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Cutaway
1. 그리고 봄이 왔다
아노마라드 왕국력 987년의 봄이 밝았다.
벨크루즈의 봄은 역시 아름다웠다. 벨노어 성 일대를 비롯한 구릉의 들판은 녹색의 풀잎과
각색의 꽃망울들로 화려하게 뒤덮였다. 성을 둘러싼 정원에는 가문의 문장에도 들어있는 하
얀 마르그리트 꽃이 피어나기 시작해서 초록빛 벌판 곳곳에 흰 리본을 매어놓은 것처럼 보
였다. 숲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앵초니 제비꽃이니, 각종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핀 4월이었다.
곧 나무들도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흰색과 분홍의 라일락들이 진한 향내
를 내뿜었고 소박한 목련도 흰 꽃잎을 갸웃이 내밀었다. 성문 앞에는 복숭아나무의 꽃이 연
분홍빛 구름처럼 탐스럽게 피어올랐다.
창문만 열어도 수십 가지 향기가 흘러들어 나날의 아침을 신선하게 깨웠다. 성 앞을 흐르
는 작은 시냇가에 나갔더니 뾰족하게 핀 수선화가 청초한 옆얼굴을 살짝 돌린 것이 보였다.
물 흐르는 소리마저 향기로운 봄이었다.
생일인 4월 8일이 지나 로즈니스는 열세 살이 되었다. 그러나 로즈니스는 나이만 먹었다
뿐이지 아직 철없는 꼬마 아가씨 그대로였고,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 열두 살인 보리스
쪽이 오히려 사뭇 달라졌다. 본래부터 어른스러운 성격이었지만 겉모습만은 또래 꼬마와 다
를 것 없었던 보리스는 갑작스레 소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겨울 사이에 놀랄 만큼 쭉쭉 커진 키가 이젠 165센티미터, 벨노어 성에 온 이후로 무려 7
센티미터 이상이 자랐다. 처음에는 본래 나이에 비해 키가 큰 편이 아니어서 란지에보다도
작았는데 이제는 훌쩍 뛰어넘었다. 로즈니스하고는 이제 머리 하나 만큼은 차이가 나서 누
가보아도 오빠처럼 보이게 되었다.
전체적인 체격도 훨씬 소년다워졌지만, 유난히 팔다리의 근골이 강해지고 단단해졌다. 본래
어깨에 닿았던 머리카락도 한결 자랐다. 처음에는 월넛이 장난삼아 묶어 주었던 머리였지만,
이제는 정말로 묶지 않고 훈련을 하는 것은 무리일 정도가 되었다. 어른스럽던 눈빛은 한결
깊어졌다. 아직 수염이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잘 깎은 조각처럼 발달된 턱선은 갓 면도한
듯 파르스름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렇듯 갑작스런 성장에 가장 놀란 사람
은 보리스 자신이었다. 한동안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일부러 거울을 보지 않고 지냈을 정도였다. 왜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전보다 규칙
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훈련한다는 것, 그리고 주위의 환경이 조금 좋아 졌다는 정도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롱고르드의 진네만 저택에 있었을 때도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한다든가, 피로한 일
을 강요당한다든가 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여기는 무엇보다도 자연과 기후가 그가
나고 자란 트라바체스와는 완연히 달랐다. 사철 서늘한 기후 탓에 성장이 억눌려 키 작은
관목만 무성한 그곳과는 달리 아노마라드, 특히 남부 아노마라드는 모든 생물이 자유로이
생육하는 풍요로운 땅이었다. 흡사 모든 물자가 필요의 몇 배로 남아도는 벨노어 성의 모습
과도 같았다.
잔에서 술이 넘쳐도, 남은 음식이 즐비한 식탁에 새 요리를 가져와도, 누구도 탓하지 않는
화려한 파티. 필요한 정도의 몇 배나 되는 옷감을 들여 주름이 많은 드레스를 만들어 입고,
창고에서 썩은 곡식을 비료 삼아 밭에 뿌리는 그곳에 자신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곳에 적응해버린 자신의 몸이 달갑지 않았다. 비록 사랑스럽지 않은 모국이라 해도
자신은 그 땅의 사람이었다. 특히 롱고르드, 그 키 작은 풀의 초원은 그의 고향이었다. 그와
예프렌의 추억이 깃들인 땅이었다.
"응?"
보리스는 책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책 읽기에 아예 취미를 붙여버
린 양오빠 뒤에서 맴돌며 심심해, 심심해를 연발하던 로즈니스가 뭔가 이상한 얘기를 꺼냈
던 것이다. 책에 정신을 팔다 보니 정확히 듣지 못했다.
"방금 뭐라고 그랬니?"
로즈니스는 약간 삐진 듯 입술을 내밀더니 불쑥 말했다.
"나 어쩐지 오빠가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고. 이제 곧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게 좀 아쉽단
말야. 이 말 했어."
"......."
보리스는 로즈니스의 녹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벨노어 성에 온 것은 9월 초, 로즈니스를 처음 만난 것은 8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분명 로즈니스는 아노마라드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녀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함께 지내면서 점차 어떤 성격인지 알아가게 되고, 그리 나쁜 아이는 아니란 것도
알았지만 그래도 역시 친근감은 들지 않았다. 솔직한 로즈니스, 미인이 되고싶어하는 소녀,
오만하지만 잊어버리기도 잘하는 꼬마 아가씨, 재미있는 일을 보고 못 견뎌하면서 깔깔 웃
을 때는 귀족답지 않은 사랑스러움도 가지고 있는 그녀.
그러나 자신은 언제나 적당히 거리를 두고 로즈니스를 대해 왔었다. 이곳에 머무르는 한
무례하게 굴 수는 없었고,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는 것이 편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
의 존재는 자신이 벨노어 백작과 하기로 한 거래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자신에게는 그 거
래 기간 동안 그녀를 점잖게 대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끝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아마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보고 싶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적당히 대해 왔는데 그런 자신에게 정이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보리스의 마음도 약간 움직였다. 좀 미안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길 떠나더라도 나중에 다시 와 줄 거지? 나 보러 다시 올 거지?"
로즈니스가 미소를 지으며 보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성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몇 명 외에는 결코 보여주지 않는 미소였다. 그걸 알기에 보리스
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이 상대를 사랑하는 한,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는 듯 자신감이 깃들인 미소였으니까.
그렇기에... 역시 너에게 마음을 열 수는 없는 거다.
내 추운 세계 안으로 넌 결코 들어올 수 없을 테니까. 찬바람만 새어들어도 놀라 달아날걸.
"응. 보러 올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실은 돌아올 리가 없는 데도,
그는 로즈니스의 미소에 화답하듯 같이 웃음까지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로즈니스는 버릇대로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정말이지? 꼭이다, 꼭 약속하는 거야?"
"그래."
자신이 여길 떠나 어디로 가게 될 지는 몰랐다. 그러나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점
만은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잊어버리겠지. 너의 존재 같은 건.
그리고 너 역시 조금 더 지나면 나의 존재 같은 건 잊겠지.
열세 살이 된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일까.
밤이었다.
겨울에도 창문을 열어 놓고 잤던 월넛의 방 창가에 흰 새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푸드덕,
한 번 날개 소리를 내더니 조용히 부리를 까딱거렸다.
침대에서 사람이 일어났다.
"요즈렐?"
창가로 다가온 그림자가 손을 내밀자 흰 새가 선뜻 날아올라 그 위로 올라갔다. 사내의 팔
뚝만한 몸길이에 순백의 깃틸과 황금빛 부리를 가진 새였다. 비둘기라고 하기엔 꼬리털이
좀더 길었고, 자태 또한 훨씬 우아했다. 새의 빨간 눈동자는 술잔 속의 포도주처럼 말갛게
빛났다.
"네가 직접 오다니 웬일이냐? 네 부하들은 어쩌고?"
월넛이 팔을 들어 새를 머리 근처로 가져가자 황금빛 부리가 그의 귓가로 다가가 조그맣게
재재거렸다. 새의 울음소리는 아니었다. 월넛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약간 어두
웠다.
"그렇구나. 알겠다."
월넛은 새를 존중하는 것처럼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다시 창가로 걸어갔다. 팔을
창 밖으로 내밀자 새가 다시 푸드득, 하며 날아갔다. 하얀 자태는 곧 검푸른 하늘 너머로 사
라져 버렸다. 달은 없었다.
"예, 좋은 결과를 보여드리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햇빛 잘 비치는 응접실에서 벨노어 백작 내외와 마주 앉았다. 열어 놓은 창문 너
머로 복숭아꽃의 향기가 흘러 들어오는 날씨 좋은 오후였다. 몇 마디 일상적인 대화가 오간
다음에 백작은 수련의 성과에 대해서 물었다.
"그렇단 말이지. 선생과 마음이 잘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수련이 정말로 잘 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대답하기 전에 조금쯤 망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보리스는 침착 한 어조로 명료하게 답했다. 그게 사실이었든,
아니었든.
물론 그도 부담은 느끼고 있었다. 백작은 며칠 전에 대결의 날이 5월 17일로 정해졌다고
통보해 주었다. 상대 소년은 벌써 월넛 선생이 말했던 실버스컬 대회를 준비할 정도의 실력
이라 했다.
어쩌면 보리스를 부추기기 위해 백작이 거짓 소문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
느 쪽이든 좋았다. 최근 보리스는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아직 월넛에게서 윈터러를 빼앗
지는 못했지만 낮에는 근력 훈련(어느새 이렇게 불리고 있었다)을 하고 밤에 짧게 대결하는
일과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24시간 중에 단 한 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긴장과 집중을 배가시키는지는 이제 보리스 스
스로도 깨닫고 있었다. 그 한 시간을 위해 나머지 23시간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컨디션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규칙적으로 휴식하고 잠들고 식사했으며, 거듭되는 훈련 외에 달리 흥분
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피했다. 그리고 밤이 오면 온 정신을 집중하여 낮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월넛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월넛도 막대가 아닌 검을 들고 보리스를 상대했다.
물론 윈터러를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보리스와 조건이 같은 것이다. 둘의 실력은
아직도 현격하게 차이가 났지만, 이제 보리스도 자신의 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서서
히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단순한 검술, 또는 오랜 훈련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알 수 없는 흐름을 쫓아,
또는 그것을 거스르거나 가로지르며, 그 모든 동선들이 마주치는 교차점을 찾고 있는 것이
다. 현재의 상태를 이대로 지속시키고자 할 때, 지금의 교착 상황을 깨고자 할 때, 똑같이
가는 체 하면서 의표를 찌르는 반격을 하고자 할 때, 그 모든 것은 흐름의 방향을 아는 것
에서 시작되었다. 그 방향을 알고서야 그것을 거스를 수도, 피할 수도, 뛰어넘을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그가 능숙하게 대처하는 기술은 아직 부족했지만 흐름을 읽는 법만은 하나씩
확실하게 깨쳐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월넛도 그의 그런 변화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문제 말인데......."
백작이 빙긋 미소를 짓더니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미 봄이 오기 전부터 몇 번인가 들어
왔던 이야기였다.
"약속대로 네가 이번 대결에서 이긴다면 너에게 주겠다고 했던 그 상에 대해서 말이다. 네
가 다른 것을 원치 안는다면 꼭들어주고 싶은게 있는데 말야."
"뭐죠?"
몇 번인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머뭇거렸었다.
"네 가족을 돕고 싶구나."
전혀 뜻밖의 이야기였다. 보리스는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약간 치켜떴다가 나지막이 말했
다.
"제게 가족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 네가 물려받았어야 할 집을 차지하고 있는 삼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란
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인데 어때, 네가 맞출 수 있을까?"
그에게 다른 가족이 있었던가?
자신이 모르는 가족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가정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아직껏
존재조차 모르는 가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든 없든, 죽든 살든 관계할
바가 아니었다.
"송하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설명해 주십시오."
백작은 곁의 아내를 잠간 바라보고는 빙긋 웃었다. 백작부인도 평소 같지 않은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야기가 된 모양이었다.
"게는 형이 있다면서?"
뜻밖의 충격이 보리스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형이라니?
지금껏 말이 없던 백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 아버지는 트라바체스에 자주 드나드는 분이라 진네만 가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아볼
수가 있으셨단다. 원한다면 네 삼촌의 요즘 소식도 들려줄 수 있을 정도지. 하지만 역시 형
의 소식을 더 알고 싶지? 진네만 가문에 아들이 둘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서 벌써 작년
겨울부터 죽 행방을 찾고 재시단다. 어째서 너와 혜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친형제
간인데 보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하셨어. 곧 좋은 소식이 전해져 올 거다."
"실은 이미 좋은 소식이 있지."
"어머, 그래요?"
보리스는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의 형은 예프넨 한 명뿐
이고, 그는 죽었다. 자신이 직접 죽음을 보았고 손수 그 얼굴에 흙을 뿌렸으니까. 지금 자신
앞에 앉은 저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매우 흡사한 외모에 나이도 딱 맞는 젊은이를 찾았다는 소식이 오늘 전해져 왔다오. 다만
기억을 잃은 듯해서 무얼 말해도 이해하는 눈치가 아니라는군. 진네만 가문의 일이나 보리
스의 이름을 말해줘도 통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오. 그렇지만 실성한 것은 아니고 하니 곧
좋아질 수 있겠지."
"잘 되었군요! 언제 데려올 수 있답니까?"
감당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간절히 사실이기를 바라는... 부조리한
감정이 솟아나 가슴속을 팍 메웠다. 숨조차 내쉬기 힘들었다. 그것이 사실이기만 하다면, 예
프넨이 그를 향해 미소짓는 얼굴을 단 한 번만 다시 볼 수 있다면, 남은 생애를 다 내놓아
도 아깝지 않을 텐데.
애써 잊으려 했던 고통스러운 소원이 갑자기 그를 사로잡았다. 마치 이미 결과를 알고 있
는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간절히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듯이, 이미 일어나 버린 비극을
되돌릴 수 있을 것처럼.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다. 불가능한 갈망이었다.
"그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말이 거짓말이라면, 틀린 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뭐라고?"
백작이 미심쩍은 얼굴로 보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지도 않은 것을 어찌 확신하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형은... 이미 죽었으니까요."
백작과 백작부인은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백작이 당황한 목소리로 약간 더듬거리
기까지 하면서 말했다.
"이미 죽었다고?"
보리스의 시선은 두 사람을 떠나 환한 들판이 펼쳐진 창 밖으로 향해 있었다. 잠시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무표정하고 초점 없는 눈이었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입 밖에 내기까지는 헤
아릴 수 없는 싸움이 필요했었다.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제 손으로 직접 묻어 주었습니다."
그랬었지... 분명히 그랬었다.
"......."
백작과 부인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듯했다. 그만큼 보리스의 얼굴
은 싸늘해져 있었고, 고통스러워 보였다.
형은 죽었어.
분명히, 틀림없이 죽었어.
죽은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
4월이 끝이 났다.
월넛은 웬일로 그 날 낮부터 보리스를 불렀다. 흰 꽃이 점점이 흩어진 풀밭에 앉아 둘은
서로 잠시 마주보고 있었다.
"자신 있나?"
보리스는 그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헷갈렸다. 그가 이제 곧 이겨야 하는 귀타
프라는 소년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윈터러를 다시 빼앗는 일에 대한 이야기일까.
월넛에게 대답하는 일에 대해서만은 보리스도 백작에게 하듯 자신 만만하지 못했다. 대답
없이 무심코 짚은 손끝에 하얀 꽃술이 부서졌다. 그는 잠시 망가진 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참 한심한 녀석이란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월넛은 싱긋 웃고 있었다. 보리스도 이제는 월넛이 하는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함께 지내며 겪어 알게 된 월넛은 약삭빠르거나 야망이
높은 사람에게 끌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보리스의 욕심 없는 소박함이 오히려 그의 마음을
끌고 있는 것이다.
처음 그걸 깨달았을 때는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
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그런 생각을 접었다. 월넛에게는 솔직해지고 싶어서라든가, 남의
마음을 이용하고 싶지 않아서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자신이 노련
한 사람을 대상으로 그런 모험을 하는 것은 오히려 나쁜 결과를 부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자신의 고지식한 순박함을 좋아하는 상대였다. 그러면 계속 그렇게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본능에 따르는 일은 쉬운 것이니까, 일부러 꾸민 행동보다 당연히 성과가 좋을 터였다. 섣불
리 뭔가 시도하다가 오히려 신뢰를 다 잃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자신이 없다 이거야? 내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어쩔 거야?"
그 질문조차도 앞서의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갑자기 가버리면
어떻게 그 애를 이길래?', '내가 갑자기 가버리면 윈터러를 어떻게 찾을래?'.
월넛은 그 두 가지 질문의 앞머리만을 잘라 다시 한 번 말했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가버리면 어쩔 거야?"
머리 위에는 흰 깃털구름이 휘감기며 흐르는 푸른 하늘이 있었다. 평화롭고 느긋한 날씨였
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고민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날씨, 행복해져야 할 것만 같은 날씨였
다.
그래도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많은 것을 잃고서 갑자기 커
버린 자신, 마음에 들지 않는 넉넉함과 한가함, 잊을 수도 없는 어두운 기억, 가슴만 아프게
해 놓고 재빨리 사라져버리는 희망.
"어디론가... 가시나요?"
어쩐지 그것은 진실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월넛의 농담 속에는 항상 과육 속의 씨앗과
같은 진실이 있었다.
"그래. 간다."
뜻밖이어야 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곁에 언제까지나 있
는 것은 없었다. 무엇이 사라진다 해도 놀라지 않을 셈이었다. 가슴속이 텅 비는 듯한.......
"어디로 가시나요?"
"아주 멀리."
월넛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높이 묶은 긴 머리채가 바람에 휘날렸다. 거칠고 강한, 오래
된 나무 같은 사내였다. 달빛을 삼키고 자란 이끼투성이 바위 같은 사내였다 그가 보리스를
내려다보았다.
"내일이면 간다. 돌아오긴 힘들 거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를 바라보며 또 한 번의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만나리라, 전혀 예
상하지 못한 곳에서. 그들의 생애는 몇 가닥으로 꼬인 실처럼 단단히 한 매듭 얽혀 있으리
라.
"네 검에 대해서 말인데......."
당연히 꺼냈어야 할 이야기였다. 월넛은 말을 하는데 있어 보통 망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처음부터 네 검을 갖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아니, 실제로
가질 수도 없는 검이지. 넌 잘 모르겠지만 그건 내 신념에 맞지 않는 검이니까 말이다. 내겐
평생을 두고 지켜야 할 중대한 신념이 있어."
"......."
보리스가 말이 없자 월넛은 계속해서 말했다. 오해받을 수밖에 없는 말을 하면서도 최대한
그걸 피하고 싶어 애쓰는 듯 했다.
"그렇지만 네게 돌려주는 것은 더더욱 안 되는 일이지. 솔직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당장 어떻게 되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불안하기 때문에 휠씬 더. 세 살 먹
은 어린아이에게 식칼을 들려 줄 수는 없는 것이니까.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것은 월넛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그는 솔직할 때는 한없이 솔직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래, 내가 하는 말이 다 사탕발림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내가 이 검에 욕심이 나서 그러
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난
걱정스러워. 차라리 내가 네 오해를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네 곁에 두고 싶지가 않아."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제야 입을 연 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전처럼 월넛이 훌쩍 들어올릴 수 있는
키는 아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제게서 빼앗아 가셨고, 저는 제 능력으로 되찾겠다고 약속한 것이었죠.
하루가 남아 있으니 그 약속 지켜보겠습니다. 아직 한 번의 밤이 더 남았지 않나요."
"하지만......."
월넛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보리스가 먼저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맡기셨던 것은 돌려드릴 테니까요. 떠나실 때 제방에 잠시 오셔서 가져
가세요."
본래의 사정을 떠나 오히려 어린 소년이 선생에게 베푸는 듯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월넛
은 약간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가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졌다.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은 무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
을 수는 없는 묘한 상황에 처해 버렸다. 변명으로 들릴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을 안 할 수
는 없다고 할까, 그러나 월넛은 말하지 않는 쪽을 택해 버렸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
그것은 '내게 그 단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줘서 고맙다'가 아니었다. 자신이 윈터러를
넘겨줄 수 없어서 죽 해왔던 고민을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의미였다. 물론 상황은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월넛은 그냥 자신에게 느껴지는 대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보리스가 처음부터 물었어야 할 말을 불쑥 던졌다.
"하지만, 왜 가시는 거지요?"
월넛은 다시 몸을 돌려 보리스를 내려다보더니 그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그리고 가볍게
악수를 했다.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야."
설명은 그것뿐이었다. 보리스의 손을 놓은 월넛은 저벅저벅 걸어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 날 밤, 마치 처음 윈터러를 놓고 대립했던 그 밤처럼 홀리게 하는 달빛이 뿌려진 연습
장에서 둘은 마주했다.
월넛과 보리스는 마지막으로 힘껏 서로를 위해 대결했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것이 당
연했다. 보리스는 가볍게 스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칼에 베이거나 찔린 상처를 여러 개
입었고 월넛도 옷깃 여기 저기가 칼끝에 긁히고 찢겼다.
한 번, 다시 한 번, 숨 돌릴 틈도 없이 달려드는 보리스 때문에 월넛도 몇 번인가 주춤거렸
다. 물론 그가 솜씨를 발휘한다면 보리스 정도 한 칼에 베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
나 그는 이 소년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지금의 싸움으로는 더더욱 그랬다. 그런 까닭
에 월넛은 수세를 취하며 보리스의 공격을 흐트러뜨리는 데만 치중하고 있었다.
보리스는 달랐다. 잠시의 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이 한 시간 내내 그는 완전한 긴장
상태였다. 그가 좀더 솜씨가 좋았더라면 이날 밤의 상대를 죽이지 않고는 결코 끝내지 못했
을 정도로 전의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차이가 이 날 둘의 현격한 실력 차를 어느 정도 덮
어 주었다. 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둘이 팽팽한 대결을 벌이고 있는 걸로 보
일 수도 있을 정도였다.
키가 커진 소년은 이제 팔만 높이 올리면 곧장 상대의 목을 찌를 수도 있었다. 물론 쉽게
그러지는 못했다. 그러나 밀쳐지고, 넘어지고, 구르고, 상처를 입어도 다시 벌떡 일어나는 보
리스에게는 잠시의 머뭇거림조차 없었다.
그러나, 한 시간은 짧았다.
"그만. 끝났다."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검이었다. 월넛은 갑자기 강한 힘으로 맞닿은 검을 밀쳐 보리스를 바
닥에 쓰러뜨려 버렸다. 지금까지 적당한 정도로 치고 받아 주던 힘이 아니었다. 보리스는 바
닥에 처박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제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매일 밤의 대결은 끝이 나
버렸다.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채,
"일어나라."
월넛은 검을 내려놓더니 보리스의 몸을 부축하여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흙 묻은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너 같은 학생을 가져 본 것은 처음이다."
보리스는 대답이 없었다. 월넛은 갑자기 혼자 피식 웃더니 말했다.
"후훗, 실은 누군가를 제대로 가르쳐 본 것이 처음인 게야. 아직껏 가르칠 마음이 나는 녀
석을 만난 적이 없었어."
보리스가 약간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너처럼 마음을 열 줄 모르는 녀석도 처음 본다."
월넛은 진실을 보고 있었다. 분명 보리스는 월넛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과거에
만났던 아이들이 열렬히 선생을 흠모하며 그의 기술이라면 뭐든 배우려고, 가르쳐 달라고
덤비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자신만으로도 완벽한 것 같은 세계의 주인, 그 세상의 벽이
일부 무너졌다면 외부에서 돌을 주워 쌓을 것이고 도움의 손길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
러나 그 벽 안쪽으로 누군가를 들여놓지는 않았다.
확실히 보리스는 월넛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이 이끄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페이스를 가지고 눈에 띈 방식들을 하나씩 자기 것으
로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아직 실력이 일천한 소년이 압도적인 선생에게 배우면서 자기 페이스를 갖는다는 것은 본
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것은 보리스가 남들의 몇 배나 되는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격의 문제였다. 강해지고 대단한 실력을 갖게
되기보다는, 자신의 길에 올라 흔들리지 않고 걷는 것만이 목표인 보리스였다. 그 마음이 그
의 페이스를 만들었다.
월넛은 거기에 끼여들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몇 번인가 열릴 듯 하면서도 결국은 열리
지 않았다. 보리스의 마음 속에는 묘하게 바깥을 향해 열린 어떤 부분이 있었다. 거기에 몇
번인가 중첩되면서 교감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사로잡을 수 없
는 소년이 그였다.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나. 백작에게는 말하지 않고 조용히 떠날 생
각이야. 너도 모르는 체 해라.욕을 해대겠지만 나 같은 떠돌이를 고용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업보로 치라지. 그 동안 즐거웠다, 너처럼 이상한 녀석을 만나서."
보리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대결에서는...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가르쳤다. 만일 진다면 네가 그걸 네 페이스에 잘 섞지
못한 탓이야."
둘은 가끔 그랬듯 방으로 올라가는 대신 아무도 없는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월넛은 늘 숨
겨 두는 틈새에서 브랜디를 꺼내어 모조리 마셔버렸다. 이제 떠나는 판이니 끝장을 보는 모
양이었다. 보리스가 자기도 한 모금 달라고 우겼지만 아이들은 안 된다고 잘라 말한 그는
짓궂게 물통에서 물을 한 그릇 퍼 건넨 다음 브랜디와 건배했다. 보리스는 짧게 말했다.
"좋은 여행을 위해."
월넛과 헤어진 보리스는 땀에 젖은 몸을 찬물로 씻고서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녘, 월넛은 약간 무거운 머리로 일어나 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떠날 것인가 심
각하게 고민했다. 비록 낮이 된다 해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훌쩍 사라지는 것쯤은 그
에게 일도 아니었지만 배고픈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인 탓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송로의 벨크루즈, 대륙의 미식가들이 한 입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
도 팔 듯 덤비는 그 검은 보물을 며칠거리로 먹을 수 있는 축복 받은 고장의 성이 아닌가.
본래 처음에 그가 벨노어 백작의 아들을 가르치겠다고 응낙한 것도 다른 무엇보다 송로가
그를 유혹한 탓이 었다.
"쓰읍, 참고 가야지 어쩌겠어."
안타깝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그를 부르고 있는 자는 약속한 날짜의 반나절도 어길 수 없
는 상대였다. 그도 이 부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흰 새의 공주인 요즈렐이 직접 온
것만 보아도 알고도 남았다.
짐이랄 것 없는 소지품들을 간단히 꾸린 그는 윈터러를 꺼내려고 침대 밑으로 손을 넣었
다. 그리고 멍해졌다.
"선생님, 이제 가십니까?"
등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도 몰랐지만 이때 그의 표정은 낭
패하여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평소 그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보리스가 문간에 서 있었다.
둘은 잠시 서로를 쏘아보고 있었다. 자신이 몹시 분개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도 약
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눈빛을 달리했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날 보기 좋게 속였구나."
보리스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선생님도 처음에 제 검을 몰래 가져가셨습니다. 배운 대로 했으니 칭찬해 주시죠."
월넛은 가만히 있다가 낮게 말했다.
"그래, 칭찬해 주지. 잘 했다."
성에 도착한 첫날, 월넛은 보리스를 붙들고 거짓말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보리스는 실제로 그것을 실천했다. 전날 밤, 상대가 충분히 지칠 정도로 잠시의 틈도
두지 않고 열렬히 달려들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었다. 또한 월넛은 브랜디를 마시고 푹 잠
들었고, 물을 마신 보리스는 정신이 맑았을 터였다. 또한 그 브랜디의 존재에 대해 보리스가
미리 알고 있는 이상 거기에 뭔가 약이라도 타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가 그런 것을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는 별문제로 치더라도.
언제부터 그가 이 일을 기획했을까.
"......"
보리스가 손을 펴 내밀었다. 거기에는 월넛이 처음에 맡겼던 단도가 놓여 있었다. 윈터러는
다른 곳에 두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런 식으로 되찾은 검인데 위험스럽게 그의 앞에
들고 나타날 정도로 어리석은 소년은 아니었다.
월넛은 다가가 그의 손에서 단도를 집어들었다. 자신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
다.
"선생님에서 저를 걱정해서 그러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검은 저를 위해 죽
은 제 형의 단 하나뿐인 유품입니다. 그리고 제가 태어났던 집안과 연결된 유일한 물건이기
도 하지요. 아무리 위험한 것이라 해도 저는 그것을 제게서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 검을 제 형처럼 여깁니다."
보리스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월넛에게 이런 사실을 말하는 것이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이
제는 더듬거리거나 목이 메이지도 않았다.
"그래, 그런 식이다."
월넛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도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반드시 그런 식으로 해라. 약속이나 맹세와 같은 것을 결코 어기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
다음, 결정적인 순간에 단 한 번 뒤통수를 쳐라. 그러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거다. 지금처
럼."
그것은 부드러운 이별이 되지 못했다. 월넛은 화를 내지 않았지만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가 느꼈을 감정은 명백했다. 분명 거짓말을 잘 해야 오래 살아남고 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었지만, 실제로 그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보리스가 그런 사
람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보리스는 이 계획을 포기할 수 없었다. 윈터러는 결
코 내놓을 수 없는 검이었다. 말로는 월넛을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 방법뿐
이었던 것이다.
실로 몇 달을 생각해 온 그대로, 그는 성공했다.
"......."
월넛은 작별 인사를 남기지도 않았다. 보리스가 막고 선 방문 쪽이 아니라 창가로 다가가더
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보리스는 놀라 창가로 뛰어가거나 하는 짓은 하
지 않았다. 비록 여기가 3층이라 해도 월넛은 다칠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채 어린 시절의
선생은 떠나버렸다.
완연한 봄이었다.
2. 바람이 남긴 손자국
"월넛 선생님 말입니다."
란지에가 그렇게 입을 열었을 때 보리스는 만개했던 꽃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복숭아꽃의 흰 꽃잎들이 점점이 떠올랐다가 흩어지고, 몇 줄기 바람에 휘
말려 들판으로 날아갔다. 눈가에서 흰 꽃잎이 스러지는 빛의 경계 너머로, 서서히 서녘 하늘
에 걸리고 있는 태양이 있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돌렸다. 란지에가 미소지을 듯 말 듯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떠나셨는지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보리스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흑청빛 머리칼에도 꽃잎 같은 흰 햇살이 내려 있었다.
"어 디로 가셨는지는 모르시지요?"
보리스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날따라 윈터러를 꺼내 든 채 그 손잡이를 만져보
고 있었다.
월넛이 떠난 후의 생활은 어딘가 모르게 맥이 빠진 듯했다. 이제는 혼자서 연습을 했지만
월넛과 함께 했던 밤의 한 시간이 사라진 후로 진전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오히려
란지에처럼 책만 읽어도 좋은 처지가 부럽다 싶었다.
아니, 곧 그는 생각을 정정했다. 란지에는 지금처럼 그와 함께 책이라도 읽을 때를 제하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누군가의 치다꺼리를 하며 보내는 처지였다. 하인이란 하루에도 몇 번
씩 자존심을 꺾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일 것이다.
"저는 왠지......."
란지에가 드디어 망설이던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그는 책을 펼친 채로 테이블에 내려놓았
다.
"도련님과 월넛 선생님제서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인질을 교환했을 것 같군요."
보리스가 맨 처음 윈터러를 되찾지 못하고 대신 월넛의 단도를 받았던 자리에 란지에도 있
었었다. 하지만 그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 란지에는 직접 보지 못했고, 다만 윈터러가 보리스
의 손에 돌아와 있는 것만을 보았다. 보리스는 말을 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란지에
라면 이해해 줄 것도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솔직히 내보이기가 싫었다.
"그 검은... 무언가 사연이 있는 물건 같았는데 말입니다. 결국 다시 도련님의 손으로 돌아
왔나 보군요."
보리스는 한 손으로 윈터러를 쥔 채 검을 뽑기 직전의 동작을 취해 보았다. 갑자기 키가
자라서인지 이제는 허리에 차고 다닌다 해도 어느 정도 자세가 나을 법도 싶었다. 여러 가
지로 수련을 한 덕택에 이제는 가누기 힘들 정도로 무겁지도 않았다. 그러나 역시 바스타드
소드(bastard sword)를 자유자재로 휘두르기에는 아직 버거운 나이였다.
란지에는 보리스가 하는 양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검과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
소년이 그였다. 문득 정말로 그럴까 싶었다.
"보겠어?"
보리스는 갑자기 윈터러를 란지에의 손에 건넸다.
란지에는 얼결에 검을 받아들었지만 어느 손으로 검의 어디를 쥐어야 하는 지도 잘 몰랐
다. 윈터러의 귀족적인 흰빛은 그에게 잘 어울렸지만 보리스의 손에 있었던 때와는 달리 그
에게는 단지 장식에 불과한 것 갈았다.
잠시 후, 란지에는 검을 받아든 보통의 소년들처럼 그럴듯한 자세를 취해 보는 대신 그것
을 그냥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더니 길이를 가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팔을 벌려
양쪽 끝을 잡았다.
문득,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보리스는 이유도 모른 채 란지에가 하는 양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손으로 흰
칼집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손잡이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손을 벌려 가드의 너비를 만져 보
았다. 그는 검의 아름다움이나 정교한 만듦새에 감탄하고 있지 않았다. 흡사 숨겨진 무언가
를 찾아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무엇을? 그가 느꼈다던 검의 사악함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란지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빠른 동작으로 검을 뽑았다.
".....!"
그 순간의 동작은 검이라고는 만져본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좀전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정말로 검을 다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떠나서 발검 하나만은 확실히 익힌 듯한 자
세였다. 그런 상대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보리스로서는 실로 뜻밖이었다.
란지에의 시선이 번쩍이는 검날을 훑어 내렸다. 눈빛은 매우 진지했다. 오랜만에 보는 윈터
러의 날은 여전히 희었고, 어지러울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러나 란지에는 겁내는 기색이 없
었다. 아니, 어떤 표정도 없는 그 얼굴은 오히려 윈터러가 지닌 싸늘함과 동류인 양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도련님, 이 검은 이것 자체로 하나뿐입니까? 혹시 다른 어떤 물건과 이름
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다. 검을 뽑아든 채로 선 란지에의 모습은 생각지도 못한 섬뜩함
을 지니고 있었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대답하려다가 잠시 후 마음을 고쳐먹고 말했다.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나도 몰라."
"그렇습니까."
그는 검을 다시 꽃았다. 그 자세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윈터러를 돌려주면서 란지에는 보
리스의 눈을 의식한 듯 말했다.
"제가 검을 들고 할수 있는 일은 방금 두 가지가 전부입니다."
보리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어째서 검을 다루지 못하면서 그것만을 배울 수가 있지? 한두 번 연습한 자세가 아닌데?"
란지에는 자조적인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귀부인들의 놀이지요. 소녀처럼 생긴 시동들을 좋아하면서 가끔은 그들에게서 남성적인
매력도 느끼고 싶어하는 악취미의 부인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란지에의 말은 종종 열세 살 먹은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것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신랄해서
보리스를 당황하게 하곤 했다. 란지에는 자리에 앉더니 검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것
처럼 말했다.
"전에 도련님께서는 제 과거에 대해 물은 일이 있으셨지요?"
그래서 그가 방금 한 말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귀부인의 파티 시동이라는 불유쾌한 시
절의 기억에 대해서.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
"제게도 도련님의 옛 이야기를 좀 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얼음 벽 앞에 마주선 것 같은 느낌
의 소년이었는데, 어느 순간 이후로는 가끔씩 이렇듯 솔직하게 말을 꺼내는 때가 있었다.
"내 이야기라고 해 봤자... 별로 말할 것은 없으니까."
"누구의 삶은 얘깃거리로 가득 차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뜻밖의 대꾸에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란지에는 곧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 나
온 것 치고는 드물게 편안한 미소였다.
"남의 얘깃거리가 되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도련님의 평범한 삶 이야기가 듣
고 싶군요."
상대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시절의 이야기를 이미 들었으면서, 그런 부탁에 응하지 않는
것은 어쩐지 부당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보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였다. 백작이 정해 준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마음 쓰다 보니
자연히 아주 어렸던 시절의 이야기가 주로 나왔다. 그게 몇 살 때 일일까. 다섯 살? 또는 여
섯 살?
그의 인생에서 결코 뺄 수 없는 존재인 예프넨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처음엔 떨렸지
만 곧 괜찮아졌다. 그는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예프넨을 묘
사하는 일에 저도 모르게 집중했다. 그의 서툰 이야기 속에서 예프넨이 지녔던 빛이 바래지
않도록 애썼다.
보리스가 기억하는 소년 시절의 예프넨은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딘가 구석에 숨어서
뭔지 모를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형을 보리스는 반나절을 헤매서라도 반드시 찾아내곤
했다. 동생이 나타나서 '드디어 찾았다!'는 듯한 얼굴로 말갛게 미소짓고 있으면 '은둔자 예
프넨'은 어쩔 수 없이 슬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장난 반 원망 반으로 동생의 머리를 슬
쩍 쥐어박은 다음 곧장 놀아주러 뛰어나갔었다.
란지에는 보리스의 이야기에서 우러나는 애정 깊은 어조를 느낀듯했다. 그가 예프넨의 일
을 입에 올릴 때면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주었다. 곧 보리스도 느낄
수 있었다. 란지에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사려 깊음은 란즈미를 향한 눈빛에서만 느낄 수 있
었던 그런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아파하는 누군가를 돌보는 마음에 이미 익숙한 것일 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점차 최근의 일들로 이어졌고, 드디어 저택을 떠날 때의 일을 언급할 때가 왔다.
보리스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블라도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아버지가 사고로 늪에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예프넨의 죽음에 대한 것이 잘 설명되지 않았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솜씨가 없는 보리스는 말문이 막혀 더듬거렸다. 지금껏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해왔던 예프넨
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후 란지에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도련님의 형님께서도 돌아가셨는데, 도련님께서 많이 상심하셔서 그 때의 상황
을 잘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형을 내버려두고 자신만 살아
남겠다고 도망쳤을 때, 그 때의 기억을 저도 모르게 스스로 지웠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을 형은 그 때의 일을 탓하지도, 다시 언급하지도 않았다. 예프넨에게 그건
용서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겁에 질린 어린 동생으로서 당연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
이다.
"그... 래......."
란지에는 차가웠지만 어떤 때는 놀랄 만큼 사려 깊은 소년이었다. 보리스의 얼굴을 쳐다보
더니 더 묻지 않고 입을 열었다.
"죽었다 해도 누군가의 가슴에 남아 있는 사람이 전 오히려 부럽습니다. 사람은 가끔 산
채로도 다른 사람의 가슴 속에서 죽어버리는 일이 있으니까요."
무슨 소리일까.
란지에는 이어 말하고 있었다
"도련님이라면 그런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난......."
그것은 보리스에게 낯선 이야기였다. 란지에는 또한 보리스가 짐작 할 수 없는 어떤 힘겨
운 일을 겪은 것이 분명했다.
"잘 모르겠어. 만일 나를 자신의 가슴 속에서 죽여버린 사람이 있다면, 나도 그 사람을 똑
같이 죽여 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 사람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
그런 것이 대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보리스도 잘 알고 있었다. 란지에는 그냥 한 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역시 그렇겠지요. 그리고 대신 마음속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 더 잘해 주고요."
보리스는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란지에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빙그레 웃었
다.
"그러니 도련님도 주위에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좀더 잘하십시오. 돌아가신 분은 그만 잊
고요."
갑자기 뜨끔, 하면서 월넛의 일이 생각났다. 월넛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몹시 잘해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도 처음엔 보리스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이성으로 설명
할 수 없는 뜻밖의 변화이기에 그도 어쩌지 못했고, 보리스도 다 깨닫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완연히 실망한 얼굴로 그의 곁을 떠나갔다. 서로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
았던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수 있을까.
아니...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애정이란 꼭 상호적인 감정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여러 사람
을 한꺼번에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은 없었다. 그에게서 예프넨의 기억이 지워질 즈음......
하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도 있어. 몸이 죽는 것과는 달라, 너도 널 지워버렸다는 그 사람의
실체까지 죽이지는 못할 거야. 살인자가 아니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마음 속의 어떤 한 사
람을 죽인다면 난 살인자가 되는 것보다도 더 큰 죄책감을 느낄 거야. 그러고 싶지 않아. 절
대로."
란지에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보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반론하지 않는 것
이 오히려 낯설었다.
한참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어려서 저는 어머니하고만 살았습니다. 란즈미까지 세 식구였죠. 별로 부족한 것은 몰랐습
니다. 집은 켈티카에서 사흘 거리 정도 떨어진 전원에 있었고, 몇 사람인가의 고용인들도 있
었습니다."
그것은 푸르고 깊은 터널로 들어가는 듯한 이야기였다. 란지에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때 저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어머니가 어떻게 하녀를 부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우리
에게 좋은 식사를 줄 수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의 일이고,
당연하게만 느껴졌던 생활이었으니까요. 그때의 란즈미는 수줍음을 타기는 해도 곧잘 사고
를 치곤 하던 호기심 많은 아이였습니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힘드시겠지만 말입니
다."
"......"
보리스가 닫지 않은 창 너머에서 복숭앗빛 꽃잎들이 작은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잘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 봄의 폭풍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찾아오는 점잖은 신사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오시면 흔
히 우리들에게 작은 선물을 주셨고 어머니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셨지요. 어렴풋이 저는
그 분이 어머니의 생활을 도와주는 후견인일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고, 또 오시면 돈이나 서류 같은 것에 대해서 복잡한 이야기를 하곤 하셨으니까
요. 먼 친척인데 어머니의 재산을 대신 관리해 주신다던가, 그런 분일 거라고 짐작해서 란즈
미에게도 예의바르게 대하라고 일부러 주의를 주었습니다."
란지에가 펼쳐 놓은 책장이 창문을 흔들던 바람에 한두 장 넘어갔다. 바랜 듯한 양피지 책
장 위로 바람과 햇빛이 동시에 흩날려갔다.
"오후에 시간이 나게 되면 그 분은 어머니 곁을 떠나 저와 몇 마디 나누는 일도 있었습니
다. 제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해 묻기도 하고, 켈티카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
셨지요. 어린 저에게 그 분의 식견은 존경할 만한 것이라 저도 모르게 가슴 깊이 따르는 마
음이 생겼습니다. 저는 그 분이 학자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치가
의 풍모가 강한 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쨌든 저는 어느새 어머니만큼이나 그 분을 앞서
더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도 저를 사랑해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문득 란지에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한때 하인을 부렸다던 그는 이제 하인의 옷을 입고 자
신에게 말끔한 존댓말로 말하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흘로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야만 했기에. 언제부터?
란지에의 이야기 속에 든 것은 깨질 듯 불안한 행복이었다. 모든 것이 그저 꿈이었던 것처
럼 그렇게 깨어질. 곧 나을 이야기를 짐작하면서도 그 행복이 부서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자신이 그 앞에 있었다.
"아홉 살 때겠군요.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저희 남매를 부르시더니 짐을 꾸리게 하시더군요.
이 집을 떠나 켈티카에서 살게 된다고, 매우 흥분하면서 또한 기뻐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왜
좋은 것인지 영문도 모르면서 짐을 챙겨 집을 나섰습니다. 오래 살았던 집인데 막상 돌아보
며 아쉽다고 느낄 사이도 없었지요. 포장이 쳐진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고, 마차는 곧장 저희
가족을 켈티카로 실어다 주었습니다. 켈티카까지 사흘 걸린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습니다. 대
신 다시 되찾아가 라면 절대 혼자서는 가지 못할 것 같더군요."
꽃잎이 하나 둘 책장 위로 떨어졌고 다시 불어온 바람이 페이지를 넘기자 마룻바닥으로 날
려갔다. 기억 속의 세월이 흐르는 것처럼, 아무도 읽지 않는 책 속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
다.
"어머니께서 저를 껴안으면서 그 분을 만나게 된다고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래서 저
도 드디어 켈티카에 온 희망이 있구나 싶었지요. 그때 제 소원은 그 분이 저희 집에 오래
사셔서 제게 늘 좋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셨으면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것 말고는 더 바랄
것도 없었고요. 그래서 저희 가족은 마차에서 내렸고, 어떤 좋은 여관에 들어가 그 날 밤을
묵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일어났을 때 거기엔 저희 세 식구밖에 없었습니다. 마차를 비롯
해서 저희를 켈티카까지 데려온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으니까요."
란지에의 눈가가 희다고 느꼈다. 꿈의 한 조각 같은 오후의 빛이 진홍의 눈빛을 아릿하게
했다. 아픈 사람처럼 뺨이 파리해져 있었다.
"어머니조차 처음엔 영문을 몰라 여관 사람들을 붙들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귀찮아하
는 듯한 태도뿐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 무렵까지 어떻게든 알아보려 애썼지만, 결국 여관에
서 나오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찾아가야 하겠는데 어머니에서는 켈티카
의 지리를 전혀 모르셨고, 저희에겐 타고 갈 말 한 필도 없었습니다. 가져온 짐이 너무 많아
서 여관에 팔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저희의 급한 사정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비웃으
면서 물건에 제대로 값을 쳐주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잠시 맡아 달라고 했지만 그것조차 거
부하더군요."
급전직하의 이야기가 느린 음악처럼 나직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쉽게 절망하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일단 마음을 결정하시자 드레스
상자며 아름다운 모자들, 신발들, 귀하게 여기던 장식품들을 모조리 팔고 쉽게 가져갈 수 있
는 귀금속류만 단단히 챙기셨습니다 그때는 초가을이었는데 저희한테도 입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많은 옷을 입히시더니 다른 것은 다 팔아버리셨지요. 그리고 그 여관을 떠나 며칠
동안 거리를 떠돌며 누군가의 집을 수소문 하셨습니다."
란지에는 갑자기 보리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미소했다.
"찾았을 것 같으십니까?"
말문이 막혀 쳐다보고 있는데 란지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바람이 넘겨버린 책장을
다시 한 장씩 되넘기고 있었다. 책장 사이로 들어간 꽃잎 몇 장이 사뿐 날아올라 그의 손등
에 떨어졌다. 꽃잎만큼의 핏기도 없는, 단단한 뼈대만 유난히 두드러진 손이었다.
"예, 찾았습니다. 대략 나흘 정도 걸렸지요. 위풍당당한 저택이더군요. 저와 란즈미가 꿈에
서도 상상해보지 못했을 정도로."
그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감정이 느껴졌다. 가벼운 경멸이었다.
"어머니께서도 약간 주눅이 드신 듯했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당당하게 문지기와 이야기하
시더군요. 잠시 후 저희는 저택 안으로 안내 되었습니다. 그러나 들어간 곳은 응접실이 아니
라 어떤 작은 방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사처럼 보이는 사람이 어머니만 불러내서 나가더군요.
한참이나 기다렸습니다. 서서히, 저는 점차 뭔가 모를 불길한 기분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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