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룬의 아이들 1
지은이 : 전민희
출판사 : 제우미디어
출판년도 : 2001년 7월 27일
저자소개 :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연구원을 거쳐 1999년 출간한 장편 판타지소설 400만회 조회수.
연사와 문학, 신학 등을 비롯하여 최근 철학의 신조류까지 섭렵한 지식광.
룬의 아이들
겨울의 검
1장. Bleeding
1.늦여름의 늪
" 에메라 호수에는 아이들을 잡아가는 망령이 있어요. "
들판의 끝에는 죽은 호수가 있었다. 썩은 수초가 마녀의 머릿단 처럼 뒤엉킨 그곳은 한낮의 태양 빛
조차 거의 닿지 않는 그늘진 늪이었다. 그곳까지만 가지 않으면 아이든지 돌아다녀도 좋다고 유모는 말
해 주었다.
" 그러니까 에메라 호수 쪽은 근방에도 가면 안돼요. 아무리 밝은 낮에도 안 되지요!. 거기엔 망령이
빨간 눈을 번쩍거리면서 잡아먹을 아이들이 없나 늘 노려본 있단 말이에요. 아이 참, 듣고 계신 거예요,
도련님? 밤만 되면 저택에서도 보인답니다. 제가 도련님처럼 꼬마였을 때부터 폭풍이 몰아치는 날이면
늘 보았어요."
진네만 가문의 어린 도련님 보리스는 유모의 말을 반신반의했지만 일단 믿는 쪽으로 하고 있었다. 사
실 폭풍이 몰아치는 밤마다 에메라호수의 망령을 보려고 저택 밖까지 나가 어둠 속을 뚫어져라 바라보
곤 했지만 한 번도 유모가 말한 빨간 눈을 본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유모뿐 아니라
다른사람들도- 특히 늙은 여자일수록- 사실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아예 거짓말로 치부하기에는 좀 꺼림
칙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없어도 흉흉한 일이 많은 저택이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가능한 한 슬픈 일은 생
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악몽에 시달리다 온 몸이 땀을 흠뻑 젓어 깨어나는 날이면 늘 찾아오는 답
답함에 우울함이 싫었다. 물론 그는 아직 열두 살에 불과했고 두고두고 악몽에 나타날 법한 두려운 것
을 목격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저택 위를 떠돌고 있는 어두운 구름을 모를 정
도로 어리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 그런 건 네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꼬마 보리스. "
문득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형 예프넨의 손길을 느꼈을 때 올려다 본 하늘은 초상화 속 어머니의 드레
스처럼 푸르렀다. 그러나 그것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동자는 흐린 하늘빛 같은 그레이 블루였다. 형은
하늘을 등진 채 하늘마냥 맑은 눈을 하고 짧은 연갈색 머리를 흩날리며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한 풀빛이 사방으로 지평선을 이루는 이곳은 진네만 가문의 영지인 롱그르드에 속한 넓은 들판이였
다. 옷자란 풀들은 들판 너머 저택언저리까지 빼곡하게 메웠다. 대륙의 중앙, 조개반도를 휩싸고 도는
카투나 산맥 아래의 땅이 대부분 그렇듯 이곳도 스텝형 초원이 서쪽으로 어디까지나 뻗어 있었다.
풀대가 길게 자란 늦여름 들판에 누우니 머리까지 푹 파묻혔다. 풀벌레일까. 자꾸만 뭔가가 날아들어
코끝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보다 형의 평소보다 환한 미소가 어쩐지 더 마음에 걸렸다. 뭐지.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그럴 필요는 전혀 없잖아. 정말로.
아니. 형은 늘 밝았었다. 수줍은 타는 소녀처럼 잘 웃지도 않는 동생의 손을 끌어 잡고 영지 곳곳을 돌
아다니며 재미있고 우습고 밝은 것만 보여주려 애썼다. 어쩌다 동생이 웃음이라도 터뜨릴라치면 몇 배
로 더 기뻐져서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형이었다.
훤칠하게 키도 크고 잘생긴 형. 근처 영지의 젊은이들 기운데 가징 빼어난 검술 솜씨를 가져서 아버지
의 자랑 거리도 되는 형이다. 그리고 꼬마 보리스가 유일하게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한 형, 예
프넨 진네만.
" 자. 약속한 대로 대련 연습이다!"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발딱 일어났다. 어깨를 덮은 긴 머리카락이 형의 그것처럼 바람에 나풀거렸
다. 형은 동생의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것을 좋아했다. 손에 목검을 쥐어 주면서 어느새 보리스의 머리꼭
지를 까치집처럼 만들어 놓았다. 보리스는 어린아이처럼 불만을 터뜨리는 대신 약간 입술을 움직이며
씩 웃었다.
" 휘어이, 휘이! 우리 동생 머리에 알을 넣으면 안돼요!"
형은 있지도 않은 새들을 쫓는 시늉을 하고, 보리스는 일부러 속아 주려는 것처럼 훌쩍, 뒤를 돌아보았
다. 그 툼에 형이 든 목검이 보리스의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 동생이 돌아볼 즈음이면 이미 멀찍이 물어
나 있었다. 건들건들, 장난스레 방어 자세를 잡고 있는 형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였다.
보리스는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형이 내민 목검을 치려고 쫓아가다가 발을 헛디뎌 무릎을 찧고. 다쳤나 싶어 다가온 형을 밀쳐 눌러
킬킬거리며 풀밭에 같이 구르면서도 내내 이상한 기분은 기시지 않았다.
그리 오랜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부턴가 보리스는 자신에게 이상스러운 직감 같은 것이 갖춰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직감이란 사실 내킬 때 쉽게 발휘되는 성질의 능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끔씩 그
것은 아주 강하고 예민해져서 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예지에 가깝게 변했다.
보리스는 검은 기초도 모르는 꼬마고 예프넨은 이미 몇 년이나 검을 배운 젊은이였으므로 본래부터 둘
은 대련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다만 보리스가 목검 휘두르는 것을 좋아해서 반사 신경을 길러 준다
는 구실로 함께 들판에서 뒹굴며 놀아주는 것이다. 아버지는 예프넨이 동생과 놀기보다는 좀더 엄격하
게 검 수련을 하길 바랬지만 이 선량한 젊은이는 검술이 향상되는 것보다 동생이 한번 깔깔대며 웃는
걸 더 좋아했다.
그들의 아버지, 율켄 진네만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보리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예프넨이
동생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도 아직 그가 어리고 감정에 잘 휩쓸려서 그렇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율켄
진네만이 생각하기에 동생이란 전혀 사랑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강도처럼 등뒤에서 다가와
목에 탈을 들이대지 않으면 다행이랄까.
예프넨은 맏아들이다. 율켄에게 유일하게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였다. 단지 신뢰의 대상만이
아니라 전폭적인 기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예프넨 역시 아버지인 자신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예프넨도 어리다. 조금 더
자라면 아버지가 뭘 원하고 뭘 기대하는지 알게 되겠지.
딱!
경쾌한 타격음이 들판을 울리며 퍼져나갔다. 오랜만에 둘의 목검이 제대로 부딪친 모양이었다. 예프넨
은 놀란 시늉을 하며 두 발짝 물러났다. 동생이 좀더 적극적으로 치고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보리스는 이번엔 발을 헛디디지도 않고 빠르게 형 앞으로 달려들었다. 형이 가르쳐 준 대로 움켜잡은
목검이 좀 흔들거리긴 했지만 그만하면 괜찮은 자세였다. 좌측으로 휘둘러 어깨를 치려 했다. 형은 맞아
줄 듯 하다가 슬쩍 비켰다.
보리스는 오기가 나서 더욱 바짝 다가들었다. 어느새 형이 말해줬던 사정 거리를 넘었다. 형의 목검이
똑바로 보리스의 목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비킬 새도 없었다.
"아!"
예프넨은 깜짝 놀랐다. 그만큼 동생이 잘했기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몸에 익은 반격이 튀어나왔던 것이
다. 목검이라고는 했지만 끝은 제법 날카로웠다. 보리스의 목 가운데에 붉게 찔린 자국이 생기더니 곧
피가 방울져 맺혔다.
"이런!"
목검을 내던지 예프넨이 다가와 놀란 동생의 빰을 감쌌다. 한 손으로 등을 쓸어 다독이며 상처를 살펴
보니 다행히 심한 것을 아니었다. 그러나 맺혔던 피는 점차 굵어지더니 이윽고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프넨은 자기 소매로 핏방울을 훔치며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눌렀다. 그다지 많은 피가 나지는 않았
지만 동생의 맥박이 작은 새처럼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놀랐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형이 실수했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물론 보리스도 놀랐었다. 순간적으로 느낀 목검의 속도는 몹시 빨랐고, 상대방이 누구인지 깜빡 잊어버
릴 정도였으니까. 정말로 어떤 사람이 자신을 치려 한다는, 뜻밖의 공포가 짧은 순간 스치고 지나갔었
다.
"......으응."
그때였다. 두 형제를 부르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저택 방향에서 사람이 뛰어오고 있었다.
"예프넨 도련님! 보리스 도련님!"
저택에서 항상 보리스를 돌보는 하인이였다. 예프넨은 안 그래도 저택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는데 잘 되
었다고 생각하며 보리스의 손을 끌어 잡았다. 그러나 달려오는 하인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는 마치 다가
오지 말라는 것처럼 손을 내젓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하인은 이윽고 형제가 선 곳에 도착했다. 몹시 급하게 달려온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의 얼굴
이 파랬다.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하인은 간신히 고개를 들고 두 형제를 향해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였다.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 틀
림없었다.
"도련님들, 저택에 잠시 들어가지 마세요! 큰일이 났습니다요!"
예프넨은 다그쳐 묻는 대신 하인이 마저 설명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본래 하인들의 호들갑을 알기
때문에 크게 긴장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오늘 아침부터 하루 종일
예민해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신호처럼.
"블라도 진네만... 그 어른이 돌아왔습니다요!"
예프넨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히 굳었다. 그는 먼저 동생이 놀랄까 싶어 손을 꽉 쥐어 주었다. 그러나
자신의 손조차 차가워져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그래, 그렇구나......"
보리스는 하인의 말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을 애매하게 떠돌던 예감이 갑자기 기정 사실화된
충격이랄까.
그는 형의 시선도 느끼지 못한 채 천천히,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되풀이했다.
"블라도 삼촌이...돌아왔다고......?"
비를 품은 바람이 형제의 머리 위에서 서서히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하나씩, 젖은 회색 깃털들이 떨
어져 내렸다.
골든 리트리버 종인 개가 문간에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으르렁거렸다. 평소 순한 녀석이어
서 그 덩치에도 불구하고 꼬마 보리스 조차 편안히 기대 장난쳐도 좋은 녀석인데 지금만은 달랐다. 개
는 긴장하여 털을 곤두세우고 사납게 커컹 짖어댔다.
"허, 저 녀석이! 오랜만이라 사람을 몰라보는군. 멍청한 놈 같으니."
후리후리한 키에 팔이 유난히 긴 남자였다. 거므스름한 얼굴을 남방의 강한 태양 빛에 빛깔이었다. 주
름투성이 눈꼬리 안쪽의 노르스름한 홍채를 자진 눈동자는 악어 가죽에 박힌 장식 보석처럼 번쩍거렸
다.
사내는 발길질이라도 할 듯 구두를 딱딱거리며 다시 소리쳤다.
"처리 가라! 저리가!"
개는 여전히 맹렬하게 짖어댔지만 훈련이 잘 되어 있었기에 주인의 허락이 있기 전에 먼저 사람을 물
지는 않았다. 뚜벅뚜벅. 거실 안쪽으로부터 발걸음이 다가와 멈췄다.
악어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입가에 주름을 만들며 씨익 미소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율켄 형님."
"쉿! 조용히 해라. 말로리."
율켄 진네만은 먼저 개를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몇 년만에 만나는 동생을 향해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흥... 그는 미소지었다. 그도 동생도 전보다 휠씬 늙어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두배로 맹렬히 살아오기
라도 한 듯, 그렇게 일그러진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용케 살아 있구나, 블라도."
"어라, 불만이기라도 하신 겁니까?"
그것은 의미 없는 대화였다. 이제 두 형제는 전처럼 억지 예의를 지킬 필요조차 없었다. 형제를 낳았던
부모는 재작년에 나란히 죽어 없어졌다. 좀더 일찍 죽어 줬더라면 5년 전에 만났을 때 저놈을 죽여 없
앴을 텐데...... 그렇게 되씹던 율켄은 동생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문득 새삼스런 경계
심을 느꼈다.
"5년만인데, 자리 정도는 권해 달란 말입니다."
"앉거라."
둘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걸어가 접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않았다.
쿠르르......
천둥이 울렀지만 비는 아직 내리지 않았다. 율켄은 문득 예프넨이 집으로 돌아왔던가 생각했다. 하긴,
동생 녀석이 현관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부터 하인들은 혼비백산했을 테고, 그 중 한둘 정도는 아들들을
찾아 뛰어나갔을 것이다. 누누이 일러두었다시피 율켄 자신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집안의 수장은 예프
넨이다. 하인들을 비롯해서 그가 거느린 병사들도 지금쯤은 예프넨을 찾아내어 보호하며 명령을 기다리
고 있을 것이다.
내 하나 뿐인 동생 블라도 진네만. 무슨 속셈으로 네가 이 먼 죽을 자리까지 찾아왔느냐.
"형님, 뭐 미실 거라고 줘요. 한나절 말을 달렸더니 목이 말라서 죽겠데."
율켄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천천히 말했다.
"그래. 흑맥주라고 마실 테냐?"
"하하. 오래 외지에서 지내다 보니 입맛이 바뀌어 버려서. 난 그냥 진저에일이나 마실 테요."
진저에일 처럼 알코올이 거의 들지 않은 음료는 본래 블라도 가 즐기던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녀에
게 손짓하여 마실 것을 가져오도록 하는 율켄도 동생의 속셈을 모르지 않았다. 언제고 블라도가 결국
돌아오리라는 걸 율켄이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에 대비해서 블라도가 즐겨 미시는 종류의 음료
에 독약을 카서 준비해 두지 않았을리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율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희끗희끗한 새치가 머리카락 곳곳에 섞인 형제는 문득 상대방이 자신과 비
슷한 표정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 피가 닿았음은 분명하겠지.
하지만 10년도 넘게 대립해 온 사이다. 서로에게 이제 타협의 여지 따위가 없음은 너무도 명백했다. 자
신에게 패배해서 5년 동안이나 집을 떠나 있었던 동생, 이제 무슨 카드를 들고 제 발로 다시 나타난 것
일까.
형제는 진저에일 잔을 하나씩 들어 입술을 대었다. 눈 색깔과 머리 길이를 빼면 섬뜩한 정도로 둘은
닮아 있었다.
" 찾아온 용건을 물어야 된는 건가?"
노란 논의 블라도는 율켄과 반대쪽 입꼬리를 올렸다.
"뭐, 수고도 덜어드릴 겸, 직접 말씀드리죠."
오래 침묵하지도 않았다. 블라도는 이어 입을 뗐다.
"칸 선제후 님을 아실 테지요? 형님도 수도 소식에 영 귀 닫고 지내는 분이 아닌 건아니까. 이번에 나
는 그 분 곁에서......"
흥, 하고 율켄은 코웃음을 쳤다.
"되잖은 소리나 하려거든 썩 나가서 다른 둥지나 찾아봐라."
블라도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웃지 않았다. 노란 눈빛을 번쩍이며 그는 사납게 대꾸했다.
" 이 둥지는 형 혼자 것이 아니잖우? 롱고르드는 부모님이 우리 형제들에게 똑같이 물려준 영지란 걸
형 혼자만 잊은 것 같수."
발끈하자마자 젋은 시절의 말투가 곧장 뛰어나오는 불라도를 율켄은 차갑게 노려보았다.
" 그 권리를 네가 어떻게 차버렸는지 잊었던 말이냐? 억울하게 죽은 예니치카가 땅 밑에 누워서 오늘
네 놈이 돌아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을 거다."
블라도는 입술을 질근질근 비틀며 대꾸했다.
"그 기집애를 죽인 게 어째서 나란 말이우?"
순간 율켄은 울컥 목에서 뭔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쾅, 하고 잔을 세차게 내려놓았다. 갈색 물방울들이
탁자에 흩뿌려졌다.
"네놈의 농간이 아니면 어째서 그 애가 어려서부터 얘기만 들어도 벌벌 떨던 에메라 호수에 혼자서 갔
겠느냐!"
"흥. 예니는 호수에서 돌아왔을 때만 해도 죽지 않았잖우! 미쳐 날 뛰는 그 애를 치료도 제대로 안 시
켜보고 죽이라고 한 건 결국 형이 아니었수?"
"어디서 더러운 궤변을 지껄이는 게냐!"
조가. 남아 있던 에일 방울들이 블라도의 얼굴에 끼얹어져 흘러내렸다. 블라도는 얼굴에 패인 주름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소매로 슥 닦았다. 그리고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하기 시작했
다.
"흥...어디 좋아, 잘 해보쇼. 형의 의견 따위. 처음부터 들어볼 것도 아니었지. 어디 우리 집안 사람들이
목에 칼이라도 들어오기 전에 정치적 신념을 꺾는 일이 있었수? 하. 하. 우리 부모님도 제각기 다른 당
파에 뛰어들어간 아들들 고집 못 꺾었고, 예니도 신랑 될 사내 때라 불꽃모르파 명부에 결국 제 이름
써넣었더랬지. 재닌느 고무님은 달랐소? 지금도 3월 의원파에서 앞장 서 휘젓고 다니잖수? 하, 하. 하.
그래. 형님 아들들은 다를 것 같수? 그놈들도 조금 더 크면 형님이 신처럼 받드는 '카챠'를 버리고 전혀
엉뚱한, 예를 들면 진군파 같은 데 들어가겠다고 살칠 지도 모른다는 거야! 전혀 무리가 아니지!"
율켄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흐린 날씨 탓에 점차 어두워지고 있는 거실에는 촛불도 하나 없었다.
"훗훗, 그렇게 되면 한 집안에 당파만 다섯 개야. 다섯 개! 아니, 부모님들은 죽었으니까 이젠 네 개가
되어야 하나?"
율켄은 더 대꾸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가라."
"나가드리지."
불라도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비웃음을 입가에 문 채 형을 가리킨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
다.
"하지만 후회하게 될걸? 오늘 내가 형에게 마지막으로 화해를 청하려 왔었다는 걸 잊지 마시란 말요.
그래, 마지막 기화였지. 형이 그놈의 '윈터바텀 킷(Winterbottom Kit)'을 내놓기만 했다면 난 과거를 모
두 잊고 형을 그만 용서하려 했었수. 어때. 한 번 더 생각해 볼 테우?"
율켄은 씹어 뱉듯 중얼거렸다.
" 내 머리가 두 쪽 나기 전에 그게 네 놈 손에 들어갈 일은 결코 없을 거다."
" 흥, 좋은 지적이군. 잘 알았수다."
블라도는 예상했다는 듯 얼굴의 주름을 한층 드러내며 싱글싱글 웃었다. 이윽고 다시 입을 연 그는 한
결 어두워진 율켄의 얼굴을 감상이라도 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칸 선제후님이 이번 선거에서 트라바체스의 통령이 되는 것은 장님이 봐도 뻔한 사실이우. 이제 그 분
을 따르지 않고서 감히 우리나라에서 발붙일 테가 있을 거라고 보우? 게다가 칸 선제후께서 가장 미워
하는 상대인 '카챠'의 사람인 형한테 다른 탈출구가 있을까? 선거만 끝났다 하면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는 것을 알아야지 동생이 아량을 베풀 때 얌전히 설득 상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 아니. 그건 역시 진네
만 가문 사람으로서 할 만한 일이 아니었나?:
"나라라지 않았나!"
블라도가 하는 말의 뜻을 율켄은 남김없이 알아듣고 있었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사실도 아니었다. 동생
이 오랫동안 섬겨 온 칸 선제후는 벌써 열 다섯 선제후 가운데 절반 이상의 지지를 획득한 상태였다.
오직 반대하는 것을 블라도가 '카챠'라는 모욕적인 별명으로 부른 카츠야 선제후를 비롯한 세 명에 불과
했고 나머지들은 공식적인 지지를 표명하진 않았어도 대세에 따르는 분위기였다.
이미 진 선거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네만 감누. 아니 트라바체스 공화국에서 조금이라도 이름 있다는 집안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명 다음으로 중시하는 것이 정치적 신념 아닌가. 그리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신념 쪽을 생명보다 더
높이 치고 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진네만 가문은 그 점에서 적지 않은 명성마저 가지고 있었다.
형제까리 이토록 참혹하게 갈리게 된 것도 그 명성을 높이 산 여러 선제후들의 유혹이 심했던 탓 일지
도모르는 일이다.
그래.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온 나라가 빵 조각도 제대로 못 먹는 주제에 신념이니 당파니 하는 것에
넋을 놓고 들썩거리게 된 것은. 아마도 트라바체스가 이처럼 불안정한 제후 선출식 공화정을 도입한 후
부터인가? 아니. 정식으로 하지만 이건 공화국도 아니다. 전 국민이 수백 개의 당파로 갈려 부자간에.
형제간에, 친구간에 화해조차 모르고 싸우도록 만든 악독한 변형 군주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결코 꺾을 수는 없었다. 트라바체스에서 한번 지지하는 섬기기로 한 선제후나 당파을 버린
다는 것은 어떤 행동으로도 씻기 힘든 불명예로 간주되었다. 그게 바로 공화국 건설 당시부터 서서히
갈려 온 수백 개의 당파가 여전히 조금도 합치지 못하고 투쟁과 암살로 얼룩진 채 볼썽 사납게 싸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갈라지기만 한다... 겨우 백 여명의 지지 세력을 가진 자들도
60명과 40명으로 갈릴 망정. 비슷한 규모의 다른 정파와 손잡아 2백이나 3백이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
는다. 모두 상대가 숙이고 들어오기만을 바랄 뿐.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율켄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의 정파를 따를 수 없었고. 동생과 합칠 수 없었
으며. 여동생의 결혼 상대자를 끌어들일 수 없었다. 그 윗대도 마찬가지 일의 반복이었다.
이런 식으로 정치 때문에 집안이 파탄 지경에 이르는 것을 트라바체스에서는 크게 드문 일이 아니다.
수많은 선제후들과 다음 선거에서 선제후가 되기를 원하는 의원들은 조금이라도 힘있는 집안 사람이라
면 그중 한명이라도 제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잦은 술책과 회유를 동원했다. 형과 누이가 갈리고 남편
과 아니가 갈리며 아버지와 딸이 등을 도렸다. 나라는 붕괴 직전이 되어도 누구도 서로를 용서하거나
용서를 빌지 않았다. 오직 자기 당파가 정권을 쥐는 것. 트라바체스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것 하
나만이 지상 목표일 뿐!
인사도 없이 걸어나가던 동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히죽거렸다.
"오늘 내말을 들었으면 진네만 집안이 둘째 아들에게 이러지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우. 어디, 내가
빼앗아 갈 때까지 모조리 꼭 끌어안고 잘 버텨 보슈."
쾅.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율켄은 석상이 된 것처럼 꼼짝 않고 않아 있었다.
그도 오랫동안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 온 사내다. 트라바체스에서 어떤 식으로 한 정파가 다른
정파를 말살하고 제압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동생이 화해를 청하러 왔다는 소리는 입에 발린
개소리고 실은 선전 포고를 하러 왔을 것이다. '윈터바텀 킷'을 찾으러 왔다고? 어림없는 소리! 율켄이
그걸 순순히 내줄 리가 없다는 것을 블라도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당연히 혼자일 리 없었다. 저택 밖에는 이미 습결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을 테고. 방금 역
시 자신의 몸을 보호할 방책쯤은 마련해서 온 것이다. 비록 자신이 태어난 곳이지만 이제는 적진과 다
름없는 저택에 홀홀 단신 들어올 불라도가 아니었다.
녀석도 저 나이가 되도록 정치판에서 구를 대로 구르고. 피 맛도 볼대로 봤을 테니까.
" 튤크"
"예, 주인님."
거실 뒤의 커튼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항쟁이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커튼 뒤에 서 있던 사람의 자취가 스르르 지워졌다. 그 뒤에는 밖으로 곧장 통하는 비밀 통로가 만들
어져 있었다.
율켄은 쏟아진 에일 방울들과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컵을 내려다 보다가 이윽고 일어섰다. 길쭉하게 솟
을 창을 말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말에 올라타는 동생 곁에 두 명의 종자가 역시 자신들의 말을 끌어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이윽고 말에 올라타더니 박차를 가해 두 형제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들판을 향해 달려갔다.
2. 눈의 갑옷. 겨울의 검
예프넨은 걸음을 서둘렀다. 하인이 맡겠다는 것을 마다하고 굳이 직접 동생을 번쩍 안아든 채 저택을
향해 내달렸다. 현관에 도착했을 때까지 비는 조금만 흩날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2층에 계십니다."
들판 너머로 블라도 삼촌이 탄 말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었다. 동생은 자기보다 더 진장해 있었다. 하인
의 대답을 듣고 예프넨은 다시 물었다.
"튤크 집사가 내려왔나?"
"예, 아까 전에 벌써 연병장으로 나가셨습니다."
예프넨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면 가볼 필요는 없겠지. 보리스. 방으로 가자."
흙 묻은 신발을 갈아 신을 틈도 없었다. 말끔하게 닦아 놓은 바닥과 잘 손질된 융단에 풀씨와 진흙이
뭉개졌다. 가로막는 문을 거칠게 열어제치며 방으로 달려들어간 예프넨은 침실 문만은 닫고 단단히 잠
갔다.
보리스가 가쁜 숨을 내쉬며 침대로 주저앉는 동안 예프넨은 당장 장롱을 열어제치더니 잘 접어놓은 옷
들을 마구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강철 경첩이 붙은 작은 상자가 발견되자 주머니에서 열쇠를 뽑아 돌
렸다. 뚜껑이 열리고 나온 것은 손가락 두 개 두께만큼 굵고 시커먼 열쇠였다.
"보리스. 네 방에 가서 아버지가 주신 브리간딘(brigandine) 갑옷을 꺼내 입어라. 검과 부츠를 가져오는
것도 잊지 말고. 알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동생의 어두운 눈동자가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옷가지들을 훝어진 옷가지들을 훑는 것을 느꼈지만
마땅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보리스는 일어나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자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보리스가 곧이어 뛰어들어온 유모의 도움을 받아 무장을 마칠 즈음 예프넨의 급한 손길도 할 일을 해
내고 있었다. 묵직한 장롱을 밀어내고 뒷벽에 난 위장된 나무판을 다음 그 너머에 장치된 철 금고에 붙
은 구멍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찾았다. 굵직한 열쇠를 꽂아 힘껏 돌리자 덜컹,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보리스가 돌아왔을 때. 난장판이 된 형의 침대 위에는 두 개의 신성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형제는 잠시 침묵했다. 보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스노우가드 (snowguard)....."
은백색으로 번쩍이는 체인이 수천 개의 눈 결정을 모아 엮은 듯 눈부셨다. 그것은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면 눈 둘 곳을 잃을 정도로 한층 황홀한 결정들이었다. 보리스는 한 걸음 다가가 그 위에 손을 얹었
다.
차갑다가...따뜻해진다. 그랬다. 거짓이 아니었다. 외부의 열을 흡수하여 내부에 이르기 전에 분쇄해버린
다는 신비로운 힘은 마법 갑옷 스노우가드의 수많은 능력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어떤 강
렬한 불꽃도 결코 뚫을 수 없다는 눈의 갑옷 스노우가드. 그것이 진네만 가문의 손에 들어온 것은 네
새대 전엔 예프넨과 보리스의 증조부가 이룬 업적이었다.
예프넨이 이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윈터러 (Winterer)."
'겨울을 지새는 자'라는 이름 그대로, 추위와 얼음의 힘으로만 제련된다는 기이한 금속이 한 줄기 섬광
처럼 벼려진 채 침묵하고 있었다. 검이다. 날씬한 자태만큼이나 귀족적인 싸늘함을 지닌 하얀 검이다.
무늬 없는 백색 검집 위로 튀어나온 손잡이는 비교적 얇은 검신에 비해 두 손을 넓혀 쥘 수 있을 만큼
길었다. 한 손으로도 두 손으로도 쓸 수 있다고 해서 사생아라는 별칭을 가진 바스타드 소드( sword)였
다. 보리스가 어린 시절 단 한번 본 기억이로도 검집 안에 든 날 역시 차가운 백색 광택을 지니고 있었
다.
이 두 가지 물건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 바로 윈터바텀 킷. 지금은 진네만 가문의 보물이 되어 있지
만 과거 수많은 신분 높은 가사와 방랑 전사들이 옳지 못한 피를 뿌리고라도 손에 넣으려 안간힘을 다
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검을 쥐는 자라면 누구나 풍문으로라도 전해 듣고 동경하게 되는 신비로운
무구, 명성 자자한 무구였다.
보리스의 증조부는 스노우가드를 손에 넣기 위해 들리는 말로 99명의 기사와 전사를 살해했다고 했다.
당시 스노우가드의 주인은 외국의 영주였다고 하니 그를 호위하는 군사가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아들이 다시 검인 윈터러를 손에 넣기까지는 30여년이 걸렸다. 그 역시 아버지보다 적
게 죽이지는 않았다.
한번 손에 넣는다고 거기서 일이 끝날 리 없었다. 윈터바텀 킷이 한주인의 손에서 완성되었다는 이야
기는 검을 쥔 자들 사이에 한층 열렬한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그 즈음부터 윈터바컴 킷을 손에 넣으면
최가의 검사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자 소문은 '원터바텀 킷을 손에 넣어야
만 최강의 검사'라는 식으로 바뀌어 버렸다.
일단 손에 넣은 보물을 광적인 도전자들로부터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한 가지,걸려 오는 무든 도전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윈터비텀 킷으로 무장하고 나와 정정당당히 겨루고 보물은 이긴 자의 전리품으로
하자는 요구들에 보리스의 할아버지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물래 숨어든 도둑들은 대기하고 있던 사
병들에 의해 깨끗이 격퇴 당해 모두 목이 잘렸다.
당시만 해도 진네만 가문은 트라바체스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당당한 집안, 1대1 결투의 방법이
아니면 그 누구도 강압적으로 윈터바텀 킷을 빼앗아 갈 길은 없었다.
또한 달리 말하자면 아무리 좋대 봤자 일개 무구일 뿐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물처럼 엮어진 집안
간의 유대를 중시하는 가문들은 검 한자루. 갑옷 한 벌 따위를 뺏자고 여럿이 죽고 죽이는 항쟁 따위를
벌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그렇게 몇십 년이 흐르자 소문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보리스의 할아버지는 그토록 힘들여 얻는 무구인데도 한 번도 윈터바텀 킷을 몸에 걸치고 밖에 나서지
않았다. 탐욕스런 자들의 욕망이 불붙을 여지를 원칙적으로 봉쇄했던 것이다. 더 세월이 흐르자 '이미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더라'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윈터바텀 킷은 여전히 진네만 저택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전통대로, 두 명의 아들들 손에.
다시 말하지만 두 명의 아들이다. 보리스의 할아버지는 이 윈터바텀 킷을 놓고 아들들이 싸우지 않기
를 원해서 그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고 서로 협력하라고 유언했다. 한쪽이 늙어 죽은 후에야 그것을 다
시 한사람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블라도는 형인 율켄에게 내 쫓겼고 당연히 소유권도 빼앗겼다. 이
제 그것을 되찾으려 하는 마음에 추호도 망설임이 있을 리 없었다.
율켄 역시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죽은 아버지와 생각이 달랐다. 윈터바텀 킷은 합해졌을 때 강
력한 힘을 발한다. 나누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지 않은가.
그것은 당연히 가문을 이을 큰아들의 것이었다. 열두 살인 보리스보다 예프넨은 여덟 살이나 많았다.
그 정도 나이 차이면 동생을 제압하여 감히 거역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율켄은 생각했다.
그러나 예프넨의 생각은 또 달랐다.
"보리스. 네게 이 검을 잠시 빌릴게."
겨울의 검 윈터러는 그 정체 모를 재질 탓인지 일반적인 바스타드 them에 비해 비교적 가벼웠지만. 역
시 열두 살 어린아이가 휘두르기에 벅찼다. 보리스는 가만히 형을 올려다보았다.
율켄이 윈터바텀 킷을 아들 예프넨에게 넘겨 준 것은 올해 초, 예프넨이 스무 살이 되던 때였다. 그러
나 예프넨은 그날 밤 자기 방으로 보리스를 불러 두 가지 물건을 보여주며 어느 쪽이 좋아 보이느냐고
물었다. 보리스는 별 생각 없이 무거운 갑옷보다는 검이 멋진 것 같다고 답했고, 그러자 예프넨은 네가
검을 휘두를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걸 네게 주겠다고 말했다. 깜짝 놀라는 보리스에게 부드럽게 웃으
면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보리스는 자신이 그 말을 믿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후로도 형은 몇 번이나 기회가 닿을 때
면 '윈터러는 네 거다'고 말해 주었고 언제부터인가 그도 그렇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날 형은 다시 한 번 그게 말하고 있었다. 문득, 보리스는 여전히 자신을 그 이름 높
은 검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보리스는 항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이가 아니었다. 트라바체스 공화국에서 가문간 항쟁으로 일어난
일은 재3자가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오늘 밤 누가 살해당한다 해도 이 자리
에 있는 사람들 외에 울어 줄 사람은 없었다. 아직은 전력이 될 수 없는 어린아이는 자신, 그러니 형이
검을 쥐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인 형이.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형 거야."
"아냐. 이번 항쟁이 끝나면 반드시 돌려주겠다. 네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빌려 가지도 않을 거야."
"돌려 줄 필요 없어. 형 거야."
"보리스."
예프넨은 윈터러의 칼집 쪽을 잡더니 보리스에게 내밀었다. 약간 망설이다가 손잡이를 잡자 형은 손을
놓았다. 휘청, 팔이 아래로 떨어지며 바닥에 부닿친 검이 요란한 소리를 울렀다.
"들어 봐."
힘껏 들어올리려 했지만 한 손으로 지탱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두 손으로 잡자 간신히 허공을 향해
쳐들고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팔뚝이 부들부들 떨리고 검 끝이 불안정하게 작은 원들을 그렸다.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생각했을 때, 형의 손이 검집으로 감싸진 끝을 탁, 잡았다. 팔에서 힘이 빠지자
어깨가 축 늘어졌다.
"거봐, 너도 들 수 있잖아."
"이런 걸로는......"
그러나 예프넨은 동생이 더 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허리를 굽히며 얼굴을 바싹 갖다 대더니 조
그맣게 속삭였다.
"더 잘 하게 될 거야. 멋지게 해내게 될걸. 너는 전사(warrior)니까, 이름 그대로 전사니까(Boris는 '전
사'라는 의미)."
형의 따뜻한 입김이 기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때, 다시 한번 이상한 기분이 목덜미를 서늘하
게 감싸며 다가왔다.
자신은 실제로 검을 갖게 될 것이다. 저 윈터러를.
그것도 원치 않은 슬픈 결과로 인해.
괴괴한 침묵이 저택 전역에 감돌았다.
아버지가 거느린 2백여 명의 사병이 저택의 앞뒤를 삼엄하게 지켰다. 진네만 가문의 전성기에는 천여
명도 넘었다는 사병이 지금은 저토록 줄어들어 있었다. 전성기란 윈터러를 가져왔다는 보리스의 할아버
지 시절을 뜻했다.
보리스와 예프넨은 2층에서, 뒤뜰로 곧장 이어지는 계단이 붙은 곳에 서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싸움
의 전면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어차피 아버지의 존재로 결정되니까. 그러나 또한 어린
아이인 보리스라고 해서 싸움에서 아예 빠질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진네만 가문 주인의 아들이었으므로.
일부러 그런 것처럼 약간 열려진 창문 밖 뜰로는 병사들의 뒷모습이 검은 말뚝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
고 박혀 있었다. 그들은 제2진이다. 1진은 저택에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나가 있었다.
진네만 저택은 여러 번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적인 항쟁을 하기에 용이한 환경은 되지 못했다. 아
니, 실은 저택까지 적이 들어오면 그 항쟁은 거의 졌다고 봐야 했다. 일단 저택에 들어온 적은 가재 도
구에서 진귀한 물건들이 이르기까지 손닿은 물건마다 남김 없이 부수고 약탈해 버린다. 싸움에 이기고
지고를 떠나 저택이 침탈 당한 집안은 거의 항쟁에서 진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이러한 항쟁은 한 해에도 몇 번이나 일어났다. 이름 있는 가문이 항쟁에 연루되었을 때만 그것은 널리
아야깃거리가 되었고. 보통은 그냥 저들 집안끼리의 일로 묻혀 버렸다. 그러나 실제로 항쟁에서 진 가분
은 어린아이까지 모조리 몰살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것은 불화가 있는 가문들이 가장 자주 택하는 해결 방식이기도 했다. 진네만 가문처럼 가문 안에서
쫓겨난 형제나 자매가 항쟁을 걸어오는 경우도 아주 드물지는 않았다. 정견이 달라 집을 나가는 형제란
트라바체스에서 매우 흔한 것들 중 하나였다.
예프넨의 시선이 창문 틈에 박혀 있었다. 보리스는 계단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단 아래에는 십여 명 이상의 병사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진네만 가문의 젊은 두 형제보다 먼
저 죽기 위해서.
" 보리스. 저길 봐."
불쑥 들려온 형의 목소리에 보리스는 재빨리 창문턱으로 다가들었다. 붉게 흐린 하늘과 보랏빛 기류가
뒤엉켜 번져 나가가는 들판머리에 새로운 광채가 곹 가세했다. 횃불이었다.
"시작이다."
늑골 아래가 쿡 찔러지는 듯한 충격이 올라왔다. 보리스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소리가 번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우우, 또는 와이... 라고 외치는 듯한 뭉개진 목소리들이
점점 가까이 닥쳐왔다. 어두워서,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 저택 주위는
온통 타오르는 횃불로 휩싸여 있었다.
얼마나 될까...수백?1천?
지독히 불리하다.
예프넨은 입술을 꼭 깨물며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사태가 불리하거든 윈터바텀
킷을 가지고 저택을 빠져나가라. 미리 일러 둔 그 방향으로.'
이버지는 보리스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일까? 하지만 예프넨에게는 보리스
가 우선이었다. 자기 혼자라면 어둠을 뚫고 달아날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첫째는 아버지를 두고 가야한
다는 사실, 둘째는 동생을 안전하게 데려가야 한다는 임무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아버지가 말한 대로 웬터바텀 킷을 삼촌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도.
또래보다 유능한 점이 많다고는 해도 예프넨은 스무 살. 그만한 짐을 한꺼번에 짊어지는 것은 당연히
벅찼다. 그러나 그렇게 길러진 탓일까. 그는 자신의 짐이 부당하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단지 자신에게
그만한 능력이 아직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느낄 뿐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이곳에서 피를 뿌리게 될 병사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주인이 되었다면 당연히 돌보아야 했을 가문의 사병들이었다.
각 가문에 속한 사병이란 일시에 모아져 급작스레 형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아 왔으며 진네만 가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커온 자들이 그들이었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다름 아닌 항쟁, 바로 그 항쟁을 위해서 평상시 평민의 몇 배나 되는 대우를 받으며 비교
적 편안한 생활을 해온 자들인 것이다.
그러니...오늘은 끝나는 날이로구나.
횃불이 동생의 얼굴에까지 어른거렸다. 예프넨은 검을 꽉 쥔 채 일단은 저들을 하나라도 더 벨 일을
생각했다. 그들 가운데 삼촌이 어디 있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가장 먼저 삼촌을 벤다면 일은 좀
더 수월해지리라고 생각하며 그는 쓴 미소를 삼켰다.
그때, 보리스는 창문 곁에 걸린 한 장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채 처연한 미소
를 짓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림 속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말을 거는 수한 눈이었다.
"오늘, 진네만 가문의 주인은 바뀐다! 들었느냐! 오늘 가문의 주인은 바뀌었다!"
목소리 큰 자 여럿이 입을 맞춰 외치는 소리를 율켄 역시 듣고 있었다. 살아오며 여러 가지 경로로 겪
은 항쟁은 십여 번 이상이었다. 저런 수순에 대해서도 알만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자신을 향해 말해지는 기분은 상상보다 훨씬 썼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는 죄를 묻지 않는다! 새 주인에게 봉사하여 다시 진네만 가문을 일으킬
자는 앞으로 나오너라!"
저런 회유에 마음 흔들질 자들이라면 이미 몇 년 전부터 기울어지는 것이 확연했던 진네만 가문을 예
전에 떠났을 거다...라고 중얼거린 율켄은 몸을 일으켰다. 저들의 헛소리를 끝까지 들어 줄 필요는 전혀
없었다. 피를 뿌릴 때가 왔다.
갈 테냐?
성큼, 한 걸음 나선 그의 입에서 벽력같은 고함이 터졌다.
"나서라, 감히 롱고르드의 땅을 침범한 자여! 진네만 가문의 미래를 서툰 입으로 논하는 자여. 빛 아래
로 나오라!"
횃불로 둘러싸인 앞마당이 저물 녘처럼 불그레했다. 율켄은 정면 2층 테라스에서 서서 아래를 나려다
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적들의 석궁이 닿는다면 닿을 수도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당당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병사들이 움츠러들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순이었다.
"율켄 진네만이다! 테라스 위다!"
병사들이 테라스로 횃불은 가져와 높이 들었다. 붉게 타오르는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율켄은 생각
했다. 1진은 어찌 되었을까? 괴멸 당한 것일까? 아니면 길이 엇갈렸나?
적이 만든 횃불의 따기 율켄의 시야에서 2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일렁이는 곡선을 이루고 있
었다. 눈속임이 섞였다 해도 5백은 훨씬 넘는 수였다. 율켄을 다시 한 번 외쳤다.
"불을 올려라!"
저택 전면에 포진한 병사들의 발아래 흰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여 붉은 횃불의 띠와 대치하는 선을
이루었다. 흰 불꽃은 저택에 마법의 힘이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고, 동시에 병사들의 사기와 체력을 끌어
올리는 마적 효과도 있었다. 집사 튤크가 해내는 일들이었다.
"소심한 자야, 나오지 못하는 것이냐? 너희의 오합지졸에 3백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젠네만 가문이
쓰러질까보냐!:
그 순간. 대답 대신 거대한 뱀이 시잇거리는 듯한 싸늘한 굉음이 저택과 벌판 전체에 올려 퍼졌다.
병사들, 저택 안의 사람들, 테라스에 선 율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붉은 보랏빛 대기가 일그러지며 언뜻 흰 불빛 같은 것이 내비쳤다고 생각된 순간이었다.
자장 먼저 사태를 알아챈 것은 율켄 이었다.
" 나가라! 모두 저택 밖으로 나가라! 2진은 자리를 지켜라!"
우우우와아아......비명에 가까운 함성과 함께 저택의 모든 문이 안에 포진했던 병사들을 토해 놓기 시작
했다 그러나 율켄 자신은 밖으로 나가는 대신 몸을 돌려 성급하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단 한가지밖에 없었다.
그러나 율켄과 거의 비슷한 순간에 사태의 위급함을 판단한 사람이 있었다. 예프넨은 동생을 와락 끌
어안고 계단으로 뛰어 내러가려는 순간, 달려오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아버지의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
져 있었다.
"예프넨! 어서......"
그때 율켄은 예프넨이 보리스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당장 예프넨
의 품에서 보리스를 빼앗았다. 두 아들이 모두 상황을 몰라 아연실색하는 것을 보면서 율켄은 사납게
소리쳤다.
"혼자 가러가! 보리스는 내 곁에 두겠다!"
"하지만......!"
율켄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제대로 도망을 치겠다는 거냐! 네가 지금 어떤 것을 지키고 있는지 모른단
말이냐! 어서 가라!"
예프넨은 감히 반대 의견을 말할 틈도 없었다. 아버지는 보리스를 옆구리에 끼다시피 한 채 어두운 복
도 넘어 사라져 버렸다. 그때, 다시 한번 저택의 벽이 울리는 것을 느껴졌다.
쿠르르르르......
입술을 깨물었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복종해 온 아들이었다. 허리에 찬 윈터러를
꼭 쥔 채 그는 한 걸음에 세 단 씩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더러운 놈......"
율켄은 저택 안을 지키던 병사들을 이꿀로 저택 뒤쪽으로 빠져 나와 있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튀어나
온 거대한 괴물의 머리가 저택 지붕을 덮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만년설의 산이 갑자기 솟은 듯. 새하얀 대가리 주위로 성근 눈발이 날리는 듯했다. 보이는 거라고는 머
리와 목. 그리고 갈고리 같은 발톱이 줄줄이 세워진 한쪽 앞발뿐이었다. 나머지는 자줏빛으로 맥동하는
구름 속에 가려져 있었다. 써늘한 청록빛 눈동자가 잔인하게 번들거리며 목표물을 주시했다. 뱀처럼 생
긴 머리통은 언뜻 반투명했다. 몸 전체가 소화되지 못한 탓이리라.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율켄의 귓가를 아프게 자극했다. 틀림없었다...... 트라바체
스 안에서 단 세명의 마법사만이 소환할 수 있다는 얼음 이계의 소화수 '크리갈'이다. 말로만 들었을 뿐
실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명 칸 선제후를 섬기는 대마법사 종그날의 작품이리라. 그가 이곳까지 함께 왔을 줄이야. 그 정도로
동생의 위치가 높단 말인가, 아니면 더 큰 전략적 가치가 이곳에 주어져 있단 말인가.
흰 뱀처럼 생긴 머리가 드디어 입을 쩍 벌리더니 동쪽 지붕을 물어뜯었다. 우지끈, 서까래가 무너져 내
리고 기둥이 부러지는 소리가 이 곳까지 들렸다. 오랫동안 지키고 가꾸어 온 저택...... 그러나 사실 그것
은 문제조차 아니다.
부서진 집은 고치면 되지만 저 강대한 이계 소환수 '크리갈'은 이빨에서 맹독성의 액체를 쏟아내었다.
독액이 집을 적셔버리면 그 안에 있던 사람이 몰살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후 정화 마법을 써도 회복
되는 데 며칠로는 어림도 없었다. 자연 상태로 둔다면 3년 이상은 들어갈 수조차 없는 폐가 되어버린다.
율켄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략적으로 저택에서 자신들을 내쭟는 것이
아무리 필요했다고 한들. 블라도에게도 역시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들인 저택인 것이다. 그것을 저렇게
더럽히면서 일순의 망설임조차 없다는 말인가.
으득......
저절로 이가 갈렸다.
" 저놈을 용서하면 내, 진네만 가문 사람이 아니다."
창백한 얼굴로 씹어 뱉는 소리였다. 그의 곁에서 말을 잊는 표정으로 하늘을 오려다보던 보리스가 문
득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화수 크리갈... 그 거대한 머리가 지붕을 씹어 부스는 것을 바라보는 보리스의 가슴이 이상할 정도로
싸늘했다. 2층에는 어머니의 방이 있었다. 형은 가끔 어머니가 그립4다고 말했지만 자신으로서는 기억조
차 없는 어머니였다. 늘 깔끔하게 청소되어 생전 어머니가 놓아둔 그대로의 모습으로 유지시키고 있는
그 방에 가끔 보리스를 데리고 들어간 형은 어머니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보리스로서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기억나는 어머니는 초상화 속의 푸른 드레스와 창
백한 얼굴일 뿐, 그리고 방에서는 하녀들이 꽂아 놓은 말린 갈대나 들꽃의 냄새가 났을 뿐이다.
하지만 형이 저걸 본다면 슬퍼하겠구나......
형과 떨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불안한 마음이 한시도 가시지 않았었다. 왜 아버지는 형과 자신을 떼
어놓았을까. 어린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 건 무리라고 했지. 역시 형의 짐이 될 필요는 없는데.
아버지는 별 역할도 할 수 없는 어린 아들보다는 대를 이어갈 큰아들. 그리고 가문의 보물이 중요한
거다.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지. 자신은 아직 진네만 가문에 중요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의 불안함은 이상하게도 자신이 아닌 형에게 닿아 있었다. 오늘 내내 형에게 무슨 일이 벌
어질 것만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율켄은 보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곁에 다가선 집사, 아니 마법사 튤크에게 명령했다.
"1진과 2진의 상태를 점검해 봐라. 얼마나 남아 있는지."
튤크는 말없이 긴소매를 한 번 휘둘러 허공에 영상을 열었다. 영상으로 드러나 저택 전면의 들판에는
흰 불길과 붉은 불꽃이 엇갈려 타올랐고 남은 병사 몇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세가 불리한 것은 누
가 보아도 자명했다. 전면전을 할 만한 병사는 남아 있지 않았다. 보리스는 섬뜩한 기분으로 그것을 바
라보고 있었다.
율켄은 잠시 침묵했다가 곧 입을 열었다.
"저택 양쪽으로 친다. 남은 병사들은 둘로 나눠라. 모두 풀이 길게 자란 쪽으로 다가가 몸을 숨기고 명
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라."
보리스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 저 괴물이 있는데 어떻게......"
율켄이 낼앨하게 내뱉었다.
" 저놈의 몸은 절반이 이계에 남아 있으니 이 세계에서 살아 있는 자에게는 힘을 발휘할 수 없어."
그러더니 율켄은 성큼 걸어가 보리스에게 들리지 않도록 튤크에게 몇 마디 속삭였다. 튤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두어 마디 답했다. 이윽고 마법사는 미리 약속해 둔 마법의 휘파람을 불어 어둠 속에서
병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밖에 걸맂 않았다. 보리스는 율켄의 손에 이끌려 저택의 동쪽으로 돌아갈 병사들과 함께 풀
숲 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반대쪽 병사들을 이끌고 있는 튤크가 마법으로 신호를 보낼 것이었다.
"보리스, 넌 천천히 따라오다가 뒤로 빠져서......"
아버지는 입을 떼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뭔가 숨기는 거라도 있는 듯한 사람의 태도였다.
"우리가 사움을 시작하거든 곧장 들판 뒤로 돌아 달려가라. 도망치는 거다, 알았지?"
보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신이 싸움에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그렇다면 역
시 형과 떼어놓은 것은 형을 번거롭게 하지말고 조용히 잡혀 죽으라는 것일까?
"어느...쪽으로요?"
"에메라 호수 쪽."
"거긴......"
이번에는 보리스도 놀란 가슴을 쉽게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것에는 붉은 눈의 유령이 살고 있지 않
은가!
보리스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아버지는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유령 따위는 없어. 늙은 여자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야 어떻게 진네만 기문의 사내랄 수 있겠느
냐? 오히려 덕택에 그 쪽으로 달아났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호수가 보이는 근처에 숨어 있
으면 아버지가 싸움을 끝내고 데리러 가마. 그렇지, 검은 둥치를 가진 나무가 세 그루 서 있는 곳에서
기다려라. 알겠느냐?"
보리스는 제대로 대답할 틈이 없었다. 튤크가 율켄의 귓가로 마법의 속삭임을 보내 왔던 것이다. 가벼
운 째깍거림 같은 소리. 신호였다. 율켄은 손을 올렸다.
"가라!"
벌떡 일어난 율켄은 아들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은 채 들판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마지막이었을까......아버지의 그림자는 완전히 어둠 속으로 묻혀버렸다.
이계의 생물체가 굽어보는 가운데 같은 성을 가진 형제의 병사들이 서로 뒤엉켰다. 흰 불꽃, 붉은 불꽃
이 어우러져 타올랐다.
불라도 진네만은 칸 선제후가 하사한 흑날의 세이버(saber) '하그룬'을 뽑아들고 연신 닥쳐드는 병사들
을 요리했다. 등뒤는 호위병들이 든든히 지켜주고 있다. 오직 앞만 잘 보면 되었다.
어깻죽지를 꿰뚫었던 검이 곧장 다른 자의 이마를 찢고, 목을 찔렀다. 다시 한 바퀴 휘두르자 상대의
손목이 잘려 나갔다. 그는 저택을 떠나가 전 자신의 솜씨가 형만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
금도 그렇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먼발치에서 형을 찾으려 했다. 잡작스레 눈앞에서 맞닥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멀리서 싸우는 것을
보고. 기회를 보아 기습하리라 마음먹었다.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형이야말로 그때 음모를 꾸며 자
신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고 내 쯫은 처지 아닌가. 조금 늦긴 했어도 보답을 받기에 모자란 행동을 아
니다 싶었다.
어쨌든 형은 자신보다 늙었다. 얼마나 잘 휘둘러댈지 그 솜씨를 좀 보자꾸나!
"율켄 진네만이다! 율켄 진네만이 여기 있다!"
병사들에게 형을 발견하면 외치라고 말해 두었었다. 이윽고 저택 동쪽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이곳까지
퍼져왔다. 블라도의 주름진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흘렀다.
이제 흑날의 하그룬이 은백의 윈터러로 바뀔 날도 멀지 않았다.
율켄은 블라도와는 반대였다. 그는 기를 쓰고 동생을 찾아내려 했다. 마흔이 넘었는데도 그의 검은 아직
매서웠고, 많은 병사들은 압도해서 달아나게 하고도 남았다. 동생이 이 손에 걸린다면... 그 목에 찔러
꿰뚫기 전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죄 많은 동생을 이 손으로 끝장내어 주리라.
그의 바램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