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권. 2장. Sever Nights (8/21)

2장. Sever Nights

1.월계수 자라던 나라

  “월넛과 이실더에 이어 이번에는 나우플리온이란 말이지요. 그것참, 한 인간의 이름을 세 개째 외워야 하다니 이만저만 불공평한 게 아닌데요.”

  “적당히 줄여서 불러. 나우플이라든가, 노플이라든가. 나우라든가.”

  “나우라니, 왠지 어감이 웃기잖아요.”

  “너도 남의 일 말하듯 할 게 아니야. 이제부터 너도 이름이 생길 참인데, 줄이기도 곤란한 기나긴 이름이 난데없이 붙여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냐.”

  “예를 들면?”

  “테스모폴로스라든가.”

  소년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 이름의 주인공이 마침 그들 앞을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우플리온도 방금 그를 발견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 분명했다. 이어서 나우플리온은 반가워 죽겠다는 듯한 태도로 손을 흔들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메달의 사제님! 좋은 아침입니다!”

  테스모 쪽에서도 어물어물 손을 흔들며 답을 해 왔다. 그가 다시 제 갈 길을 가자 나우플리온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저 정도면 그래도 양호한 거야. 브라토마르티스라든가, 테르크시에페이아라든가 하는 이름이 걸리면 남은 생애 동안 정식 이름을 불릴 기대 따위는 조용히 접고서 사는 편이 좋지.”

  “그런 이름을 누가 기억하겠어요. 자신조차 안 잊어버리면 다행일 텐데.”

  “날 봐. 방금 정확히 발음하는 거 못 들었어?”

  “오호라, 그 두 아가씨는 도대체 누구죠?”

  그 날은 <자신을 모르는 소년>을 위한 세례식과 정식 입문례가 동시에 치러지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공회당 뒤편까지 걸어가 넓은 뜰과 같은 곳에 이르러 멈춰 섰다.

  약간 흐린 날씨였으나 희미한 햇살이 뜰을 비추고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담소를 나누며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다. 지금껏 본 중 가장 많은 섬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뜰을 처음 본 순간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마음속으로 까닭을 알 수 없는 약한 충격을 받았다.

  바닥은 대부분 흙이었고, 중앙에 만들어진 좁은 길에는 납작한 포석이 죽 깔려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그가 처음 섬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순간적으로 보았던 폐허의 환각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어쩌면 느낌이 비슷한 것일 지도 몰랐다.

  사발 비슷한 모양의 커다란 청동그릇들이 길 양 옆에 드문드문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물이 반쯤 담겨 있었다. 언뜻 보아도 물은 비교적 깨끗했고 가끔 나뭇잎 몇 개만이 떠다닐 따름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릇 중심에 둥근 구멍이 뚫려 아래로 통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 왔군. 어서 이리로 오게나.”

  포석 길 맨 끝, 그러니까 공회당 뒷벽과 닿아 있는 위치에 돌로 된 제단과 같은 것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팡이의 사제 데시가 그 제단 아래에 내려선 채 그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데시는 첫날 보았던 것과는 달리 치렁치렁한 갈색 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은빛 관을 쓰고 있었다.

  이 은관은 모양이 희한했다. 곧게 솟아 올라가는 여러 개의 나뭇가지들을 형상화한 것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가장 높은 부분은 무려 30여 센티미터나 되었다. 손에 든 것은 전날 본 일이 있던, 초승달 모양의 수정으로 머리를 장식한 지팡이였다.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나우플리온으로부터 떨어져 데시 앞으로 가 섰다. 데시는 계단을 향해 큰절을 한 번 올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더니 자신 앞에 놓인 물그릇에 손을 넣었다.

  의식이 시작되어도 사람들은 단지 잡담을 그쳤을 뿐, 열을 지어 늘어선다거나 동작을 모두 멈춘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될 소년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사귀게 되어 그 이름이 널리 불릴 수 있게 되도록 이곳에 나와 준 손님들일 뿐, 의식에 직접 참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은 반드시 이곳에 나와야 할 필요도 없었다. 마치 생일 파티의 하객과도 같아서 초를 불면 박수를 칠 의무 정도밖에는 없었다.

  데시는 물그릇에 넣었던 손을 빼며 소년의 머리에 물을 가볍게 뿌렸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우플리온도, 에니오스<단센>도, 리리오페도, 헥토르도, 에키온도, 오이지스도, 다른 모든 사제들도, 모두 사람들 속 어딘가에 선 채로 이 의식을 주시하고 있었다.

  “옛 고향, 대륙으로부터 건너와 사흘 간 자신을 알지 못하는 소년아, 이제 섬의 사람, <달의 순례자>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소년아.”

  다만 이례적이라면 이 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이 여섯 사제들 가운데서도 암암리에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지팡이의 사제라는 점이었다. 이름은 사제들이 지을지언정 세례식은 대부분 여섯 사제들보다 한 단계 낮은 자들, 즉 열일곱 명의 수도사들이나 또는 <스콜리>의 선생들이 집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단순히 마을의 나이 많은 어른이 하게 되는 경우도 흔했다. 물론 그런 세례식은 어린 아기일 때 치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렇듯 나이든 소년의 세례식 자체가 드문 일이긴 했다.

  몇몇 사람들은 이 의식이 순례자로서의 입문례를 겸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수군거렸다. 어쨌든 섬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날 때부터 순례자였으므로 입문례라는 것을 거칠 필요가 없었다.

  “내, 달 여왕의 지팡이를 빌어 네 묵은 이름을 지우고 새 이름을 지어 붙이고자 하니, 이는 삶을 이루는 열 가운데 한 점을 바꿈으로써 지난 생애의 전체를 망각 속으로 흘려버리고자 함이다. 밤하늘의 여인은 바라는 자를 위해별을 내림이니, 이후 삶은 그 별을 따를지니라.”

  그러면서 데시는 두 손으로 물을 떠올려 허공으로 높이 들어올렸다. 거기에서 희미한 빛이 떠올라 소년의 머리를 비췄다. 빛은 이윽고 붉은 광채로 변했고, 군중들 사이에서 “아” 하는 탄성들이 들려왔다.

  헥토르의 표정이 어두웠다. 세례식에서 보이는 붉은 광채는 <검의 길>을 뜻했다. 직접 기억할 수는 없지만 헥토르 자신의 세례식에서도 저것과 같은 색깔의 빛이 보였다고 했다. 처음부터 알아보았다시피 저 녀석은 그의 경쟁자였다.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대는 목소리가 그의 귀를 불쾌하게 찔렀다.

  “역시 검의 사제가 고른 소년인가.”

  “틀림없겠지. 저 허리의 검을 봐. 어딘가 예사롭지 않잖아.”

  “어쩐지 다음 검의 사제가 누구일지 짐작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심지어 다음 의식이 이어질 시점이 되어서도 붉은 광채는 사라지지 않고 한층 강렬한 빛을 발했다. 그리고 점점 더 커졌다. 사람들이 놀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어버렸을 즈음, 직경 20센티에 이를 정도로 커졌던 광채는 데시의 손짓에 의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소란을 무마시키려는 듯 한층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알게 될 소년아, 너는 이제 다프넨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너는 다프넨이다.”

  다프넨......?

  보통 섬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짓는 옛 언어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당장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것은 이제 다프넨으로 불리게 된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그 이름이 형의 이름인 <예프넨>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약간의 만족을 찾았다.

 의식을 돕는 젊은 여자 한 명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와 섰다.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은 가위가 들려 있었다. 데시가 낮게 말했다. 

  “이제 새 이름을 받아 새로 태어난 소년아. 네 속의 옛 것들은 지금 마음 밖으로 영원히 흘려버리려무나.”

  여자가 그의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모아 쥐고 가위를 갖다 댔다. 사각, 사각, 소년의 검푸른 머리카락이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흰 포석 위에 새의 깃처럼 곱게 흩어져 내렸다.

  등을 거의 덮을 정도로 자랐던 머리였다. 그러나 별 미련은 들지 않았다. 이제 이곳에서 자신을 지켜줄 사람에게 어울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먹고 있었고, 잘라 떨어진 머리카락은 그런 결심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홀가분해졌다. 과거와 연결된 끈이 하나 끊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데시는 마지막으로 지팡이를 두 손으로 모아 쥐고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너의 세례는 견습 순례자의 것이므로 여기에서 맺어질 것이다. 너는 이제 작은 순례자, 즉 배워 살아갈 자이다. 네가 훌륭히 배우고 살아간다면 15세의 정화 의식을 통해 너는 진실한 순례자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달 여왕의 의지와 옛 역사, 그리고 너의 별이 가리키는 길을 위해 탐구하거라, 이곳에는 분명 너 한사람만을 위해 준비된 약속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너이다.”

  데시의 지팡이에 붙은 수정 초승달이 부드럽게 빛을 냈다. 그것으로 의식은 끝났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소란스럽지 않을 정도의 박수를 보냈다.

  사람들이 서서히 흩어져 갔다. 다프넨은 그 자리에 좀더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는 어젯밤 데시가 그가 임시로 기거하던 방에 찾아온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데시는 그의 앞에 커다란 은 쟁반을 내밀었다. 그리고 거기에 두 손을 얹어 놓고 눈을 감고 있게 했다. 소년은 솔직히 당황했으나 그곳에는 사정을 물어 볼 나우플리온도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면서 그는 데시가 되었다고 말할 때까지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눈을 떠 쟁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이상한 그림이 나타나 있었다.

  무엇인지 얼른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이었다. 기름이나 물이 번진 무늬 같은 것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커다란 우물과 그 주변에 흩어진 주춧돌들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가 신기해하고 있는 동안 데시는 쟁반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그림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것 없다. 아직 네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네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쟁반의 빛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너는 아직 진심으로 이곳에 소속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구나. 네가 온 것은 어떤 특정한 일, 또는 특정한 사람 때문이겠지. 하지만 결코 속임수나 악에 물든 마음은 없다는 것을 알겠다. 15살이 되어 미래를 다시 한번 결정하게 될 때까지, 네가 이곳에서 무엇을 찾고 얻을 수 있을지 잘 알아보려무나. 너의 혼돈이, 과연 여기에서 치유를 찾을 수 있을지.”

  데시는 그의 혼돈을 알고 있었다.

  “그만 가자.”

  나우플리온이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쳤다. 생각에서 깨어난 다프넨은 어디선가 본 듯한 소녀 한 사람이 눈앞에서 싱긋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디서 봤더라?

  “안녕? 난 리리오페야. 리리라고 불러도 좋아. 머리 자른 모습도 보기 좋은데? 나한테 첫 번째로 네 이름을 직접 말해줄래?”

  다프넨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 난 다프넨이야. 반가워.”

  옆에서 나우플리온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 하다가 생각을 바꾼 듯 그만두었다. 리리오페는 씩 웃더니 이어 말했다.

  “반갑다고? 정말이야?”

  이번에도 얼결에 그는 진심을 말해 버리고 말았다.

  “글쎄.”

  말을 뱉자마자 실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리리오페는 <당연히 화내야 할 일을 봐줬으니 넌 내게 빚졌다>라는 듯한 표정으로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흐응, 너무 솔직한 건 곤란해. 하지만 잘생겼으니까 봐 줄게.”

  이번에야말로 할 말을 잃어버린 다프넨은 입을 약간 벌린 채 당황한 눈으로 리리오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소리 내어 웃더니 팔짝 뛰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놀랐지? 하지만 사실을 말한 거니까 내가 잘못한 건 아냐! 그리고 만에 하나 기분이 나쁘더라도 봐줘. 왜냐면 난 예쁘잖니? 그것도 아주 많이!”

  “......”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직껏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외모나 귀여움에 대해 단단히 확신하고 심지어 자랑스러워했던 로즈니스조차도 그런 얘기를 저렇게 입 밖에 내어 당당히 말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다지 소녀가 불쾌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리리오페는 단지 혀를 쏙 내밀었다가 입 끝을 씨익 올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을 뿐이고, 그것은 로즈니스가 흔히 짓던 자부심 가득한 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굳이 말한다면 남이 깜짝 놀랄 말을 해 놓고 즐기는 개구쟁이의 치기와 비슷하달 까. 그 말이 무슨 내용이었는가 하는 점은 중요하지도 않고.

  “그럼 예쁜 아기씨는 갈 테니까, 혹시라도 또 보고 싶어지면 하루 전에 미리 신청해! 안녕!”

  리리오페는 손가락을 들어 눈가에 댔다가 경쾌하게 떼더니 어느새 사람들 사이로 달려가 버렸다. 남은 두 남자는 한참 동안 말문이 막혀 있다가 잠시 후 비슷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우플리온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거 참, 쟤가 언제부터 로즈니스보다 한 수 더 뜨게 되었지.”

  나우플리온도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프넨은 이제 분명히 스승이 된 남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잘 아시나요, 저 애?”

  “그래.”

  “어떤 애죠?”

  “관심 있냐?”

  “네에?”

  나우플리온은 갑자기 얼굴 가득 장난기를 띠며 말했다.

  “응, 실은 말이지, 내가 여길 떠나기 전에는 나하고가 아니면 결혼 하지 않겠다고 그러던 애거든. 하지만 이제 너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으니 원한다면 내가 양보할까 한다. 오, 이 관대함, 너그러움, 역시 훌륭한 스승의 풍모야.”

  “차라리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친딸이라고 하시면 믿겠네요.”

  “쟤가 어딜 봐서 날 닮았냐?”

  “당신은 로즈니스하고도 죽이 잘 맞았잖아요? 분명 쟤하고도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넌 안 맞았냐? 너도 걔하고 잘 놀았잖아?”

  “그거야......”

  <그때 난 싫고 좋고를 가릴 입장이 아니지 않았느냐>라고 말하려는 참이었다. 나우플리온이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 그거야. 지금 네가 하려는 말이 바로 내가 하려던 말이다. 나도 그랬어.”

  “로즈가 불쌍해요.”

  “바보야, 더 불쌍한 건 우리야. 잘 생각해 보라고.”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둘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전에 하던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런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눈이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로, 아니, 사실은 약간 달랐다. 다프넨 쪽에서는 몰랐지만 나우플리온은 이미 한참 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죄송합니다만.”

  눈앞에 나타난 붉은 머리의 소년을 보면서 다프넨은 <자신을 모르는 소년>이었던 당시 한 번 들었던 그의 이름을 기억해 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비교적 간단했던 그 이름이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다행히도 이 소년은 그가 아닌 나우플리온에게 용건이 있는 것 같았다.

  “검의 사제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뭐지?”

  “저 아이가 말입니다.”

  그 순간 다프넨은 그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 했던 노력을 중단했다.

  방금 한 말을 들음과 동시에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챘던 것이다. <다프넨>이라는 이름은 방금 전에 데시 사제에 의해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선포되었다. 그 이름을 굳이 부르지 않을 이유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일부러 존재 자체를 무시하려는 것. 

  “정말로 사제님의 첫 번째 제자입니까?”

  “그렇다만, 그런데 뭐 잘못됐냐?”

  여느 때처럼 대수롭잖게 대꾸한 나우플리온에게 붉은 머리 소년, 헥토르는 대담한 목소리고 말했다.

  “잘못되었지요.”

  둘은 잠시 서로의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들려온 나우플리온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프넨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가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것을 아직껏 상상해 본 일이 없어서였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해라. 당장 나를 납득시켜라. 서투른 핑계를 용서하지 않겠다.”

  딱딱한 목소리 속에는 경멸조차 뼈처럼 박혀 있었다. 나우플리온과 같은 사람이 아직 어린 소년을 그렇게 불쾌하게 대한다는 것부터가 다프넨이 전에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헥토르는 오히려 익숙한 듯 당황하지 않은 채 일단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며 말했다.

  “첫째로 저 아이는 아직 달 여왕의 가르침조차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제대로 된 순례자라고 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까 지팡이의 사제님께서도 세례식 도중에 지적하셨지요. 지금의 저 아이는 우리가 그토록 배척해야 마땅하다고 배워온 외지인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일을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저 아이에 대해서 사제님과 개인적 친분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아이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조차 시간이 걸릴 터인데 어떻게 갑작스레 그런 중대한 위치에 오르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떤 과거를 거쳤는지,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 심지어 이전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왜 하필 그런 아이를 받아들이라고 말하십니까? 좋은 혈통을 가진 섬 태생의 아이들, 의심할 필요가 없는 투명한 생애를 살아 온 아이들을 내버려두고요.”

  다프넨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살아온 과거는 어둡고, 성격은 좋지 않고, 심지어 사람을 죽인 일도 있는 자신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을 확인한 것뿐이다. 다만 저 소년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불쾌감과 불안감을 표현해버린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왜? 왜 그 사실이 그렇게나 불쾌하고 불안한가?

  그때까지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느 정도 중대한 일인지 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부러움을 살 만한 자리란 건 이해하겠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자신을 미워하고 질투할 이유가 되는 걸까?

  그때 나우플리온이 그에 못지않게 딱딱하고도 위압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제자로 삼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거냐? 내 고유의 권위를 놓고 함부로 옳고 그름을 논할 권리가 네겐 없다. 그렇게 애써 길게 말했으니 나도 예의상 짧게나마 설명을 해 주지. 자, 지금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나는 대륙에서 이미 5년여를 살다가 왔다. 아무래도 대륙의 문물과 관습에 물들었기가 쉽겠지? 너도 그것조차 불안하게 여길 테냐? 내 제자라는 위치가 무슨 책임이나 권리를 갖는 자리냐? 단지 내 마음에 들었다는 것뿐이다. 그것에 대해 제 3자가 왈가왈부할 필요가 있느냐? 훗, 난 네가 누구를 만나고 사귀든 관심조차 없는데 왜 너는 그에 대해 논하려 하지? 자, 비켜라. 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숙취에 시달려 머리가 몽롱한 것 같은 느낌이다. 다신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의 손을 끌어 잡더니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러나 헥토르는 그대로 좀더 오랫동안 서 있었다. 잠시 후 몸을 돌린 그는 어느새 주위를 둘러싼 소년들과 함께 반대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 가운데는 헥토르의 동생인 에키온이 있어서 무언가 열렬히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봐, 보리스.”

  나우플리온과 다프넨은 산비탈에 푸르게 깔린 클로버들 위에 앉아 무심결에 손을 넣어 잎사귀들을 헤집고 있었다. 문득 그 이름으로 불리니 가슴 한쪽이 핀으로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운 어감이군요.”

  “네 이름말이야, 굳이 바꿀 필요 없어.”

  “네?” 

  나우플리온은 큼직한 손으로 클로버를 한 움큼 뽑더니 사방에 흩뿌렸다 그러더니 말했다.

  “네 이름의 뜻, 알고 있냐? 섬사람의 이름엔 다 뜻이 있다는 거 말이다.”

  “그런 얘기는 들었어요. 다프넨이라는 이름의 뜻은 뭔가요?”

  “다프넨...월계수라는 뜻이지.”

  “월계수라고요?”

  그런 나무 이름을 들어본 일은 있었다. 보았던 적도 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보았더라도 아마 그 나무가 월계수인지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식물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

  “월계수는 이 섬에서 자라지 않아. 대륙에 가면 볼 수 있지. 아마 이 섬에서 태어나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월계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거다, 심지어 지팡이의 사제인 데시 님 조차도 모르겠지. 그녀도 밖으로 나간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아름다운 나무야. 대륙에서 그 나무의 푸른 잎사귀는 승리자를 위한 관을 장식하는 데 쓰이곤 한다지.”

  “그런데 어째서 본 적도 없는 나무 이름을 섬에서 사람 이름으로 쓰는 거죠? 전에 <무화과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사제님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걸 말해준 아이는 무화과가 뭔지 모르더군요.”

  “우리가 본래 살았던 곳은 월계수도, 무화과나무도 무성하던 곳이었다고 해. 하지만 기억하는 자는 거의 없어. 우리는 고향에서 멀어져 버린 유랑자들이야. 이제는 뿌리조차 희미하지.”

  “그곳은 어디였죠?”

  “몰라. 아마 아무도 모르진 않을 거야. 섭정 각하나 저 나무 탑 속의 현자께서는 알고 계실 지도 모르지.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심지어 나 같은 사람들조차 이미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거야. 우리가 과거의 왕국과 공유하고 있는 부분은 이제 극히 일부가 되어버렸으니까.”

  “나우플리온... 그렇다면 당신의 이름은 무슨 뜻인가요?”

  “항해자.”

  항해자... 그 말은 분명 나우플리온과 아주 잘 어울렸다. 항해란 말의 뜻을, 배를 타는 데만 국한해도 그렇고, 멀리 떠돈다는 의미로 보아도 그랬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면 더욱 더 그랬다. 이 섬까지 오던 도중 폭풍우를 만났던 때, 에니오스<단센>가 나우플리온에게 <역시 형님은 항해자요>라고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지금은 돌아가신 옛 사제님이 지어주신 것이고. 후후. 정말로 놀랍단 말이야. 너, 이런 이름들이 단순히 그냥 지어지는 게 아니란 것, 알고 있냐?”

  “그럼 어떻게 지어지는데요?”

  클로버들이 연신 뜯겨 바람에 날려갔다. 꺾어진 풀대에서 나는 싸한 풀 내가 코끝을 간질였다. 나우플리온은 손을 내밀더니 다프넨의 짧아진 머리털을 흐트러뜨렸다. 그런 행동은 과거 예프넨이 하던 그것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리는 진네만 저택을 떠날 때보다 훨씬 더 짧아져서 겨우 귀를 넘길 정도가 되었다. 아까 의식 중에 가위로 대강 잘라서 끝도 들쭉날쭉했다.

  “미래를 내다보고서이지. 새 이름을 받게 될 아이의 미래를 들여다보고 거기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이게 되는 거야. 내 이름의 뜻을 처음 깨닫던 나이에 나는 이미 밖으로 나가 떠돌게 될 삶을 예감했어. 그렇다면 너는 뭘까. 월계수가 네게 의미하는 건 뭘 것 같니?”

  “전혀 모르겠어요. 월계수라는 나무에 대해서는 아무 느낌도 없는걸요.”

  나우플리온은 웃었다.

  “이 이야기를 해도 좋은지 모르겠지만... 본래 네 이름은 다프넨이 될 것이 아니었다. 지팡이의 사제께서 본래 네 미래를 예감하며 가장 먼저 지은 이름은 다른 것이었지. 그런데 그 분은 무슨 생각이셨는지 그 이름에 대해 내게 와서 의논하시더군, 그래서 내가 말렸어. 그런 이름은 붙이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말이야.”

  “무슨... 이름이었는데요?”

  “아타나토스.”

  “에엣, 훨씬 길군요.”

  “임마, 길어서 말린 게 아냐. 아타나토스가 다프넨으로 변할 줄은 나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야.”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인데 그래요?”

  나우플리온은 약간 망설이다가 말했다.

  “불멸, 불사... 죽지 않는 자라는 의미다.”

  죽지 않는다고?

  다프넨이 당황하고 있자 나우플리온은 고개를 숙였다가 저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잊어버려. 그런 이름 따위, 네게는 어울리지 않아. 월계수라는 두 번째 이름 역시 무슨 의미로 택했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네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역시 네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야. 네게는 전사, 보리스라는 이름이 제일 잘 맞는 것 같아. 삶의 전사, 삶 전체를 통해 모든 것들과 부딪쳐 싸워나가야만 하는 전사 말이다.”

  자신이 이름이 될 뻔했다는 낯선 개념에 대해 생각하느라 말을 잊고 있던 다프넨이 한참 만에 물었다.

  “저를 계속 보리스라고 부르실 건가요?”

  “적어도 둘이 있을 때는 그러기로 할까?”

  어딘지 모를 옛 땅에 월계수가 푸르게 자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했다. 이제 모두가 떠나고 비어버린 대지에는 아직도 월계수가 녹색 잎을 달고 서 있을까. 아니면 모두 사라져 황무지로 변해버렸을까.

  “우리들의 옛 왕국에 자랐다는 월계수는 종종 성의 입구에 심어두기도 했다고 그래. 방문객을 환영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거든, 네 이름이 다프넨이 된 건 만일 네가 그곳에 가게 된다면 환영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단 뜻이지 않을까?”

  나우플리온은 무언가 더 알고 있지만 숨기는 듯한 태도로 말을 멈췄다.

2. 적대자들

  사흘 뒤, 다프넨은 <스콜리>로 안내받아 갔다.

  마을에서 북쪽으로 뻗은 완만한 비탈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널찍한 탁상지가 있었고, 거기에 모든 아이들의 학교인 스콜리가 있었다. 배우는 것은 순례자의 임무와 달 여왕의 가르침, 옛 역사 약간, 그리고 막대 호신술 정도였다. 막대 호신술이라는 것은 2미터가 조금 안 되는 막대만을 이용해서 무기를 든 적조차 제압하는 기술로서 섬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익히고 있는 전통 무예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이제 달 여왕이라는 것이 실제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냥 달과 <달 여왕>이라고 불릴 때의 달은 성격이 전혀 달랐다.

  달 여왕은 오만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변덕스러우면서 동시에 지혜로웠다. 그녀의 성격은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강한 자를 좋아하고, 게으르거나 유약한 자를 못 견뎌하는 초승달의 성격이고, 나머지 하나는 예지와 마법을 주관하며 오랜 지혜를 나누어주는 보름달의 성격이었다. 그녀의 그런 모순 되는 성격을 잘 이해하고, 그녀가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달의 순례자가 추구하는 길이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두 가지 성격은 서로 상반되기에 때로는 이쪽에 걸리고, 때로는 저쪽에 맞지 않았다. 단순히 중용의 길을 걸으라는 의미도 아니었다. 달 여왕은 우유부단한 자를 증오했다. 그녀의 감정 표현은 때로는 은근하지만 때로는 매우 명백하게 직설적이었다. 그녀는 아주 가끔씩 직접 손을 써서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벌했다. 그러나 어떤 악은 아주 오래오래 번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이 섬에 정착한 사람들의 조상은 옛 왕국에서도 달을 섬기는 종교를 지녔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연원이 오랜 만큼 이 신앙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초월자의 모순 된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어찌 하찮은 인간으로서 간단한 일이겠는가. 우리는 단지 끝없이 그녀에게 가까워지려 노력할 뿐이지. 오직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야.”

  다프넨은 스콜리 입구에서 한 노인을 만나 그런 말을 들었다. 노인은 한때 스콜리의 선생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현재는 은퇴하여 정원을 다듬고 있었다.

  다프넨은 노인을 지나쳐 야트막한 1층 건물인 스콜리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복도를 끝까지 따라가니 방문이 있었다. 그는 노크하고 들어갔다.

  “그래, 네가 다프넨이구나.”

  스콜리의 교장은 수도사, 즉 사제 바로 아래 단계에 속하는 지위의 순례자였다. 방안에는 한 명의 소녀가 앉아 있어서 그를 놀라게 했다. 세례식 날 그를 당황하게 했던 리리오페였다.

  그러나 이번에 그녀는 발목까지 오는 다소곳한 긴치마 차림에 어울리게 얌전한 미소만 띠었을 따름이었다. 양 갈래로 묶은 머리만이 그녀의 장난기를 약간 나타내고 있달 까. 정말이지 수십 가지 얼굴을 가진 소녀임에 틀림없었다.

  인사가 끝나자 교장이 말했다.

  “리리오페는 너보다 한 살 아래지만 학교에 오래 있었고, 또 네가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안내역을 맡겠다고 자청했단다. 그러니 서로 친하게 지내고 고맙게 생각하도록 해라.”

  다프넨은 리리오페를 바라보며 “고마워”하고 말했고, 리리오페 역시 기쁜 듯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여기까지는 좋은 진행이었다.

  “그러면 나가 보거라. 오늘은 학교가 쉬는 날이니 천천히 둘러보고, 수업은 내일부터 시작하자. 네가 가야 할 교실이나 준비할 것들에 대해서는 리리오페가 잘 이야기해 줄 거다.”

  둘은 교장실을 나와 몇 걸음 복도를 되짚어 걸어갔다. 그때부터 일이 터지기 시작했다.

  “굳이 오빠라고 안 해도 되지? 난 도저히 네가 나보다 오빠라고 못 믿겠어. 너무 귀엽기만 한 얼굴이잖아. 후훗.”

  “......”

  귀엽다는 말은 진네만 저택에 살 때 예프넨 형한테나 들어보았을까? 형을 잃은 후로 그런 생각을 떠올려 본 일조차 없던 그로서는 황당하다 못해 무례하게까지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리리오페는 그런 말이나 한 주제에 너무도 해맑게 웃고 있어서 화를 내기도 좀 애매했다.

  “......그런 말은 싫어해.”

  싫어했던가? 방금 생각해 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적당한 대답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리리오페는 이런 문제에서 만만한 상대가 절대 아니었다.

  “아, 미안. 귀엽다는 얘긴 앞으로 안 하도록 노력해 볼게. 어쨌든 그러면 오빠라고 안 불러도 된다는 건 허락한 거지? 고마워, 관대한 오빠. 이건 마지막으로 불러 준 거야!”

  그러더니 곧장 앞질러 몇 걸음 뛰어가서 복도 옆으로 난 첫 번째 문을 경쾌하게 열어 젖혔다. 안으로 들어갔다가 상반신만 쑥 내밀더니 어서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어쨌거나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아, 여기는 우리 학교에서 제일 크고 좋은 교실이야. 뭐, 그래봤자 교실이라곤 두 개 밖에 없지만 말이야.”

  널찍하고 둥근 테이블이 가운데 놓여 있었는데 리리오페는 잰걸음으로 춤추듯 빙글빙글 돌며 테이블 주위를 반 바퀴 정도 돌아갔다. 폭이 넓고 트임이 있는 치마가 펄럭이자 하안 발목과 종아리가 드러났다. 한 개의 의자 앞에 멈춰 선 리리오페는 손가락을 탁자에 탁, 짚으며 말했다.

  “아무데나 앉아도 되지만 여기가 명당이지! 햇빛도 잘 들고 선생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않아도 되거든. 그러니까 여기 앉아. 알았지? 그리고 난 네 옆자리, 여기 앉을 거야. 이 교실에선 이드몬 선생님께서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치시고, 또 필로멜라 선생님은 간단한 마법 주문들을 가르쳐 주셔. 제네시 선생님은 순례자의 길과 옛날 역사를 얘기해 주시고 또 우리들의 의견을 말하게 하시지. 그것 말고도 주로 나이 많은 학생들의 수업은 다 여기서 해.”

  두 번째 교실은 바로 맞은편에 붙어 있었다. 앞서의 것보다 훨씬 작았지만 생긴 것은 비슷했다. 우측 벽 쪽으로 약간 넓은 공간을 비워두었고 중앙에는 둥근 테이블과 의자들이 있었다.

  나무로 바닥을 깐 교실 옆벽에는 덧문을 열어 놓은 작은 창들이 있었다. 그리고 들어온 완만한 햇살이 갈색 테이블을 갓 구운 빵처럼 폭신하게 보이게 했다. 그런데 그 너머에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이 창 밖을 내다보며 앉아 있었다. 

  리리오페가 별로 곱지 못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어머, 땅다람쥐잖아? 여기서 혼자 뭐하니?”

  그 아이, 오이지스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가 다프넨과 눈을 마주치고는 더욱 당황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움츠렸는데, 흡사 그렇게 해서 자신이 안보이게 될 수 있다고 믿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겨우 등받이 뒤에 숨으려 한 것에 불과했다.

  “뭐, 있는 거야 자유니깐.”

  리리오페는 오이지스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듯 쌀쌀맞게 말하며 다프넨을 왼쪽 벽으로 이끌어 갔다. 거기에는 크지 않은 책꽂이가 있었고 낡아빠진 책들이 마흔 권정도 꽂혀있었다. 아이들의 손이 닿아 해어진 모양이었고, 책의 내용들도 대부분 쉬운 것들인 듯했다. 학교 안에서 도서실이라 할만한 건 그것이 전부였다.

  “여기 책은 마음대로 봐도 돼. 그렇다고 해 봤자 별로 보는 사람도 없지만 말이야. 너도 책에는 그다지 관심 없지? 검의 사제님의 제자잖아! 후우, 난 책이 많이 있는 것 보면 머리가 아파져. 사실 여기도 너무 많은 것 같거든. 넌 이렇게 많은 책이 한 곳에 있는 걸 본 일이 있어?”

  다프넨은 여러 사람이 읽어서가 아니라 이리저리 던지고 놀다가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책들의 소박한 규모를 올려다보았다.

  바다처럼 넓은 벨노어 백작의 서재를 보았고, 한때 그 안에서 책을 읽으며 겨울을 보냈던 그였으므로 이 정도 책은 시골 사람의 개인서가 정도로도 보이지 않았다. 너덜거리는 표지에다가 들쭉날쭉하게 멋대로 꽂힌 책들 역시, 그가 읽었던 책들에 비해 얇기도 했고 제목도 단순하고 쉬웠다.

  벨노어 성의 서재를 떠올리자 이어 란지에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해졌다. 햇빛 좋은 창가에 걸터앉아 두터운 책장을 넘기고 있는 하늘빛 머리카락의 소년, 그의 나직한 목소리와 침착한 눈빛이 어제 본 듯 생생했다. 그만큼 인상 깊은 사람이었다. 이제 다시 볼 수는 없을 지도 모르는데. 바다를 건너고 평야와 산들을 넘어 아름다운 남부의 땅에서 그는 아직도 살아가고 있겠지.

  “뭘 생각해?”

  “아니.”

  리리오페가 궁금한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다프넨은 책장에서 책을 하나 꺼내서 넘겨보았다. 어린이들을 위한 전설 집 같은 것이었다. 동갑내기 독서 선생이 곁에 없으니 책들이 다 부질없어 보였다. 그는 책을 다시 꽂아 넣고 돌아섰다.

  오이지스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 나는......”

  버릇처럼 말을 더듬으며 그는 잠시 호흡을 지체했다. 다프넨은 무감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실제로 무감정했다. 거친 아이들의 협박에 굴해 불리한 증언을 했지만 그리 신경 쓰이는 일도 아니었다. 새로이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듯, 누군가를 딱히 미워할 기분도 나지 않았다.

  갑자기 리리오페가 끼어들어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넌 무슨 자격으로 얘한테 말을 거는 거니? 용기가 없으면 최소한 양심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정말 겁쟁이에다 형편없는 애라니까! 내가 무슨 일 때문에 너한테 이렇게 말하는지는 너 역시 잘 알고 있겠지?”

  용기가 없으면 양심도 지킬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다프넨이었다. 하지만 일말의 불쾌감 때문인지 연민은 들지 않았다. 

  오이지스는 모진 말을 듣고도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다 알고 있어...... 하지만...아니, 변명하지는 않을 거야. 난 이거밖에 안 돼... 정말로, 리리오페 말대로 겁쟁이고... 형편없어...... 미안하고... 차라리 날 실컷 때려 줬으면... 마음이 편하겠어......”

  그러나 리리오페는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네 마음 편해지라고 얘가 굳이 널 때리기까지 해야 한단 말이니? 무슨 그따위 소리가 다 있니? 생각하는 것마다 엉터리없어서... 너 같은 애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거 모르니? 매일같이 맞기만 하다 보니 아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오이지스는 리리오페가 하는 말을 모조리 곧이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반박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자기 비하에 익숙해 온 나머지 화를 낼 줄도 모르게 된 소년의 모습이었다.

  “너란 애는 도대체......”

  “그만해.”

  리리오페는 다프넨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말을 그쳤다. 그리고 새침하게 입가를 실룩이며 팔짱을 꼈다.

  다프넨은 오이지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으니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보다 구체적으로 말했다.

  “데시 사제님께서는 머리카락과 함께 지난 일들을 털어 버리라 하셨지. 내 짧아진 머리가 보이겠지? 내가 그 일에 더 이상 마음 쓰게 하지 마. 끝났으니까.”

  그는 돌아서서 교실을 나왔고 리리오페가 뒤를 따라왔다. 다프넨은 걸으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금 자신이 오이지스를 용서한 것인가, 아니면 사죄조차 차단해 버린 것인가.

  리리오페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9시에 작은 교실로 와. 소매의 사제, 페트라님한테 가면 스콜리 입학생을 위한 준비물들을 주실 거야. 그 분은 공회당 동쪽에 전나무 묘목이 많이 있는 집에 사셔. 어쨌든 학교에 오면 선생님들이 차례로 네 실력을 시험에 주실 거야. 대부분 읽고 쓸 줄 알면 별로 문제없는 시험이니까 걱정할 건 없고, 그나저나 너, 나우플리온 사제님하고 같이 살게 된 거지?”

  둘은 헤어졌다. 리리오페는 도로 스콜리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녀로서도 뭔가 생각에 잠길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 네가 대륙에서 온 다프넨 군이군? 그래, 그게 너로군?”

  몇 번째일까. 그가 섬으로 온 뒤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 온 적대적인 사람들이 또다시 한 명 늘어난 모양이었다. 그는 스콜리의 막대호신술 선생인 질이었다. 본래 이름은 질레보라고 했다.

  나우플리온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두 손을 넓혀 움켜쥔 막대를 양쪽으로 번갈아 움직여 어깨 근육을 풀면서 말없이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주위에는 여러 소년 소녀들이 비슷한 막대를 든 채 선생이 시킨 대로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스콜리의 뒤뜰이었다. 오후였다.

  “그러니까 네가 그, 훌륭하신 분의 제자라고? 그것도 섬에 들어와 이름도 받기 전에 말이야, 아주 파격적으로.”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막대호신술선생 질은 움직이던 팔을 멈췄다.

  “시험해 볼 필요가 있겠어? 보나마나 훌륭하겠지, 안 그런가? 그렇게 훌륭하신 분의 제자인데 대단하지 않다면 그것이 이상하겠지. 아참, 그러고 보니 어쩌면 나보다 더 나은 실력을 가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겠군?”

  그날 다프넨은 여러 명의 선생들로부터 기초적인 학습 능력을 시험받았다. 이드몬 선생이라는 사람은 그의 읽기 쓰기, 그리고 심지어 작문 실력조차도 그 또래들에 비해 뛰어나다고 말했고, 필로멜라 선생은 이 아이가 마법에는 전혀 지식이 없지만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제네시 선생조차 그가 보기보다 책과 친숙한 것에 놀랐다고 전해 주었다. 요즘 섬에서는 책을 읽는 아이를 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로 오게 된 곳이 이곳이었다. 다프넨은 말없이 질 선생을 올려다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한 마디라도 나우플리온을 비난하는 말을 한다면 바로 반박해 줄 참이었다.

  “보기나 하자고, 어디까지나 보기만 하는 거니까 그분께 감히 제자를 시험해 봤다고 화내시진 말라고 말씀드려라.”

  다프넨은 윈터러를 풀어 바닥에 놓고 막대를 잡았다. 그리고 세 발짝 떨어져 섰다. 질은 막대를 앞으로 내민 채 상대방을 놀리기라도 하듯 휘휘 젓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빠른 동작으로 그의 어깨를 찔렀다.

  정확히 받아내지 못하고 얼결에 피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반사적으로 손에 든 막대가 튀어나가고 말았다. 막대는 정확히 선생의 팔꿈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질 선생의 얼굴이 변했다.

  물론 막대는 날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베듯 휘두르는 것은 별로 쓸모가 없었다. 그제야 형과 목검을 휘두르던 때의 일을 떠올렸지만, 그때도 검의 대용으로 썼을 뿐 막대의 특징을 살려 사용하는 법을 익힌 것은 아니었다. 다프넨은 다시 물러섰다.

  선생은 팔을 빼더니 빠르게 세 번, 그의 얼굴 양쪽을 찔렀다. 모두 피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눈속임이었다. 상대가 혼란해진 틈을 타서 막대는 다프넨의 다리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얻어맞고 말았다. 긴 막대는 순식간에 거두어져 갔다.

  “저런, 그래서야 어디 내 코를 납작하게 하겠어?”

  선생의 코를 납작하게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럴 실력이 있다고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은근히 화가 치미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자, 이번엔 공격해 보라고!”

  다프넨은 막대의 중간쯤을 두 손으로 잡았다. 이렇게 긴 무기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선 전혀 몰랐지만 검이라면 얼마든지 써 본 자신이었다. 좌우 같은 길이가 된 막대의 양끝을 두 팔로 움직이는 것처럼 휘둘렀다. 그런 식으로 하다가 갑자기 한쪽을 빠르게 밀었다.

  그러나 질 선생은 이렇게 생긴 막대를 사용하는 법만 평생 연구해 온 사람이었다. 초보자의 응용공격쯤은 이미 다 간파하고 있었다. 막대는 봉쇄당하고, 이어 격파 당했다. 공격에 실패하자 자연 허점이 드러났다. 질 선생은 아주 경쾌한 동작으로 그의 허리를 내리치고 팔을 찍었다. 그리고 발을 쳐서 넘어뜨리려했다.

  그때 다프넨은 그냥 넘어져 주는 편이 좋다는 것을 깨닫고 일부러 바닥에 넘어졌다. 그러자 시점을 정확히 조절하지 못해 막대가 닿자 넘어진 꼴이 되고 말았다. 선생이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질 선생이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네가 뭔데 감히 지는 체 하려는 거냐!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널 이길 수 없기라도 하다는 거냐?”

  조금 전에 비꼬던 때와는 전혀 다른 말투였다. 다프넨은 다시 일어나서며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선생님을 이길 재간이 없습니다.”

  “허! 갈수록 건방지군, 봐주는 체 하지 마라. 너 같은 어린애한테 그런 취급이나 받을 정도로 허술한 실력을 가진 내가 아니다. 네가 나우플리온 사제님의 제자라고 해서 선생인 나보다 잘났을 줄 아느냐?”

  그런 말은 입 밖에 낸 일조차 없었다. 그제야 다프넨은 질 선생이 나우플리온에게 어떤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말끝마다 그의 일을 들먹이면서 상대를 화나게 하려다 점점 더 흥분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쪽이었다.

  “사제님께서는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어리고 실력이 없습니다.”

  “웃기지 말아! 이미 기고만장해서 나조차도 눈 아래 두지 않았느냐! 제대로 겨루어 볼 테냐? 내 앞에서 걸어서 나가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듣자 다프넨도 약간의 오기가 올랐다.

  “저도 익숙하지 않은 막대를 들고 선생님에게 이길 자신은 없습니다.”

  “뭐라고? 그럼 네가 검을 들면 날 이길 수 있단 말이냐? 어디 해 봐라, 검을 쥐고 내게 덤벼 봐! 나우플리온 사제한테 배운 그 잘난 실력으로 나를 눌러보란 말이다! 어디, 나도 검을 잡아 줄까?”

  그제야 말을 실수했다는 것을 느꼈지만 어떻게 돌이켜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질 선생은 당장 옆의 소년에게 창고로 가서 검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주위의 아이들은 어느새 연습을 멈추고 두 사람의 다툼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프넨의 처지를 동정하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단지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한 눈빛들에 불과했다.

  검을 든 질 선생은 다시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어서 검을 뽑아라!”

  “선생님과 싸우지 않겠어요.”

  “누구 마음대로! 그러면 나우플리온 사제의 실력이 나보다 못하다는 걸 인정할 테냐?”

  죽어도 그럴 수는 없었다. 다프넨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께서 제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우플리온 사제님과 실력을 겨루고 싶으시면 그 분과 만나시면 될 일이 아닌가요? 어떻게 어린 제가 선생님과 겨뤄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어리석어 좋은 가르침을 다 이해하지 못하니 실력이 모자란 것뿐입니다. 제 형편없는 실력을 놓고 나우플리온 사제님의 이름을 자꾸만 거론하지 마십시오.”

  그때 질 선생 옆으로 한 소년이 다가왔다.

  “선생님, 직접 어린 녀석과 상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이 훌륭하다는 것은 선생님께 배운 제가 증명하지요.”

  선생과 다프넨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헥토르가 거기에 서 있었다. 질 선생은 조금 놀란 듯하더니 곧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네가 내 명예를 위해 싸우겠다니 의외이긴 하다만, 그 말은 확실히 옳은 것 같군. 둘이 싸우면 누구의 가르침이 더 훌륭한지 알 수 있겠지.”

  보아하니 질 선생과 헥토르도 그다지 좋은 사이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다프넨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둘 다 똑같이 다프넨을 미워하고 있었다. 

  헥토르가 앞으로 나서더니 말했다.

  “자, 나하고 겨뤄 볼까. 검이 좋다면 검으로 해 보자고. 어서 네 검을 뽑아.”

  질 선생의 손에서 검을 넘겨받은 헥토르는 눈을 빛내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나 다프넨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이 검을 뽑을 수 없어. 내게도 연습용 검을 준다면 싸우겠다.”

  헥토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네 좋은 검을 쓰면 내가 다칠까봐 그러냐? 걱정할 거 없어. 난 네 손에 상처 하나 입지 않을 거니까.”

  나우플리온의 충고가 있은 후로 한 번도 뽑지 않았던 윈터러였다. 렘므에 있는 동안 윈터러 대신 얇은 소검을 차고 다녔지만 섬으로 오면서 팔아 버렸다. 검을 두 개나 갖고 있는 것이 공격적으로 보일까봐 그랬고, 또 이곳에 와서 그렇게 검을 휘두를 일이 빨리 생기리란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프넨은 고개를 저었다.

  “안돼. 이 검을 함부로 뽑을 수 없는 검이야. 다른 검을 주지 않으면 너와 싸우지 않겠어.”

  질 선생이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꼬마 녀석이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구는군! 저 녀석에게 연습용 검을 가져다 줘라!”

  헥토르가 비아냥거렸다.

  “흥, 실은 검의 상태가 아주 엉망인가보지? 매일숫돌에 가는 걸 게을리 해서 이가 다 빠진 고철 검인가?”

  그런 시시한 도발에 일일이 응할 생각은 없었다. 드디어 둘 다의 손에 연습용 검이 쥐어졌다. 그때 구경하던 아이들은 한쪽에 내려놓은 윈터러를 흘끔거리며 몹시 궁금해 하는 기색이었다.

  둘은 말없이 격돌했다.

  헥토르의 검이 먼저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다프넨보다 키가 클 뿐만 아니라 팔까지 상당히 긴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검은 똑같은 연습용 검이어서 길이는 물론 모양까지 거의 비슷했다. 다프넨은 평소 쓰던 것보다 검이 너무 가벼워서 오히려 불편함을 느꼈다. 움직이려 한 지점과 실제로 검이 휘둘러진 지점이 미묘하게 달랐다.

  다프넨의 검이 헥토르가 든 검의 자루 쪽을 쳤지만, 개의치 않고 내찌른 헥토르의 검이 다프넨의 이마를 살짝 그었다. 처음부터 머리를 다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오랜 실전 경험 때문에 다프넨은 당황하지 않았다. 물러나 곧장 재공격에 들어갔다.

  두 발짝 앞에서 방향을 틀며 왼쪽 허리를 찔러갔다.

  “어림없어!”

  헥토르가 희한한 동작으로 팔을 틀며 접근한 검을 쳐내 버렸다. 다프넨은 흠칫 놀랐다. 저런 자세로 이 정도의 위력을 낼 수 있다니, 도대체 어느 정도의 힘인 거지?

  당황한 틈을 타서 헥토르가 내민 검이 상박에 명중했다. 다행히도 왼팔이었다. 피가 옷을 적시며 번져나가는 것이 구경하는 아이들의 눈에도 보였다. 

  보통의 소년이라면 이 정도 상처에도 놀라 움츠러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다프넨은 달랐다. 위기를 느낀 순간 오히려 놓친 반 박자를 되찾아 기세 좋게 달려가며 내리그었다. 촤악, 핏줄기가 튀며 헥토르의 오른쪽 어깨 부분의 옷이 찢어져 너덜거렸다. 한 번씩 주고받은 셈이 되었지만 아직 서로의 실력을 알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어머나, 어찌 된 거야? 두 사람 실력이 비슷한가 보네?”

  목소리가 크지 않았는데도 헥토르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것은 리리오페의 목소리였다.

  “헥토르 오빠는 다프넨보다 두 살이나 많은데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동생 하나 쉽게 못 이기는 거야?”

  “......”

  리리오페의 말에는 다분히 감정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코에 갖다대며 짓궂게 말을 이었다.

  “그럼 앞으로 2년 더 있으면 다프넨이 오빠보다 더 나을 지도 모르겠네?”

  그 순간, 헥토르의 검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깊숙이 찔러져 들어왔다. 상대를 단숨에 제압하려는, 방어는 완전히 무시하다시피 한 공격이었다.

  “!”

  다프넨은 한 발짝 물러남과 동시에 춤추듯 날쌔게 어깨를 틀어 피하며 상대의 검을 밀어 쳤다. 그러면서 다리를 들어 무릎을 걷어차 버렸다. 상대의 검을 밀쳐내자마자 당장 베기로 들어갔다. 기회를 잡은 이상, 무자비하다 싶을 정도로 몰아쳐 상대를 단숨에 누르는 것이야말로 모든 실전의 기본이었다. 대련보다는 실전에 익숙한 다프넨은 바로 그대로 행동했다.

  거칠 것 없는 검이 헥토르의 눈가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망설임조차 느끼지 못한 그였다.

  “그만둬!”

  다른 목소리였다면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우플리온의 목소리였다. 다프넨의 검이 멈췄다. 바로 헥토르의 얼굴을 긋기 직전이었다.

  나우플리온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다프넨의 팔을 움켜잡으며 질 선생에게 소리쳤다.

  “아니, 졸업도 하지 않은 아이들끼리 실검으로 대결하게 하다니, 정신 나갔나! 왜 스콜리에서 막대호신술만 가르치게 하는지 잊었단 말인가?”

  정신을 차린 헥토르는 이마와 등줄기에서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꼈다. 좀 전에는 모든 진행이 너무나 빨라 당황할 틈조차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딱 멈추는 검 날을 보았을 때는, 정말로 세상 전부가 멎었다가 다시 돌기 시작한 듯한 느낌이었다.

  다프넨도 그제야 자신이 상대를 죽일 뻔했다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충격을 받았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그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었는데, 게다가 손에 든 검이 윈터러도 아닌데 왜 그 순간 그렇게 살기에 익숙한 듯 행동했던 것일까?

  “내... 수업에 참견하지 마.”

  보아하니 질 선생과 나우플리온은 서로 반말을 하는 사이였다. 나우플리온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방금 한 아이가 죽을 뻔하지 않았나! 선생이란 자가 그런 것을 막지 않고서 무얼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지?”

  “너, 너는......”

  질 선생은 불쾌감으로 온 몸을 떨고 있었다. 헥토르가 다칠 뻔했다거나, 다프넨이 살인을 저지를 뻔했다는 일 따위에 대해선 애초에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다. 

  “넌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이 없어! 평생을 참회해도 모자랄 죄인인 주제에...너, 넌 여기 들어와 수업에 끼어들 수 없어. 넌 스콜리에 들어올 수도 없어, 넌, 넌, 이 섬에 있을 자격도 없어!”

  다들 나우플리온이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이는 선생에게 크게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우플리온은 입술을 꾹 다물더니 다프넨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만 나가자. 저 자의 수업을 받지 마라.”

  그러나 실 선생은 아무도 그 까닭을 모르는 격분에 사로잡혀 중풍 환자처럼 떨고 있었다. 나우플리온의 모습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폭발해 버린 것 같았다. 돌아선 상대의 뒤통수에 대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질렀다.

  “왜 돌아왔지? 그래도 대륙에서 떠돌이처럼 살다가 죽어버릴 것이지! 섬사람들이 다 너를 환영할 줄 알았나? 어림없는 소리,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비겁자 나우플리온! 네가 양심이 있다면 감히 이솔렛의 얼굴을 마주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우플리온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모든 아이들의 시선을 등 뒤로 받으며 그 자리를 떴다.

  다프넨은 스승을 따라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헥토르의 얼굴을 살피려 했다. 그러나 먼저 들어온 것은 리리오페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큰일을 당할 뻔한 헥토르는 아랑곳도 않고, 오른손 손바닥을 쫙 펴서 든 채 눈동자만을 굴려 그에게 인사를 보냈다.

3. 산 위의 공주, 산 아래의 공주

  지금까지 함께 지내오면서 나우플리온이 결코 대답하지 않는 화제가 한 가지 있었다.

  그들은 렘므에서 재회했을 당시, 나우플리온은 제사용 마법단도인 루네트를 이용해서 섬의 모습을 보여 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솔렛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를 보았었다. 

  다음날쯤 되어 그는 그 소녀가 누구냐고 넌지시 물어 보았다. 누이 동생일까, 생각해 봤지만 전혀 닮은 얼굴이 아니었다.

  “글쎄 말이다.”

  나우플리온이 대꾸하기 싫은 일을 은근슬쩍 넘기려 할 때 종종 하곤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그렇게 넘어갔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인가 가족에 대해 서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고향과 진네만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와 삼촌 사이에 얽힌 오랜 애증, 고모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예프넨의 죽음에 대한 것까지.

  그런 다음 나우플리온의 가족에 대한 것을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나우플리온에게는 마땅한 가족이 없었다. 부모를 일찍 잃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식을 낳고서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떴다고 했다. 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섬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이름을 지어 준 전임 지팡이의 사제는 그를 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다. 그 전임 사제는 현재 지팡이의 사제를 맡고 있는 데시의 친아버지였다.

  그때 다시 한 번 이솔렛에 대한 것을 물어보았지만 나우플리온은 또다시 함구했다. 그녀에 관한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섬으로 오고 드디어 이솔렛에 대한 것을 물어보았을 때, 다프넨은 첫눈에 그녀에게서 묘한 충격을 느꼈다. 아름다워서? 아니다, 그것조차 사소한 특징에 불과할 정도로 그녀에게는 어떤 특별한 것이 천분처럼 주어져 있었다. 가장 먼저, 온 몸에 감도는 비인간적인 싸늘함에서부터.

  얼음 조각처럼 고운 얼굴과 검사답게 균형 잡힌 단단한 몸매는 분명 대조적이었으나, 살아가는 데 남의 도움 따위 필요 없다는 오만한 자태만은 어느 쪽이든 똑같았다. 목소리는 여성치고는 약간 낮은 저음에 풍부한 울림이 깃들여 종종 낯설게까지 느껴지는 허스키로 변했다.

  이 섬에 와서 모든 것이 낯설었고 모든 사람이 그와 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