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Blinding
1. 로즈니스 아가씨
산이 내려다보고 하늘이 내려다 본다.
어디까지라도 뻗은 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걷는다.
그이 뒤로 계절이 진다.
그림자가 진다.
"아이 참! 왜 내가 그런 하녀들이나 입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야!"
"하지만 아가씨... 다른 옷이 있어야지요."
화가 난 어린 아가씨의 비위를 맞추는 시종들은 연신 굽실거렸다. 실은 처음부터 이토록 까다로운 아
가씨를 모시고 먼 외국까지 여행을 나온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러나 주인님이 허락해 버린 걸 그
들이 감히 어쩌겠는가.
덕택에 여행은 하루도 빠짐없이 무슨 일인가 터져 삐걱거렸다. 그래도 극히 다행스러운 것은 이제 여
행의 볼일은 끝났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중이란 점이었다.
"다른 옷을 가져와! 난 백작 가문의 아가씨라고! 이런 옷을 입고 다니면 아버지의 체면이 깎인단 말이
야!"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곳이 떠나온 본국 아노마라드의 장원 안이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여기가 본국의 장원과는 열흘 거리도 넘게 떨어진 타국 땅 트라비체스였고, 백작 가문의 체면을 논할
아노마라드 귀족은 아무 데도 없었다.
"하지만 아가씨, 아무리 그러셔도 여긴 시골이라 새 옷을 사올 데가 없는뎁쇼."
나올 대답은 뻔했다.
"뭐 그 따위 나라가 다 있어!"
열두 살 먹은 백작 가의 꼬마 아가씨 로즈니스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아노마라드의 수도 겔티카의 거
리처럼 곳곳에 최고급 의상실이 줄지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허술한 옷을 입을 바엔
아예 평생 밖에 나오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그녀인데 이런 여행길에 이따위 사고라니!
전날 밤에 내린 비로 길에 진창이 생겨서 그들은 호숫가에 마차를 잠시 세웠었다. 그런데 누구의 부
주의인지 닫혀 있어야 할 마차의 문이 갑자기 열리는 바람에 아가씨의 드레스 상자가 통째로 물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아침부터 바람 쐰다고 마차에서 내려 돌아다녔던 로즈니스는 아미 드레스 자락을 흙탕물에 다 망쳐버
린 뒤였고, 이번 여행에서 아가씨의 시중을 책임지고 있는 고참 하녀 윌라는 마차의 문을 제대로 다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지 잡히기만 하면 손목을 분질러 버리겠다고 별렀다. 그녀는 뼈대가 굵고 키가 겄
으며 몸무게도 보통 남자의 배는 넘었기에 그런 결심이 실행에 옮겨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
다.
"싫으면 지금 그 옷을 계속 입고 다니려무나, 로즈."
구원가가 나타났다. 마을에 잠시 나갔던 백작 일행이 돌아온 것이다. 또래 아이 여덟은 합쳐 놓은
만큼이나 까다로운 꼬마 아가씨지만 단 하나, 고분고분 말을 듣는 상대가 있긴 했다.
벨노어 백작은 딸을 몹시 귀여워해서 늘 로즈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가져다주었
지만, 버릇없이 구는 것만은 용서하지 않는 아버지였다. 하인들고 얽힌 일에서도 언제나 공정해서 피고
용인들조차 모두 백작을 존경했다.
"아빠, 이건 흙이 묻었는걸..... "
애교를 섞어 조금쯤 항변해보려 하지만 곧 소용없다는 것 깨닫고 하녀 윌라가 내미는 옷을 마지못해
받아들었다. 로즈니스의 말이 아예 틀리지는 않았다. 그 옷은 잔심부름하는 소녀인 캐미아의 옷이었
다. 그래도 백작 집안 하녀의 옷이니 만큼 그리 지저분하거나 나쁜 옷도 아니었다.
옷을 다 입고 난 로즈니스는 장식도 별로 없고 심지어 길이조차 무릎 언저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치마
때문에 잔뜩 부아가 났다. 바로 옆에 나이도 똑같은 어린 하녀 캐미아가 있었다. 로즈니스는 화풀이를
그 애에게 했다.
"저라 가! 네가 옆에 있는 걸 보니까 화가 나 죽겠어!"
캐미아는 얼른 종종걸음쳐 마치 뒤로 돌아갔다. 하긴, 자기가 아가씨와 똑같이 생긴 옷을 입고 있느
니 이런 때 그 앞에 서 있는 건 좋은 수가 아니었다.
"로즈, 흙탕물에 다시 옷을 더럽힐 지도 모르니까 마차 안에 들어가 있거라."
아버지가 말할 때만 옳은 말을 옳다고 받아들일 줄 아는 로즈니스여서 곧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 문을
열었다. 윌라가 다가와 번쩍 안아 안에 들여놓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고래를 돌려 휴, 한숨을 내쉬
었다.
마차가 세 대나 되는 대 행렬이었다. 백작의 신분으로 왕국 아노마라드를 떠나 트라바체스 공화국까
지 온 것은 아내 쪽으로 먼 친척이되는 어떤 유력한 선제후를 만나 몇 가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항상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트라바체스였기에 어느 날 갑자기 정권이 뒤집혀 친분으로 엮어 두었던 관
계들이 박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벨노어 백작의 장원은 아노마라드 왕국의 식민령인 티아
를 제외하면 트라바체스와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었으므로 결코 이 나라와의 관계에 소홀할 수는 없었
다.
남부 아노마라드는 예로부터 포도아 아몬드, 그리고 미식가들은 이름만 들어도 입에 침이 괸다는 송
로(버섯의일종)의 산지로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곳이었다. 남부 아노마라드를 가로로 자르며 솟은 파노
라자fp 산맥의 양 끝자락을 각각 아라종, 그리고 벨크루즈라고 부르는데 두 지방 모두 천혜의 따사로운
기후와 아름다운 시골 풍광, 그리고 남부 특산물들이 풍부하게 나는 것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했
다.
벨노어 백작의 장원이 바로 그 벨크루즈에 속해 있었다. 트라바체스에도 돈 많은 부자들이 있는 고
로 미식을 탐내지 않을 리 없었다.
무역을 위해 길을 뚫는 것은 언제나 중요했다. 비록 수도에 왕이 있다해도 이 정도의 권한은 영지의
주인인 백작의 것이었다.
백작이 자리를 비운 동안 일행을 지키는 책임을 맡은 비서인 휴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백작이 말
했다.
"그래, 달리 문제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주인님께서 가신 일은 잘 되었습니까?"
"암, 잘 되었지."
고개를 끄덕인 휴는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제가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 티아 국경까지 사흘 정도면 닿을 것 같다더군요. 티아 땅에 들어서면
아가씨께서 편히 쉬실곳 정도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맞닿아 있으니 만큼 대국 아노마라드의 비위를 거스를 생각이 없는 티아의 군소 기사나 영주들
은 벨노어 백작을 언제고 깍듯하게 모셨다.
"그래, 오랜 여행이라 로즈가 많이 지치기도 했겠지. 늘 집에서만 지내던 아니인데."
"그래도 그만하면 얌전하게 버티셨습니다. 이제 곧 다시 상냥해지시겠지요."
휴의 말은 별로 진실이 아니었다. 로즈니스가 상냥하게 구는 상대는 몇 명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휴
는 그 안에 절반 정도만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직업 의식이 투철한 그는 개의치 않았다.
친창길이 어는 정도 말랐기에 마차 행렬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기 전에 닌근에서 가
장 큰 성인 그와레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별로 친분이 없는 곳이라 성에서 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좋은 여관은 몇 군데 있을 터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으로 우울해진 로즈니스를 달래고 불확실한 정보
도 좀더 확인할 마음이었다.
"저기, 저 녀석 좀 봐라."
"웬 어린놈이 어른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지?"
"저런 게 어디서 난 거야?"
그와레는 큰 성이긴 했지만 일종의 장원이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웃과 외지인을 한 눈에 구별할
수 있었다. 성이 크다 해도 교통상의 요충지에 자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외지인의 비율은 항상 일정
수준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나마 오늘 들어온 외지인 가운데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세 대나 되는 마차에다 말 탄 기사가 열
둘이나 따라붙은 어느 외국 귀족의 행렬이었다. 맨 앞에 일행의 주인인 듯한 30대 중반 가량의 남자가
훌륭한 백마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런 일행은 갈 곳이 뻔했다. 틀림없이 그와레에서 가장 훌륭한 '사
프란 대문' 여관일 것이다.
그와레를 비롯해서 트라바체스 중남부에는 고급 향료인 사프란이 많이 나서 그나마 몇 안 되는 수출품
이 되어 주고 있었다. '사프란 대문' 여관에서 가장 훌륭한 요리는 당연히 사프란을 듬뿍 깔고 나오는
훈제 연어 스테이크였다. 물론, 해안 지방에서 훈제 연어를 잔쯕 싣고 오는 장사꾼이 성에 들어오는 날
만.
"많이 지쳐 보이는데."
성 사람 몇이 선 채로 주고받는 화제의 대상이 된 것은 번화한 길거리를 혼자 느리고 걷고 있는 한 소
년이었다. 행상이 그리 초라하지 않아서 소년 거지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오히려 그들의 의아하
게 했다. 그러나 소년이 여러 사람의 눈길을 끈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소년이 질질 끌며 가고
있는 한 소지품이었다.
그건 검임에 분명해 보였다. 무엇으로 만든 건지 새하얀 칼집은 상점의 램프 빛만 받아도 수십 가지
빛깔로 희번덕거렸다. 어린 소년이 들기에는 지나치게 컸고. 또 지나치게 좋은 것으로 보였다. 칼을 매
다는 혁대는 차고 있긴 했지만 블레이드가 워낙 길어서 소용이 없었고, 소년 역시 검을 옆구리에 낀 채
끝을 질질 끌며 걷고 있을 따름이었다. 눈길을 끌게 되긴 해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 같았다. 아
직 어린 소년인데 그만한 검은 가벼운 짐이 아니었다.
소년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거리 곳곳에서 의아한 눈동자로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몇몇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벨노어 백작 집안의 얼니 하녀인 캐미아는 로즈니스의 성화에 못이겨 새 드레스를 구할 데가 없을까
하고 거리에 나와 있었다. 사람들에게 물어 가며 거리도 구경할 겸 천천히 걷던 그녀의 눈에 검을 끌고
가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뛰었다. 워낙 희한한 모양새라 캐미아의 눈도 한참이나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리고 무심결에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의상실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커 보이는 바느질 집을 발견한 캐미아가 걸음을 멈췄을 때, 소년도 멈
춰 서서 거리의 한 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허술한 여관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백작 저택에서 자라 온 캐미아였는지라 어쩐지 저런 여관 안에는 거친 깡패들만 자리잡고 있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 얘! 저런 덴 너 같은 어린애가 들어가기엔 위험하다고."
소년은 얼른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시선이 캐미아의 얼굴로 옮겨갔다. 소년의 얼
굴을 똑바로 바로 본 캐미아는 문득 움찔했다. 자기 또래 정도로 생각되었는데 눈빛은 결코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12년 동안 주위 사람들의 눈치만 보며 자라 온 캐미아에게는 사람 보는 눈이 저절로 길러져 있었다.
소년의 눈은 어둡고 움푹했다. 단순히 굶거나 고생을 해서 해쓱해진 것이 아니라 눈 주위에 검은 그늘
이 한겹 드리워져 있었다. 아직 어린 캐미아는 거기까진 몰랐지만 그런 눈은 한때 결코 보아선 안될 자
면을 보고 애써 견뎌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눈이었다.
"괜찮아."
짧은 대답이 떨어졌다. 소년은 몸을 돌려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캐미아는 잠시 당황하고 있다가 곧 정
신을 추슬러 바느질 집으로 돌아들어갔다.
그날은 보리스가 형을 떠난 지 닷새 째 되는 날이었다.
형이 어머니의 유품을 팔아 남겨 준 돈이 아직은 약간 남아 있었다. 그 닷새 동안 그는 천지간에 버려
진 아이 같았던 자신 곁에 형이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그늘이 되어 주었는지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전이라고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만 하는 것과 실제로 형이 없는 현실에 직접 부딪치
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첫날,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 가다가 만난 인가에서 구걸을 했다. 집을 지키고 있던 아주머니는 의심쩍
은 눈으로 보다가 그가 정말 오갈 데 없는 아이라는 것을 알고는 들여보내어 죽 비슷한 것을 한 그릇
주었다. 그가 죽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아주머니가 가리킨 대로 헛간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있는데 밤
이 되어 집 주인인 남자가 돌아왔다. 보리스를 보고 친절한 채 마음놓고 쉬라고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
갔다.
생각이 많아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던 그의 귀에 벽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봐도
거지는 아닌 것 같은데 저런 아이를 넘겨주면 부모를 찾아내어 돈을 받고 파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였
다. 물론 아이를 넘긴 그들 역시 몇 푼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만일 그 자들이 부모를 찾지 못하면? 그
러면 노예 제도가 있는 아노마라드에 팔아 버리거나 용병단 따위에 넘긴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아주머니도 혹하는 눈치였다.
보리스는 부부가 잠들기를 기다려 살그머니 헛간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밤새 걸어서 그곳을 벗어났
다.
주위에서 큰 새만 푸드덕거리며 날아놀라도 깜짝 놀랐다. 저택에서 지낼 때는 형과 함께 자고새 사냥
을 나가서 한두 마리 잡아오기도 했었던 그가 이렇듯 변해 있었다. 밤이 되어 불을 피워보려 했지만 아
무리 애써도 되지 않았다. 형이 시범을 보여주었던 그대로 했건만 불씨는 제대로 붙기도 전에 피시식
꺼져 버렸다.
바짝 웅크린 채로 밤을 지새고 다음 날 다시 걸었다. 방향조차 알길이 없었다. 유일한 유품이라 할 만
한 윈터러는 점차 더 무거워졌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형과 지낼 때 가끔씩 잡곤
했던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이나 심지어 새알조차도 그의 눈에는 발견되지 않았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
나 때서 먹은 열매는 시고 떫은 맛만 났다. 그래도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채 그것을 다 먹어치웠
다.
다음 날 순전히 운이 좋아 발견한 마을에서 그는 다시 인가로 가 구걸을 해야 할 지 아니면 여관으로
가야 할 지 결정이 서지 않았다. 그는 결국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빵만 조금 사서 사람이 드문 구석을
찾았다. 아직 가을걷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아 곡식을 쌓는 창고가 비어 있었다. 텅 빈 창고에는
짚단조차 없었다. 이제 차고 딱딱한 바닥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상도 없는 그는 빵을 몇 입 뜯어먹은 다
음 거기에 누워 눈을 붙였다.
새벽이 채 밝기도 전에 그는 잠에서 깨었다. 갑자기 가슴 한쪽이 아파지면서 눈물이 한 줄기 주르륵
흘렀다. 그러나 그는 애써 눈물을 닦아내고 마른 입으로 다시 빵을 씹었다.
그는 이미 고모할머니를 찾아가는 것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도 트라바체스에서 나고 자란 만큼 서로
대립되는 정파에 속한 친척이란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그는 홀로 생각한 끝에 그가 갈 곳이란 없고 어딘가에서 심부름꾼
으로라도 써 준다면 뭄 붙이고 사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출신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따위, 이
미 이런 상태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형의 말대로 살아남은 것만이. 오직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만일 일을 얻는다면 그래도 큰 도시 쪽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그는 그 마을을 떠나 일전에 들어
두었던 그와레 성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닷새 째 되는 날 그와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방 좀 주십시오."
여관의 카운터를 맡아보고 있는 토냐는 열 여덟 살 먹은 주인의 딸이었다. 그는 조그마한 소년이 혼자
걸어와서 어른스런 말투로 방을 달라고 말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너 혼자니?"
"그렇습니다."
소년은 작았지만 말투로 보아 철없는 아이 같지는 않았다. 목소리는 겁먹은 것도 아니었고 당황하거나
망설이지도 않았다. 토냐는 잠시 후 어깨를 으쓱하며 뭐 어떠랴, 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 싼 방으로 줄까?"
"그렇게 해 주세요."
"5엘소란다. 저쪽 부엌 옆에 딸린 방이야. 침대가 좀 작지만 너한테는 상관없을 것 같구나."
보리스는 미리 세어 두었던 은화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내주었다. 돈주머니를 내보이는 것이 좋지 않다
는 것은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토냐가 돈을 받자 보리스는 좀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그리고......"
서글서글한 성격인 토냐는 혼자 여행하는 어린 소년에게 호기심을 느꼈으므로 평소보다 친절한 목소리
로 되물었다.
"그리고?"
"혹시, 저기. 저 같은 어린아이라도 써줄 만한...그런 곳을 알 수 없을까 하고요. 돈은 주지 않더라도 그
냥 먹고 잘 수만 있으면 되고....그런 데요."
보리스도 어느 정도는 예프넨과 비슷한 성격이었기에 그런 말을 꺼내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토냐는 눈을 약간 크게 뜨며 상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일자리를 구하니?"
이번엔 대답이 쉬었다.
"네."
"흐음......"
보리스는 토냐의 얼굴을 처음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자기가 그녀 정도의 나이만 되었더라도 얼마
나 좋을까 생각했다. 토내도 보리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장사꾼인 그녀는 이 소년이 평민 가정에서
자란 것 같지는 않다고 짐작했다.
"정말로 아무 일이나 상관없어?"
그리고 토냐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오자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대답했다.
"네, 어떤 일이든지."
"뭐 나도 확신은 할 수 없어. 저번에 대장간의 부닌 아저씨가 조수가 필요하다고 했던 것 같으니까 일
단 물어 볼게. 아니라면 이 근처에 드나드는 상인들이 잔심부름꾼을 필요로 할 것 같기도 하고."
눈을 천장으로 굴리며 중얼거리던 토냐는 불쑥 이어 말했다.
"너처럼 예쁘게 생긴 애는 돈 많은 마나님들도 시종으로 마음에 들어할 것 같은데."
보리스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얼굴로 약간 눈을 바로 떴다가 다시 내리깔았을 뿐이었다. 그런
소년을 내려다보며 토냐는 웃는 것처럼 입가를 실룩거렸다.
"어쨌든 혹시라도 좋은 얘기가 있으면 전해 줄 테니까 그만 방에 가서 쉬도록 해."
보리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에 들어간 후 토냐는 저 애가 저녁은 먹은 걸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없더란 말이야?"
캐미아는 동갑내기 아가씨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아직도 아가씨는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있
을 터였으므로. 게다가 좋은 소식도 없었다.
"그럼 다른 델 찾아보면 되잖아! 이만큼이나 큰 성인데 여기 귀족들은 그럼 뭘 입고 산단 말야!"
"여긴 시골이라서요 아가씨... 아가씨 같은 분이 입으시는 옷은 주문을 받아야만 만든대요."
"흥!"
로즈니스는 화가 나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즈, 아버지다. 들어가도 되겠니?"
아직 어린 딸이지만 꼬마 숙녀 취급을 해 주는 아버지였기에 이런 모습으로 있을 수 는 없었다. 로즈
니스는 얼른 발딱 일어나서 치마를 정돈하고서 대답했다.
"네, 아버지."
문을 열고 들어온 벨노어 백작의 팔에 걸쳐진 젓은 로즈니스가 가장 좋아하는 초록빛 천으로 만든 귀
여운 드레스였다. 완전히 새 것이였고. 만족스러울 정도로 고급이었기에 로즈니스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
다.
"아빠!"
뒤따라 들어온 비서 휴가 문을 닫았다. 벨노어 백작이 말했다.
"우리 꼬마 숙녀님이 옷이 없어서 쩔쩔매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얼른 가서 구해왔단다. 마음에 드느
냐?"
벌써 드레스를 받아들어 몸에 대어보고 있던 로즈니스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마음에 들고말고요!"
"그럼 얼른 입어라. 아버지와 밤나들이 가자꾸나. 다른 나라의 풍습도 많이 구경해야 현명한 숙녀가 되
지."
"네!"
백작이 나가고 나서 로즈니스는 캐미아의 도움을 바당 싫었던 옷을 벗어버리고 서둘러 드레스로 갈아
입었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 그녀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밝은 레몬빛 머리카락을 곱게 늘어뜨리고 초록색 눈을 보석처럼 빛내는 자신은 스스로도 깜짝 놀란ㄹ
만큼 예뻐져 있었다. 실은 단순히 드레스 때문에 아니라 반나절 동안 구질구질하던 기분이 맑아졌던 탓
이었다. 캐미아도 옆에서 손뼉을 치며 아가씨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곧 둘은 신이 나서 아래층으로 내
려왔다.
백작은 이미 타고 갈 말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백작이 말에 오르고, 하인의 도움을 받아 두
다리를 안장 한쪽으로 모아 내린 채 말에 탄 로즈니스는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빠. 어디서 옷을 구하셨어요? 캐미아는 바느질 집밖에 못봤다는데."
"아버지도 그 바느질 집에서 샀지."
로즈니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요?"
"이웃 마을에서 주문 받아 만들고 있던 드레스를 두 배 값을 주고 사왔지."
"아아."
로즈니스는 그제야 생긋 우승며 이해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고삐를 쥔 아버지의 품에 편안하게
기댔다.
말이 출발했다. 백작의 뒤로 비서 휴와 기사 셋이 역시 말을 타고 따랐다. 캐미아는 떠나는 말들을 바
라보며 저렇게 좋은 아버지가 있는 아가씨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태어나자마자
귀족 집의 몸종으로 팔아먹었고, 돈 몇 푼만 생기면하루도 빠짐 없이 취해 있는 주정뱅이였으며 그나마
도 몇 년 전에 집을 나가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얘, 얘... 문 좀 열어 봐."
토냐는 소년의 이름을 물어두지 않은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탓하며 문을 두드렸다. 한참 잠들었을 테니
금방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금방 대답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이리 나와 봐. 대장간 아저씨가 널 좀 보자고 하셔."
보아하니 소년은 잠들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걸어가는 동안 토냐가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보리스...입니다."
"난 토냐라고 불러."
왠지 모르게 진네만이라는 성을 말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토냐도 더 묻지 않은 채 그를 한쪽 구석의
테이블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키가 크고 유난히 팔뚝만 굵은 40대 남자가 앉아 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부닌 아저씨. 얘에요."
남자는 곁눈으로 슬쩍 보리스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비리비리한 녀석이군. 너, 대장간 일을 견딜 수 있겠냐?"
대장간 일이 무엇인지 알 리 없는 보리스였다. 그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입을
열었다.
"솔직히 어떤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허."
부닌이라는 남자는 맥주잔을 내려놓더니 다시 한 번 소년을 살피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거짓말하는 녀석은 아니군. 널 딱 보고서 한 눈에 평민 출신은 아니란 걸 짐작했다. 어느 집안이냐?
최근에 항쟁이 있었나?"
"......"
보리스의 어두운 눈동자가 문득 마음에 걸린다 싶었다.
부닌은 대장장이였기 때문에 항쟁에 쓰일 무기를 댄 일이 여러 번 있었고. 덕택에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항쟁이란 주로 지배 계층들끼리 일어나는 법이고 주인이 바뀌어도 장원의 평민들은 그냥
살아가면 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대뜸 짐작하여 물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문 편이었다. 트라바체스가
공화국이 되었어도 아직은 틀림없는 계급 사회였다. 평민들에겐 선제후나 의원을 뽑을 투표권조차 없었
다.
"말하지 실은 게냐?"
말없이 서 있는 보리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부닌이 재차 물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맥
주를 마저 들이키더니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대장간으로 와라. 일을 조금 시켜 보고 별 볼일 없으면 쫒아버리겠다."
보리스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지만 토냐의 얼굴은 환해졌다. 그녀는 부닌 아저씨를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면 합격이나 마찬가지란 걸 알고 있었다.
"얘, 어서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고 뭘 하고 있어?"
보리스는 토냐가 다그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고, 다시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돌아왔다. 토냐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주방으로 가서 따뜻한 수프를 한 그릇 가득 떠 가직
돌아왔다.
" 너 저녁 안 먹었지? 이거라도 마셔 봐."
수프는 속에 든 것도 없이 허여멀건 물이 아니라 꽤 충실하게 야채니 고기 조각이니 하는 것이 들어
있었다. 보리스는 토냐를 잠시 쳐다보다가 수프 그릇을 받아들고 한 모금 마셨다. 토냐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얘, 너는 고마우면 고맙다고 말하는 버릇 좀 들여야겠다."
탓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보리스의 눈에서 충분히 고마움을 일었던 것이다.
"고마워요...누나."
좀 창피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보리스는 주머니에서 말라비틀어진 빵조각을 꺼내어 수프에 찍어 먹었
다. 그러나 토냐는 그저 미소만 지었을 따름이었다.
먹고 나니 몸이 좀 따뜻해졌다. 토냐가 그릇을 가지고 돌아가자 보리스는 잠시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
겼다.
대장간이라는 곳은 아마 농기구나 무기 따위를 만드는 곳이나 분명 힘들고 거친 일일 터였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최근 얼마간 겪어 온 일들로 인해 그의 마
음에 생겨난 교훈 같은 것이었다.
저들을 믿어도 좋을까.
생명의 은인인 양 접근해서 탐내던 검을 빼앗고 용병단에 팔아버리는 자들도 있었다. 친절하게 재워
주는 체 하며 역시 어떻게 돈이나 몇 푼 챙겨 볼까 하는 어른들도 보았다. 친한 동료처럼 보이는 자들
도 간단한 위기만 닥치자 금방 서로를 배신했다.
토냐 누나나 부닌 아저씨 지금 친절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유난히 친절한 체 하던 자들일수록 꼭 더 악랄한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속으로 이리 저리 고민하던 보리스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옆에 끼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늦은 밤이 되어 있었다. 그는 카운터에서 바쁘게 일하는 토냐의 눈을 피해 여관 밖까지 나왔다. 대장간
이 정말로 있는지 찾아볼 셈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대장장이가 정직한 사람인지도 알아볼 생각이었
다.
여관 문 앞에서 거리로 걸어나오던 그는 갑자기 달려오는 네 마리나 되는 말에 그대로 밟힐 뻔했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기수들이 길거리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부주의하게 달려왔던 것이다. 거리에는 사
람들이 이리저리 개미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워엇!"
보리스가 미처 피하지 못한 채 바닥에 바짝 웅크렸을 때, 그의 등바로 위에서 말이 멈추었다. 멈추고도
다리를 움직거리던 말이 보리스의 옆구리를 툭 걷어찼다. 간신히 옆으로 굴러 빠져나왔지만 통증이 멈
추지 않았다.
"뭐냐! 죽고 싶어서 길을 막는 거냐!"
길을 막았다는 것은 순 억지였다. 보리스가 애써 몸을 일으켰을 때 기세 등등한 네 명의 기수가 푸르
륵 대는 말을 세운 채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시비를 걸기 위해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저들끼리 피식거리는 웃음을 주고 받았다.
"이 어른의 앞길을 막았으면 얼른 엎으려 빌 것이지 뭘 그리 쳐다보고 있느냐!"
그들의 기세가 하도 높아서 주위 사람들은 감히 끼여들고 싶지 않은 듯 눈치만 보며 흩어져 갔다. 보
리스는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는 아직 고개 속이는 데 익숙하지 못했다.
"길을 방해해서 죄송하지만...사람 많은 거리에서 말을 달린 아저씨들도 잘못인 것 같습니다."
"허어?"
"저 녀석 말하는 것 좀 봐라. 아직 정신이 덜 든 모양이구나."
기수들이 어이없어하며 헛웃음을 흘리는데 한 명이 말했다.
"정신 번쩍 나게 형님이 맛 좀 보여주지 그러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맨 앞에서 달려왔던 자가 말채찍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보리스를 향해 내리쳤다.
철썩!
채찍은 피할 겨를도 없이 등과 어깨에 감겨 날카로운 상처를 냈다. 그런 일격을 맞고 서 있을 어린아
이는 없었다. 보리스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자 그들은 히죽거리며 다시 한 번 채찍을 들었다. 살갗이 터져
나가는 통증이 다시 한 번 피부를 파고들었다. 채찍 끝이 얼굴에 스쳐 입가에도 피가 흘렀다.
"형님이 버릇을 가르치니까 저절로 무릎을 꿇는군요."
보리스가 쓰러진 것을 보고 한 남자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또 다른 남자가 말했다.
"알겠냐, 꼬마야? 송장 치우게 되기 전에 얼른 무릎 꿇고 빌어라."
토냐는 밖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느끼고 뭔가 싶어 밖으로 나왔다가 이 꼴을 목격했다. 그녀는 화가 치
밀어 올랐지만 동시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도 저들처럼 행색 좋은 망나니들에게 함부로 대들었다가
는 무슨 수모를 당하게 될 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망설이다가 여관으로 뛰어들어간 그녀가 소
리질렀다.
"아빠! 아빠 어디있어요! 부닌 아저씨, 이리 좀 나와 보세요!"
보리스는 주위의 모든 것이 벌떼처럼 윙윙거린다고 느꼈다. 통증보다도 수치심이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는 옆구리에 낀 윈터러의 자루를 보았다. 이 검을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자라기만 했
더라면, 아니 여기에 형이, 예프넨이 있기만 했어도......
그러나 소용없는 기원일 뿐이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그는 비척거리며 검을 짚고 있어났다. 후들
거리는 다리조차 가누기 힘들었지만 그는 똑바로 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항변하지도 않았지만, 여전히 굴복하지도 않았다.
"저런 표독스런 자식을 봤나......"
한 사람이 말에서 내렸다. 넷 가운데 가장 막내인 듯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보리스의 멱살을 움
켜쥐더니 힘껏 여관의 기둥에 부딪쳤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기둥이 다 흔들렸다.
"너 같은 놈은 혼쭐내서 버릇을 가르쳐야 해. 어딜 거지 자식이 귀족한테 대드나, 대들길!"
쾅!쾅!
두 번 연속으로 기둥에 처박더니 다른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커다란 손은 소
년의 얼굴 전체를 덮어 일그러뜨렸고 강인한 손목이 머리를 옆으로 꺾어 돌렸다. 목이 뒤로 꺾어질 지
경이 되었을 때 다시 한번 기둥으로 밀쳐 박았다. 심한 충격으로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나냐?"
"......"
대장장이 부닌이 토냐와 함께 밖으로 뛰쳐나와 그 꼴을 보는 순간이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우직
한 사내인 그가 다짜고짜 달려들려는 그 때 등뒤에서 엄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 무슨 소란이냐!'
사람들의 눈이 뒤로 돌아갔다. 오늘은 말 탄 자들이 연이어 들어닥치는 날인 모양이었다. 다섯 마리나
되는 말이 멈춰 있었고 그 가운데 맨 앞에서 백마를 탄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남자가 호통을 치고 있었
다. 토냐가 보니 아까 저녁 무렵 성으로 들어온 외국 귀족이 분명했다.
"뭐야!"
보리스를 구타하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 때 백작 일행의 두 남자가 말에서 뛰어내려 그에게 달려
갔다. 그리고 당장 그 자를 붙잡아 밀치고 보리스를 부축했다.
보리스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을 정신이 아니었다.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아서 정확한 판단
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대로 부축하는 자들의 손에 축 늘어졌다.
"넌 뭔데 참견이야!"
말채찍을 휘둘렀던 자가 따지려 했지만 백작의 목소리가 단호하고도 위엄 있게 그를 눌렀다.
"난 이곳 사람은 아니지만 너희 같은 무뢰배들이 어린아이 하나를 때리는 모양을 그냥 보아 넘길 사람
은 아니다. 매운 맛을 보고 싶지 않거든 썩 물러나라."
"어쭈, 제법 큰소리치는데!"
결국 칼싸움으로 번질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무기를 뽑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슬금슬금 뒷걸음
질치면서도 구경을 하려는 자세가 되었다. 토냐와 대장장이 부닌은 손쓰기가 뭣해져서 그들이 하는 양
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경꾼들의 기대대로 되지는 않았다. 백작이 일단 칼을 뽑고 그 부하들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
자 처음의 무뢰한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특히 중년 백작의 칼 솜씨는 매우 놀라워서 단숨에
두 사람을 말 등에서 떨어뜨리고도 상대가 크게 다치는 것은 교묘히 피했다. 말에서 떨어진 자는 욕을
퍼부었지만 그들 패거리가 모두 지는 것을 보고서 얼굴빛이 변해서 엉금엉금 기어 구석으로 달아났다.
백작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어서 네놈들의 말을 끌로 이 자리에서 썩 사라져라!"
더 추궁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들은 한 마디 대거리도 없이 시킨 대로 얼른 달아났다.
"아이를 말에 실어라. 그리고 의사도 수소문해 봐라."
백작이 명령하지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토냐에게 다가와 이 근처에 의사
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뭔가 씁쓸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의사는 아니지만 저쪽 골목을 돌아가서 세 번째 집에 약사 할머니가 살아요."
상황이 해결되자 백작은 말을 돌려 비서 휴가 안고 있는 로즈니스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레 칼싸움 장
면을 보게 된 로즈니스는 눈이 동그래져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괜찮다. 로즈, 다 끝났단다. 아버지가 늘 말했지? 불의한 상황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귀족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너도 기억해두거라. 귀족에게는 귄리만큼이나 다 나름의 의무가 있는 거란다."
로즈니스는 아버지가 거느린 기사 한명이 안아 말을 태운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이미 정신이
반쯤 혼미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후에도 이날 로즈니스가 내뱉은 말을 금방 기억해 낼 수는 없었다.
"난 저렇게 더러운 아이는 싫어!"
로즈니스가 뭐라고 말했든 백작 일행은 보리스를 데리고 여관 앞을 떴다.
2. 삶의 갈림길
"으, 으음......"
천장에 무늬 있는 벽지가 발라진 방이었다. 순간 롱고르드의 저택에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었다. 그것도 저택에 있는 어머니의 방, 더 어렸을 때 무심결에 잠들었다가 깨어난 일이 있는 그 침대
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방이었지만, 형에게는 늘 느껴진다는 그 어머니의 냄새를 맡아보려
했었다.
혼수 상태에서는 깨어났지만 한쪽 눈이 부어 올라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되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 검은?"
몸을 일으키려는 그를 다시 눌어 눕혀버리며 눈가에 물수건을 얹어 주는 목소리가 대꾸해 왔다.
"검이라고?: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대략 서른 정도 먹은 아주머니인 듯했다.
"여기가...어딘가요?"
보리스는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아까의 손이 사정없이 그를 도로 눌러버리며 이번에는 어
깨를 싸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서른 먹은 아주머니라는 생각은 정정되어야 할 것 같았다. 손의 힘은 같
은 나이대의 아저씨와도 맞먹었다.
"가만히 좀 있어. 궁금한 건 차근히 가르쳐 줄 테니까."
시킨 대로 보리스는 상대방이 몸 곳곳의 붕대를 풀어 상처를 닦고 다시 새 붕대로 감도록 가만히 기다
리고 있었다.
치료가 끝나자 몸이 한결 시원해졌다. 한쪽 눈이나마 뜨고 옆에 애써 바라보니 매우 뚱뚱한 아주머니
가 더러운 붕대와 대야를 챙기고 있었다. 다른 하인이 들어와서 그것들을 가져가고 나자 아주머니는 그
제야 보리스의 얼굴을 바로 바라보았다.
"집은 어디냐?"
갑자기 눈앞에 어지러울 정도로 어머니의 방이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답했다.
"없어요."
"떠돌이라고?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바른 대로 말해 봐. 피해는 끼치지 않으니까."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집이 있다 해도 돌아갈 수 없으니까 없는 거나 다름없어요."
"흥, 너도 네가 비극의 주인공인 줄 아는 가출 소년이야?"
너무 어이없는 반응에 보리스는 뭐라 답해야 할 지 몰랐다. 아주머니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꼭 집안 환경도 좋은 것들이 제 집이 제일 편한 줄 모르고 가출해서 헛소리들을 지껄인다니까. 아버지
가 동생만 사랑해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둥, 살짝 돌아서 어머니한테 마음 아플 소리를 해버렸으니
돌아갈 면목이 없다는 둥......"
"......"
"얼른 솔직히 말해. 어느 집이야? 넌 입은 옷도 좋은 것이고 손에 박힌 굳은 살이라고는 겨우 검을 잡
았던 흔적밖에 없으니 평민의 자식일 리가 없단 말이다. 백작 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서 널 구해주셨지만
언제까지나 데리고 다닐 거라 생각해선 안 돼. 얼른 집에 가서 얼토당토않은 오해나 푸는 게 옳지."
보리스는 점차 이 아주머니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도 끊
을 겸 낯선 단어를 질문했다.
"백작...님이요?"
아주머니는 이불을 바로 펴서 덮어 주면서 말했다.
"그래. 백작 님...아참, 이 나라엔 백작이 없지? 널 구해주신 분은 아노마라드의 귀족이신 벨노어 백작이
시다. 설마 백작이 무엇인지 모르는 건 아니지?"
보리스가 뭔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덜컥 열리더니 한 소녀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월라 아줌마!"
보리스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소녀 쪽에서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사뿐사뿐 들어오더니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거 봐. 그런 여관에 들어가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라고."
캐미아가 보리스의 부어오른 눈을 보더니 조그맣게 혀를 찼다. 그러나 그녀는 기본적으로 보리스를 다
시 만나게 된 걸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캐미아는 곧 입을 열어 말했다.
"어쨌든 우리 주인님께서 마친 그곳을 지나고 계셔서 다행이었다. 아가씨께선 많이 놀라신 모양이지만
지금은 괜찮으시고. 우음...너, 집으로 돌아갈거니?"
보리스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아주머니의 질문은 어른인 만큼 당연한 것이었을 지 몰라
도 캐미아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였다. 더구나 캐미아의 어조는 마치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는 듯해서 더욱 이상했다.
옆에서 윌라 아주머니가 다시 불쑥 끼여들었다.
"그럼 당연한 게 아니겠느냐, 캐미아. 주인님께선 어서 영지로 돌아가셔야 할 분이신데."
캐미아는 일부러 아주머니의 말을 외면하는 체 하며 다시 말했다.
"으응, 뭐 돌아갈 곳이 있다면 가야겠지만."
윌라는 평소 로즈니스의 곁에 붙어 있는 캐미아가 뭔가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고 딱 짐작했
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대기 시작했다.
"주인님께서 무슨 말씀이 있으셨대냐? 응? 로즈니스 아가씨께서 무슨 얘기라도 하셨어?"
"아아,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인걸요."
"이 에... 아니, 이름도 모르잖아. 하여튼...쟤가 어느 집안 앤지 알아내셨대?
보리스는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그는 캐미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캐미아는 고개를 내
저었어다.
"난 몰라요.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아이 참. 난 그만 아가씨한테 가볼래요. 찾는데 없다고 또 꾸
중들을지도 몰라."
그러더니 캐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보리스에게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또 봐."
보리스가 윈터러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그 날 저녁 무렵이 되어서였다. 혼란한 꿈속에서 문득 깨어나
보니 윈터러는 검은 보자기에 둘둘 감아져서 침대 바로 아래에 놓여 있었다.
전날 밤으로부터 하루를 꼬박 잠을 보낸 것이다. 어질어질하던 머릿속에 토냐와의 약속이 떠오르고서
야 그는 자신을 돌봐주고 있는 이 사람들이게 뭔가 말해야겠다고 느꼈다. 때마침 윌라가 몸이 좀 나아
졌으니 백작 부녀와 함께 저녁을 들도록 하라는 전갈을 가지고 왔다.
눈의 붓기가 가라앉고 붕대로 감았던 곳도 어느 정도 옷으로 덮어 입을 수 있게 된 터였다. 그가 안내
된 곳은 이 여관 안에서도 특실에만 딸려 있는 거실 겸 작은 식당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백
작과 로즈니스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음식 시중을 들기 위해 윌라와 캐미아도 들어와
있었다.
"어서 오거라."
백작이 먼저 말하자 로즈니스도 비교적 나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와."
빈 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어서 보리스는 어디에 앉아야 할 지 몰랐다. 백작이 로즈니스의 바로 옆자
리를 가리켰다.
"저기 앉거라."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소수의 사람이 즐기는 만찬치고는 꽤 푸짐한 편이었다. 얇게 자른 햄
과 흰 치즈를 얹은 빵, 샐러드 접시가 나오고 나서 곧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테이블 가운데 커다란
빵 덩어리가 놓여 있었는데 보리스는 그것이 무엇에 사용하는 것인지 몰랐으나 백작 부녀가 하는 것을
보고 곧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접시에 남은 부스러기를 닦아 내는 꽤나 사치스러운 용도였다.
토끼고기를 잘게 썰어 양념한 질그릇 요리와 통후추 열매를 드문드문 뿌린 큼직한 벨크루즈 소시지,
그리고 포도주빛이 도는 얇게 썬 양고기 등등이 붉은 포도주와 함께 나왔다. 보리스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된 사람처럼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간단하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두 사람을 기다려 식사를
시작했다.
잠시 후 조금 늦게 오믈렛이 하나 사왔는데 그걸 보며 아버지와 딸은 서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 받
았다. 백작이 말했다.
"이걸 먹어 보면 벨크루즈의 진짜 맛을 알게 되지."
무엇인지도 모르고 보리스는 오믈렛을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약간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입에서는 두툼하게 자른 일종의 버석이 씹혔는데 그 맛이 아주 희한했다. 부드럽고 촉촉했으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진하고 독특한 향미가 입안에 퍼졌다. 소년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보고 로즈니스가 재빨
리 말했다.
"송로야. 우리 집안의 영지에서 나는 것은 아주 유명하거든."
처음 먹어 보는 것인데도 진미라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보리스는 설명에 감사하듯 로즈니스에
게 가볍게 고래를 숙여 보였다. 로즈니스의 등위에 서 있던 캐미아가 살짝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러고도 로즈니스는 보리스가 식사하는 양을 슬쩍슬쩍 곁눈질해 쳐다보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익숙한 손놀림과 정확한 식사 예법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차츰 안심하기 시작했다. 이
낯선 소년이 불쾌한 일을 저질러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가능성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느낀 탓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오랜만에 잘 먹은 탓에 보리스의 마음도 약간은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경계심을 완전
히 버리지는 않은 채 후식으로 나온 타트와 차를 맛보았다. 브랜디를 마시던 백작이 하녀들을 나가게
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소개를 안했군. 나는 아노마라드 남쪽 지방인 벨크루즈의 절반을 차지하는 벨노어 영지의 백
작 가니미드 다 벨노어다. 이 아이는 내 외동딸이자 상속녀인 로즈니스 다 벨노어라고 하지."
보리스는 순간 당황했다. 상대방이 이렇듯 정식으로 소개하면 자신의 신분도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되
는 것이다. 보리스는 입 속으로 약간 망설이다가 외국인인데 그리 크지도 않은 자신의 가문을 설마 모
르겠지 하고 생각하며 말했다.
"보리스 진네만입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백작이 되물었다.
"롱고르드의 그 진네만 가문인가?"
거짓말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망설이긴 했지만 보리스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백작은 의아
한 표정이 되었다.
"그곳이라면 트라바체스에서도 이름 있는 무사 가문이라고 언뜻 들었는데...집안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인가?"
다행히도 백작은 앞서 소설 좋아하는 아주머니처럼 얼토당토않은 지레짐작은 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솔직하게 털어놓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보리스는 짧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삼촌께서 집안을 관리하게 되셨습니다."
"흐음......"
로즈니스의 상식으로는 보리스의 말이 무슨 상황을 뜻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셔
서 삼촌이 집안을 맡게 되었다면 그 아래에서 계속 보호를 받으면 될 일 아닌가? 그렇다면 그 말은 '아
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삼촌께서 집안을 관리하게 되셨다' 가 되었어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리스의 말
속에서 인과관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백작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는 자주 트라바체스에 드나들었던 만큼 아 나라의 고
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었다.
"역시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것인가? 그런 것이겠군."
"......"
문득 외국인 앞에서 자기 나라의 치부가 드러나는 듯한 기분에 얼굴이 붉어졌다. 아직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이이지만 이런 식의 공화정이라면 신물이 난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다. 아노마라드는
왕정이라고 들었는데 그 나라는 좀더 나은 상태일까?
"그렇다면 이제 어디에 몸을 의탁할 생각인가?"
보리스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작정했다.
"딱히 정해진 곳은 없습니다. 다만 이 도시의 대장장이 어른께서 도제로 거둬 주실 지도 모른다고 하셔
서 그곳에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로즈니스는 대장장이를 '어른' 이라고 말하는 보리스의 말을 들으며 푸훗, 하고 웃었다. 이 희한한 대화
가 즐겁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약간의 우월감이 또한 그녀를 기분 좋게 했다.
"그래, 그럼 대장간 조수가 되겠군. 전에도 그런 일에 관심이 있었나? 그 일이 마음에 들 것 같나?"
그럴 리가 없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만은 달
리 말했다.
"이제부터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웃고만 있던 로즈니스가 불쑥 끼여들더니 말했다.
"아빠, 그럼 이 소년은 귀족인가요? 귀족이 대장간 일을 하게 되나요?"
"아니다. 로즈. 이 나라에는 아노마르드에서와 같은 귀족이 없단다. 다만 오랫동안 세습되어 온 선제후
와 의원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들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책임질 사람들을 뽑지."
로즈니스는 장차 영지를 상속할 딸이였기에 아버지로부터 여러 가지 들은 것이 조금 있었다. 그래서
반문했다.
"그러면 나라 안의 영지들은 어쩌고요? 귀족이 없다면 누가 그것들을 관리하나요?"
"영지들에는 대대로 내려온 주인이 있지. 그러나 그들도 귀족은 아니란다. 대부분은 앞서 말한 선제후
나 의원 가운데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을 찾아서 그들에게 조력을 제공하고 반대로 도움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영주들의 투표가 선제후와 위원을 결정하게 되는 만큼 그들의 지지를 얻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이지. 어찌됐든 그들 윗사람이 힘을 갖느냐, 또는 쇠망하느냐에 따라서 영지들은 때때로
그 윗사람과 운명을 같이하게 되고, 그럴 때면 영지의 주인도 바뀌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백작이 길게 설명을 하면서 대장간에 대한 것은 어쩐지 뒤로 밀려나 버린 것 같았다. 보리스는 외국인
인 백작이 우리나라에 대해 상당히 잘 아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다시 말했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염치없이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만, 이만 떠나 대장간으로 가볼까 합니다. 본
래는 아침에 가기로 했는데 늦어지게 되었으니 저도 그 분께 면목이 없게 되어서 더 지체할 수가 없을
것같아요."
백작은 잠시 말하지 않고 조용한 눈길로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이것저것 생각하던 로즈니스도 아버지
의 분위기에 동요되어 같이 보리스를 쳐다봤다.
보리스가 두 사람의 눈길에 불편해할 정도가 될 무렵, 백작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보리스 진네만이라고 했지? 자네, 대장간으로 가기보다는 우리와 함께 아노마라드로 가는 것이 어떻겠
는가?"
보리스도 놀랐지만 로즈니스도 금시초문이었던 모양이었다. 깜짝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빠! 얘가 우리와 함께 간다고요? 우리 집으로요?"
백작은 빙그레 웃었다.
"그건 진네만 군이 결정할 문제지. 난 일단 제안을 했을 뿐이니까."
그들이 몇 마디 나누는 사이 보리스는 갑작스런 제안으로 인한 혼란에서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당장 질문이 튀어나왔다.
"죄송합니다만, 어째서입니까?"
"어째서라. 이유를 듣고 싶은가?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원한다면 이유를 들려주겠지만 난 듣지 않는 쪽
을 권하고 싶군."
보리스는 잠시 테이블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곧 단호하게 고개를 떨쳐 들며 말했다.
"전 듣겠습니다."
그러자 백작도 망설이지 않고 단숨에 말했다.
"자네를 이용하고 싶어서다."
보리스는 숨을 훅, 하고 짧게 들이켰다. 그리고 말했다.
"이용...이라고 하셨습니까?"
보리스는 이 낯선 귀족이 뜻밖에 친절을 베풀 때부터 이미 약간의 의심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심지어
함께 가자는 이야기까지 꺼냈을때는 더 망설임 없이 이자가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보리스는 이제부터 그게 무엇인지 상대방의 변명으로부터 추론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듣게 된 대답
은 전혀 엉뚱한 것이어서 그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백작의 눈이 묘한 빛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직 어린 보리스가 속내를 알아보기에는 너무
도 다의적인 의미를 품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말하고 그 뒤를 말하지 않을 순 없지 그래, 난 실제로 자네가 필요 없다. 내게는 무엇 하
나 부족한 것이 없고 사랑스런 딸애가 있으니 더 이상의 자식도 원치 않아. 그런데 뜻밖으로 내게 딱
네 나이의 소년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 실은 소년이 아니라 소녀라도 생관 없었지 네가 좋은 검을 갖고
있는 걸 봤다."
보리스의 눈동자도 그 즈음에서 어린아이답지 않은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주도면밀한 자세로 그
는 상대의 말을 들었다.
"난 오래 전. 로즈가 태어나기도 더 전에 여러 친구들 앞에서 한 친구와 내기를 걸었었다. 결혼하여 자
식을 낳게 되면, 그 아이가 열 세살이 되었을 때 서로 검을 겨루게 시켜서 이기는 쪽이게 진 쪽이 무슨
소원이든 들어 주기로 말이지. 그 후로 로즈가 태어났고 난 오랫동안 그런 내기는 잊고 있었다."
전혀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들으며 보리스는 더욱 정신을 차려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바로 작년에, 아주 오랜만에 그 친구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되었지 그 자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 쪽은 불행하게도 백치라고 하더군. 그는 내가 딸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는 동생 쪽을 맹렬하게
교육시켜서 그 나이에 보기 드문 소년 검사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 자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바로 내
딸 로즈였지 그는 백치인 아들과 내딸을 혼인시키기를 바라고 있는 거다."
"어머나!"
로즈니스가 깜짝 놀라 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엎질러진 음료수를 닦아 낼 하녀들은 이미 밖으로 나
간 상태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로즈니스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아버지를 다그쳤다.
"아빠, 그게 정말이에요? 백치하고 저를 결혼 시키신다고요?"
백작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 모든 명예와 이름을 걸고 그런 일은 없다. 안심해라. 로즈."
아버지의 단호한 말에 로즈니스는 조금 안심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미심쩍은 표정으로 보리스를 다시
쳐다보았다. 보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 사람과 싸울 소년으로 저를 택하시려는 것인가요? 하지만 저는 백작 님의 아들이 아닌데
어떻게 그 소년과 싸울 자격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딸에게서 고개를 돌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