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권. 1장 Never Eyes (7/21)

제목 : 룬의 아이들-윈터러

지은이 : 전민희

펴낸이 : 서인석

출판사 : 제우미디어

출판년도 : 초판발행 2001년 10월 17일

          초판 5쇄 인쇄 2002년 12월 8일

저자소개 : 전민희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역사와 문학, 신화            등을 비롯하여 최근 철학의 신조류까지 섭렵한 지식 광이며, 판타지 동화에서 남            미 환상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판타지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연구원을 거쳐 1999년 출간한 장편 판타지 소설             [세월의 돌]은 통신 연재사상 전설적인 400만회의 조회수와 더불어 전국 판타지            독자들의 입문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4대 통신망과 유명한 인터넷 커뮤니티들마            다 작가의 팬클럽이 빠짐없이 결성되어 있으며, 현재 (주)이삭커뮤니케이션에서             <아룬드 온라인>이라는 이름의 3D 온라인 게임으로 제작중이다. 또한 [세월의             돌]은 총 5부작으로 예정된 <아룬드 연대기>의 3부로서, 1부 격인 [태양의 탑]이            이듬해 출간되었다.

          (주)소프트맥스의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 <4leaf>의 제작에 참여, 배경세계와             스코리, 캐릭터 설정을 담당하였으며, 곧 출시될 온라인 게임 <테일즈 위버>에서            도 동일한 설정을 사용하게 된다. 현재 100만 명에 육박하는 회원들이 이용하고            있는 <4leaf>의 아바타 캐릭터들이 직접 등장하여 지금까지 감춰졌던 이야기들            을 펼치게 될 연작 소설 시리즈가 바로 [룬의 아이들]이며, 그 가운데 [룬의 아이            들-윈터러]는 첫 번째로 공개되는 매력적인 비밀이 될 것이다.

          작가 전민희 홈페이지 www.fairytale.pe.kr

          [룬의 아이들-윈터러]홈페이지 www.jeumedia.com

          (주)소프트맥스의 <4leaf>홈페이지 www.4leaf.co.kr

차례 : 1장 Never Eyes

           1. 겨울 땅의 헤베티카

           2. 그 상처의 약

           3. 썰물섬

           4. 자신을 모르는 자

           5. Will You Remember?

       2장 Sever Nights

           1. 월계수 자라던 나라

           2. 적대자들

           3. 산 위의 공주, 산 아래의 공주

           4. 윈터바텀 킷

       3장 Ever Rose

           1. 마법의 계단

           2. 두 가지의 음모

           3. 그림자 도시와 죽은 자의 오벨리스크

1장 Never Eyes

1. 겨울 땅의 헤베티카

  트라바체스의 가을은 빨랐다.

  파랗게 타던 밤하늘이 8월 중순경부터 점차 서늘한 어둠으로 바뀌어갔다. 새벽녘, 아직까지도 여름의 열에 들뜬 청색 밤이 희뿌옇게 흐려져 갈 무렵 트라바체스의 수도 곤의 어느 저택에서는 아기 하나가 태어났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아기의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높은 사람의 명을 받고 한 달 전부터 다른 나라에 가 있었다. 아기가 태어날 때가 다된 터라 맞추어 돌아오기로 한 것인데, 아기는 예상보다 두 달이나 일찍 태어나 버렸다. 그래서 아기 아버지가 돌아온 것은 아기가 태어나고도 두 달이 흐른 뒤가 되었다.

  그러나 아기는 저택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사랑과 축복을 듬뿍 받았다. 첫 아기였고, 모두가 기대하던 아이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저택의 주인을 모시는 사람들은 이 아기가 점차 자라나면서 아기 아버지의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 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도 부디 여자아이이기를. 아기 어머니조차도 아직 그 마음의 벽을 미처 허물지 못한 남편이지만, 사랑스런 딸의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태어난 아기는 상냥한 눈동자를 가진 딸이었다.

  아직 채 자라지도 않은 금빛 머리털과 꼭 같은 빛깔의 눈동자가 자못 어른이라도 된 듯 깊었고, 또한 고요했다. 그러나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태어나서인지 아기는 몸이 약했다. 아기 아버지가 섬기는 사람이 친히 보내 준 몇 명의 의사들과 치유술사들이 한 달 내내 붙어 있는 가운데도 몇 번이나 어려운 고비를 넘겼고, 이제 곧 죽지 않을까 생각한 날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아기는 살아났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려는 것처럼, 매일 그칠 날이 없던 아기 어머니의 눈물도 멈추게 하고, 곧 돌아오마. 편지한 아기 아버지의 기대도 저버리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부터인가 언제 그랬냐는 듯 건강해져서 잘 먹고, 잘 자게 되었다. 그 후로도 아기는 언제고 사람들이 바라는 일을 쉽사리 고개 돌려 저버리지 못하는 소녀로 자랐다. 여러 사람이 눈물 흘려 기원한 기적을 몇 번이고 일으키면서, 애써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치지 못해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깥 햇빛을 보던 날,  작은 새처럼 푹신한 아기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정원 안뜰에 나와 있었다. 워낙 얌전해서 칭얼댈 줄도 모르는 아기였다. 세상 모든 평화를 다 기진 듯 편안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아기 어머니 앞으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저택의 주인이 먼 곳에서 데려왔다는 말 없는 집사였다.

  아직까지 저택의 다른 사람들과 어떤 구체적인 교류도 가지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비운 이 저택을 대신 책임질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는 남자였다. 아기 어머니는 그를 약간 무서워했다. 남편이 없는 가운데서도 모든 일을 빈틈없이 처리해 주었지만 마음을 터놓고 의론하기에는 지나치게 차갑고 음울한 사람이었다.

  아기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이 평화를 느낄 줄 아는 것처럼 햇빛내리는 정원에 가만히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잠시 아기를 들여다보던 집시는 이윽고 전에 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기가 죽은 고모를 닮았군요.”

  아기의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아직껏 이름이 없던 작은 소녀의 이름은 예니가 되었다.

  렘므의 12월은 혹독했다.

  땅이 얼어 서리가 바삭바삭 밟히는 들판을 두 사람이 질러 걷고 있었다. 엇비슷해 보이는 검은 로브 차림이었지만 키가 작은 쪽이 입은 것은 후드 달린 망토에 가까웠다. 언뜻 아버지와 아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좀더 친구 같았고, 그렇다고 동료로 보기에는 나이 차이가 너무 났다. 그러나 둘의 걸음은 가벼웠고 이날의 추위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거 같았다.

  갑자기 나이든 남자 쪽이 소년을 내려다보더니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소년 쪽에서도 즉시 응답해 왔다.

  “당신도요.”

  소년의 목소리도 추위에 언 듯 발음이 불명확했다. 둘은 서로를 향해 오기와 장난기가 뒤섞인 눈짓을 하더니 다시 기운차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하늘은 눈이라도 내릴 듯 누르스름하게 변했다. 서로의 얼굴까지 노랗게 보일 정도로 흐린 날이었다. 잠시 후 눈발이 가늘게 날리기 시작했다.

  매운바람 탓에 두 뺨이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얼었다. 그런데도 둘은 걸음을 멈추기는커녕 한층 빨리 걷기 시작하고 있었다. 서리 깔린 마른 들판은 끝날 줄을 몰랐고, 낮의 빛은 빠르게 졌다. 노숙할 만한 날씨는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달리기 경주라도 하듯 속도를 올리기만 하던 그들은 결국 본의 아니게 멈출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강이군.”

  가까워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멈추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걸음을 늦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어붙은 강 앞에 도착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다시 키 큰 남자 쪽이 소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건너갈 테냐?"

  소년은 미소 지으려 했지만 얼굴이 너무 얼어서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냥 짧게 대답했다.

  “당신이 간다면.”

  “흥, 고집 부리긴.”

  얼음 위로 올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강폭은 대략 20미터가랑, 그리 넓은 강은 아니었지만 얼마나 깊을지는 짐작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얼음이 얼마나 단단히 얼었는지도. 그러나 최근 며칠간 몰아닥쳤던 혹한을 생각할 때 그리 쉽게 부서질 염려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의 유속 때문이었단, 아니면 오전 내내 내리쬐었던 햇빛 때문이었든.

  “보리스!”

  먼저 알아챈 것은 어른 쪽이었다. 앞질러 걷고 있던 소년이 강 중심부로 접어들자마자 얼음판 곳곳에서 얇은 금이 생기기 시작하다가 급기야 찌익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다행히 큰 얼음 조각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 여파로 주위의 얼음들이 죄다 부서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오히려 소리친 사람 쪽이 위험했다. 날카로운 금이 곧장 번져 그의 발밑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도 위급한 상황이 되면 저절로 튀어나오는 이름이었다. 다가오려던 남지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다가 갑자기 몸을 솟구쳐 눈앞의 부서진 얼음 하나를 딛고 순식간에 소년이 선 얼음 위에 도달했다.

  그러나 미처 소년의 손을 잡기도 전에, 그가 내려선 충격으로 또다시 얼음을 두 조각으로 갈라져 버렸다. 얼음 아래 빠르게 흐르는 물살이 얼음들을 계속 하류로 밀고 있었다. 그가 탄 얼음이 뒤쪽의 얼음에 부딪치는 순간, 소년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져 넘어졌다. 무게가 한쪽으로 쏠리자 얼음이 기울어지며 물 속으로 밀려들어가고, 소년의 몸도 동시에 빠져버렸다.

  닿는 순간 온 몸이 바싹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다.

  “이런! 안되겠다!”

  소년의 머리는 물에 잠겨 이미 보이지 않은 상태였다. 몸이 자칫 얼음 아래로 흘러갔다가는 얼어 죽기 전에 먼저 숨이 막혀 정신을 잃게 될 것이 뻔했다. 약하게 남은 햇빛 아래 시커먼 강물만이 번쩍거렸다. 다른 대안을 생각해 내지 못한 남자는 앞 뒤 가릴 것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려 했다.

  “푸후, 헙......”

  소년의 머리가 순간적으로 잠시 떠올랐다. 이 아이가 수영을 할 줄 알던가? 더 판단할 겨를도 없이 남자는 얼음 위에 엎드린 채 손을 내밀어 소년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힘껏 앞으로 끌어당겼다.

  “......”

  잠깐 사이에 소년의 몸은 흡사 얼린 생선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놀라운 힘으로 상반신을 잡아 올려 숨을 쉬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런 자세로는 더 이상 끌어올릴 재간이 없었다. 자칫 힘을 주었다가는 그가 몸을 의지한 얼음도 부서져버릴 터였다.

  “전...괜찮...아요......”

  그러나 순식간에 얼어버린 다리는 이미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눈앞에는 그를 붙잡은 사람의 안타까운 눈동자가 보였다. 어떻게든 팔을 움직여 얼음 덩어리를 부여잡아보려 해도 이미 제대로 말을 닫지 않는 몸이었다.

  죽는 건가......

  소년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약한 불씨처럼 떠올라 깜빡일 무렵이었다.

  어딘가에서 낯선 목소리가 외치는 것을 들은 것 같았다. 혹시 꿈이나, 착각은 아닐까?

  그러나 그 목소리는 점차 명확해져서 물 밖의 남자나 물 속의 소년 모두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억양이 특이한 전형적인 렘므 사투리였다.

  “거기서 뭣들 하신가요? 이 추운 겨울에 목욕이라도 한다는 거다요?”

  얼음에 엎드린 남자가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니 건너편 기슭에서 농민으로 보이는 세 명의 남자와 한 여자가 그들을 보며 쑥덕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외친 사람은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런데 이 급박한 상황에 그들은 킬킬대며 웃어대고 있지 않은가!

  소년을 잡고 있던 남자는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거기서 웃고만 있을 겁니까!”

  “죽긴 누가 죽는다고 그러요! 거, 그려, 당신도 접시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쪽요?”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소년은 오그렸던 발을 내려 물 바닥을 더듬어 보았다. 다리에 느낌이 없어서 얼른 알 수는 없었지만, 물이 가슴 언저리까지 올라올 즈음 발을 더 내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래는 단단한 바닥이었다.

  “......”

  함께 서 있던 여자가 웃고 있는 남자들을 향해 눈을 흘기더니 말했다. 

  “영문 모르는 사람들을 놀리니 재밌나요? 노닥대는 동안 어린애는 동상에 걸려요!”

  여자는 양털로 짠 두툼한 긴치마 차림에 2미터도 넘는 장대를 짚고서 있었는데 놀랍게도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다짜고짜 얼음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장대를 물 바닥에 박아 넣으며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띄우는 방식으로 몇 번 만에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녀가 얼음에 내려서는 것이 어찌나 가벼운지 아까 사내가 한 방식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멍해있는 동안 여자는 막대에 몸을 의지한 채 아이에게 손을 내밀더니 말했다. 

  “꽉 잡고, 바닥을 힘껏 차는 거라.”

  순식간이었다. 여자가 셋, 하고 구령을 붙이더니 단숨에 소년을 물에서 글어내어 얼음 위에 내려놓아 주었다. 소년은 착지가 서툴러서 금세 얼음이 다시 갈라졌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 또다시 들어올려졌다. 여자는 장대 하나만 가졌으면서도 흡사 튼튼하게 솟은 나무에 매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능숙한 솜씨로 소년을 강기슭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아...후......”

  당장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온 몸이 젖어서 떨고 있는 소년을 본 여자는 옆에 있는 남자 한 명의 망토를 냉큼 빼앗아서 소년의 몸에 둘러 주었다. 망토를 빼앗긴 남자는 항의도 하지 않은 채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할 일을 다 한 여자는 막대를 휘둘러 물기를 탁탁 털더니 아직까지도 얼음 위에 엎드린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한 마디 던졌다.

  “어른은 혼자 나와.”

  농부들은 그들을 기꺼이 초대해 주었다. 최초의 멍청한 짓거리를 해서 그들을 즐겁게 한 것이 오히려 호감을 주게 된 것 같았다. 렘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외지 사람에게 배타적이었으나 어느 순간 기분이 나면 갑자기 한정 없이 친절해지는 기질의 소유자들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잠자리와 저녁 식사는 물론이고 물에 빠진 소년을 위해 데운 목욕물까지 준비해 주는 놀라운 친절을 발휘했다.

  물론 다음날 아침 이실더 산과 보리스 진네만은 그게 공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둘이 얼굴을 보고 고개를 돌리며 키득거리는 상황이 속출했다. 말하자면 구경거리를 제공한 대가였달 까. 물론 아이의 키  보다도 얕은 강에 빠져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양 심각하게 군 걸 생각하면 본인들도 그리 좋은 기분만은 아니었다.

  “널 만난 후로 나까지 덩달아 자꾸 바보짓을 해대게 된 기분이 든단 말이야.”

  보리스는 말없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철없는 소리를 곧잘 지껄이는 것은 이실더의 버릇이자 매력이기도 했다.

  둘은 대략 이틀 동안 누가 더 쉬지 않고 추위 속을 오래 걸을 수 있나 내기를 했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어쩌다 그런 걸 하게 된 건지도 모를 노릇이었지만 어쨌든, 그 내기가 아니었더라면 얼어붙은 강을 그렇게 무식하게 건너려 하는 일 역시 없었을 터였다.

  전날 밤새 쉬지 않고 걸었고, 다시 다음날 낮 내내 계속해서 불도 한 번 피우지 않고 걸어왔다. 물에 빠진 것은 고사하고 귀나 손 따위가 동상에 걸리지 않은 것만도 천행이었다. 님 반도 중에서도 북 드라켄즈 산맥 동쪽 지방에서 12월에 그런 일을 벌였다는 소릴 했다간 렘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바보취급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보리스는 얇게 흩날리는 눈발을 보다가 작게 말했다.

  “어쨌든 제가 졌네요.”

  갑자기 이실더는 발끈한 목소리고 외쳤다.

  “이 자식아, 내가 태어나 살던 곳은 사철 녹지 않는 눈이 골짜기마다 쌓인 곳이란 말이야! 난 그 눈 속에서 뒹굴며 자랐어. 웬만한 추위는 내 적수가 못 된다고! 처음부터 성립될 수도 없는 내기였단 말이야.”

  보리스는 약간 고개를 올리며 씩 웃었다.

  “그래도 다행히 무사했죠?”

  “......”

  이실더가 흥분한 것은 어린 녀석의 고집을 꺾으려다가 어른인 자신조차 이성적이지 못한 짓을 했던 것에 대한 약간의 자학이었다. 비록 웃긴 짓거리가 되긴 했지만 보리스가 물에 빠졌던 당시는 정말 진심으로 그의 생명을 걱정하고 자신의 경솔함을 탓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른치고는 천진한 사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곧 이런 문제를 일으키고 만 괘씸한 꼬마 녀석을 어떻게 혼내 줄 방법이 없나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래 , 접시 물에서 헤엄친 소감은?”

  장대를 든 여자와 다른 남자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부락 중앙에는 모닥불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주위에서 몇 명의 사내들이 양철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오전부터 술이라니, 역시 강추위를 자랑하는 고장의 풍습답다 싶었다.

  이실더가 약간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거, 멋대로 깨져버리는 접시 뚜껑이라니 이름 높은 렘므의 추위도 예전 같진 않군 그래.”

  “렘므 사람이라고 죽으란 법 있겠어. 버림받은 땅에도 은총이 좀 내리려나 보지.”

  여자는 렘므 사투리가 아니라 이들에게 익숙한 남부 말씨로 단정하게 말하며 다가와 섰다. 두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잠시 키 큰 상대방을 올려다보고 있더니 이윽고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당신, 어쩐지 처음 보는 사람 같지가 않은데?”

  “잘 봤어.”

  대수롭잖게 대꾸해 놓고 더해지는 설명이 없었다. 보리스는 이실더가 말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여자는 계속해서 의심스런 눈초리로 상대를 구석구석 살펴봤다.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몇 년 전인가, 여기 온 적이 있어. 분명. 당신 이름은 뭐야?”

  “이실더, 이실더 산.”

  “그런 이름은 아니었는데.”

  “그럼 우리 형이 왔었나?”

  예의 태평스런 말투로 아무렇게나 말해버리는 걸 보며 보리스는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곧 이실더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당신 이름도 말해야지.”

  여자는 장대를 고쳐 쥐며 약간 위협하는 듯한 자세로 대꾸했다.

  “헤베티카.”

  “오, 성도 없는 여자치고는 우아한 이름이잖아?”

  헤베티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긴장대로 맞은편 손바닥을 탁탁 때리면서 무표정하게 말했다.

  “지금 들은 내 이름이 당신에게 뭘 요구하고 있는지 모르나? 당신, 야만족 출신이야? 아니면 그쪽도 몇 대 맞지 않으면 얌전해지지 않는 남자인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하는 말치고는 발끈할 정도로 거친데도 이실더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야만족이라니, 그런 뜻밖의 말씀을, 당신 이복오빠가 들으면 섭섭해 하겠는걸.”

  헤베티카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눈썹을 찌푸린 채 그녀가 말했다.

  “그 사름을 알아? 지금 어디에 있지?”

  “이봐, 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잖나? 설마 날 정말로 야만족으로 보는 거야? 단지 소문을 들었을 뿐이라고, 게다가 당신을 보니까 마침 딱 닮은 것 같기도 해서 말이야.”

  “닮다니, 지금 말 다 했어?”

  헤베티카와 함께 온 남자가 히죽 웃더니 말했다.

  “헤베티카는 열 살 때부터 노 젓기로 잔뼈가 굵은 여자라. 할머니 때부터 뱃사공인 집안이다니. 장대 다루는 솜씨는 근방에서 당할 자가 없다라. 아가씨라고 얕보았다간 큰코다치니 조심하게라.”

  “그래? 역시 노 젓기로는 당할 수 없겠는걸. 내가 진 걸로 하지. 음 훗훗.”

  여자는 <누가 노 젓기 내기라도 하자고 그랬냐>는 듯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실더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실더는 이어 계속 말했다.

  “당신도 성 하나 만들어서 그냥 붙여. 이름이 아깝네. 헤베티카 카잔니스는 어때? 헤베티카 알츠로즈도 나쁘지 않고, 헤베티카 솔론도 괜찮은데?”

  “어이, 당신, 그렇게 자꾸 장난하다가는 정말로 한 대 맞는 다라!”

  헤베티카는 유난히 하얀 얼굴에 길게 기른 흑갈색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이십대 후반의 여자였다. 옆의 남자가 짓궂게 경고하는 가운데 그녀는 장대를 고쳐 쥐었다가 다시 반대쪽 손으로 옮기고, 또다시 다른 손으로 꼬나 쥐었다가 이윽고 내렸다. 그리고 한쪽 입술을 약간 말아 올리면서 말했다.

  “이제 기억이 났어. 4년 전쯤인가, 아마도. 생각보다 오래됐네. 데칸 야만족들이 쳐들어왔을 때 별로 도와주겠다는 말도 없이 멋대로 끼여서 싸우고는 사라졌던 그 사람, 맞지? 그래서 우리 오빠를 알고 있는 거로군?”

  이실더는 생각에 잠긴 체 하면서 말했다.

  “아, 그래. 우리 형이 아니라면 역시 나일 거라니까.”

  헤베티카는 다시 손에 든 장대를 바닥에 탁탁 찍으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도와줘서 감사하다는 말이 그렇게나 듣기 싫어?”

  이실더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이어 나온 대답을 들은 여자는 약간 얼굴색이 변했다.

  “새삼스럽게 예전의 은혜를 생각해내서 화제 삼는 사람은 흔히 2차의 용건을 가지고 있더라고.”

  여자는 잠시 입술을 비죽거리며 장대만 매만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심한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래, 바로 맞췄어. 용건이 있지.”

  “한 문장으로 줄여서 말해 봐.”

  “그때처럼 다시 협조해 줘.”

  “날더러 싸우라고?”

  이실더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두 손을 펴서 들어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난 이제 늙어서 그런 건 못해. 뭐 다른 용건은 없어? 내년 파종을 위해서 땅을 갈아엎어 달라던가, 묵은 포도주가 처치 곤란이니 좀 먹어 없애 달라던가, 그런 거라면 기꺼이 도와줄 텐데.”

  헤베티카는 갑자기 희한한 표정으로 웃더니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일이야. 열심히 해 준다면 묵은 포도주쯤은 실컷 줄게.”

  “오, 그래? 먹고 남는 것은 좀 싸 갖고 가도 되겠지?”

  정말로 일의 내용을 다 물어보지도 않은 채 이실더는 그녀의 제안을 간단히 수락해 버렸다. 헤베티카는 손가락을 들어 북쪽으로 솟은 언덕배기를 가리키며 내일 아침 일찍 저리로 나오라고 말했다.

  이실더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 자리를 떠나자 보리스는 뒤따라가며 물었다.

  “정말로 형이 있어요?”

  “음, 없지 않다면 있는 거겠지.”

  보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있지 않다면 없단 뜻이군요.”

  해양성 기후인 님 반도에서도 내륙 지방의 겨울은 맑고 사늘했다. 북쪽 하늘 지평선 언저리에 두텁게 쌓인 회색 구름층이 있었고, 그 위로 뭉게구름 몇 조각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이실더와 보리스는 헤베티카와 약속한 언덕에 미리 도착해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리스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이실더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뇌까려 보았다.

  “야만족이라고?”

  “그래, 내가 전에 벨노어 성에 있을 때 해준 얘기 생각 안 나냐?”

  독백하는 듯한 분위기와 딴판으로 이실더는 바로 옆에 선 채 묵은 포도주 한 병을 따느라 애쓰고 있었다. 흡사 달려오는 군마가 일으킨 흙먼지처럼 보이는 회색 구름을 불안한 듯 바라보던 보리스가 다시 말했다.

  “생각납니다. 야만족과 공주에 대한 이야기였죠.”

  “그래. 그때 렘므 사람들과 야만족들 사이의 묘한 공생관계에 대해 설명해 준 일이 있지? 한때 원수처럼 싸웠지만 지금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 가면서, 서로 좋아하진 않지만 때로는 돕기도 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고. 지금 일도 그런 상황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지. 어쨌든 간에 이번 일은 간단한 것이고, 신세도 졌고 하니 헤베티카를 지켜 줘야 갰지.”

  처음에 보리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를 지킨다고요?”

  “아냐, 아냐.”

  이실더는 머리를 젓더니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하는 표정이 되었다.

  “헤베티카라는건 사람 이름이기 전에 뜻이 있는 단어인데 말이야, 옛 렘므 말로 <예의>와 비슷한 뜻이랄까, 아니, 예의하고는 조금 다를 수도 있는데...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 땅의 오랜 풍습을 따른다>에 가깝겠다. 그런 뜻이야. 그녀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고.”

  보리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사람에게 그런 이름을 붙이죠?”

  “그것도 그냥 풍습이야. 부락 안에서 몇몇 사람에게 어떤 특별한 이름을 물려받게 하는 거지. 그들이 부락 안에 존재함으로써 그 단어, 또는 의미가 대대로 잊혀지지 않도록 하려고 말이야. 헤베티카라는 이름은 외지인들의 출입이 잦은 지역의 부락에서 흔히 발견되지. 바로 외지인들에게 헤베티카를 강조하여 지키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것 말고도 있어. <림사르>라고 하면 <싸움에서 항상 선두에 선다>는 의미가 있지. 주로 이민족들과 오랫동안 투쟁해 온 부락에서 이어져 오는 이름이야. 큰 강을 끼고 있는 마을에는 흔히 <코로누스>가 있어. 그건, 음...<치수자>라는 의미랄까. 물이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미니 잘 다스려 놓으라는 얘기지.”

  보리스는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당신은 모르는 게 없네요.”

  “그럼, 모르는 거 빼고는 다 아는 거야.”

  보리스는 그의 버릇이다시피 한 기고만장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야만족이 렘므 인의 부락을 공격하죠? 방금 선생님...아니, 당신이 말하기로 야만족은 렘므 인과 공생한다면서요? 서로 도우면서 국경을...”

  “그래, 그래. 하지만 그건 렘므 왕국과 야만족 전체, 이렇게 크게 보았을 때 그렇다는 거고 작은 단위로는 항상 다툼이 있기 마련이지. 두 집의 아들들끼리 동네에서 몇 번 치고 박고했다고 집안끼리 원수가 되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런 싸움에서 운이 없어 한쪽이 전멸한다 해도 렘므 왕국도, 야만족의 족장도 별달리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일부러라도.”

  잠시 후 이실더는 흐음, 하더니 말을 정정했다.

  “야만족의 족장은 조금 다를 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그들은 렘므 왕가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무리니까. 아마도 무모하게 행동한 저들의 일족에 대해 화를 내겠지. 어리석은 자라면 반격을 원하는 자들을 지원해서 결국 렘므 왕가의 공식 병력을 움직이게 할 거고 말이다. 뭐, 하지만 이번 일은 그리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 것 같지는 않다. 얘기를 들어보니 단순히 옥수수 경작지 다툼이 있는 것 같으니까. 하여간 아옹다옹 거리는 이웃사촌 같은 사이라니까.”

  조각난 구름들이 점차 넓게 퍼지며 번져나가고 있었다. 하늘은 얼어붙은 푸른색이었고 태양은 구름 뒤에 가려져 있었다. 보기 드문 장관의 새벽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헤베티카>를 지키려면 어느 정도로 그들을 도와야 하나요? 그 <림사르>처럼 맨 앞에 서서 달려가야 되나요?”

  이실더는 혀를 내밀면서 고개를 저어 보였다.

  “몰라. 내키는 대로 해버리라고.”

  보리스는 자못 어른 같은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지평선의 구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죽이는 건 싫거든요.”

  놓치지 않고 이실더의 주먹이 날아와 보리스의 이마를 쿡 쥐어박았다.

  “나도 싫어, 이 녀석아!”

  둘은 고개를 돌려 코를 맞댄 채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벨노어 성을 떠나자 그다지 자라지 않게 된 보리스의 키는 이제 167센티, 닥 이실더의 목 언저리에 닿는 키였다. 둘은 비슷한 얼굴로 뺨을 부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하지만 멋지게라고.”

  “남의 나라 예의 지키는 법을 배우러 가는군요.”

  이럴 때의 둘은 영락없는 <친구>였다. 보리스는 그가 좋았다. 

  진심으로 그가 좋았다.

  그가 떠나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 가볼까?”

  그건 둘만의 구령 비슷한 것이었다. 몽둥이를 꼬나든 마을 사람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아우성 비슷한 내용 모를 외침을 울리며 앞 다투어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뒤로 처진 사람들이 달려오다가 그들의 등을 퍽퍽 치고 지나갔다. 혼란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들은 묘한 동료의식으로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보리스는 어깨 너머를 슬쩍 넘어다보며 말을 건넸다. 이실더는 아까 애써 뚜껑을 딴 포도주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있었다.

  “포도주씩이나 받고 하는 일 치고 너무 뒤쪽에 처져 있는 것 같은데요.”

  “걱정 마. 묵은 포도주니까. 넌 자칫 검을 뽑지 않도록 조심하기나해.”

  “설마 그 정도 일이야 있겠어요?”

  윈터러(Winterer)이야기였다. 처음 마주친 날 이후로 이실더의 충고를 받아들인 보리스는 다시 윈터러를 뽑지 않고 있었다. 대신 이실더가 사 준 짤막한 검을 썼다.

  어쨌든 이날의 싸움이란 단순히 몽둥이 싸움 정도가 될 듯했다. 이실더가 말한 대로 렘므 사람들도, 야만족들도, 자칫 피를 흘렸다가는 엄청난 결과가 오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자, 그러면 포도주 값을 좀 해볼까.”

  모였던 사람들이 거의 뛰어 내려가 버리고 나자 언덕에는 응원 나선 아이들과 소녀들만이 드문드문 남았다. 그들 역시 지금껏 두드려 대고 있던 무쇠 솥뚜껑 따위를 들고 계속해서 행렬의 마지막을 따라갈 태세였다. 보리스는 아직도 약간 어이가 없는 기분이라 나직이 중얼 거려 보았다.

  “옥수수 재배지 쟁탈전이라.”

  그 순간, 이실더가 갑자기 광분한 마을 사람들과 비슷한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너무 큰 목소리라 솥뚜껑을 두드리던 소녀들도 놀라 쳐다봤을 정도였다.

  “옥수수는 내줄 수 없다아아앗!”

  그리고 그는 마을 사람들과 똑같이 팔다리를 휘저으면서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애써 포도주 한 병을 다 마셔버린 까닭을 알게 하는 장면이었다.

  보리스는 약간 당황했다. 그러나 곧 그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즐거운 욕구였다.

  “옥수수...땅을 내놔라아앗!”

  “우리 땅에서 옥수수 한 알도 못 거둬먹게 하겠다아아아......”

  “야만족들아, 옥수수는 너네 집 뒷마당에나 가꿔라!”

  “옥수숫대를 입에 틀어박기 전에 조용히 꺼져라, 야만족들아!”

  입을 다투어 외쳐지는 새롭고도 신선한(?) 구호들이 먼 들판으로 메아리쳐 갔다. 서른 명 남짓한 <옥수수 경작지 수호 대>와 <침략자>들은 그 들판 어느 구석인가에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격돌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누구보다도 목청껏 옥수수에 대한 사수 의지를 밝히며 달려가고 있는 한 어른과 한 소년이 있었다.

2. 그 상처의 약

  흡사 봄과 같은 겨울 하루가 기울어 갔다.

  1월이 지나 이제 2월이었다. 보리스는 아직껏 올해처럼 별다른 일 없이 새해 첫 달을 보낸 기억이 없었다. 기념 만찬도, 폭죽 행사도, 밤샘 놀이도 없이 그냥 다른 때와 다름없는 조용한 나날이었을 뿐이었다.

  1월 1일 저녁에 이실더와 보리스는 모닥불을 마주하고 앉아 마른 빵을 물어뜯고 있었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 보리스는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새해 만찬에도 불구하고 별 불만 없이 빵을 모두 먹어치우고 데운 밀죽 비슷한 것을 마셨다.

  밀죽 그릇을 들여다보고 있는 소년을 흘끗 바라본 이실더가 불기가 어른거리는 얼굴 곳곳에 움푹한 그늘들이 번진 것을 발견했다. 소년은 확실히 전보다 말라 있었다. 뽀얗던 뺨의 젖살이 빠지고 얼굴 윤곽은 한결 남자답게 뚜렷해져 있었다.

  “새해를 위해 건배.”

  둘은 밀죽이든 나무 그릇을 부딪쳤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마음의 짐이 가벼운 새해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했다.

  집안의 일도, 생존의 문제도, 이날만은 그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았다. 자신이 작년보다 한결 당당해졌다고 느꼈다. 앞으로도 계속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점차 북부로 가고 있었다.

  딱히 어떤 목적지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보리스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실더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고, 지금껏 방향을 결정해 온 것도 그였다. 보리스는 그에게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지난 해 11월 경, 드라켄즈 산맥의 본줄기와 오를란느 공국 방향으로 뻗은 소 드라켄즈<오를란느에서는 마리메조 산맥>가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한 모리더 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보리스는 렘므의 수도인 엘티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모리더 산은 렘므 내륙 지방에서 님 반도로 접어드는 경계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곧장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님 반도의 뿌리를 가로질러 가면 닿을 수 있는 바닷가에 엘티보가 있었다. 아노마라드의 수도인 켈티카에 이어 대륙에서 둘째가는 규모, 그리고 특이한 북부 문물을 자랑하는 도시였다.

  한 번쯤 가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이실더는 고개를 저었다. 수도이면서 동시에 날카로운 만을 끼고 발달한 항구 도시이기도 한 엘티보는 렘므 사람의 기질, 즉 북방 선원의 기운이 가장 폭발할 듯 충만한 곳 가운데 하나였다. 플레일(flail)을 휘두르는 지나파 같은 공주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나라인 것이다.

  수도라는 곳은 보통 문화의 집결지가 되기 마련이라 유동적으로 드나드는 외지 민족이나 별난 풍습에도 관대하기 마련인데 엘티보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관대한 층과 그렇지 않은 층으로 확연히 갈려 있었다. 몇 백 년 역사를 가진 항구인 엘티보를 수도로 정해서 옮겨 온 왕족과 귀족들, 그 뒤를 따라온 이주자 출신들은 무관심하면서 너그러웠고, 토박이 출신인 선원들은 날카롭고 짓궂었다.

  “엘티보는 우리 같은 평민들이 초대장 없이 놀러갈 만한 곳이 아니야. 다시 말해 연줄이 있어야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편안히 지낼 수 있다는 뜻이지.”

  그래서 엘티보 행은 포기되었다. 그들은 드라켄즈 산맥으로부터 뻗어 나온 산자락 틈새에 자리 잡은 마을들을 가끔씩 거치며 북으로, 또 북으로 갔다.

  동쪽으로 휘어진 님 반도 아래에 위치한 커다란 만을 티보 만이라고 불렀다. 렘므의 화폐 단위와도 같은 이름이었다. 두 사람은 배를 타지 않은 채 북쪽 길을 택해 그 만을 우회해 갔다. 그리고 2월 말이 되었을 때 렘므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시라는 나르닛사에 도착했다.

  국토의 대부분이 빙설 산맥으로 채워진 렘므 땅에서 큰 도시란 거의 다 항구들이었다. 나르닛사는 렘므에서 가장 큰 섬인 엘베 섬을 바로 내려다보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엘베 섬으로 가는 배, 또는 해류를 타고 서쪽으로 돌아 티보만 주변의 작은 항구들을 거쳐 다니며 무역하는 배들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출항했다. 

  물론 그들은 엘베 섬으로 갈 계획은 없었다. 그들이 추운 겨울에도 정착하지 않고 꾸준히 이동하여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를 보리스가 알게 된 것은 결국 그 날 밤이 되었다.

  둘은 돈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뒷골목을 이리저리 뒤진 끝에 허름하지만 비교적 조용해 보이는 여관을 발견했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세 단 올라가 문을 밀고 숙박계로 다가간 이실더는 방을 하나만 달라고 말했다.

  예순쯤 되어 보이는 늙은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퍼뜩 깨어 이실더가 부르는 대로 이름을 적었다. 서서히 정신이 든 노인은 보리스 쪽을 내려다보더니 무심코 물었다.

  “아들이 다요?”

  그러자 이실더가 망설이지도 않고 냉큼 대꾸했다.

  “그러요.”

  “안 닮았구마는?”

  “쳇, 남의 아픈 데 찌르지 말고 방이나 주요.”

  이실더는 렘므 말투를 능청스럽게 흉내 내어서 비록 민족은 다를지 몰라도 이 땅에서 오래 산 사람인 양 행동했다. 노인은 열쇠를 떼어 내주면서 이죽거렸다.

  “그러기에 마누라 관리를 잘 해야 되는 법이다요.”

  이실더는 화를 내는 대신 한탄조로 말했다.

  “아들 녀석이 듣는 데서 못 하는 소리도 없는 노망난 늙은이한테 충고랍시고 듣자니 한숨이 절로 나오요.”

  그때 등 뒤에서 어떤 사람이 말했다.

  “어라, 형님한테 마누라도 있고 아들도 있었소? 난 지금까지 전혀 몰랐소, 그래?”

  이 연극 같은 놀음에 사정 모르고 끼어든 사람이 누군가 싶어 지금껏 눈만 말똥말똥 굴리고 있던 보리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실더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큰 키를 가진 백발의 남자를 발견하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실더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농담조로 말을 받는 대신 안색이 변했다.

  노인이 이실더의 건방진 말에 뭐라고 꿍얼대며 팔을 툭툭 치는 가운데에서도 이실더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남자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너덜거리는 가죽조끼 안쪽으로 흰 무명옷이 들여다보이는 남자의 손에는 방금 벗은 듯한 두터운 털옷이 들려 있었다. 딱 벌어진 어깨와 팔, 추위에 단련된 듯 거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목 안쪽으로 보이는 피부는 본래 희었던 모양이었다. 어깨 너머로 흐트러진 흰 백발과 거칠거칠한 눈매에도 불구하고 삼십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지금껏 보다 온 렘므 사람들이 바닷사람 느낌이었다면 그는 마치 산사람인 양 튼튼하고 강인해 보였다.

  “오랜만이잖소.”

  백발 남자가 손을 내밀자 이실더도 마주 손을 내밀어 둘은 악수를 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이실더의 태도가 약간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이군, 동생.”

  뒤에서 노인네가 툴툴대고 있었다.

  “아들에, 마누라에, 이번엔 동생요?”

  백발 남자가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노인장, 나도 방 하나 주시오, 우리 형님 바로 옆방으로 말이오. 상관없겠소?”

  “좋은 대로 하요.”

  북부 전나무처럼 건장한 두 남자가 실제로 친한 사이라는 걸 알아 본 노인은 더 시비 걸 생각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백발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보리스를 흘끗 보더니 다시 말했다.

  “오랜만에 회포나 풉시다. 그건 그렇고 진짜 저 아이는 도대체 누구요? 정말 숨겨 놓은 자식이오?”

  눈앞에는 반쯤 채워진 술잔이 놓여 있었다. 이실더는 그것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잔이 비자 상대방의 손이 움직여 다시 술을 따랐다. 이실더는 찰랑이는 술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일 떠나겠소?”

  “......”

  이렇게 만날 줄 알고서 이리로 온 것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심란한지 몰랐다. 물론 정확히 누가 사자로 올 것인지는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오든, 그가 무슨 전언을 말할 지는 이미 다 짐작하고 있지 않았던가. 

  흰 빛깔은 어쩌면 본래부터 이별의 전조였을까. 이렇게 흰 머리칼을 한 사자를 보내어 그를 다시 부르고 있었다. 섬은, 그가 영원히 떠나고 싶어 할 섬은.

  본래 간단한 식사를 위해서만 쓰이는 듯한 1층 홀은 고요했다. 깨어있는 사람이라고는 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어스레하게 보이는 계단 쪽에 램프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초가 하나 꽂혀 있었다. 빛이라고는 그게 전부였다.

  두 빛이 동시에 일렁였다.

  “망설이시오?”

  이실더의 손이 다시 나무 술잔을 잡았다. 들어올려지는 잔은 향해 다른 잔이 다가오더니 가볍게 탁, 치고 지나갔다. 팔이 멎었으나 술은 여전히 출렁거렸다.

  “혼자 너무 마시는 것 같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소?”

  이실더는 마시지 않고 그냥 잔을 내려놓았다. 상대가 다시 물어 왔다.

  "아까 그 소년이오? “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실더가 입을 열었다. 

  “에니...아니, 이곳에서는 무슨 이름이지?”

  “단센이오, 그냥 단센.”

  “그래, 단센.”

  이 자 역시 이실더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땅에서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실더는 진지한 눈동자로 그를 보며 말했다.

  “꼭 돌아가야 할까?”

  “왜 그러시오? 이제 돌아올 때가 되었다는 것쯤은 형님이 더 잘 아시지 않소? 알고 이리로 오신 것이 아니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지.”

  단센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형님의 자리가 있소. 해야 할 일도 있소. 오직 형님만을 기다리면서 밤낮 없이 수련하는 아이들도 있잖소. 10년 만에 치러지는 <7원례>를 위해서는 형님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니 지체할 수도 없......”

  “그런 것들이 모두... 그렇게 중요할까?”

  백발의 사내 단센은 눈을 크게 뜨더니 대꾸했다.

  “그게 아니면 뭐가 중요하다는 말이오?”

  이실더는 술잔으로 시선을 떨어뜨린 채 자신 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난 내 삶이 중요해.”

  단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저었다. 이해는 하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형님의 문제를 모르는 내가 아니란 것, 잘 알지 않소. 그러니까 이렇듯 내내 대륙에 머물러도 어른들께서 아무 말 않으셨던 것 아니오? 하지만 이번 7원례의 문제가 아니라 해도 평생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오. 아직껏 특별히 건강에 이상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 구료. 어른들께선 이제 그만 형님이 정착해서 신성한 직분을 수행하시길 바라......”

  “난 이미 한 가지 약을 찾았어.”

  단센은 얼굴을 펴면서 물었다.

  “오, 그렇소? 무슨 약이오?”

  이실더는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작게 대꾸했다.

  “그 소년이다.”

   “......”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단센이 먼저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형님을 이해할 수가 없고. 지금 섬에는 형님만을 존경하고 따르며 평생을 형님에 대한 봉사로 바치고 싶어 하는 어린 녀석들이 헤아릴 수도 없는데 왜 하필 외인의 아이요? 왜 그런 아이한테 연연하오? 혹시 그 아이에게 놀랄 만한 천부의 자질이라도 있는 거요? 형님은 사실 천재를 찾고 있었소?”

  그의 말은 약간 비난조였다. 그러니까 <천재를 찾아 교육하고 싶어서 지금껏 성실한 아이들을 외면해 온 것이냐>는 속뜻이 섞여 있었다. 이실더는 풋, 하고 조소를 내뱉으며 입 끝을 올렸다.

  “천재라, 후, 천재라. 생각해 봐. 나는 천재였니? 아니, 오히려 반대지. 주어진 행운도 잡을 줄 모르는 자였지. 일러오스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최고의 황금빛 미래를 제 발로 박차고서 쭈그렁 궁상 노인네 밑으로 달아난 미친놈이 아니었냔 말이야. 천재? 내게 그런 말은 하지 마. 난 그런 녀석들을 싫어해.”

  “낮은 마루에 낀 먼지는 오래 기억하오. 형님.”

  그것은 그들 무리가 말하는 방식이었다. 두 번, 세 번 꼬인 비유로 말하는 것으로 간단히 말해 <입 조심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외인의 땅에서 본명을 말하는 것은 금지된 일이었다. 그것이 이미 죽은 자의 본명일지라도.

  “그래 술잔 속에서도 파도는 멎는 법이 없지. 잘못했군.”

  같은 의미의 말이었다. 이실더는 자신이 술기운 탓에 실수한 모양이라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실은 그는 술이 아니라 헤어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좋소. 그렇다면 내가 형님이 외인의 문제로 의무를 등한히 하려 한다고 행각해 버리기 전에 방금 한 말은 취소하는 것이 좋겠소.”

  “그 녀석은......”

  상대가 한 말의 울림이 채 멎기도 전에 시작된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것은 더뎠다.

  “......내게서 아무 것도 얻어가려 하지 않아.”

  단센은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한 번 기울였다.

  “무슨 소리요?”

  이실더의 목소리는 점차 정확해졌다.

  “그래... 섬에 가면 내 곁에서 평생토록 잔심부름꾼 노릇이라도 기꺼이 하려 할 녀석들이 갓 엮어놓은 보릿단처럼 얼마든지 있다. 예전 그 분 앞에 서려고 한 젊은이들이 많았던 것처럼. 그 놈들의 인내는 내, 높이 사지. 높이 사겠다고. 하지만 왜? 왜 자신의 삶을 그런 식으로 낭비하고 싶어 하지? 인생의 즐거움들은 다 어쩌고? 왜 칙칙한 사내 옆에서 쇳조각이나 만지작거리며 생애를 마치려는 녀석들이 이렇게 많은 거지?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일이냔 말이다. 난 이해할 수가 없어. 받아들일 수도 없고. 녀석들의 그런 태도는 비굴한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아. 원하는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서라면 보석 같은 삶의 시간쯤이야 얼마든지 희생해도 좋다고 여기는 그 녀석들이 불쾌해. 그런 녀석이 한두 명이 아니라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곳... 분위기가 싫어.”

  그러나 이실더 역시 감히 <섬이 싫다>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벗어나고자 간절히 발버둥쳐 온 그의 마음도 오래된 굴레들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달라. 단지 내게 동료다운 신뢰를 줄 뿐이야. 아니, 그것조차 완벽한 신뢰는 아닐 테지. 어린 나이인데도 이미 자신만의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녀석이란 말이다. 누구를 믿거나 돕거나 받아들이거나 하는 것은 모두 매 순간의 판단이고, 아부하여 내게 얻어가려 하는 것도, 속여서 빼앗으려 하는 것도 없어. 내가 그 녀석을 가르치고자 하느냐고? 전혀 틀려. 내가 한 인간이라면 그도 한 인간, 친구처럼 존중하고 서로의 이상을 말하는 사이지. 아니, 나는 실제로 그 아이의 독립된 정신이 오히려 부러웠어. 어디에도 발 묶일 필요 없이 저 해안 절벽의 동굴에 들어가 혼자 은둔하더라도 만족할 수 있을, 하나로 충분하고자 하는,,, 자유로운,,, 그는 자유로워지고자 하고 있어. 명예로도 원한으로도 묶일 수 없는 자가 되고자 하지. 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까, 아니, 왜 섬의 아이들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지?”

  단센은 눈썹을 찡그리더니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오, 형님? 그 아이들이 왜 다들 그러는지 이미 잘 알지 않소? 우리에겐 오랜 책임이 있소. 모두가 죽을 때 죽지 않았기에 갚아야 할 빚이 있지 않소? 한두 사람의 행복쯤 끊어 내주는 걸로는 감히 셈도 맞추지 못할 거대한 채무가 있지 않소? 그건 까마득하게 깊은 빈 우물이오. 바닥조차 채 메우지 못한......”

  “그 녀석들이, 우리 무리의 빚을 생각해서 그런다고? 어림없는 소리. 그런 게 아니야. 놈들은 단지 미래의 영광과 자랑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야. 그것이 얼마만큼의 책임을 필요로 하는 자리인지도 모르면서 내 자리를 무작정 탐낸 뿐이다. 내게 잘하고 싶겠지. 그래서 뼛골의 정수까지 빼앗아 가고 싶겠지. 몇 년, 몇 십 년쯤 내 시중을 들며 희생하는 일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겠지. 그래,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지! 어차피 그 세월이 그리 길지 않을 거란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닌가!”

  “형님!”

  탁자를 짚고 있던 팔꿈치가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술잔이 툭 건들려 옆으로 밀려났다. 탁자에서는 몇 년간 찌들었을 싸구려 술 냄새가 물씬 났다. 술잔과 나란히 놓인 머릿속에서도 똑같이 갈색 술이 출렁 거렸다.

  계단 앞에 놓인 램프가 낯선 그림자 하나를 붙들고 그림자 인형극처럼 춤을 추었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새어들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질 대답은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확인하듯 대답이 울렸다.

  “외지인을 데려갈 수는 없잖소.”

  단센은 섬의 법도에 따라 밖에서는 철저히 이실더를 형으로 불렀으며 실제로도 오랫동안 그를 친형처럼 생각해 온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이실더와 생각이 달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만은 분명히 있었다. 밖으로만 나도는 이실더와는 달리 단센은 지시를 받기 전에는 대륙에 나오는 일도 없을 정도로 고지식한 <따르는 자>였다. 그건 앞서 한 그의 발언들이 섬의 <어른>들이 늘 하는 말 그대로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그는 어떻게든 공감하고 싶다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퍽 얌전해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눈가가 유난히 깊은 것이 아이 치고는 음험해 보였소. 그 아이가 몇 살이오?”

  이실더는 갑자기 아들의 나이를 질문 받은 아버지가 된 듯, 일말의 자랑스러움을 품은 얼굴로 대답했다.

  “올해 7월이면 열 넷이 되지.”

  “허어, 열 셋이란 말이오? 도저히 그렇게는 보이지 않던데. 나는 넉넉잡아 열다섯도 가능하리라고 봤소이다. 그 나이에 그만한 검을 지니고 다니니 상당한 근골이겠소.”

  “실력도 상당해. 벌써 사람을 죽여 본 일도 있는 아이다.”

  단센은 눈을 약간 크게 떴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거 좋지 않은 소식이오.”

  이실더는 피식 웃었다.

  “핏자국만은 아무리 말라붙었다 해도 금방 보인다는 그 소리겠지? 하지만 무슨 소용 있겠나. 그걸 알아볼 사람들 앞까진 갈 수도 없을 터인데.”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잖소.”

  이실더는 고개를 들더니 단센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단센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견습 순례자로 입문시키시오.”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이실더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앉은 채로 올려다보는 백발의 동생을 쏘아보며 나직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길을 그 애에게 걷게 한다고? 결코 안 될 말이다. 그 앤 이제 겨우 열세 살이야. 아직 사리 분별도 완벽하게 자리 잡히지 않았을 나이인 아이에게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라고는 말 못 해. 그것이 어떤 길인지, 겨우 열세 살 먹은 아이가 깨달을 수 있을까? 이후 나를 원망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내 욕심만으로 권하기에는 너무도 중대한 일이야.”

  단센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제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형님 말 대로요. 다행히 아이가 아직 열 셋에 불과하잖소. 열다섯만 되었어도 이미 입문은 불가했을 테요. 그 아이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면, 데려가시오. 가서 섬의 풍습을 가르치고 검을 가르쳐 평생을 함께 하면 되지 않소? 무엇이 나쁜 길이오? 형님이 싫어한다 해서 아이도 싫어하리라 보장할 수 있소? 이렇게 해서라도 형님이 섬으로 돌아가 준다면 나는 기꺼이 어른들 앞에서 저 아이의 신분을 보증하고 의식에도 입회하겠소. 원한다면 그 아이의 대부도 되겠소. 함께 섬으로 돌아갑시다. 모두, 함께.”

  단센의 말은 사실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그러나 이실더는 힘겹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그건 사슬을 얽어매는 짓이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묶여버리고 나면 결코 풀려날 수 없는 사슬이지. 한 번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다시는 혼자로, 자족적인 인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단 말이야. 거기서 태어난 나는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왜 죄 없는 인간에게 그런 짐을 지워야 하지?”

  “자신이 원하니까요.”

  대답 소리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동생이 아니라 램프가 흔들리던 계단 쪽에서 들렸다. 이윽고 하나의 그림자가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와 섰다.

  “너, 어떻게......”

  “엿듣게 되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보리스는 먼저 단센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절했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들며 말했다.

  “저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해주시겠다고 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모든 일을 기꺼이 부탁드리겠습니다.”

  보리스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계단에 앉아 턱을 괸 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단센의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들, 이실더의 감정적인 반응, 그리고 정체 모를 굴레의 존재와 그 선택에 대한 것도.

  흔들리는 램프, 그 램프가 계단 너머로 만드는 긴 그림자, 그림자 아래의 자신, 그림자보다도 훨씬 작은 자신, 버려짐, 헤어짐, 잃어버림, 결코 다시는 잡을 수 없는 사라진 것들.

  이실더와 함께 보낸 반 년.

  예프넨을 떠난 뒤로... 아니, 예프넨과 함께 저택에서 살던 그 때조차도 자신을 짓누르던 모든 악몽으로부터 이토록 자유롭지는 못했다. 작년 여름부터 이 겨울까지, 그는 한 사람의 보호 아래에 있었고 그와 자신은 서로를 존중하여 친구로 대했다.

  지금도 그는 예프넨을 가장 사랑하지만... 이제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이 한 사람만을 신뢰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그를 떠나 다른 사람을 다시 믿으려 노력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무도 믿지 않게 된다면 모를까, 이제 다시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믿을 수 있는 사람 따위, 없어도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어느 순간부터 씨앗처럼 심어진 것은 어떤 진심어린 관계에 대한강한 욕구였다.

  한때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은 자랐고, 성숙해졌으며,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 돌아본 자신은 지독히 황폐한 인간이었을 뿐. 친구가 될 수 있었을 소년의 마음조차 끝내 얻지 못한 불완전함, 피 묻은 손을 보며 위로해 줄 사람이 없어 떨며 울었던 연약함, 그리고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는 소년을 보며 느꼈던 부러움까지도 오직 홀로, 타인의 존재 없이도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원했던 그런 사람>과는 아득하게도 멀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함께 있고 싶었다. 그의 곁에서 다시 그 나이의 소년답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영원히 믿고 싶었다. 가족을 잃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사람을 죽였던 자신, 그런 자신조차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줄 수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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