 일을 오래 맡겨둔 것에 비해 성과가 너무 적었다.”

  그러나 칸 통령의 생각은 거기까지가 아니었다. 그는 블라도 진네만이 쓸만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섬기던 자를 한번 배반한 자인만큼 완전히 신용하지는 않았다. 그간의 공을 치하하여 론에 있는 저택까지 사줘가며 가까이 두고 있으면서도 만일을 대비해 약점을 잡아놓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전형적인 트라바체스 사람이었다.

  이번 일은 결국 개인과 개인간의 싸움이 될 듯하니 아무래도 지략가보다는 암살자인 이들 <네 날개>가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껏 이들 네 날개는 주어진 일에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일단 보이지 않는 경쟁을 시켜놓고, 실패하는 쪽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을 빌미로 해서 더 충성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까.

  “그렇습니까.”

  류스노의 담백함은 칸 통령의 이중 계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자야말로 트라바체스 출신답지 않은 자였다.

  마라노프가 물었다.

  “아이는 죽여도 상관없나요?”

  칸 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돼. 그 녀석은 산 채로 데려와라. 가능한 한 상처도 많이 입히지 말고. 데려와서 다른 한 가지 보물의 행방을 말하도록 해야 할 테니까. 다른 자는 얼마든지 죽여도 좋다. 하지만 혹시라도 인질이 될만한 자가 있다면 생포해 와라.”

  너무 많은 상처를 입히면 고문의 효과가 적어지기 마련이었다. 마라노프는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아이, 그러면 결국 아무도 못 죽인다는 얘기잖아요? 서글퍼라.”

  “대신 인질의 가치가 없는 자를 죽이라고. 누님한테 양보할 테니까.”

  옆에서 유리히가 천진한 얼굴로 싱글거리며 거들었다. 그러나 이 젊은이 역시 지금까지 죽인 사람의 숫자가 자기 나이보다 많은 자였다. 

  마라노프가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그 약속 믿어도 되겠지?”

  류스노와 유리히가 모든 준비를 끝내고 렘므로 출발한 것은 그 날 밤이었다. 평소에는 한껏 게으름을 피우지만 맡겨진 일이 있으면 촌각도 지체하지 않는 자들이 이들이었다. 칸 통령이 정말로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이들을 부르지 않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칸 통령의 마법사 종그날이 그들을 단숨에 아노마라드 국경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들이 로젠버그 관문에 도착해 조사를 시작하리까지 꼭 이레가 걸렸다.

  한때 보리스라고 불렸던 소년 다프넨은 나뭇잎이 우수수 내리는 바람 많은 언덕을 걷고 있었다. 스콜리의 수업도 끝났고, 오늘은 이솔렛에게 다른 일이 있어 하루 쉬기로 한 터였다.

  언덕 꼭대기에 오른 그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몇 걸음 더 걷다가 갑자기 발끝에 뭔가가 걸리는 것을 느끼고 내려다보았다. 풀밭 속에 굴러 있는 두 짝의 신발이었다. 

  그제야 상황을 눈치 챈 다프넨은 싱긋 웃으며 신발을 집어 들고 근처의 수풀을 몇 군데 더 헤쳤다. 예상대로 나우플리온이 거기서 세상모르고 낮잠에 빠져 있었다.

  “게으른 사제님, 당신의 첫 번째 제자가 왔다고요!”

  요즘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즐겼다. 나우플리온의 정식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불편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섬을 비웠던 나우플리온이 한동안 쌓인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전처럼 검술 연습을 할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가 된 것은 그에게 즐거움의 원천이었다. 남의 질투 따위에 우쭐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고, 그와 지내는 것은 본래 재미있었다.

  “으음...게으른 사제님이라니 너무 하쟎냐, 버릇없는 제자야. 스승님은 격무에 시달려 한 잠 더 주무셔야겠다.”

  힘들다는 것이 괜히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나우플리온이 섬 전체를 조사하는 임무를 띠고 떠났다가 돌아온 것은 겨우 십여 일 전이었다. 돌아오고 얼마 되지도 않아 이번에는 마을 일대의 조사에 착수했다. 무기를 비롯한 보급품의 수량 조사 따위가 그의 성미에 맞을 까닭이 없었다. 지루한 일들을 되풀이하느라 요즘 그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럼 전 여기서 잠깐 기다리죠.”

  나우플리온은 몸을 뒤척이더니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검의 사제란 무척 피곤한 직업이란다. 나중에 누가 너보고 하겠냐고 물으면 결단코 안한다고 그래라.”

  다프넨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네......”

  그래서 나우플리온은 다시 잠이 들고 다프넨은 풀밭에 앉아 다리를 쭉 뻗은 채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바람의 뭉툭한 손가락이 길게 자란 풀들 사이로 이리저리 선을 긋고 있었다. 또는 긴 치맛자락으로 쓸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짧아진 머리는 바람이 불면 휙 뒤집혀 흩날리곤 했다. 누군가의 머리카락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윈터러를 띠에서 풀어내어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약간 뽑아 보려다가 마음을 바꿔 그대로 두었다.

  이솔렛에게서 드디어 첫 찬트를 배우게 된 것이 바로 어제였다. 아직 능숙하지 못해 이솔렛처럼 그 안에 마력을 불어넣지는 못했지만 일단 구조는 외워 두었다. 언제고 그도 마법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은 대단히 훌륭한 학생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언제고 성실한 학생이기는 했다.

  아직은 뜻을 잘 알 수 없는 노래, 나직이 외워 보았다.

  물 속의 구슬 그 안의 세계

  네 안의 마법 그 속의 노래

  잃은 것을 영원히 버려 성스러워지며 맑아지리라

  “그 노래, 이솔렛이 가르쳐 줬냐?”

  자는 줄 알았던 나우플리온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수풀 속에 머리를 묻고 있어서인지 목소리는 한결 먼 것처럼 들렸다.

  “네.”

  “클라자니냐의 찬트구나.”

  “클라자니냐가 뭐죠?”

  나우플리온은 누운 자세에서 상체만 벌떡 일으켜 앉았다.

  “지명이야. 옛 왕국의 지명.”

  그러더니 나우플리온은 불쑥 질문했다.

  “정말로 가르치긴 하는군. 이솔렛과는 잘 지내고 있는 거냐?”

  단순한 질문을 받은 것뿐인데 순간적으로 뺨이 살짝 붉어졌다. 다행히 그는 나우플리온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많이 좋아졌어요.”

  “다행이구나.”

  잠시 사이를 두고 그가 말을 이었다.

  “난 너를 그녀에게 소개할 때 절반은 너를 위해서, 절반은 그녀를 위해서 그랬었지. 너를 위해서가 무슨 얘긴 지는 알 테고, 이솔렛은 너무 사람들과 교류를 안 해. 예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솔직히 물어볼 기회를 잡은 것 같아서 다프넨은 말을 꺼냈다.

  “당신은 그녀를 잘 아나요? 왜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고 있어요?”

  또다시 나우플리온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이번엔 조금 후 입을 열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솔렛은 돌아가신 검의 사제, 일리오스님의 무남독녀야. 나 이전에 검의 사제이셨던 그 분은...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뛰어난 분이셨지. 검술에 있어서도 물론 독보적이셨지만 학문이면 학문, 예술이면 예술, 못하는 것이 없는 분이셨어. 최고의 리라 연주자이자 작곡가였고, 그림 솜씨도 당대에 당할 사람이 없었던 데다, 건축 설계에도 정통하셔서 후세를 위해 많은 스케치를 남기셨지. 철학자이기도 했고, 역사가이기도 했으며, 심지어 지금은 거의 사라진 학문인 수학에도 능통하셨으니 말이야. 살아생전에 그 분을 존경하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야. 당시 섭정 각하이셨던 분도 그 분의 학식과 식견에는 고개를 숙일 정도였으니까. 그래, 진정한 의미에서 천재였다고 할까. 이 섬의 긴 역사 속에서도 그만한 천재는 쉽게 찾을 수 없지.”

  나우플리온의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과 더불어 일말의 그리움까지 깃들여 있어 다프넨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고, 그가 매번 보여준 수많은 새로운 면모들 가운데 가장 신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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