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필로그. 재회 (2) >
신장이 가장 크게 어긋나고, 분위기와 얼굴 또한 김세진과 비슷한 부분이 드문드문 엿보일 뿐 명확히 다르다.
하지만 그는 특성으로 인해 체격과 외면이 크게 변했다고 말했었다. 실제로, 이제는 기억에도 흐릿한 그의 첫인상 또한 날이 지날수록 변했던 걸로 기억한다.
한데. 이제 이 세상에 '특성'이라는 불가사의는 없어지지 않았는가.
물론 특성이 없어졌다고 해서 여태 특성으로 쌓아올렸던 모든 것들까지 모조리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아니긴 하다. 실례로 특성을 이용하여 변화시킨 자신의 몸은 그대로니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과거 속, 묘연하게 남은 김세진의 '첫인상'은 저 남자와 비슷하다. 그저 덧없는 희망이 만들어낸 망상일 수도 있겠지만, 너무나도 익숙하다.
그때 이혜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세정아?“
"아, 네?"
"뭘 그렇게 봐?"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때문에 세정은 파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애써 주의를 환기시켜보려고도 했지만 어느새 힐끗힐끗 바라보게 된다. 그가 다른 여자를 보며 환하게 웃기라도 하면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온다.
미소를 흘리며 다가오는 남자들이 귀찮다. 파티를 아름답게 적시는 선율도 그저 신경에 거슬릴 뿐이다.
결국 그녀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다만 용기가 나질 않아 잔에 가득한 샴페인을입으로 털어 넣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한 잔 더. 그럼에도 부족해 두 잔 더.
갑작스런 폭주(暴酒)에 주변 사람들이 의아한 기색으로 쳐다보지만 상관 없다.
지금 나에게 유의미한 존재는, 오직 저 남자 뿐이니까.
*
"오빠. 혹시 세정 언니랑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유아는 결국 매니저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힐끔거리는 유세정을 더 이상은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매니저, 김윤재는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오늘 처음 봤어.“
물론 유아로서는 쉬이 납득하지 못했다. 유세정은 아직까지도 이쪽을 힐끗힐끗 바라보고 있는데, 어찌 아무런 일도 없었다 단정내릴 수 있겠는가. 필히 둘 중 한명이 무슨 잘못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무슨 잘못이라도 했다던가.“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아. 아까 인사할 때 그냥 고개만 까딱여서 그런가?“
"앗? 목례만 한거야? 건방지게?!“
유아가 화들짝 놀라 김윤재의 팔을 우악스레 끌어당겼다.
순간 유세정의 시선이 한층 더 진해진다. 이번에는 눈빛으로 피부를 찌르는 듯하다.
"그럼 뭐, 어떻게 해야 되는데. 90도로 박아야 돼?“
"아니······ 90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60도는 해줄 수는 있었잖어.“
"그런가? ······아니 근데. 유세정이 그렇게 속 좁은 여자는 아닐 거 아냐.“
"어, 어허! 이 남정네가 지금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유아는 황급히 그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곤 혹시라도 들었을까 싶어 주변을 힐끔 둘러보았다.
"으억.“
역시나, 유세정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다. 심지어 입술까지 꽉 깨물고서!
"······도망가자 일단.“
"뭐? 왜?“
"난 아직 오빠를 잃을 수 없어서 그래.“
"아니, 무슨······.“
결국 유아는 김윤재를 이끌고 황급히 파티장을 도망가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그들이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을, 유세정은 하염없이 바라보는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로 넉 잔만 더 마시면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아······."
그녀는 쓰라리기만 하고 취하지는 않는 속을 원망하며 깊은 탄식을 뿜어냈다.
*
그날 밤.
홀로 파티장을 빠져나온 유세정은 단단히 결심하고서 릴리아를 찾아갔다. 이제는정말, 정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죽었다고 한다면 마지막 희망까지 스러지게 되니 그저 기다리기만했던 것인데, 당장 오늘 너무나도 김세진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 이상 어찌 참으란 말인가.
그리고 릴리아는 대단한 결기를 가지고 찾아온 유세정이 곤혹스러웠다.
그간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세진 씨의 뜻이라며 함구했던 릴리아였지만, 그러나 유세정의 울음기 섞인 전말을 듣고는 결국 모든 진실을 알려주기로 결심했다.
릴리아 또한 유세정의 말에 그가 '지구로부터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릴리아는 모든 것을 가감없이 말해주었다.
그가 여태 거쳐왔던 세계를, 우리를 지켜내기 위해 견뎌내고 짊어졌던 인내와 고행의 길을,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했던 이유까지도.
감히 성자라고 분류하여도 부족함이 없는 그의 무거운 진실 앞에 유세정은 온몸이 짓눌려,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만약 그 남자가 정말 세진 씨라면, 지구가 그분에게 감사와 보답을 해준 것이겠지요. 특성을 회수하는 것을 넘어, 기억까지 앗아가 평범한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릴리아는 나름대로 김세진을 찾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정보원들의 말로는-그와 비슷한 인상의 남자는 없었다. 허나 유세정의 말대로 특성이 생기기 전으로 회귀하였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니, 어쩌면 지구가 직접 새로운 몸을 만들어서그를 생환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되겠지.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요? 그 남자가 김세진이면요? 저는······“
"그 사람이 세진 씨가 맞다 하더라도, 또 아니더라도. 힘든 일이 될 거예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방구야! 알아 듣게 좀 좀 말해봐요!“
유세정은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고, 릴리아는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그가 세진 씨가 아니라면 정말 아닌 것이고, 맞다 하더라도 문제가 많아요.600년 가까이 살아온 사람이 기억을 되찾는다면, 그 전과 똑같은 마음을 유지하고 있을까요? 심지어 그 분의 전생은 '바하무트'로서 존재 자체가 격상되었어요. 어쩌면 신과 다를 바 없게 되셨던 것이죠.“
─기억을 되찾으신다면, 그분에게는 우리가 개미처럼 보이지는 않을까요. 릴리아는 씁쓸하게 덧붙였다.
유세정은 차마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억지로나마 우기고 싶은 건 많았다.
그러나 목이 메어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머리는 아찔하게 아파 가장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오히려 현실 보다 더 현실같고, 심장에 비수처럼 꽂히는 릴리아의 말은 겁이 났다. 두려웠다.
결국 그녀는 전신을 수장시킬 듯 덮쳐오는 감정의 해일을 견뎌내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참동안이나 꺽꺽대며 신음 비슷한 울음을 흘렸다.
* * * *
8월 19일.
처음에는 절망 뿐이었다. 그러나 애써 정신줄을 부여잡고 꽤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았다. 체감 상으로는 일 년, 그러나 실제로는 한 달.
누군가 본다면 스토커라 매도할 만한 집착이었지만, 그만큼 하루하루가 피말리는 나날들이어서 그랬다.
매일 밤 잠에 들면 그가 평소처럼 다가와 웃어주는 단꿈과, 그가 기억을 채 되찾기 전에 유아라는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악몽을 동시에 꾸었다.
그렇게 죽을 것처럼 시달리다가 결국 참을 수 없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게 된 게, 바로 오늘.
한성 씨에게 부탁하여 그와의 독대를 추진했다. 그는 엔터사업에 종사하고, 나는 몬스터 엔터의 대주주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8월 19일, 오후 5시 47분.
그와 만나기로 약속한 6시까지는 13분이 남았다.
초조함은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어느정도 무마하고, 불안감은 다리를 떨면서 미약하게나마 해소시킨다.
그리고 핸드폰 액정이 6:00을 표시했을 때.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순간 정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욥!“
아차, 목소리가 너무 큰가. 바보같은 실수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져온다. 하지만 여기서 기절해버리면 안 된다······ 필사적으로 정신력을 발휘해 의자를 가리켰다.
"······?“
"아, 앉으세요. 어서."
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방안에 흐르는 3초의 침묵을 견딜 수 없어, 나는 차와 다과가 놓인 집무책상으로 걸어갔다.
"차 드시겠어요?"
"예? 아니······.“
"드세요."
막무가내로 내려놓았다. 어쩔 수 없지만, 지금은 심박수가 말이 아니라 정상적인 행동이 불가능하거든요.
"아··· 예, 뭐."
차와 다과를 힐끔거리는 그를 지긋이 관찰한다. 내 뒷목에 고였던 식은땀이 이제는 등골로 흘러내렸다.
지금 이 상황은 사실 하나의 판별과정이었다.
사람은 기억이 변하더라도 몸에 베인 습관은 사라지지 않고, 그와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나는 그의 모든 것들을 절실하게 기억한다······.
찰나, 등골에 전기가 파르르 올랐다.
찻잔을 쥐는 자세, 다과를 먹는 모습.
확신했다.
이 남자는, 김세진이다.
"저,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김윤재입니다만.“
물론 이름은 다르겠지. 하지만 이 남자는 김세진이다. 나를 향해 비스듬히 허리만튼 자세, 어색할 땐 엄지손톱을 긁적이는 버릇, 이따금씩 머리를 쓸어 넘기는 행위까지.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서 참으로 쌩뚱맞게 묻고 말았다.
"저 모르시겠어요?“
"네?“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너무 귀여워서 껴안아주고 싶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저, 모르시겠어요? 저요. 유세정이요.“
"······아, 예. 저, 알긴 하죠. 테레비에 많이 나오시니까.“
"······그것 뿐?“
시야가 흐릿해졌다. 아무래도 눈가에 눈물이 맺힌 것 같은데 훔쳐낼 수가 없다. 손에 힘이 풀려버려서.
그런데 뒤이어 머리에 박힌 나사까지 풀려버렸는지, 이후엔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 머릿속에 남아있질 않다. 아마도 바보처럼 울면서 '저 아시냐고요' 라고만 반복해서 물었을 걸로 추정될 뿐.
어쨌든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는 떠나가고 없었다. 그게 왠지 모르게 더 슬퍼, 홀로 남아 처량하게 울었다. 정말 목청껏 흐느꼈다.
*
유세정은 퉁퉁 부운 얼굴로 더 몬스터 회의를 소집했다. 마음을 속시원히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길드원들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복잡한 상황이네······ 그 사람이 세진 씨라는 건 확실한 거니?“
"네. 거의 확실해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좀 알아봐야 겠지만요.“
김유린의 물음에 유세정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시원하게 울고 나니 맘이 조금 편안해진 듯.
"그런데, 뭐 어때? 계속 들이대면 되는 거지. 어차피 세정이 너는 쌩판 모르는 남자라도 충분히 꼬실 수 있잖아. 그렇게 먼저 꼬시고 사랑하다 보면 차차 기억이 살아나지 않겠어?“
지금 상황에서는 그나마 가장 명쾌한 이혜린의 해답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말에 뭔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유세정 뿐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흠.“
"어······."
김유린과 하젤린. 그 둘은 생각에 잠긴 듯 다소 심각한 얼굴로 턱을 쓸어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그에 유세정은 황급히 식탁을 팡팡 두드렸다. 배신감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이상한 생각 하지마요들. 경고했어요!“
"내, 내가 뭐슨 이상한 생각을 했다구 그러니······?“
하젤린은 유세정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아주아주 수상한 행동이어서 유세정은 그것을 재빨리 낚아챘다.
"나도. 그냥 어떻게 세진 씨 기억을 되찾을까 생각한거야.“
그렇게 말하는 김유린의 손등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
유세정은 미간을 팔자로 좁히고서 그들을 쏘아보았다.
그때였다.
"야! 찾았어!“
바토리가 문을 거칠게부수며 쳐들어왔다.
"찾았다고!“
"······뭐야.“
시선의 집중에 바토리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선언했다.
"꽤나 특이한 능력이 있는 마인 한 놈을 잡았거든? 그 놈이 차원으로 흘러간 마나의 흐름을 추적할 수 잇는데······.“
"혹시, 김윤재요? 로센 엔터에서 매니저 하는 사람?“
순간 바토리의 얼굴이 돌처럼 굳는다.
"······니들은 그걸 어떻게 알았니?"
회의장에 모인 모두가 살포시 웃음을 지었고, 유세정은 직접 다가가 바토리의 손을 꼬옥 붙들어주었다.
"고마워요, 확신을 주셔서."
* * *
편의점에서 일용할 양식을 사오는 길, 김윤재는 아파트의 주차장에 가득한 이삿짐을 보곤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 아파트, 요즘 들어 고급 이웃주민이 상당히 많아졌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하젤린과 김유린, 주지혁과 이혜린, 그리고 김선호와 로스한델을 비롯한 더 몬스터의 단원들이 이 아파트로 우르르 이사를 왔다는 뜻이다.
물론 불만 따윈 없다. 대출까지 받아서 산 집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때 아닌 시세차익을 거두고 있으니 몹시 만족할 뿐. 덕분에 매일매일 헤실헤실 웃고 다닌다.
김윤재는 하늘 높이 쌓인 이삿짐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더욱 위로 올렸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게 맑은 여름 하늘, 참 아름답다.
몇 년 전에는 저게 어둠으로 뒤덮여 꼼짝없이 멸망할 참이었다고 하던데.
"저 하늘을 지키기 위해, 바하무트는 자신을 희생한 거예요.“
그때, 누군가의 고운 목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고개를 돌리니 유세정이었다. 아, 저 여자도 이사왔다고 했지. 언론에서 화룡정점이라며 떠들던 걸 본 적 있다.
"바하무트요?"
"네.“
"······하하."
윤재는 그저 웃었다. 어차피 모두 기억에 없는 것들 뿐이다. 분명 봤긴 했을 텐데,아니 실제로 그에 휘말려서 기억이 없어진 것일텐데, 머릿속은 백짓장처럼 새하얗다. 참 답답하고도 외로운 일이다.
씁쓸하게 웃는 그에게, 유세정은 천천히 다가와서 물었다.
"윤재 씨, 여기서 사세요?“
"아, 예. 그런데요.“
"우연이네요. 저도 여기로 이사왔는데.“
유세정은 뒤축에 있는 이삿짐을 가리키며 방긋 웃었다.
"······그래요?“
"네. 그래요."
그녀는 자신을 무심히 보는 김윤재. 아니 김세진을 바라보며 굳게 다짐했다.
그가 과거에 쌓아올렸던 모든 추억을 잃어 이제 더 이상 김세진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그를 되찾을 것이라고.
그리고 오늘 유세정은 그에게 벌일 첫 번째 수작(?)을 위해, 어머님의 힘까지 빌려왔다. 어차피 곧 시어머님이 되실 분이었으니까, 라고 합리화를 하며 수소문 끝에납골당을 찾아 시어머님과 남편 될 사람이 어렸을적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을 가져온 것이다.
"흐, 흐흠."
그녀는 속으로 사죄에 사죄를 거듭하며, 실수인 척 그의 앞을 지나가다 액자를 떨어트렸다. 투쿵- 혹시라도 깨지지는 않았을까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렇게 한 3초 정도 짐짓 모르쇠하고 있다보니, 역시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이거······.“
그는 액자를 주섬주섬 줍더니 이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디, 부디······
그러나 의미심장한 눈빛도 잠시 뿐, 그는 고개를 한번 갸우뚱 하고는 다시 액자를건넬 뿐이었다.
하지만 세정은 그걸로 만족했다. 그의 얼굴에 잠시나마 떠오른 의아함과 기시감, 그거면 충분하다. 가능성은 확실하다.
"······들어가시던 길인 것 같은데, 함께 가실까요?“
"예? 아, 뭐······.“
그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저벅저벅- 엘리베이터까지, 끽해봤자 10초에 불과할 시간이 너무나도 행복하다.
손도 잡고 싶지만, 욕심은 내지 말자. 그저 나란히 걸어 걷자.
"근데 이삿짐을 저렇게 아무렇게나 밖에 놔둬도 돼요?“
"네.“
그의 말에 세정은 액자, 정확히는 그 속에 환히 웃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
"저는······ 이거 하나만 있으면 되거든요."
굳이 그가 기억을 되찾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렇다면 기다림으로 점철되었던 당신의 삶보다 더욱 새롭고 아름다우며 즐거운 추억을, 함께 쌓아가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되도록, 비록 당신의 기다림에 비하면 너무나도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인내겠지만, 이번에는 내가 피나도록 노력하고 기다릴테니까.
"들어가요~"
"······아, 예."
그의 옆모습을 수줍게 바라보며 두 주먹을 꽉 쥔다.
두려움은 없고 겁도 나지 않는다. 당신과의 미래를 낙관하며 그저 웃을 뿐.
이제 하늘은 파랗게 개였다.
그 맑음 속에서 환하게 웃는 태양은, 두 번 다시 어둠으로 물드는 일 없이 우리에게 한없이 따스한 햇볕을 비쳐주겠지.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언젠가 우리가 함께 바라 마지않던 행복이 찾아오겠지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햇살처럼 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