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권. 3장.Intensify (6/21)

3장.Intensify

1. 첫 살해 

 다음날이 밝아올 무렵, 보리스는 온 몸에서 통증을 느꼈다. 뼈와 살이 어긋나 제멋대로  삐

걱거리는 느낌이었다. 산길을 내려오고 평야를 달리는 동안 가끔씩 느려지다 빨라지다 했지

만 너무 오랫동안 말 위에서 흔들렸던 것이다. 더구나 마지막으로  말을 탄 것은 이미 작년

의 일이었다. 그의 온 몸 근육은 최근 말타기에 적합하게 단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추적을 깨달은 것은 푸르스름한 새벽이 하늘 곳곳으로 번져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반쯤 중독된 듯 앞으로  달리기만 했기에 앞일도 뒷일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밤이 올 무렵부터는 어지럽던 머리도 맑아져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다

시 혼자라는 것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다시 아무도 보호해 주지  않는 혼자로 돌아간 

것이다.

 백작이 언제쯤 그가 없어진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점심 시간이 가까워 올 무렵이었으니 

만큼, 식사시간이 되었을 때 돌아오지 않는다면 수상쩍게 생각할 것이었다. 데리고 간  기사

를 풀어서 주위를 수색할 테고, 란지에를 만난다면 아마도 추궁하겠지. 그가 뭐라고  대꾸를 

할까. 그로서는 짐작하기 힘든 노릇이었다.

 메르데르 자작 역시 거느린 무사들이 소수 있었고, 그들 역시 추적에 동참할 것이  뻔했다. 

벨노어 성으로도 곧장 연락을 넣겠지. 빠른 말을 탄 연락자에 의해 소식이 들어가기까지 걸

리는 시간은 대략 반나절. 곧장 남은 기사들이 총동원되어 그를 찾기 위해 기를 쓸 테고,

그 즈음이면 그도 완전히 숨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디로 가는 것이 적당할까. 사람이 없는 곳? 아니면 오히려 사람이 많은곳?

 어느 쪽이 좋다고 생각되든, 그에겐 선택해서 갈 수 있는 방법조차 없었다. 그가 있는 곳이 

지금 벨크루즈인지 아라종인지도 구별할 수 없는 그였다. 동서남북을 간신히 판별하는 것이 

다였고, 주위는 온통 비슷비슷한 산마루와 녹록한 평야였다 아노마라드는 지독히 넓었다. 작

은 점에 불과한 그가 밤낮으로 달리고 달려도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그래서 추적자를 만났을 때, 그는 오히려 덜 당황할 수 있었다. 어차피 닥칠 일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그가 말을 타고 하루 반 동안 갈 수 있는 거리란 뻔한 것이었다. 추적자는 두 

명의 기사였고, 그들은 소년을 보자 박차를 가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인적 하나 없는 새벽녘의 들판과 짙푸른 빛이 번져 가는 하늘, 등뒤로 솟은 산, 곳곳에  돌

부리와 바위가 솟아오른 길 없는 땅.......

 "하아!"

 푸르릅!

 보리스의 말은 지쳐 있었다. 도망자와 추적자가 포물선을 그리며 들판을 꺾어 돌았다. 회색 

바위들이 시야에 뛰어들었다가 획획 뒤로 지나쳐갔다. 애써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오래 버

틸 수 없으리란 것을 직감했다. 메르데르 자작의 말이 그래도 훌륭했기에 지금까지도 잘 버

텨준 셈이었다.

 말라비틀어진 잡목들이 흩어진 나지(裸地)가 나타났다.  흙먼지가 일어나 말발굽을 하얗게 

뒤덮었다. 보리스는 최대한 몸을 말 등에 붙인  채 달리고 있었다. 오래 전 형이 가르쳐  준 

대로 잘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잘해내는 것만으로는 소용없었다. 살아남지 못하면 다 쓸데 없었다. 그가 나이에 비

해 뛰어나다고 해도 어른들과 상대하고 있는 처지였고, 그들에게  이기지 못하는 한 객관적

인 평가 따위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드디어 싸우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왔다. 두  마리 말은 이제 10여 미터 뒤까지 따라붙었다. 

그중 한 명은 창을 들고 있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어디서 내려서야 할까. 그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확신을  떠나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

했다. 그때 저만치 낮은 허공에 무리 지은  새들이 빙빙 돌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들 

가운데 한 마리가 쏜살같이 아래를 향해 활강했다. 다른 새들도 뒤를 이었다. 그 모습은  곧 

시야에서 지워져 버렸다.

 위험한 도박이 머릿속에서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조금 더,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해갔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말은 마지막 힘을 짜내

어 미친 듯 달리고 있었다. 너무 빠르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것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여

기쯤일까, 아니, 조금 더일까, 이미 지나쳐 버렸을까.......

 "하!"

 힘껏 고삐를 움켜쥔 채 강한 선회를 감행했다. 빨리 달리던 말은 제대로 방향을 틀지 못했

지만, 그는 최대한의 힘과 실력을  다해 있는 대로 몰아붙였다.  아니면 죽음이었다. 간신히 

오른쪽으로, 조금 더 틀어진 채로 말은 아슬아슬하게 가장자리를 스쳐갔다. 발굽이 찬  돌부

리가 부서져 아득한 소리를 내며 저 아래로 떨어져 갔다.

 타닥, 툭, 툭, 툭, 투두둑.......

 "억!"

 외마디 비명 소리가 왼쪽 귓전을 때렸다. 찢어질 듯 울부짖는 말의 소리도 들렸다.  날카로

운 것이 돌을 긁어내는 듯한 파열음과 부서져 흐르는 돌멩이들의 소리, 생각보다 더, 폐부를 

깊숙이 찌르고 들어오는 소리들.

 귀를 막고 싶었다. 그러나 손은 고삐를 놓을 수 없었다. 성공했을까, 둘 다 떨어졌을까.

 아아아아아아악.......

 그 끝은 절벽이었다. 결국 한 명의 적은 속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

다.

 "저 쳐죽일 놈!"

 뒤늦었던 말 한 마리가 간신히 절벽 끝에서 멈출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보리스의 말이 지

쳐 속력이 떨어지는 동안, 분노한 소리를  지른 적의 말이 질풍처럼 휘몰아쳐 왔다.  눈앞은 

잡목숲이었다. 그가 다시 한 번 방향을 틀려고 애쓰는 동안 직진한 적이 곧장 따라붙었다.

 결국 말은 잡목숲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몸을 가리기에는 어림없었지만 진로를 방해하기에

는 오히려 충분했다. 마음을 비워야 할 시점이 왔다. 보리스는 말의 속력을 늦춰가다가 윈터

러만을 움켜쥐고 바닥으로 뛰어내려 한 바퀴 굴렀다. 말은 그러고도  몇 미터 더 가서 쓰러

질 듯 멈췄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아!"

 적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말에서 내렸다. 장검을 뽑아들고 성큼 다가서는  그 

모습이 저 호수의 괴물만큼이나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여기엔  그를 지켜줄 형은 없

었다.

 보리스도 윈터러를 뽑아 들었다.

 "......."

 떨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비록 저  노련한 전사와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그도 최대한의 

노력으로 지난 겨울을 보냈었다. 산 자는 점점 더  강해진다. 살아남아서 더 강해질 것이다. 

형이 물려준 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비록 죽더라도.......

 아니, 난 결코 죽지 않아!

 "하아아압!"

 지난 겨울 동안 그의 유일한 대련자는 월넛이었다. 그와 수십, 수백 번을 되풀이하여  싸운 

결과 그는 어느새 그와의 싸움에서 다칠 것을 두려워하여 몸을 사리지 않게 되었었다. 지금 

적이 그 자라고 생각했다. 그때처럼, 그렇게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챙!

 그러나 검이 첫 번째로 부딪쳤을 때, 그는 손목이 꺾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며 압도적인 힘

의 차이를 절감했다. 맞붙었던 검이 떨어지는 순간, 간신히 뒤로 물러났지만 적은 전혀 사이

를 두려 하지 않았다. 월넛은 그를 가르치고자 했지만 이 자는 적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생

쥐만도 못한 어린아이였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다만, 소년이 쥔 검만은 그의 눈길을 끌었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이제 붉게 변한 햇볕이 표면에 닿을  때마다 현란한 광채가 눈을 부시

게 했다. 게다가 소년은 비교적 검을 가볍게 썼다. 보리스가 있는 힘을 다했기 때문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기사의 눈에 저 검은 보기보다 가볍다는 인상을 주었다.

 바스타드는 제대로 수련하지 않는 한 스무 살이 되어도  제대로 휘두르기 힘들다. 철로 만

들어진 검이라면 일정한 무게가 있을 텐데 저토록 가벼운 검의 정체는 뭐지?

 백작은 부하들에게 윈터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일이 없었다. 두번 검이 맞부딪치고 다음 

순간, 보리스가 민첩하게 왼쪽으로 몸을 빼며 검을 똑바로 찔렀다. 순간적으로 검의  모습을 

보며 한눈을 팔다가 팔꿈치를 찔리고 말았다. 소년은 그가 얕본 것보다 기본기가 탄탄했다.

 "건방진 새끼가!"

 그래, 단지 장식품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팔꿈치에 두터운 가죽 보호대를  붙이고 

있었는데 소년의 검은 간단히 그것을 잘라 버리고 팔꿈치에 제대로 된 상처를 입혔다. 피가 

서서히 흘러내려 손목을 적셨다.

 "원대로 죽여주지!"

 적의 검이 순식간에 빨라졌다. 강한 힘으로 검을 눌러 밀치고  사슬 건틀렛(Gauntlet)을 낀 

손으로 검을 쥔 보리스의 손을 짓눌렀다. 동시에 발을 들어 배를 걷어차려 했다.

 그러나 일전에 난데없이 시작했던 달리기로  오랫동안 다리를 단련해 온 보리스는  재빨리 

발을 올려 상대방의 오금을 비스듬히 걷어차 버렸다. 약간 비틀거린 적은 급히 물러나 곧장 

베기로 들어갔다. 어깨를 한 번 피하고,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피한 보리스는 상대방

이 그를 죽이려 하지는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백작은 그가 생포되어 오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스노우 가드를 함께 얻어 윈터바

텀 킷을 완성하기 위해서겠지. 그가 죽는다면 스노우가드의 행방을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

을 테니까.

 다만 팔이나 다리 하나쯤 잘라 버린대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적은 보리스가 의외로 검을 

여러 번 연속해서 받아치는 것에 의아해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부딪쳤을 때, 윈터러가  희

한한 소리를 내며 우웅, 하고 떨었다. 보리스는  깜짝 놀랐다. 마치 프로즌 브레이크(Frozen 

Break), 극저온 폭발이 일어날 때와 비슷한 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스노우가드가 없는데?

 적도 흠칫 놀란 모양이었다. 약간 떨어져 경계 태세를 취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꾼 듯 성큼 

방향을 돌렸다. 반 바퀴 뒤로 돌아가자 보리스도 몸을 돌렸다. 검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

아왔다.

 츠컥!

 검은 보리스의 옆구리를 후벼팠다. 갑옷이 없었기 때문에 단숨에 핏줄기가 솟았다.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이 온 몸을 휩쌌다.

 "......."

 이토록 큰 상처를 입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당황한 마음이 더욱 컸다.  페이

스를 잃는 순간 적은 어느새 검을 쥔 손을 강하게 내리쳤다. 비척, 검이 손에서 떨어져 나가

려는 순간 반대쪽 손으로 간신히 부여잡았다. 검을 놓치는 것만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

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적은 칼등으로 그의 옆얼굴을 냅다 후려쳤고, 보리스는  쓰러지

지 않으려고 검을 바닥에 짚었다. 적은 곧장 접근하더니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쥐어 졸

랐다.

 "어린놈이 제법 버텼다만 이제 끝내야지."

 적은 바닥에 짚은 보리스의 검을  옆으로 탁 걷어차면서 그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흙 묻은 발로 손을 밟으면서 윈터러를 보리스의 손에서 비틀어 빼냈다.

 "흐음......."

 눈빛에 서서히 탐욕이 어렸다. 검은 놀랄 만큼 예리하고 신기할 정도로 가벼웠다. 또한  아

름답기까지 했다. 그는 눈으로는 칼날을 훑으면서 발로 소년의  가슴이며 머리 등을 가리지 

않고 걷어찼다.

 "이런 검을 갖고 도망쳤으니  주인님께서 네놈을 잡아오라고 하셨구나.  제 분수도 모르는 

놈 같으니라고."

 윈터러를 잠시 흙바닥에 푹 꽃아 넣고 그는 보리스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축 늘어

진 소년을 나무 등치로 밀어젖히며 몇 번 처박았다. 백작을  만났을 때 그를 족치던 자들의 

방식과 확실히 유사했다. 보리스가 의심하고 있는 그대로.

 그는 보리스를 도로 바닥에 내던지더니 윈터러를 다시 한 번 흘끔 보았다.

 "쓰읍......."

 이 자는 이제 확실히 고민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몹시 탐나는 검이었다. 검사 생활 십 몇 

년 만에 이렇게 좋은 검은 처음  보았다. 방금 바닥에 찔러 넣을 때도  놀랄 만큼 부드럽게 

들어가지 않았던가.

 그러나 겨우 검 한 자루 때문에 오랫동안 섬겨 온 주인을 배반하기는 좀 뭣했다 다만 모든 

일이 숨겨질 수만 있다면 검도 갖고 백작에게도 시치미를 뗄 텐데 싶었다.

 그때 저 교활한 녀석의 계략으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동료가 생각났다.

 그래, 저 녀석도 말과 함께 절벽으로 밀어 버리자. 떨어져 죽은 시체 옆의 검을 누가  집어

갔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고, 그는 단지 소년을 보지 못한 체 하면 되는  것이다. 죽

은 자와 소년은 맹렬히 추격전을 벌이다가 둘  다 절벽을 보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죽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방금 전에 저 동료 기사와 마주친  것도 우연이었으니 다른 녀석이 또 

이 길을 탐색하러 올 테지. 백작이 상금을 제대로 내걸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보리스는 쓰러진 채 상대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 어떤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대강 짐작 했다. 그러나 손쓸 방법이 없었다.

 "일어나."

 한 손에는 윈터러를, 또 한 손에는 자신의 검을 든 적이 턱짓하며 말했다. 보리스는 자리에

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패배한 몸에 남은 상처는 한층 더 고통스러웠다.

 "이리 와. 자, 얼른."

 기사는 도망치지 않고 서 있는 보리스의 말을 향해  다가가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

리고 자기 말안장에서 밧줄을 꺼내 들었다. 그 밧줄로 보리스의 목을 몇 번 감아 꽉 묶더니 

그 끝을 자기 손에 단단히 감아 잡았다.

 "말에 타라."

 그 말에 따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보리스는 말에 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리스는 이 자가 이대로 자신을 백작에게 데려가려는 줄로만 알았다. 자

신이 달아나려 마음먹고 말의 배를 걷어찬다  해도 저쪽에서 밧줄만 당기만 목이  졸리거나 

바닥에 나뒹굴게 되어있었다. 도망칠 길이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은 초조한 심정으로 가득 

찼다.

 그 순간, 그는 한쪽 손이 안장에 달린 란지에의 도시락 주머니에 닿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래로 늘어진 주머니의 주둥이에는 뭔가 단단한 것이 약간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은 별다른 

동작 없이도 그의 손에 충분히 잡혔다.

 기사는 만족한 얼굴로 검을 허리에 찬 칼집에 꽂은 다음 윈터러의 칼집도 찾아 꽂더니  자

기 말안장에 매달았다. 그리고 말에 훌쩍 올라탔다.

 "말 몰 줄 알지?"

 그리고 그는 보리스를 앞세워 서서히 절벽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적당히 다가간 다음 밧줄을 놓으면서  채찍으로 보리스의 말을 한  대 후려칠 생각이었다. 

그러면 저절로 떨어져 줄 것이다.

 그러한 계획을 보리스가 알아챈 것은  이미 절벽 근처까지 가까이  간 후였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보리스는 돌아보았다.

 "어, 어떻게......."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기사는 대답하는 대신 비릿한 웃음을 보였다.

 "잘 가라고."

 더 생각할 여유도 없는 상황이었다. 기사가 고삐를 잠시 놓고 채찍을 드는 순간,  보리스는 

다리의 힘만으로 힘껏 말 등을 박차고 가능한 한 먼  곳으로 떨어져 굴렀다. 동시에 순간적

으로 목이 꽉 졸리며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어 억 !"

 기사는 손에 감아쥔 밧줄을 아직 풀지 못한 채였다. 갑자기 줄이 당겨지자 그 역시 순간적

으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함께  말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말고삐를 놓은  채 한 손에는 

밧줄, 또 한 손에는 채찍을 들었던  행동의 결과였다. 그는 급히 정신을 추스르고  일어나려 

했지만 절벽이 근처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좀  전에 동료가 떨어지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보았던 탓이 컸다.

 보리스는 얼굴을 심하게 바닥에 부딪쳤지만 곧 죽을 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 때문에 벌

떡 일어날 수 있었다. 동시에 도시락  주머니에서 빼든 단도로 목을 감았던 밧줄을  끊었다. 

옆구리의 통증도 잊었다. 저쪽에서 정신을 차리고 검을 뽑는 순간 상황은 뒤바뀌게 되어 있

었다. 짧은 순간, 기회는 단 한 번뿐. 망설이면 자신이 죽는다!

 손에 쥐어진 단도에 힘이 실렸다. 한달음에 달려간 그는 단도를 힘껏 상대의 등에 꽂아 넣

었다.

 "크억......!"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순식간에 옷 전체로 번져 가는  핏자국을 보며 보리스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그가 찌른 곳은 목과 등이 이어지는 언저리였고 검붉은 피는 그야말로 물밀 듯 쏟아져 나왔

다. 급박한 상황에 처해 인간이 아닌 무엇을 찌른 듯  느꼈던 기분은 순식간에 생생한 살해

의 감정으로 변했다.

 온 몸이 덜덜 떨렸다. 단도를 찌를 때까지만 해도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고, 공격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으으윽......."

 상처는 깊었지만 적은 아직 죽지 않았다. 분노하고 동시에  당황한 기사는 몸을 돌려 보리

스의 목을 움켜잡으려 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충격을  받아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 나갔다. 단도를 너무 꽉 움켜쥐고 있었던 것일까.

 푸욱!

 날카로운 칼날은 곧바로 상대의 목을 뚫고 들어갔다. 너무도 쉽게, 그렇게 찔러져 버렸다.

 그 순간, 옷을 타고 번지던 방금 전과는 달리 맹렬한 핏줄기가 솟구쳐 그의 얼굴에 피보라

를 씌웠다. 동시에 상대방의 크게 열린 동공이 바로 눈앞에 생생히 들어왔다. 죽어 가는  자

의 눈,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과거를 주시하고 있을 지도 모를  흰 눈자위와 똑바로 눈이 마

주쳤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살해한 자의 눈이었다.

 "으... 아...... 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적은 풀썩 쓰러졌다. 피는 쏟아진 우유처럼 흙바닥을 적시며, 다시

는 주워담을 수 없을 몸 속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썰물처럼, 그렇게.

 부르르.

 보리스가 몸을 떠는 것과 함께 시체도 몇 번인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이윽고 단말마의 고

통은 완전히 멈췄다.

 그러나 보리스는 멈출 수 없었다.

 "아, 하, 으흐... 하악, 학......."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가 않았다. 너무도 꽉 쥐었던 단도는 아직도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이며 얼굴, 가슴 언저리가 모조리 피범벅이었고 곳곳에 맺힌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대로 

몇 명이고 계속해서 죽여도 더 달라질 것조차 없을 정도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

었다. 왜인지 알 수도 없게 그냥 울음 비슷한 것이 먹먹하게 가슴을 메우고 있었다.  무어라

고 표현해야 좋을 지 몰랐다. 슬픔도 아닌, 고통도 아닌, 안도감도 아닌.

 뭔가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데 누구도 그를 안고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한 생명이 

삶을 그쳤는데 자신은 그를 위해 슬퍼할 수도 없었다. 폭풍이 그친 아침에 둥지에서 떨어져 

죽은 새끼 새를 보고도 슬퍼할 수 있는데, 저 사람만은 애도할 수 없었다. 그의 생명을 자기 

손으로 없애 버렸다. 그것도 바로 이 손으로.

 그것은 좀 전에 절벽으로 떨어진 사람에 대해 느꼈던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절벽으로 떨

어진 자에게 죄책감을 느쪘다면 지금 느끼는 것은 공포와  혐오감이었다. 세상일은 본래 아

무 것도 돌이킬 수 없는데, 이것만이 돌이킬 수 없는 양 그렇게 두렵고 아득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이 무서웠다. 누군가를 죽인 손, 마치 자기 자신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

다.

 "형......."

 그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형을 찾았다. 그  순간, 그는 형이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슬픈 

얼굴로 한말이 생각났다.

 형도 할 수 있는 일인 거야. 아버지뿐만 아니라... 형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다.

 너도 마찬가지야.

 형의 말이 옳았다. 이제 그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모든 인간이 다  닥치는 

순간 해치울 수 있게 되는 걸까. 본래 그런 걸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에 대한 경험.

 그러나 그것은 성장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돌아올 수 없는 길에 본의 아니게 한 걸음 

들어와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점차 환한 낮이 되어가고 있는데도 그의 마음은 피로 얼룩진 듯 어두워졌다 첫 살해를  저

지른 피투성이 소년의 머리 위로 이윽고 흰 태양이 떴다.

 "놓쳤나!"

 속속 들어오는 보고를 들으며 백작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져 있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칠십

여 명에 달하는 추적자들을 벨크루즈와 아라종 일대에 풀었는데 소년의 그림자라도  보았다

는 자조차 없으니 답답하다 못해 울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그들 가운데 보리스의 얼굴을 모르는 자가 아무도 없고, 심지어 절반 이상은 전날 점심 식

사가 채 끝나기 전부터 수색을 시작했는데도 그 지경이었다. 도대체 그 놈이 도망친 시점은 

언제인 거지? 왜 아무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거냐!

 벨노어 성으로 급히 돌아와 밤새 보리스가 쓰던 방을 뒤집어엎다시피 수색했지만 물론 윈

터러는 나오지 않았다. 그 녀석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후로 처음으로 멀리 내보내게 되는 터

라 백작 자신이 일부러 눈여겨봤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숨겨서 갖고 나갔는지 모를 노릇이

었다.

 영문을 모르는 로즈니스가 아침에 깨어나자마자 달려와 오빠의 행방을 캐물었지만  백작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오빠가 졌나요? 그래서 아빠가 오빠를 쫓아낸 거예요? 그런 거죠? 네? 말씀해 주세요!"

 "시끄러우니 네 방으로 가라!"

 백작이 딸에게 이런 식으로 소리지르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에 로즈니스는 금방 눈에 눈물

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러나 어리광쟁이인 만큼 고집도 보통이 아닌 그녀였다.

 "아빠가 미워요! 오빠는 착했는데.... 아무리 졌다고 해도 어떻게  집에도 데려오지 않을 수

가 있죠? 난 오빠한테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아빠가 이럴 줄은 정말 몰랐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이 별 대꾸조차 하지 않자 로즈니스는 마음이 몹시 상해서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그러나 백작은 머릿속으로 이미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서 란지에를 데려와!"

 반쯤 끌려오다시피 해서 백작 앞에 나타난 란지에는 매우  놀란 듯한 얼굴로, 그러나 동시

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이 위협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 그 날 사냥 중에 보리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냐!

 "예?"

 백작의 눈에 란지에는 갑작스런 질문의  의도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더듬거리다가 입을 연 그는 기억을 애써 더듬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멧돼지 세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서 다들 매우 놀라서... 저는 멧돼지를 처음 봤

기 때문에 너무 무서워서 급히 말을 돌려 도망쳤습니다.  그때 도련님께서도 마찬가지로 놀

라시는 것 같았는데... 달리다 보니 어느 쪽으로 가셨는지는......."

 말만은 그럴듯했다 백작은 한쪽 눈을 약간 작게 뜨면서 날카롭게 다시 물었다.

 "분명 너희 둘이 같은 쪽에 있는 것을 보았다.  너는 그의 시종인데 멀리 떨어졌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란지에는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제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거라면 무슨 벌이든 받겠습니다. 제가 살펴

드리지 못해 도련님이 위험해지신 거라면......."

 끝까지 란지에는 보리스가 단지 행방불명이 된 걸로 아는  듯 행동했다. 백작은 어이가 없

어서 혀를 찼다. 이 녀석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지조차 모르지 않는가.  그런 

녀석한테 시간을 들여 추궁할 가치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다시 한 번 다짐하듯 소리를 높였다.

 "설마 너, 내게 감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녀석이 떠나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못 본 체 한 것이 밝혀진다면 이후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아라!"

 란지에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당황한 듯한 얼굴 그대로 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제가 도련님의 행방조차 모르는 것에 대해

서는 무슨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만.... 하지만 도련님께서 왜 저택을 떠나신다고  생각하

시지요? 단지 숲 속에서 길을 잃으신 것은 아닐지......."

 백작은 란지에의 말을 더 듣고 있지 않았다. 비서 휴에게 몸을 돌리며 명령했다.

 "계속 수색하도록 하고, 찾지 못하고 돌아온 자들의 몸수색을 철저하게 해라! 만일 그 녀석

을 보고도 거짓을 고하는 자가 있다면 이후 목숨을 보전치 못하리라고 말해라!"

 "예, 주인님!"

 백작이 계속해서 몇 가지 명령들을 더 내리는 동안 란지에는 엎드려 있다가 일어나 천천히 

물러 나왔다. 복도를 따라 걷던 그의 발걸음이 문득 멈췄을 때, 그는 문샤인 탑 2층의 그 방

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이곳으로 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저기에 들어갈 일이 없겠지.

 그는 쓴웃음을 한 번 짓고는 창 밖의 푸른 하늘로 시선을 보냈다. 거기에는 대열에서 떨어

진 작은 새 한 마리가 힘찬 날갯짓으로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손

을 올려 눈가의 햇빛을 가린 채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2. 북방 선원의 나라,

    렘므로 가며 겪은 세 가지 일들 

 대장간 주인 드와릿은 느지막이 그 날의 일을 접으려  하고 있었다. 그의 대장간은 마을에

서 약간 떨어진 화강석 채석장을 등진 곳에 있었지만 근방에 알려질 정도로 실력이 좋았기 

때문에 벌어먹고 사는데 별 지장은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은 별다른 손님이 오지 않았다. 인근 마을에서 농기구를 고치러 온 농부가 두

엇, 아버지의 녹슨 철검을 손봐 달라고 가져온 소녀 한 명이 전부였다. 그래도 며칠  전부터 

맡아놓은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늘 저녁 시간 전까지 일했다.  나이가 들었지만 결혼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자식도 없었기에 일하는 시간은 그가 내키는 대로였다.

 저녁 생각도 별로 없는데 오늘은 마을로 나가서 맥주나 몇 잔 마실까.

 풀무니 수건이니 하는 것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가죽 앞치마를 벗어 걸쇠에 거는데 저만치 

들판 쪽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농번기가 다가오는 봄철이라 할 일 없이 돌아다

니는 사람은 드문 편인데, 멀리서 온 여행자인가 싶었다.

 그림자는 점차 다가왔다. 바람이 긴 날개처럼 들판을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그 바람  속에

서 검푸른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었다.

 말을 탔고 여행자의 몸차림이었지만 어른치고는 키가 좀  작다 싶었다. 대장장이가 장갑을 

벗어 선반에 얹고 돌아보니 그림자는 이미 몇 걸음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직 앳된 뺨을 가진 소년이었다 그런데 온 몸이 물에 빠졌다가 방금 나오기라도 한  것처

럼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 모양이니 당연히 소년은 떨고 있었다. 봄이 깊었다지만 아직  저

녁 공기는 싸늘했다.

 소년은 대장장이 앞에 오더니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일은 끝내신 건가요?"

 소년은 가진 것이 별로 없어 보였다. 안장에는 도시락 주머니 비슷한 것이 매달려  있었고,

손에는 검이 한 자루 들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검의 모습이 희한했다. 오랫동안 대장장이로 

잔뼈가 굵어 온 자신조차 한 번도 보지 못한 재질로 만들어진 칼집이었다.

 "무슨 볼일인데 그러느냐?"

 "이 검의... 칼집을 새로 구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대장장이는 저도 모르게 놀란 목소리로 말하고 말았다.

 "그 검을?"

 그가 보기에 칼집은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낡기는커녕 흠집조차 없는 순백의 아름다운 

표면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거기에 꽂힌 검과 아주 잘 맞았다. 그런 칼집을 왜  바꾸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년은 대장장이의 기색을 보고는 그런 생각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직 어린데도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눈가는 더욱 움푹하게 그늘져 있었다. 못 볼  것을 많이 본 눈... 대장장이

가 문득 떠올린 생각이었다. 소년은 단순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새 칼집은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는 단순한 것이라면 좋겠습니다. 물론 돈은 치르겠어요. 

아아, 그리고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가능하다면  다른 검의 칼집을 그냥 제게  주시겠습니

까? 잘 맞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대장장이는 소년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죽은 조카도 저와 비슷한 날카로운 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를 죽인  자를 

죽이겠다고 말했고, 결국 자신의 목숨조차 원수에게 맡기는 것으로 짧은 생애를 마무리지었

다. 그는 형을 말리지 못했고, 조카를 말리지 못했으며, 홀로 살아남았다. 아이를 낳지  않겠

다고 결심한 것은 밤을 틈타 조카의 시체를 훔쳐 몰래 묻어주던 무렵 이었던가.

 "들어와라."

 대장장이 드와릿은 대장간 안에서 자신이 만든 바스타드 소드들을 모조리 끄집어내어 소년

에게 보였다. 원하는 것을 가지라고 눈짓했다. 그 가운데는 영주나 인근의 부자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훌륭한 것들도 섞여 있었다. 청동에 보석의 원석이 아로새겨진 것도 있었고, 정교

한 문양으로 표면을 다듬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한참을 살펴보다가 마치 투핸드소드(two-hand sword)에나 어울릴 법한 폭

이 넓고 묵직한 칼집을 골랐다. 끝이 닳지 않도록 둥그런  쇠가 박힌 투박하고 거친 모양새

였다. 그러더니 소년은 자신의 칼을 뽑았다.

 아, 하고 대장장이는 경탄했다. 사십여 평생을 대장장이로만 살아왔는데 아직껏 저런  검을 

보지 못했다니 헛살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광채와  그 예기(銳氣), 완벽한 선과 

단호한 이음매를 보는 눈이 시릿할 정도였다. 소년은 흰 칼집을 내던지고 투박한 칼집을 집

어 검의 광채를 가렸다. 보고 있는 대장장이가 안타까워질 정도였다. 저토록 완벽한  결합을 

떼어버리려 하다니, 저토록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하나의 신물(神物)을 어지럽히다니.

 "이걸로 하겠습니다. 얼마를 치르면 될까요?"

 "꼭 그렇게 해야겠느냐? 지금 그건 네 훌륭한 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탐욕이 아니라 검이라는 존재에 대한 진지한 애정으로  대장장이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표정은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이 칼집은 어차피 버릴 테니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

 대장장이는 고개를 젓다가 잠시 후  다시 끄덕거렸다. 소년이 내려놓은  흰 칼집을 집어든 

그는 홀린 듯한 눈동자로 그것을 훑어보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돈은 치를 필요 없다. 아니, 오히려 내가 네게 이 칼집의 값을 쳐주어야 할 것 같구나."

 소년이 미처 거절하기도 전에 대장장이는 대장간 한구석을 뒤지더니 누런 가죽으로 된 특

이한 허리띠를 하나 찾아 내주었다. 두 갈래 가죽끈을  엇갈리게 해서 어깨까지 이어지도록 

만든 그것은 묵직한 검을 허리 뒤로 돌려 가로로 걸고 다니도록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재료

로 쓴 가죽과 버클의 만듦새는 말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소년은 거절하려다 그만두고 짧은 말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지금껏 들

고 다니던 검을 찼다.

 둘은 길게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소년은 말에 올랐고, 아주 먼 곳으로 멀어져 갔다.

 비가 내렸다.

 이미 젖어 있기에 더 이상 젖지 않았다. 온 몸에서 물이 흘러내렸지만 그것이 오히려 마음

에 들었다. 몸에서 한없이 씻어내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이렇게  계속 젖어 있는 편이 좋았

다. 피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물 속에 푹 잠겨 있고 싶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짧은 망토는 묵직해지고 부츠에서는  물이 질벅거렸다. 지칠 대

로 지친 말을 잠시 쉬게 하려는 마음에서 걷기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여행을 멈출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낮에서 밤, 밤에서 낮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하늘에 번진 붉고 푸른 광채

는 단색의 하늘보다 항상 황홀했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어째서 지는 햇빛이 보이는 것일

까. 참으로 이상한 날씨구나.

 비도 그치고 어두워질 무렵 들어선 곳은 작은 마을이었다.  정말로 작아서 마을 안의 모든 

집을 합쳐도 서른 채도 안될 법한 그런 곳이었다. 돈은  있었기 때문에 어딘가에 유숙을 청

할 셈이었다. 아직 어리긴 했지만 이제 어엿한 소년 검사로 보이는 자신이었으므로 작년 여

름이 끝나갈 무렵처럼 사람들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을 안쪽으로 들어설 무렵, 그는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죽여라!"

 "저 놈, 죽여버려!"

 사람들이 한 사람의 희생자를 둘러싼 채 욕을 퍼부으며 돌을 던지고 있었다. 창칼을 든 사

람은 없었지만 쇠스랑이나 낫을 든 사람은 있었다. 다행히도 찌르지는 않았고, 대부분은  발

길질이나 썩은 사과를 던지는 정도로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했다.

 "어딜 남의 동네에 와서 그딴 말도 안 되는 수작이냐!"

 "저런 놈은 국왕님께 보내서 단숨에 목을 치게 해야 돼!"

 "퉤! 멀정히 조용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괜스레 그런 문제에 끌어 들이지 마라!"

 지나쳐 걸을 수가 없었다. 둘러싸인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 사람은 예순은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렇게 핍박받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또한 끼여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신도 깨끗하고 정직한 인간은 이미 아니었다. 남

의 불행을 좀 지나친다고 해서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또한 돕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랴?

 돌과 가래침 세례를 받던 노인은 잠시  후 벌떡 일어나더니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버럭 외쳤다 둘러싼 사람들이 움찔할 정도로, 그러나 보리스의 귀에는 

그 말이 얼른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그 내용이 너무 낯설었기  때

문일까.

 "......너희는 사람답게 사는 것을 저버린 자들이야! 어서 날 죽여라! 당장 죽이란 말이다! 이

제 결코 다시는 너희 같은 자들을 위해 싸우지 않겠어!"

 분노한 사람들의 발길질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노인은 더 말하지 못한 채 몸을 구부리고 

자리에 쓰러졌다. 피와 침... 흙과 먼지에  뒤엉켜 흩뿌려지는 인간의 흔적을 보며  보리스는 

뒷걸음질쳤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노인을 죽이지는 않았다. 화풀이를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자 그들은 욕

을 내뱉으며 하나 둘씩 떠났다.

 그 자리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보리스는 한 걸음  다가가 섰다. 그리고 쓰러진 노

인을 내려다보았다. 노인이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까지도 마음 속에 남은 한 사람이 했던 말과 같았기 때문일까.

 "......."

 보리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도 노인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누

구이든 상관없다는 듯,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뭐지... 큭, 아직까지 날 비웃을 자가 남아  있었나... 컥, 쿨럭! 가버려라! 어차피 뒤집히지

도 않을 세상......."

 보리스는 나지막이 물었다.

 "아저씨는 공화국 지지자입니까."

 노인의 시선이 문득 보리스 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제야 보리스는 노인의 눈이 거의  보이

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보리스의 턱 언저리에 어설픈 시선을 보낸 채로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목소리는 아이 같은데 모습은 어른이로군 이제 와서 왜 내게 그런 걸  묻

는 거요? 당신이야말로 날 저 국왕놈에게 넘겨 목이라도 자르게 할 셈인가."

 죽기를 각오하지 않은 다음에야 '국왕놈' 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리

스는 여전히 선 채로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공화국을 지지하는 건가요? 트라바체스 공화국 같은 꼴이 그렇게  좋

아 보인단 말씀입니까?"

 "그건... 모르는 소리야......."

 노인은 천천히 일어나 바로 앉았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 눈을 허공을 향해 굴리며 비교

적 똑똑한 목소리로 말했다.

 "트라바체스는 공화국이 아냐. 그 나라에서 평민들이 투표에  참여 하던가? 오직 영주놈들

이 선제후를 뽑고, 선제후들이 통령을 뽑을 뿐이지. 몇 명 안 되는 자들 사이에서 강자가 되

려니 사분오열하여 서로 전략적  제휴만 노리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고, 그  와중에 겉모양 

만... 프흡, 쿨럭! ...다른 신념들을 내세워 수많은 정파들이 탄생하는 거야. 정권을 잡기만 하

면 그것으로 그만, 갑자기 세력이 약화되지 않는 한 종신에 가까운 통령직, 대대로 세습되는 

영주의 장원, 거기에서 뽑히는 반 세습의 선제후.......  절반뿐인 공화제는 그렇게 무섭지. 그

렇게 되지 않으려고 우리 아노마라드 공화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국민 총 투표를 실시하

려 했어. 하지만 단 한 번도... 오히려 계속되는 귀족놈들의 켈티카 공략을 막는데  급급했을 

뿐 그렇게 애썼던 국민 투표는 켈티카 내에서도 단 한  번 시행되는데 그쳤단 말이야. 켈티

카 공방전... 사방을 포위한 신국왕군 놈들의 총공격을 기다리며 새웠던 사흘 밤... 결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지. 아니, 죽어도 잊을 수 없을 거야. 수 차례에 걸친 항복 권유를 받아들

이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 마지막  새벽이 밝을 때 수천의 군대가  몰아닥쳐 인간 사슬을 

이루고 있던 동지들을 갈가리 난도질하는 것을 난 분명히 보았어. 흥... 그 누가 다시 산  시

체가, 가축 같은 노예가 되기를 바라겠나? 저 전쟁 포로들만 노예인 줄 아나?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들은 모조리 노예야. 저 귀족들만 빼고!"

 보리스는 말문이 막힌 채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투표해서 대표자를 뽑는다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일인지,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과

연 평민이 영주나 귀족과 같아질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민과 영주란 태어날 때

부터의 신분적 격차보다 실제로는 돈과 권력의  유무에서 더 큰 차이가 나는 것  아니던가? 

투표를 하게 된다고 돈이 생기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한 돈이 없는 자에게 권력

이 생길 리 만무한 것이다.

 "정말로 그것뿐입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은 이유가 겨우 자신의 투표로 대

표자를 뽑을 수 있는 권리, 그것 하나를 얻기 위해서란 말입니까?"

 보리스의 질문에 노인은 이상하게도 힘을 얻는 것처럼 보였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그 대표자는...  국민의 지지가 없으면 다시 실각하는  거다. 임기는 

정해져 있고, 그 안에 국민이 지지할 만한 정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만일  임기 안

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국민에게는 그를 쫓아낼 권리가 있어. 그러면 국민이 지지할 만한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올바른 법의 제정이야.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

을 만들어서 올바르게 시행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만민이 바라는 정치가 되는 거지."

 보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그 법이 잘못 제정된다면? 아니, 올바른 국왕이 있어서  처음부터 잘 정치한다면 그런 법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지요? 게다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 옳은 일만을 생각한다는 보

장이 어디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이라고 해서  선량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들 역시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린아이를 팔아 넘기고 남의 물건을 뺏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족속인

데 그들에게서 무슨 올바른 합의가 나올 수 있죠?"

 그것은 뼈아픈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조건 없이 선량했던 사

람이 있던가? 아니, 그런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고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남을 등쳐먹

을 궁리만 하고 있는, 기회가 온다면 곧장 강도로 돌변할 수 있는 인간뿐이지 않았는가?

 "뼛속까지 악한 사람은 드물지... 그런 결정의 문제를 공공의 영역으로 끌어내게 되면 사람

들은 사회적인 정의에 마음이 쏠리게  된다. 평소에는 저질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있더라도 

자신을 다스리는 자가 악을 저지르기를 바라는  사람은 적어. 아니, 모두 올바를 필요도  없

다. 그 가운데 절반 이상만 올바르다면  돼. 투표의 결과는 옳은 쪽을  가리킬 테니까. 옳은 

것을 바라는 열망은 결국 전달된다. 그것이 전달될 통로만 있다면 말이지. 그게 바로 투표를 

비롯한 권리들이야. 빈민이든 평민이든 누구나 지휘자가 될 투표의 장에 후보로 나설 수 있

고, 또 지지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공화국이다.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은 기득권을 가진 저 

귀족들 뿐이야. 악한 왕을 몰아낼 권리가 우리에겐 있어야만 하는 거다."

 보리스는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저라면 전 국민의 절반이 올바르기를 바라기보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이 올바르다는  쪽에 

걸겠습니다. 무리 지은 사람들은 처음엔 서로 눈치를 보지만  한 방향으로 횝쓸리기만 하면 

더 큰 죄도 서슴없이 저지르지요. 악한 왕을 몰아낼 권리, 좋습니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 파

괴되는 사람들과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보상받지요? 세상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그걸  잃고 나서 모든 사람이 행복해졌으니  수긍하라고 한다면 전 

거부하겠습니다. 더구나 사람이란 옳은 일보다는  이익에 민감한 법이고, 뭔가 이해  관계가 

걸려 있기만 하다면 서슴없이 악한 쪽을 지지할 겁니다. 그런 불완전한 것을 위해 목숨보다 

아끼고 있는 것들을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노인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자네는 귀족답지 않은 귀족인 모양이군."

 그 말은 한때 란지에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보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공화국은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지만, 그들을 인간답게 해주는 나라다. 인간이기에 

피도 흘릴 수 있는, 그런 나라. 인간이 아니었던 자들은 인간이 되는 순간 죽어도 여한이 없

을 수 있어. 처음부터 가졌던 것이 있는 자들만 잃을 수 있는 거지. 잃을 것이 없는 자에게 

두려울 게 무에 있겠나?"

 어쩌면 그렇게 과거 자신이 들었던 말과 같을 수가 있을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보리스는 문득 알 수 없는 압박감 같은 것을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저 노인은 공화국을 대단히 낭만적인 무엇으로 느끼는 사람인 듯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공화국을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렇게 이상을 위

해 자신의 목숨 따위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다고 말한단 말인가? 트라바체스에도 이념을 

논하는 자는 많지만 그걸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고, 오히려 자신의 머리가 되는 

주군 또는 주인의 명령 몇 마디에 목숨을 걸었다. 어떻게  눈에 보이는 권력자가 아니라 미

래조차 불분명한 하나의 정체(政體)를 위해 저토록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가 있을까?

 "늙고 병들어 이젠 쓸모없는 공화주의자지. 공화주의자, 그건 인간다운 삶을 위해 목숨이라

도 바치고자 하는 자들의 이름이다."

 노인을 처음 보았을 때는 사람들에게 매나 맞는 어리석은 자로밖에 보이지 않았었다. 그가 

문득 외쳤던 한 마디만 아니었다면 멈춰 서서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공화국이란 인간을 분열시키는 존재다, 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분열이 가져오는  비극

이란 폭군의 정치보다 몇 배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한 명의 폭군을 모두 증오

하고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아끼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여야 하는 상황에 

비하면.

 그러나, 확실히 공화국이란 참으로 이상한 존재였다.... 사람들의 마음을 중독시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도록 빠져들게 하는 마력적인 흡인력을 가진 존재였다.

 노인은 일어났다. 그러더니 천천히 마을 바깥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트라바체스라, 가보고 싶은 곳이군. 거기에는 또 어떤 인간 아닌 자들의 비극이 있을까."

 노인이 발을 끌며 멀리 떠나갈 때까지 보리스는 그 자리에 못 박힌듯 우뚝 서 있었다.

 트라바체스는 자신이 돌아갈 수 없는 나라였다. 그 나라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애증이 자신의 가슴을  짓눌렀다. 아마 트라바체스에서 태어

나고 자란 자가 아니라면 그 비극을 다 이해할 수는 없으리라.

 그리고 아노마라드, 이곳 역시 그가 머무를 수 없는 나라였다.

 '공화국' 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괴물에 대해 생명과도 바꿀 열정을 불사르는 사람도 있었

다. 낭만적인 늙은 공화주의자 뿐만 아니라 란지에와 같이 영리한 소년의 마음조차 온통 사

로잡아 버린 존재인 것이다. 이곳에도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역사가 있었다. 다시는 공화국으

로 되돌아갈 수 없을 지라도, 이곳은 천혜의 아름다운 국토만큼 행복만이 가득한 땅은 아니

었다.

 이 나라의 그 풍요로움을 한 때 증오했었다. 그러나 그 땅에서도 가지지 못해 저토록 새로

운 나라를 열망하는 사람이 있었다. 풍요란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지지는 않는 것일까.  동전

의 양면처럼 두 가지 얼굴을 가진 아노마라드, 그는 그 두  가지 면에 모두 적응할 수 없었

다.

 이 나라를 떠나자, 그는 생각했다. 다른 곳으로 가자.

 트라바체스에서는 그를 잡으려는 블라도 삼촌의 손길이 있을  테고, 이곳에서 당연히 백작

이 그를 찾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들을 억지로 이해하려 

하기에는 그 자신에게 주어진 고뇌가 너무나 컸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논할 넓은 땅이 아니라 방해없이 홀로 숨을 수 있는 외딴 동굴이었다.

 문득, 월넛 선생이 말해 주었던 북방 야만인의 땅이 생각났다. 외부에서 들어온 자들을  싫

어하여 머리 가죽을 벗긴다고 하던 야만인들이지만 적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강요받지는 

않아도 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북방 선원의 나라, 야만인과 공존하며 살아간다는 거친 국민

들의 땅.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차고 검푸른 파도의 땅.

 렘므.

 이제 그는 추위의 땅으로 가고 싶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기묘한 풍요의 됫면에는 빈곤자들

의 지독한 열망이 새겨진 이 땅을 떠나기를 원했다.

 봄이 끝나가고 있었다.

 갈색 망토 안쪽으로 허름한 칼집의 검을 비스듬히 차고,  길고 검푸른 머리카락과 훌쩍 큰 

키를 가진 소년이 번화한 길거리에 서 있었다. 그 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고 있

었다.

 아노마라드 안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시인 잔포드는 국경 근처 길목에 위치한 도

시인지라 곳곳에 외지인들이 들끓었다. 그 가운데 특히 많은 것은 상인들이었다. 오를란느와 

아노마라드, 그리고 렘므 왕국에 이르기까지 세 나라의 영지가 맞닿아 있는 대륙 최대의 호

수 로젠버그(Rosenberg) 호는 대륙 북부 상업의 중심지였고, 잔포드는 바로 그 호수의 남쪽 

호반에 위치해 있었다. 조금만 더 동쪽으로 가면 렘므와의 국경이었다.

 "훠어이! 드메린 칼츠 님의 행차이시다! 얼른 길을 비켜라!"

 귀족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단지 이름뿐이고 작위를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런 건 아

닌 것 같았다. 큰 거리를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갈라져 흩어지고 그 중앙에 당

당한 가마의 행렬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요즘 시절에 마차도 아니고 가마라니,  대단히 

특이한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화려한 금빛 천으로 만든 휘장 주위로 정교하게 세공한 보석이 빙둘러가며 십여 개나 장식

된 것이 보였다. 가마꾼들의 모습 또한 같은 복장으로 통일된 것을 보니 대단히 돈 많은 사

람의 행차인 모양이었다. 꼭대기에는 가문의  문장으로 보이는 것이 새겨져  있었는데 바로 

금빛 까마귀였다. 까마귀는 재보를 모으는 짐승이니 아마도 이 자의 정체는 상인일 터였다.

 사람들이 곳곳에서 수군대며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메린칼츠라는 자는 외지인들

에게조차 유명한 상인인 모양이었다.

 지나쳐 가려나 했던 가마가 그  자리에서 멈추더니 바닥에 내려졌다.  한쪽 휘장이 들리고 

온통 비단과 보석으로 치장한 풍채 좋은 남자가 걸어나왔다. 키도 크고 금발에 비교적 잘생

긴 얼굴인데 배만은 이상할 정도로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아마 저  배 때문에 마차보다는 

가마를 선호하는 모양이었다.

 "칼츠 상단의 대표이신 드메린 칼츠  님께서 오셨다! 얼른 나와서 인사드리지  않고 뭘 하

나!"

 우스운 광경이 벌어졌다. 가마가 멈춰 선 곳은 3층으로 된 대형 주점의 앞이었는데 급사들

이 혼비백산해서 뛰어들어가고 곧 주인으로 보이는 잔뜩 치장한 여자가 구르듯 달려나와 허

리를 굽혔다. 그 뒤로 대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같이 코가 땅에 닿을  듯 절을 하고 

있었다.

 "어, 어쩐 일이십니까, 이런  누추한 곳까지 직접 오시다니요.......  아랫사람을 시켜 기별만 

주셨으면 저희 쪽에서 만사 제치고 달려갔을 터인데......."

 여주인은 보기에도 안쓰러을 정도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전에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강대한 상단의 인물이라 해도 저토록 어쩔 줄 몰라하

는 것은 확실히 수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배를 내밀고 선 칼츠의 호통이 떨어졌다.

 "어쩐 일로 왔냐고? 지금 그걸 몰라서 묻고 있는 겐가! 정말 몰라서 물어? 지금 나와 장난

을 치자는 건가 뭔가!"

 여주인을 비롯한 주점의 사람들은 모두 부들부들 떨었다.  칼츠라는자의 한 마디가 주점의 

문을 영영 닫게 할 수도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구경거리를  보러 모여든 사람들도 다들 불

안한 얼굴로 그 모습을 주시했다.

 "저, 저로서는... 정말로 무슨 일로 그리 역정을 내시는지......."

 드메린 칼츠는 더욱 분노한 얼굴이 되었다. 한층 더한  불호령이 주위 사람들이 귀를 막을 

정도로 쩌렁하게 울렸다.

 "내 하나 뿐인 아들녀석! 그 녀석이 여기 왔지 않아! 설마 모른다고 잡아뗄 생각은 아니겠

지!"

 여주인의 낯이 흙빛이 되었다. 그녀는 뒤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그 아들이란 자를 본 사람

이 있으면 얼른 말하라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른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그 뒷말을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듯, 여주인은 갑자기 바닥에 납작 엎드리면서 애원하는 목

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어르신...... 귀하신  아드님께서 본래 변장을 즐기시는 터라 

우매한 저희가 혹시나 알아보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된 거라면......."

 그때 보리스는 자기 옆에 선 소년 한  명이 소리 죽여 키득키득 웃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

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에서 웃다니 도대체 겁이라고는 없는  녀석인가 싶었다. 그러나 소년은 

남루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하얀 뺨에는 귀하게 자란 듯한  기품이 흘렀고, 머리카락은 햇

빛처럼 곱게 반짝이는 금발.......

 보리스는 배가 나온 칼츠 씨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얼굴 윤곽이 비슷한 

것은 물론, 금발의 빛깔조차 거의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소년을 바라본 그는 문득  화

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잠시."

 손을 뻗어 소년의 어깨를 잡고  사람들 속으로 끌어당겼다. 웃어대고  있던 소년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낯선 소년인 보리스를 쳐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를  보는 순간 갑자기 예

프넨이 연상되었지만 이 소년이 가진 것은 근심 걱정의 기색 따위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

는 해맑은 눈이 었다.

 "왜 그래?"

 묻는 것조차 아이처럼 천진했다. 정말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모든 책

임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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