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권. 2장. parting (2/21)

2장. parting

1. 첫 저녁 식사

 보리스는 풀밭에서 눈을 떴다.

 밝은 햇빛이 얼굴에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는 검 하나를 지녔을 뿐 빈 몸이었다. 주위에는 아무

도 없었다.

 그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고 이곳이 전혀 익숙하지 않은 곳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여긴 어딜까? 그는 

곧 전날 밤의 일을 기억해 냈다.

 형과 등을 대고 서 있었던 것까지는 기억났다. 가쁜 숨소리도  턱까지 뜨겁던 것도 생각해 낼 수 있었

다. 그러나 그 다음은?

 큰 충격이 머릿속을 휘저어 버린  것처럼 이후는 혼돈 뿐이었다.  보리스가 기억의 부재가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때 자신이 기절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뭔가... 보았던 것도 같은데......

 "보리스! 깨어났구나?"

 그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기분이 되어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물 담긴 나무 바가지를 든 

채 걸어오고 있는 예프넨을 보았다. 그의 입술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이 떨어졌다.

"......형?"

 예프넨은 얼떨떨해하고 있는 동생에게 바가지를 건네주며 빙긋 웃었다.

 "그래,임 마 너한테 나 말고 형이 따로 또 있기라도 했냐?"

 보리스는 물을 마실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예프넨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왜인지 몰랐다. 갑자기 

그의 눈에서 눈물이 두 줄기 주룩 흘러내렸다. 예프넨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예프넨이 다가와 이마를 짚는 순간  보리스가 바가지를 떨어뜨리고 형을  와락 껴안았다. 쏟아진 물이 

둘의 바짓가랑이를 적셨다.

  예프넨이 뭔가 묻기도 전에 보리스가 먼저 말했다.

 "아냐, 형... 나,난. 그냥, 그냥 반가워서 그래......"

 실은 보리스도 그 이유를 몰랐다. 어젯밤의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장면들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기억은 멀쩡한데 그 부분만이 생각나지 않다니.

 예프넨은 별 말 없이 보리스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고는 몸을 땠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동생과 눈높이

를 맞추더니 뺨을 쓰다듬었다.

 "자식, 너 뭔가에 많이 놀랐구나."

 마음이 진정되고 나자 둘은 쏘다진 물 대신 바가지를 집어들고  직접 샘으로 향했다. 그리 먼 곳은 아

니었다. 주위는 마치 고향 롱고르드의 그곳이 그랬듯 사방이 들판이었다.

 샘은 작았다. 동근 돌로 빙 둘러져 있고 아마 예프넨이  끊어낸 듯한 바가지의 끈이 한쪽 말뚝에 남아 

있었다. 두 형제는 물을 실컷 마신 후 바가지를 다시 처음처럼 매어 두었다.

 "형,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귀렘 가문 영지의 일부인 하타 고원이야, 롱고르드는 여기서  남쪽이지. 너도 이곳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았니?"

 예프넨은 뭐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

다.

 "어떻게 하룻밤도안 그렇게 멀리 올 수 있는 거지?"

 예프넨이 팔을 저어 샘 뒤쪽을 가르켰다. 거기에는 낯선 말 한 마리가 매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밤새 저 말을 타고 왔다고 생각하자 다시 한 번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계속 깨어

나지도 않아고 기절해 있었다는 건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정신을 잃을 수가 있는거지?

 그 다음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보리스가 형의 태독 너무도 밝고, 또 주위가 평화로운 

것에 이끌려 나쁜 대답이 나올 것은 기대도 하지 않은 채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셔?"

 "아......"

 예프넨은 입을 벌렸지만 그리 빨리 밥하지는 못했다.  보리스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눈이 동그래지자 

예프넨은 급히 말을 이었다.

 "아. 그러니까..여가가 아닌 다른 데로  가셨어. 튤크 집사하고... 그런데 어딘지  정확히 모르겠어. 워낙 

엉망진창이어서 흩어져...달렸거든."

 "그럼 어떻게 아버질 찾아?"

 예프넨은 빠른 목소리로 대꾸했다.

 "튤크 집사가 우리한테 마법으로 연락을 줄 거야."

 보리스가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럼 그 동안은 우리끼리 있어야 되겠네? 그럼 우린  집으로 돌아가도 되는 거야? 저어, 그럼 블라도 

삼촌은?:

 "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조금 무리지만....."

 예프넨이 말을 흐리자 보리스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삼촌의  무서움은 보리스가 다섯 갈이 

었을 때 이미 충분히 경험한 바 있었다. 그때 삼촌은 혼자 아버지를 찾아와서 마당에서 놀고 있던 보리

스를 붙잡아 옆구리에 낀 채 우물에 빠뜨리려는 시늉을 하며 싱글싱글 웃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삼촌을 쫓아낼 수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ㅇ네 삼촌이 장난으로 겁을 

주는 줄 알고 까륵거리며 웃었었다. 그러나 점점 시커먼  우울이 무섭게 느껴질 즈음이 된 후에도 삼촌

은 그 '장난'을 멈추지 않았고 아버지가 그 앞에서 삼촌과 뭔가 어려운 대화를 하셨던 것은 기억하고 있

었다.

 "우리 고모할머님한테 갈까?"

 예프넨이 불쑥 제안하자 보리스는 의아해서 눈을 깜빡였다. 고모할머니라면  한 사람 뿐인데 보리스는 

아직까지 만나는 일이 한번도 없었다. 아버지의 고모지만 아주 멀고  낯선 존재였다. 아마도 아버지와는 

속한 정파가 다르다고 들었다. 서시조차도 오가지 않는 사이인데 형은 고모할머니를 잘 아는 걸까?

 "쟈닌느...고모할머니?"

 "그럼. 3월의원파의 스무렌 의원이 시장으로 있는 엘머 시에 계실거야.  좀 걸리긴 하겠지만 늦어도 한 

달 안에 갈 수 있어."

 "그렇지만 고모할머니께서 우릴 환영해 주실까?"

 예프넨은 고개를 움직여 머리카락이 양쪽 어깨에 번갈아 닿도록 하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그건 확신할 수 없는 무제야. 하지만 아버지께서...우릴 찾으시기 전에 딱히 갈 곳도 없거든. 고모

할머니가 속한 3월의원파는 아버지와 완전히 대립하고 있는 곳은 아니라서...아,  전혀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긴 하지."

 "뭔데?"

 예프넨 형은 세상에서 가장 곤란한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처럼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대답했다.

 "카츠야 선제후."

 "아아."

 보리스도 말이 없었다. 어려서 잘 모르긴 했지만 아버지가 섬기고 있는 아주 높은 분이라는 것만을 알

고 있었다. 예프넨은 아버지를 따라 아주  높은 분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예프넨은 아버지를 따라 

몇 번 간 일이 있으니 알고 있지만 보리스로서는 본 일도 없는 데다  무척 어렵게까지 느껴지는 대상인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많다고 들었으니 이런 입장인 형제가 가 봤자 그다지 좋은 

대접을 기대하긴 어려울 성 싶었다.

 "형... 우리 그냥 아무 데도 가지 않으면 안돼?"

 예프넨은 동생이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약간 더듬거리다가 말했다.

 "왜?. 그들이 환영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그것도 그렇지만...낯선 사람들한테 받아들여 달라고 애걸하는 것보다 그냥 우리끼리 평민들처럼  잠시 

살 수도 있잖아. 그리고, 그리고 아버지가 곹 연락해 오실 거 아냐? 그러니까 잠깐일 뿐일 테고, 또......"

 예프넨은 우울한 것도 같고 답답한 것도 같은  표정으로 동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답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보리스. 그런 생활은...너나 나는 저택에서 죽 하인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평민들처럼 

사는 것은 많이 힘들 거야. 난 가진 돈이 그리 만지 않아.  넌 아직 어려서 잘 모를 거야. 돈이 없는 평

민들의 생활은 무척 고달프거든. 일단  삼촌이 이겨서 저택을 차지한 이상  얼마간은 다른 이로 바빠서 

우릴 쫓아오지는 못하겠지만 우리가 윈터바텀 킷을 갖고 있는 이상 그리 오래 내버려두지는 않겠지. 그 

말고 다른 위험도 얼마든지 있어."

 보리스는 형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  상황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는 든든한 형이 

있었다. 뭐가 겁날 게 있단 말인가. 더구나 곧 아버지가 그들을 찾을 텐데.

 "난 괜찮아. 잠깐 뿐인데 그거도 목 견딘다면 아버지가 진네만 이름을 가질 자격도 없다고 꾸짖으실 거

야."

 그렇게 말하며 보리스가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형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걱정거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예프넨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일 지도 모르지. 우선 가장 가까운 마을부터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그런 

다음에 어느 쪽으로 갈지 천천히 생각해 보자."

 마을을 찾아냈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오는 동안 두 형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점검했다. 당연히 예프넨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무구, 위너바텀 킷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직 지켜야 하는 것들이니까. 그 다음으로 예프넨은 

허리에서 자궂 주머니를 끌러 집에서 탈출하기 전에  준비해 둔 금화들을 보여 주었다. 아노마라드에서 

T는 큼직한 1백 엘소 금화가 열 개 가량, 그 절반 가치를 지니는 1백 고블룬 금화가 30개쯤 되었다. 그 

정도면 넉넉히 써도 한달 이상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돈이 될 많나 물건들이 있었다. 남자들이다  보니 그다지 값나가는 장신구는 가진 것이 없

었다. 예프넨은 사파이어가 아로새겨진 손바닥만한 덮게 거울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보리스는 아무 것도 없었다. 주머니에서 나온 거라고는  저녁을 못 먹어서 대신 넣어 둔 말라비틀어진 

빵이 고작이었다. 그거라도 형제는 유쾌하게 나눠 씹으며 마을을 도착했다.

 그들은 자리를 잘 몰라서 마을의 이름이 뭔지는 몰랐다. 사실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도 않았다. 보리

스가 뭔가 새로운 모험이라도 시작하려는 것처럼 약간 들떠 있기까지 했다.

 마을은 작지 않았다. 그들은 들판을 가로질러 왔지만  입구에는 멀리서부터 이어져 온 듯한 길이 뚫려 

있었다. 그들은 경비병에게 신분이나 가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껏 번화한 거리라고는 롱고르드 지방에서 장이 서는 카즈난 시에 나갔을 때 본 것이 전부였다. 그

곳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북적거림이 곳곳에 가득했다. 사람 사는 곳이었다.

 보리스가 촌뜨기처럼 두리번거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실상은 계속해서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저. 이 근처에 여관이 어디 있습니까?"

 행상 아주머니에게 물어서 찾아간 여관은 다락이 높게 솟은 2층 건물이었다. 여러 마리의 말이나 마차

를 타고 온 여행객들이 입구를 메우고 있어서 그들을 피해 들어가는 것부터 애를 먹었다. 말 한 마리를 

함께 탄 그들은 그야말로 단출한 손님이었다.

 "어서 오십쇼!"

 커다란 목소리 때문에 보리스는 깜짝 놀랐지만 그건 그들에게 지른 소리가 아니라 뒤따라 들어오고 있

던 네댓 명의 모험가들을 환영하는 목소리였다.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곧장 형제를 앞질러 카운터로 다

가간 그들은 저들끼리 쉴새 없이 뭔가 지껄이며 방 두 개를 주문했다.

 "형, 방은 하루 빌리는 데 비싼거야?: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건 예프넨도 몰랐다. 여행을 한  일은 있었지만 들었던 여관은 항상 이보다 훨씬 

좋은 곳들이었고. 시중드는 하인들과 함께였으므로 한 번도  직접 카운터에서 계산한 일이 없었던 것이

다. 진네만 가문은 전통적으로 무인의 가문인 까닭에 돈을 직접 만지는 것을 약간 천시해었다.

 "방을...하나 주십시오."

 커운터의 여급은 방 가격을 말하지도 않고 벽에 죽 붙은 고리에서 열쇠를 하나 떼어 내놓았다. 예프넨

은 금화밖에 없었기 때문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로 돈이 오가는 일에 대해서는 서툴렀다.

 여금이 묘한 눈길로 예프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예프넨은 그것이 왜 빨리 돈을 주지 않느

냐는 뜻이라고 판단했다.

 "얼마죠?"

 여급은 입술 끝을 실룩이며 애매한 미소를 보이더니  '10엘소' 라고 말했다. 예프넨은 50엘소의 가치를 

가지는 고블룬 금화를 한 개 내었다.

 "어머, 젊은 분이 큰돈을 가지고 다니시네요."

 여급이 거슬러 준 은화들을 집어 주머니에 넣고 돌아서려니 여급이 피식피식 웃으며 뒤통수에 대고 말

을 걸었다.

 "저년 식사는 안하나요? 내일 아침은?"

 다시 은화 몇 개를 꺼내 주고 계산을 했다. 또  돌아서려는데 여급이 이제는 완연히 비웃는 듯한 어조

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메뉴 정도는 고르지 그래요?"

 집에서 준비해 주는 음식만 먹었던 그들이었다. 이런 곳에서 뭘 주문해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예

프넨은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대꾸했다.

 "그냥 적당한 것으로 주면 좋겠소.

 "아아. 난 귀한 집 아드님들이라 아무 음식이나 입에 못 댈 줄 알았죠."

 카운터 주위를 오가던 급사들마저 킬킬거리가 시작했다. 사실 별로 우스운 상황은 아니였다. 그들은 일

부러 노골적으로 비웃기 위해 웃는 것 같았다.

 예프넨은 약간 화가 났지만 꾹 참고 테이블로  걸어가 앉았다. 보리스는 형의 얼굴을 쳐다보고 상황을 

깨달았지만 일단은 잠자코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그러나 곧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 이 정도 음식쯤이야 충분히 드시겠지. 안 그래요?"

 음식을 가져온 예프넨과 비슷한 또래의 급사는 비아냥대는 듯한 말투로 지껄이더니 두 형제의 앞에 널

찍한 그릇 두 개를 내려놨다. 보리스는 그릇 안을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죽이나 수프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그  안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보리스는 기겁하

여 의자를 뒤로 물렸다. 드르륵, 소리가 나는 순간 등뒤에서 몇 명이  거침없이 웃어젖히는 소리가 들렸

다.

 예프넨은 가만히 그릇 속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열 마리, 스무 마리... 새끼 손가락 한 마디 만한 허연 

벌레들이 묽은 죽과 뒤엉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뱃속의 것을 다 토해 내고 싶을 정도로 역겨운 광

경이었다.

 "어이, 숟가락 들라고! 여기 여관 특실을 내줬는데 식용이 좀 없다해도 맛은 봐야지?"

 "별로 배고프지 않은 모양이군? 그렇지만 요즘 같이 어려운 시절에 음식을 남기면 쓰나."

 "어린 도련님은 요리를 먹을 줄 모르는 모양인데 이 몸이 한 숟갈 떠 먹여 줄까나?"

 보리스가 고개를 들어보니 여관 곳곳에 서서 잡담이나 주고 받던  잡패들이 한꺼번에 지껄이기 시작하

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괴롭히는 건가? 묵은 

원한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들 중에 안면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예프넨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윈터러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푸른 눈을 들어 비웃는  자들을 쏘아보았다. 예프넨의 눈길을 

받은 자들 가운데 몇은 그의 눈빛에 깃들인 분노에 약간 흠칫하긴 했지만 대다수는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예프넨이 입을 열어 말했다.

 "누군가, 이 음식을 먹는 법을 좀 가르쳐 주지 않겠소?"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는 이어 말했다.

 "직접 한 입 먹는 것으로 말이오."

 약간 잠잠해진 가운데 한 명이 킬킬러리며 말했다.

 "남은 음식을 얻어먹을 정도로 배고프지 않은데 어쩌지?"

 그 순간 그자는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의심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근 예프넨의 손에 붙잡혀 

테이블 앞으로 끌려와 있었고. 곧장 턱이 테이블에 처박아졌다.

 "큭...뭐야!"

 예프넨은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이 식탁의 손님으로 초청하고자 합니다. 사양치 말고 드시지요."

 "으으......"

 예프넨은 그 자의 목 뒤를 바짝 눌러 턱을 테이블에 떼지 못하게 한 채 숟가락을 잡았다. 둘러섰던 사

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예프넨은 숟가락을 벌레가 들끓는 그릇 속에 푹 집어넣었다.

 "아으...안돼......"

 그 자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 이 청년의 손아귀에서 이처럼 강한 힘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목을 눌렀을 뿐인데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예프넨은 드디

어 한 숟가락을 그릇에서 떠서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숟가락 속에는 벌레가 세 마리나 들어있었다.

 "요, 용서해 줘!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니까!"

 비굴하게 외치는 그 자의 입술 근처까지 숟가락이 들이대어졌다. 땀을 질질 흘리며 입술을 악물었지만 

고개조차 제대로 저어지지 않았다. 바로 코앞에 벌레들이 굼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형!"

 보리스가 외친 것과 거의 같은 순간, 예프넨은 숟가락을 멈췄다. 여관의 홀을 메운 손님들이 어느새 모

조리 침묵하고 있었다. 오직 예프넨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 그 입에 벌레를 처넣을 정도로 내가 강심장이 아니란 것에 감사하시오."

 숟가락은 몰려지고, 그릇 속에 내려놓아졌다. 동시에 목을  누르던 손이 풀렸다. 보리스가 외치지 않았

어도 예프넨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일부러 강한 채 그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예프넨의 손에서 놓여난 자는 비척거리면서도 급히 뒤로  물러났다. 화가 난 얼굴로 목을 매만지던 그

는 주위의 몇 명과 빠른 눈짓을 나눴다. 고개를 끄덕인 자들이 있었고, 순식간에 사태는 급변했다.

 "덮져!"

 동시에 예닐곱 명이나 되는 사내들이 테이블을 타넘어 달려들었다. 뜻밖에 상황 전개에 당황한 예프넨

은 재빨리 동생을 막아섰지만 이미 한 박자를 놓치고  있었다. 칼을 뽑았더라면 여러 사람을 죽이지 않

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예프넨은 의자를 들어 첫 번째로 다가드는 놈을  후려친 다음 그 의자를 내던져 또 한  명을 쓰러뜨렸

다. 그러나 그 다음은 역부족이었다. 등뒤에서  세 개나 되는 몽둥이가 한꺼번에  날아들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예프넨의 허리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

 비명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보리스가  달려들어 형을 껴안았고 달렫르었던 사내들은 두 형제

를 바닥에 쓰려뜨린 채 마구 걷어차고 짓밟았다.

 "뭐에 감사하라고? 어디서 감히 헛소릴!"

 "체, 개뿔도 안 되는 것이 그런 잡소릴 늘어놨냐?"

 "이런 병신 같은 놈은 아주 얼굴을 짓이겨 놔야 정신을 차리지!"

 예프넨은 자기 몸으로 보리스를 덮어 누른 채 대부분의 발길질을 혼자서 맞았었다. 스노우가드로 보호

되는 곳은 괜찮았지만 다른 곳은 옷이 찢겨져 나가고 드러난 살갗은 거친 부츠에 긁히고 채여 곳곳에서 

피가 흘렀다.

 예프넨이 용서해 주었던 사내가 가장 날뛰었다. 그는 발길질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갑가지 흉물스러

운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꼴 좋다! 누굴 초청하고 뭘 어쨌다고...... 그래, 이 자식들한테 훌륭한 만찬을 직접 먹여 드리는 친절이

나 베풀어 드릴까!"

 그 자가 팔을 뻗어 예프넨의 멱살을  움켜쥐자 주위의 패거리들이 달려들어 쓰러진 그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팔을 위에 꺾어 잡았다. 다른 자는 보리스를  거칠게 붙잡아 한 손으로 옆구리에 끼더니 테이블

로 성큼 다가갔다. 다른 자가 숟가락을 다시 쥐었다. 그걸 본 보리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한 숟갈 가득히... 관대하게 퍼 줘야지."

 숟가락은 그릇 속에 들어갔고. 다시  나왔을 때는 그 위에 일곱  마리나 되는 벌레들이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역겨운 누런 죽은 벌레들이 몸을 뒤챌 때마다 숟가락 사이로 뚝뚝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숟가락이 보리스의 입가로 다가왔다. 미친 듯 몸을 비틀며 고개를 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입을 열었

다가는 곧장 저 벌레들이 입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

 사내들의 팔을 뿌리치려 애쓰던 예프넨이 외쳤다.

 "동생은 매버려 둬! 어린아이에게 그게 무슨 짓인가!"

 팡르 잡아TEjs 사내가 떠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네가 대신 먹을 테냐?"

 갑자기 재미있는 문제라도 냈다는 듯 사내들은  예프넨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젊은이의 잘생긴 이마가 

고민으로 잠시 찌푸려지고 이윽고 입술을 깨물며 동생을  바라보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정말로 예프넨

이 동생 대신 저 벌레들을 삼키겠다고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고민을 시켜 놓고 즐기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비열한 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뇌가 예프넨의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맴돌고 있어TEk. 그는 

지금 단 하나 가지고 있는 희망이 무엇인데,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조금 밖에 없을 텐데.

 이윽고 예프넨은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래. 내게 가져와라."

 "뭐...뭐?"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들은 주위의 동료들을 둘러보며 자신이 잘못 듣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로의 얼굴에는 "'뭐 저런 놈이 다있지?' 하는 감정이 드러나 있었고 그것은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말했다.

 "쳇, 그만 두지. 난 저런 놈은 질색이다."

 "기분이 나빠졌다. 젠장, 이건 장난이 아니잖아."

 다들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한 사내만은 달랐다.  바로 예프넨에게 용서받은 그 남자였다. 이름은 

귀트라고 했다.

 "저런 건방진 놈들을 그냥 두자고? 그런 어설픈 꼴로는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는 걸 모르냐! 한번 했으

면 끝장을 봐야 되는 거다.!"

 귀트는 다가가 동료로부터 숟가락을 빼앗더니 담긴 것을 쏟아 버리고는 새로 한 숟가락 듬뿍 떴다. 그

리고 직접 예프넨 앞으로 다가가 기분 나쁜 눈초리로 젊은이를 쏘아보았다.

 본래 낯선 자들에게 텃세를 부리는 것이 이들 무리의 버릇이자  소일거리였지만 예프넨과 같은 여행자

들은 특히 불쾌한 존재이기도 했다. 옛 귀족 출신이나 되는 듯이 반반한  얼굴에 예의바른 말투. 괜찮아 

보이는 무과와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돈.

 그런 자들은 자기들의 저택이나 영지에 처박혀 조용히  지내면 되는 거다. 뭣 때문에 자기들처럼 지저

분한 놈들이 뒹구는 여관 따위에 오는 거냐.

 특히 가장 싫은 것은 바로 예프넨의 침착한 눈동자였다. 너희들의 속성쯤이야 익히 알고 있다는 듯, 너

희 같은 종자들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겠지...라고 하는 듯한, 그 당황하지 않는 표정이 싫었다. 그

런 놈일수록 놀라고 절망하여 주저앉는 꼴을 반드시 보고 싶은 것이 퀴트와 같은 자들의 공통된 심정이

기도 했다.

 "자. 입 벌려."

 "......"

 " 뭐야, 이제 와서 싫다는 거냐?"

 "......"

 "그럼 동생에게 먹일 박에."

 그가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예프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러나 귀트는 기대와는 달

리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그만둬."

 젠장...재수 없는 놈.

 그는 다짜고짜 왼손을 내밀어 예프넨의  턱을 움켜쥐더니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그리고 숟가락을 

푹 쑤셔 박아 버렸다.

 "흐읍......"

 귀트 자신조차 잠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숟가락을 빼내며 슬쩍 예프넨의 얼굴을 

보았을 때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본 그는 경악하여 말을 잊었다.

 예프넨은 천천히 턱을 움직여 입안에 든 것을 씹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가벼운 비웃음까지 띤 채

로 그것을 삼켜버렸다. 깨끗이. 감켜버렸다.

 "저, 저런......저런......"

 예프넨의 팔을 잡았던 자들은 어느 새 놀라 팔을 놓고  있었다. 어쩌면 예프넨은 좀 전부터 그들을 뿌

리치고 입안의 것을 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팔을 빼

며 한 걸음 귀트에게 다가갔다.

 귀트는 예프넨의 손이 허리에 찬 칼의 손잡이로 가 올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가 들

려오는 것도 느꼈다.

 "네게 정신으로 결투를 신청한다. 나는 예프넨 진네만, 롱고르드의  영주 율켄 진네만의 맏아들이자 영

지의 후계자다. 네 신분을 밝혀라."

 그 누구도 다시 예프넨의 몸에  손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제야 예프넨의 허리에 찬 

검을 불안한 눈으로 살폈고. 그것이 예사 검이 아니라는 사실도 눈치챘다. 칼집은 무늬 없이 간소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색의 광채가 감돌고 있었다.

 게다가 영주의 아들이라고? 그렇다면 이겨도 큰일. 져도 큰일이 아닌가!

 귀트는 더듬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하고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홀에 낮은 사람들의 눈이 모조리 그

에게 돌려져 있었다. 여행자인 예프넨과는 달리 그는 이 마을에서 깡패 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입장이었

다. 여기서 자칫 굴복했다가는 다시는 얼굴을 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조직은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까

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나는...귀트...필로네다."

 예프넨은 이제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는  보리스를 붙잡고 있는 사내에게 잠시 눈길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그가 주춤거리며 동생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그리고 손짓으로 보리스를 불러 옆에 자리하게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투로 예프넨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난 물론 너를 죽일 것이다."

 귀트의 얼굴은 점차 희게 변해갔다. 예프넨은 말을 이었다.

 "네가 살아남으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결투하여 내가 너를 죽이기 전에 네게 졌음을 말하고 바닥에 

엎드려라. 그러면 너를 죽이지 않겠다. 그 대신."

 예프넨은 왼손으로 식탁 위에 아직도 놓여있는 그릇을 가리켰다.

 " 저 그릇에 남은 것을 네놈에게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일 것을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

겠다"

 이제는 피할 길이 없었다. 귀트는 숨을 거칠게  쉬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더니 사나운 눈으로 동

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동료들은 모두 그의 눈을 피했다.

 예프넨은 고개를 돌리더니 카운터의 건방진 여급을 향해 말했다.

 "뒤뜰에서 결투를 할 수 있나?"

 처음 여관에 들어와 방을 달라고 하고 돈을 계산할 때까지 예프넨은 모든 일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 여

행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검과 결투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늘 배워오고 겪어온. 그레에 가장 ld

익숙한 삶인 것이다. 가문의 이름을 말한 이상 추호의 망설임도. 머뭇거림도 필요 없었다.

 여급도 이번에는 감히 농담을 걸지 못한 채  단지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예프넨은 홀을 휘둘러보

고는 가장 이들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한 상인 일행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입회인이  되어 줄 것을 청했

다. 이미 예프넨의 기세에 눌린 그들은 거절할 리는 없었다. 트라바체스의 관습으로는 각 측에서 입회인 

둘이 결투를 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전혀 죄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보리스와 함께 뒤뜰로 나갔다. 호기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나왔다. 귀트 일행

이 밖으로 나온 것은 그보다 한참 뒤였다. 그러나 감히 도망치지는 못했다.

1.윈터러

 예프넨과 마주 선 귀트는 아직도 불안감을 완전히 누르지 못한 채였다. 쉴 새 없이 들썩거리는 어깨가 

그것을 반증했다.

 그의 손에도 검은 들려 있었지만 그다지 익숙한 듯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반해 예프넨은 완전히 숙달

된 자세로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 섰다.

 보리스는 형이 이웃 여지의 아들들과 검격을 겨루는 것을 본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때는 대부분 서로 

죽고 죽이는 결투는 아니었다. 검술 시합과 비슷한 것이었고, 한 쪽에서 상처를 입으면 그것으로 대결은 

끝났가.

 물론 형이 누군가와 결투를 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투하는 순간의 형을 

본 일은 없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바라본 형의 푸르고 차가운 눈동자는 평소의 따뜻한 눈빛과

는 판이하게 달랐다. 과연 같은 사람인가 의심될 정도로.

 그리고 예프넨이 입을 열어 짧게 말했다.

 "검을 뽑아라."

 귀트가 검을 뽑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예프넨도 검 손잡이를 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윈터러의 날이 

뽑혀 나오는 순가, 입회인들을 비롯한 구경꾼들의 눈은 모조리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그들 가운데 몇

은 곁의 사람들에게 급히 속삭였다.

 "저 백색 날을 봐...저건 보통 검이 아냐."

 "저건 도대체 뭐지? 저 검에 대해서 들어본 사람 있어?"

 서녘 태양의 광채가 붉게 깔린 뒤뜰이었다. 둘러선 사람들의 얼굴도 술 취한 듯 불그레했다. 그 가운데 

희게 솟아난 윈터러의 공채는 보는 사람의 가슴속에 얼음 한 조간 찔러 넣을 듯 싸늘한 충격을 주었다.

 한 사람이 다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세상에는 겨울의 검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던데......"

 그때 두 결투자는 뜰 가운데로 훌쩍 뛰어들어왔다. 이어 검과 검이 서로를 노렸다. 이윽고 석양을 빨아

들인 윈터러가 붉게 타기 시작했다.

 먼저 공격을 감행한 것은 귀트였다, 그는 초보  검사답게 선제 공격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

다. 그러나 자신의 검이 윈터러와 스치는 순가. 그는 이 결투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래 힘을 줄 수도 없었다. 날씬한 젊은이인 예프넨의 팔 힘은 동네에서 주먹으로 먹고 살던 자신보다 

훨씬 강했고. 윈터러는 마술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악마 같은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귀트는 검 끝일

부가 싸악 갈라져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그는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서기에 급급했다.

 이번에는 예프넨의 차례였다. 그는 단  두 걸음만에 적의 사정  거리로 급습하여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검을 대각으로 후려쳤다. 칼날이 서로 비껴  미끄러졌다. 그 순간 귀트의 검이  금속성의 마찰음과 함께 

부르르 떨리더니 잠시 후 쩡, 하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건 윈터러를 써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소리였으니까.

 귀트가 이마에 핏줄을 세우더니 평소의 최고 실력을 내어 윈터러를 두 차례 막아 밀쳤다. 그리고 그것

이 끝이었다.

 츠르르...챙그랑!

 "저, 저런......"

 그건 귀트만이 낸 소리가 아니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충격으로 탄성을 질렀다. 귀트

의 검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보리스의 눈에도 보였다.

 결코 두 조각이나 세조각으로 부서진 것이 아니었다. 쇠로 만든 검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저 백색의 검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

 귀트는 상황을 깨달았다. 망설임도 없이 예프넨의 윈터러가 곧장 앞으로 찔러져 오는 것을 본 그는 무

작정 바닥에 납작 엎으려 머리를 흙바닥에 박았다. 그리고 손을 앞으로 내밀어 싹싹 비볐다.

 "제, 제발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제발......"

 이젠 체면이고 뭐고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예프넨은 귀트의 뒷목을 똑바로 겨누며 검을 멈췄다.

 "승복하는 건가?"

 "예, 예, 물론입죠, 그렇고 말고요."

 그러자 예프넨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나와 한 약속도 기억하고 있겠지?"

 "그건......"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귀트는 잠시 후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라."

 해가 서서히 졌다. 여관에서 램프를 내어 밝히는 가운데 예프넨은 윈터러를 겨눈 채로 귀트를 여관 안

으로 들어가게 했다.

 뒤따라 들어간 보리스는 형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형

이 정말로 저 자에게 저걸 다 먹게 할까? 평소의  형이라면 절대로...하지만 아까 형 역시 저걸 씹어 삼

키지 않았던가.

 사람들의 눈이 윈터러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예프넨에게 들리지 않게 저들끼리 말을 주고 받았

다. 실내에 들어오자 윈터러는 다시 씻긴 듯 싸늘한 흰빛을 내었다.

 귀트가 테이블 앞에 앉고, 예프넨은 선 채로 등위에서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단지 짧게 말했다.

 "먹어라."

 귀트는 숟가락을 들었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동안 그릇 속에서는  여러 마리의 벌레들이 kqR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전체적인 앵은 줄었는지 모르지만 그 광경은 더더욱 역겨운 심정을 부추겼다. 그는 

먹기도 전에 벌써 끅끅거리며 구역질을 했다.

 예프넨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형......"

 보리스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예프넨은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늘 보리스

에게 밝게 웃어주던 그 형이 아니었다.

 점차 사람들이 눈길을 돌렸다. 어떤 결과가 오든 보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아

예 나가버리는 사람은 없었다.

 귀트는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그릇에 집어넣었다. 점점  그의 어깨까지 떨리는 것이 뒤에 앉은 사람

들에게도 잘 보였다. 그는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예프넨은 마지막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귀트가 그릇에 든 것을 몇 숟갈 먹고, 토하고. 다시 먹고. 또 

토하고 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완전히 녹초가 된  귀트가 드디어 숟가락을 놓고 미친 듯이 토해

내고 구역질을 하다가 기절해 버리는 것까지 본 다음, 그는 보리스르 데리고 자리를 떴다.

"형."

"왜?"

 예프넨은 막 촛불 심지를 살펴보고 침대 와 읹은 참이었다. 문득 바라보니 보리스는 침대 위에 쪼그리

고 앉아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프넨은 표정을 부드럽게 했다.

 "뭔가 걱정되니?"

 "......"

예프넨은 부츠를 벗어 한쪽 모서리에 세워 놓은 다음  침대 위로 올라가 보리스의 등을 쓰다듬었다. 동

생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자아. 형한테 예기해 봐."

 보리스의 푸른 잿빛 눈동자가 형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형의 평화로운 표정을 보며 마치 뜻밖이

라는 듯 흔들렸다. 예프넨은 보리스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보리스.너......"

 "형이 괜찮아서 다행이야."

 보리스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형이 그 남자를 이긴 것도 물론 다행이야.  하지만 난...그때 형이 뭔가 달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형이 잘못했다는 건 아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도 알아.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분명

히 형에게 잘했다고 하셨을 거야. 하지만, 하지만......"

 "아니야."

 예프넨이 갑자기 말했다.

 "아니야, 보리스. 네가 제대로 본 거야. 너만큼 그걸 잘 알아낼 수 있는 사람도 없겠지."

 예프넨은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보리스로부터 약간 떨쳐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보리스를 외면한 채 열린 덧창너머를 잠시 바라보았다.

 "보리스. 난 말이지......"

 예프넨은 다시 말을 끊더니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보리스는 형을 따라 창  밖을 쳐다보았다. 별이 총

총히 박혀 반짝거렸다.

 "나와 너는 언제고 아버지의 뜻에 맞는 아들들이 아니었지, 안 그래?"

 보리스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형제의 우애를  탓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그보다 좀더 강인하고 

냉정하여 애정 따위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랬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삼촌과 대립하며 철

저히 그를 증오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 전혀 무리가 아닐 정도로.

 촛불이 깜빡거리고, 예프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 말이다, 아버지의 말도 옳았다고 이제 외서야. 이리도 늦어버린 뒤에야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를 대

신해서 이제 나라도 네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동정심 같은 걸로 마음 약해지지 말라고. 어떤 고통

이나 아픔을 겪어도 능히 이겨낼 수 있도록. 그렇게 되라고 말아야."

 형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오랫동안 너를 보살필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네가 지금처럼 따뜻한 가슴으로, 여린  눈동

자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언제고 지켜 줄 텐데."

 왜 형은 곧 떠날 사람처럼 저렇게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난 언제까지나 네 곁에 있을 수는 없는 거지. 아니, 있을 수 있다 해도 그래서는 안 되는 거

지. 네게는 너만의 길이 있을 텐데. 그걸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도록 너는 충분히 강해져야 하는 거야. 

충분히...단단해져야 하는 거야."

 어머니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문득 물기를 머금은 듯 보였다. 예프넨은 마치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애써 하는 사람처럼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었다.

 "보리스. 바위가 될 수없다면 조개가 되는 거다. 네 속이 여려도 아무도 알아볼 수 없도록. 그걸 아무도 

열어볼 수 없도록 꽉 닫아버려.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깊은 골방에서는  눈물 흘려도 좋으니까. 거기

서만은 누구도 탓하지 않으니까."

 보리스는 영문을 몰랐다. 형이 갑자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이

야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갑작스러웠다. 평소처럼 자연스러운 이야

기가 아니었다.

 어린아이를 갑자기 어른으로 성장시키려는 것처럼.

 그래야만 하는 어떤 이유가 생긴 것처럼.

 "널 작고 선량한 소년으로 내버려두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네가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빨리, 빨리...예프넨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깃들여 있었다.  동지가 없어져 버린 어린 새가 한시바삐 

날 수 있기를 바라는 듯한. 그런 불가능한 일을 바라는 듯한.

 "그래서 형은 그런 사람이 되기로 한거야?"

 한참만에 보리스가 묻자 예프넨은 말을 삼킨 채 잠시 시선을 다른 곳에 주었다가. 이윽고 대꾸했다.

 "그래."

 "그렇구나......"

 보리스는 가문이 몰락한 지금 자신이 약해질까 봐  형이 암시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형을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오늘의 일은 분명 그들이 롱고르드의 저택에서

만 살았더라면 겪었을 리 없는 사건이었다. 형이 다른 면모를 보였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곳을 모두가 보호해 주는 글들의 영지가 아니니까. 사방에는 낯선 사람 아니면 적뿐이었다.

 잘 준비를 하고 옷을 벗으려니까 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잡옷은 벗지 마라. 보리스."

 "왜?"

 예프넨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면 우리를 노리고 찾아올 자들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자, 형이 보초를 설 테니까 너는 자도 좋아. 

내가 이따가 새벽녘에 깨워 줄게."

 훅, 예프넨이 촛불을 불어 껐다.

 보리스는 처음에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츰 잠이  달아나자 꿈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

었다.

 윈터러를 바닥에 세우고 앉은 형이 보였다.  그는 침대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처음엔 

무슨 소리 때문에 깼나 했다. 그러나 곧 형이 소리를 죽여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보리스가  깨어난 것도 어쩌면 그 소리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아니

다... 보리스는 캄캄한 어둠 속에 흐르는 정적만으로도 예프넨이 어떤 중대한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안을 흐르는 침묵은 소년의 귀를 먹먹하게 했고 가슴을 터질 듯 짓눌렀다. 

마치 이 슬픈 침묵 그 자체가 그를 깨운 것만 같았다.

 말을 걸었어야 했을까. 그러나 보리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이제 소리가 나지  않는데도 한층 아픈 침

묵이 생생하게 그의 뇌리에 파고 들었다.

 보리스의 관자놀이는 타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유도 모른 채. 그렇게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왜일까.

 아아, 왜일까.

 다음날 낮. 그들은 마을을 떠나 다시 들판을 걸었다.

 한 필뿐인 말은 주로 보리스가 탔고 예프넨은  고삐를 쥐고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그 이야기들은 저택에서 지낼 때 해주곤  하던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나 이웃 영지의  우스운 사건 같은 

것은 아니었다. 못 보던 나무나 꽃을 보면 보리스는  예전처럼 어김없이 형에게 물었지만 이제 형은 간

단히 이름만 말해 줄 뿐이었다. 전처럼 거기에 얽힌  아름다운 전설이나 우와 같은 것은 예프넨의 입에

서 나오지 않았다.

 "형, 형은 예전에 많이 알던 얘기들은 다 잊어버렸어?"

 그렇게 보리스가 묻자 예프넨은 입술만 움직여 웃더니 대답했다.

 "그런가봐."

 그게 진심으로 웃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보리스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녁때까지 걸어도 새로운 마을은 나타나지 안았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 충분히 물어 둔 터였지만 역

시 길을 잘못 둔 모양이었다.

 "오늘밤은 아무래도 야영을 해야겠구나."

 더 어두어지기 전에 형제는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자리를 잡고 마른풀과 나뭇가지 따위를 모아 화 

불을 지폈다. 예프넨은 예전에 이웃  영지의 젊은이들과 며칠씩 걸리는 사냥을  여러 번 떠났던 탓인지 

이런 일에는 익숙해 보였다. 말은 야트막한 관목을 묶었다. 적당한 나무가 없었던 탓이었다.

 불을 보고 있자나 저택을 둘러쌌던 횃불이 생각났다. 나무 그림자들이 불꽃의 움직임에 때라 이리저리 

일렁거렸다.

 처음엔 금방 깨닫지 못했다. 잠시 후 예프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리스. 검을 잡아."

 긴장이 확 끼쳐오는 순간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예프넨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불 속에 나뭇가

지를 하나 던져 넣었다. 그리고 원터러를 잡은 채 일어나 섰다.

 " 그 정도 수로도 숨을 필요가 있나."

 이후 보리스가 예프넨을 기억할 때마다 떠오르는 모습이  세 가지 있었다. 하나는 에메라 호수 앞에서 

함께 죽자고 말하던 형의 푸른 눈동자,  또 하나는 바로 윈터러를 잡은  채 모닥불을 바라보고 선 형의 

어두운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건방 떠는 어린놈이......"

 보리스는 짤막한 검을 꼭 쥔 채 꼼짝고 하지 않았다. 예프넨은 윈터러를 천천히 뽑았다. 모답불뿐인 어

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고상한 칼날이 암흑 가운데 갈라진 틈새처럼 번뜩였다.

 "포위해!"

 곧 보리스도 볼 수 있었다. 모닥불 앞의 두 형제를 둘러싼 자들은 대략  보아도 20여명은 넘어 보였다. 

거기다 모두 칼 따위의 무기를 꼬나들고 있었다. 예프넨은 그 가운데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는 냉랭하게 

말했다.

 "호위하는 부하들이 많군 그래, 귀트."

 그건 도발성 발언이었다. 귀트가 얼굴을 찌푸리는 가운데 다른 자들이 불쾌한 듯 입을 열었다.

 "누가 저 놈을 돕겠다고 이곳까지 온 줄 알아?"

 "흥, 아직도 상황을 잘 모르는군."

 적들이 빙 둘러서서 진을 갖추기 시작했다. 매어져 있던 말을 끌어들어 쫓아버리는 소리가 저만치에서 

들렸다. 그림자들이 사방에 어슬렁거렸다. 예프넨은 재빨리 눈을 돌리며 그  가운데 지휘자일 법한 자를 

찾았다.

 "뭘 원하지?"

 보리스는 일어섰다. 그리고 모닥불을 사이에 둔 채 형과 등을 맞대고 섰다. 목검말고는 휘둘러 본 일이 

없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검을 다를 줄 모르는 어린아이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는 비

교적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적은 압도적이었다.

 지휘자인 듯한 자가 모닥불 쪽으로 한 발짝 나서며 말했다.

 "네 검. 그게 바로 윈터러 라는 검이지?"

 예상 대로다... 예프넨은 입술을 깨물며 검을  단단히 쥐었다. 결투를 위해 이름을  밝힌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러나 이름도 밝히지 않고 상대를 죽일 수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 예프넨이었다. 위험

하다 해도 명예를 위해 결투하기로 한 이상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수순이었다.

 "얌전히 내 놓으면 둘 다 조용히 보내주겠다."

 지휘자로 보이는 자는 검은 구레나룻을 기른 키 큰 남자였다. 우렁우렁한 목소리의 소유자였고. 드러낸 

가슴팍에는 두 갈래의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저 정도의  인원을 꿀로 올 정도면 상당한 실력자일 것이

었다.

 그자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어린 동생은 아직 죽기엔 이른 것 같군. 안 그런가?"

 스무 명이나 되는 적을 처치할 실력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죽기 전에 검을 내줄 생각도 없었다. 그

러나 보리스는?

 그때 보리스가 입을 열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12년은 사리를 알기에 그리 적은 나이라 할 수는 없어."

 "허,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꼬마야?"

 언뜻 검을 내놓겠다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 검은 구레나룻을 향해 보리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죽어야 할 때 정도는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더 말이 필요 없었다. 첫 번째 적이 검을 높이 쳐든 채 측면에서 튀어나왔다. 예프넨이 쥔 윈터러가 가

로로 번뜩이고. 어둠 속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조심해!"

 좌측에서 내밀어진 두 번째 검을 윈터러의 가드로  쳐내는 순간 예프넨의 손등이 찢겨나갔다. 짧고 흰 

검이 정면 대각선으로 베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검을 바짝 당겼다가 밀쳤다. 동시에 뻗어나간 윈터러의 

공격에 상대방의 이마가 뚫렸다. 뜨거운 액체가 칼날을 타고 흘렀다.

 보리스가 어둠 속을 똑바로 보려 애썼다.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무기가 아닌  밧줄과 같은 것이었다. 

흠칫 물러서려다가 불타는 나뭇가지를 밟고는 무작정 검을 비스듬히 휘둘렀다. 훅, 하는 소리와 함께 밧

줄이 끊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너무 이를 악문 나머지 입술에서 피가 흐르는

데도 깨닫지 못했다.

 누군가 예프넨의 머리를 향해 모닝스타를 휘두르자 윈터러의 날이 사살을 휘감아 버렸다 두 손으로 검

을 곽 쥐는 순간 다시 한 번 쩡, 하는 소리가 울렸다.

 사슬이 투둑 끊겨 나가며 쇳덩어리가 모닥불 속으로 떨어져 글렀다. 타던 나뭇가지들이 부서지고 불티

가 확 일어나 사방으로 날려쌌다.

 "흥...과연 저게 바로 소문으로만 듣던 윈터러의 '프로즌 브레이크' 로구나."

 프로즌 브레이크란 윈터러의 특수한 능력들 가운데 비러   '극저온 폭발'을 칭하는 별명이었다. 맞닿은 

물질의 온도를 순간적으로 극저온으로 끌어내려 분자구조를 파괴해 버리는 이 강력한 힘은 본래 스노우

가드와 함께 사용될 때에만 본령을 발휘했다. 무기를 부수기 위해 만드는 소드 브레이커 따위의 능력과

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력적인 힘이다.

 "흥, 솜씨 좋구나! 하지만 동생의 배때기에 구멍을 뚫려도 그럴 수 있을까?"

 동시에 세 명의 적이 보리스를 둘러싸고 접근했다.  모닥불 탓에 형제의 움직임은 적들에게 완전히 노

출되었다. 대신 적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예프넨도  그 점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혼자 적들 속으로 뛰어든다면 보리스는 꼼짝없이 붙들려 당할 것이다. 그것이 그가 

이 포위를 뚫고 전장을 바꿀 수 없는 이유였다.

 설상가상으로 빛에 익숙해져버린 형제의 눈은 자꾸만 어둠 속에서 적의 움직임을 놓쳤다. 둘의 사이를 

바로 찌르고 들어온 검을 뒤늦게 발견한 예프넨이  미처 방어하기도 전이었다. 보리스를 노리는 척하던 

적은 예프넨의 옆구리를 힘껏 찔렀다.

 그극......

 기묘한 소리가 울러 퍼졌다. 검은 스노우가드의 표면에  닿아 미끄러지며 약한 마찰열을 냈고 그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진동이 발생하여 검을 쥔 손에까지 몰려왔다. 찔렀던 적은  놀라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충격으로 어깨까지 저릴 지경이었다. 검은 구레나룻을 가진 자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주위에 들리지 않

게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윈터바텀 킷이 모두 저 놈의 수중에 있는 건가?"

 진네만 가문에 일어난 일은 아직 그리 멀리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로서는 그 가문의 아들들

이 왜 이 먼 곳까지 와서 여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귀 기울이

고 탐내 오던 보물에 대한 소유욕만은 강해서 상대가 누구든 조금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어디, 그렇다면 이 검도 받을 수 있을까?"

 드디어 그 자와 예프넨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한 번, 두 번 부딪쳐는 동안 둘 다 상대의 실력이 여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러나 예프넨은 젊은이였고  그 자는 오랫동안 칼을 휘두르는 것으로 

먹고 살아 온 노련한 자였다. 그는 슬슬 물러나는 체하며 예프넨을 앞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한 걸음 옮기기 시작한 이상 쉽게 뒤로  물러서기는 어려웠다. 자칫 박자를 놓쳤다가는 완전히 수세에 

몰리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적은 윈터러의 힘을 알기  때문인지 일부러 검을 오래 맞대지 않고 조심스

럽게 빈틈만을 노렸다.

 반 발짝 움직일 때마다 예프넨은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실력으로는 결코 일방적으로 

제압할 수 없는 상대였다. 약간만 실수를 했다가는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츠르르...챙!

 검이 한 차례 얽혀 미끄러지고 상대는 프로즌 브레이크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검을 뗐다. 예프넨은 그 

틈을 노려 재빨리 공격을 감행했다.

 "하아!"

 거의 되었다 싶은 순간이었다. 윈터러의 날이 상대의 목을 뚫고 들어가기 직전,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

어났다.

 "......"

 상대의 몸이 축 늘어지더니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검 날은 아직  닿지도 않았는데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3. 쓰디쓴 가르침

 다른 놈들이 놀라 웅성대려는데 곧 이어 같은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몇 명이 그 자리에 무너지듯이 

주저 앉았고. 도망치려던 자들도 하나씩  엎어지기 시작했다. 예프넨은 재빨리 물러서며  보리스를 가지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검을 세운 채 정체 모를 적을 노렸다.

 "잘 싸우더군, 젊은이."

 20여명에 달했던 적들이 거의 다 쓰러지거나 달아나고 나자 어둠속에서 네 명의 낮선 사람들이 나타났

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의 손에 작지만  정교한 석궁이 들려 있었다. 여전히 새  볼트가 메겨진 채였는데 

모양이 좀 특이했다. 볼트 끝의 촉이 약간 뭉툭하고 그 끝에 다시 바늘처럼 뽀족한 침이 튀어나와 있었

다.

 예프넨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물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처음 말했던 사람이 허허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가만히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니 조금 이상한 점

이 있었다. 마치 여자의 목소리 같달까?

 "명색이야 어찌됐든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데 좀더 친절한 대답을 기대할 수는 없는 건가?"

 여자 목소리를 가진 그 자는 중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팔을 튼튼한 

근육이 엉겨 있어 오랫동안 검을 위 두른 노련한 검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예프넨은 여전히 자세를 푸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것이 무상의 도움이었다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허, 허허. 허허허허......."

 이윽고 그들은 모닥불 근처로 다가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 목소리를 가진 검사가 아마도 리더인 듯

했는데 상체만 보호하는 검은 가죽 갑옷에 큼직한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내더니 예프넨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모닥불로 다가가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아 뱉으며 그는 다시 말

했다.

 "무상이고 뭐고, 우리에게 치를 만한 뭔가를 갖고 있기나 한가? 우리 웬만한 것은 필요 없는데."

 보리스는 주위에 흩어진 시체들을 보며 기분이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 살아서 그들을 위협하던 자들인

데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한 채 순식간에 시체로 변했다. 도대체 이 자들은 얼마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기에?

 "보아하니 여행을 즐기는 자들도 아닌 것 같은데. 우리한테 줄게 있기나 하겠소, 니카? 그냥 불이나 얻

어 쬐면 족할 것 같은데."

 석궁을 들었던 자가 그렇게 말하더니 서슴없이 모닥불가로 다가와 앉았다. 각반을 쳐서 입은 푸르스름

한 가죽 바지가 불가에 오니 오묘한 색깔로 번쩍거렸다.

 예프넨은 잠시 사이에 두었다가 약간 태도를 바꾸어 말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강한 여행자들인 것 같군요."

 네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분분히 자기 소개들을 했다.

 "난 윌스 캄브라고 하네."

 "조아킴이라고 브르게. 섬은 없어."

 "난 로마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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