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필로그. 재회 (1) >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의 정오, 세 번 걸을 때마다 한 방울의 땀이 흐르는 최악의 날씨. 열풍에 스며든 습기와 지치지 않고 쨍쨍거리는 태양은 사뭇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티 한 점 없이 오직 맑기만 한 하늘 아래, 나는 벽돌을 내려놓으며 땀을 닦았다.
"어이 김씨!“
그러나 짧은 휴식도 잠시. 반장 특유의 울림 큰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 작업장에 김씨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가 부르는 김씨가 누구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안다.
"예예. 갑니다 가요.“
투덜거릴 여력도 없어 반장에게 걸어갔다. 그는 트럭에 쌓인 철근을 운반하라고 했다. 군말 없이, 트럭에 쌓인 수십의 철근을 한꺼번에 들고 옮겼다. 일반인이 본다면 기예 혹은 차력이라 부를 광경이건만, 노가다판의 사람들은 익숙한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역시 힘이 장사라니까."
반장은 만족스러워하며 내 어깨를 두들겼다. 그 가벼운 접촉면에 열기가 일어 순간 기분이 팍 상했다.
노가다는 힘들다. 솔직히 좆같다. 특히 여름에는 그 좆같음이 더욱 심해진다. 땀은 끝없이 흘러 끈적끈적 들러붙고, 냄새는 오물이 가득한 하수구보다 퀴퀴하고 역하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머리통에는 통 들은 게 없으니 무식하게 쎈 힘이라도 활용하는 수 밖에.
"너는 참, 시기를 잘못 타고나도 너~무 잘못 타고났어. 적어도 20년 전에만 태어났으면 평생 먹고 살 돈을 벌어놨을 텐데.“
"기사 말입니까?“
"기사든 용병이든. 뭐가 됐든."
반장의 말에 살풋 웃었다. 나는 그저 노가다판의 다른 사람들보다 하루 일당을 조금 더 받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애초부터 기사나 용병 노릇을 할 만큼 어마무시한 힘도 아니고.
"근데 기억은 아직인가?"
반장이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병실에서 깨어나기 이전의 기억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내 몸이 부산 앞바다 위를 떠도는 것을 우연찮게 누군가가 발견하여 병원으로 데리고 갔고, 몇 가지 심문과 상담 끝에 새로운 신원을 발급받았을 뿐.
평소라면 조금은 특별하게 보도되었을 괴사건이지만, '그 날' 이후로는 나보다 더한 처지의 사람들이 널렸기에 별다른 보도도 없었다.
"아쉽구만. 그 힘이면 뭔가 특별한 일을 했을 것 같은데."
"그만큼 대단한 건 절대 아니니까 아쉬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힘은 둘째치고 너무 성실해서 그래. 내 딸이라도 소개시켜 주고 싶을 정돈데.“
"······노가다꾼 소개시켜줘서 뭐합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혹했다. 혹시 사진이라도 보여주려나 싶어 괜히 뜸을 들이는데,
"긍까 말이야. 그냥 해 본 말이었다. 하하하하.“
······빌어먹을 반장. 그래도 애써 웃었다.
"하. 하. 하.“
"그래도 내가 본 사람 중에는 네가 최고로 몸 좋고, 힘도 억세. 노가다판에 썩기는 아쉽단 말이지.“
"저같이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을 누가 씁니까.“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신장. 지문조회를 해도 없다. 홍채인식을 해도 없다. 나는 원래부터 없던 사람인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그래도 말이다······ 아, 맞다. 이번에 경호업체에서 신입 구하는데 한번 지원해봐. 힘보고 뽑는거면 너는 무조건 당선이니까.“
"그게 뭐라고 당선까지······.“
"주 5일 월 300인데?"
"어디, 공문 있습니까?“
주 5일에 300이면 할 만하다. 휴일에 다른 알바를 할 수도 있는 것도 한 이유이지만, 무엇보다 일단 호적상으로는 나이가 25살인데 언제까지고 노가다판만 전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자.“
반장이 건넨 전단지를 훑으며 입꼬리를 슬며시 비틀어올렸다.
"주 5일 월 300이면, 나와봤자 주말 뿐인데 괜찮습니까?“
"허허. 창창한 사내 앞길 막으면 쓰나. 나중에 양복 입고 오면 내 딸한테 의향은 한번 물어보마.“
"필요 없습니다. 보나마나 반장님 닮았을 것 같거든요.“
"뭐 이새꺄? 너 보면 깜짝 놀랄······“
딸을 들먹거리자 갑자기 광포해진 반장님의 난동은, 그저 웃으며 흘려보냈다.
*
"우리 경호 업체는 용병과는 다르다! 돈보다 충성을 ······“
면접관으로 보이는 덩치 큰 사내는 면접이랍시고 군기를 바싹 잡았다. 고함, 고함, 그리고 또 고함.
다른 면접자들에게는 아주 잘 먹히는지 몸을 파르르 떨고 있지만, 이상하게 나는 별로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병아리가 삐약거리는 것 같아 귀여웠다.
"알겠냐!“
"예!“
"대답 더 크게!“
"예에에엑!“
그제서야 사내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을 이었다.
"우선, 경호라고 해서 몸이 좋으면 장땡이란 건 착각이다. 예를 들겠다. 어이, 너.“
사내는 나를 가리켰다. 예시를 나로 들겠다는 것이었기에 내가 되었든, 사내가 되었든 둘 중 하나는 운이 지지리도 없게 될 터였다.
"예."
"나와.“
"······예.“
"나한테 한번 달려들어봐."
사내의 말대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향해 발을 굴렀다. 내가 파고든 순간 그는 내 허리를 붙잡고 그대로 들어올리려 했으나······
"으, 으어억!“
몸이 기억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나는 사내의 허리를 붙잡고 몸을 통째로 들어올린 뒤 바닥에 내다꽂았다.
쾅!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는 동공이 풀린 채 기절했고, 그 다음에는 적막이 있었다.
"허.."
"미친."
아무래도 사내는 이 업체 최고 에이스였는지 면접을 구경하던 다른 직원들도 입을 떡 벌렸다.
그렇게 나는 비정규직이나마 취업을 성공했다.
*
주 5일 월 300은 새빨간 개구라였다. 무려 한달 동안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출근하며 현장을 구르고서도 월급은 220.생각보다 무척 적었지만 그래도 예상 외로 일이 재미있어서 계속했다. 워낙 몸이 튼튼하여 잠도 적고 병도 없었다는 것도 하나의이유였다.
투척된 계란으로부터 국회의원을 경호해준 적도 있었고, 별안간 행사 무대 위로 난입하려는 남성을 제지한 적도 있었으며, 걸그룹을 쫓아다니던 사생팬-이라 쓰고 스토커라 읽는다-을 쫓아내준 적도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걸그룹을 구해준 일이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꿈인지 생신지 당사자인 여자애가 내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리고는 내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매니저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건넸다. '유아'라는 예명의 예쁘장한 여자애였다.
"생각 없습니다. 어차피······.“
"대표님한테 물어보니까 월 350정도는 드릴 수 있대요.“
"······매니저 월급이 왜 그렇게 높아요?“
"일도 잘하실 것 같고, 뭣보다 제가 대표님한테 부탁했거든요.“
아직 막 뜨기 시작한 걸그룹이 무슨 입김이 있다고······ 그러나 이어진 말이 단박에 이해시켜주었다.
"대표님이 제 삼촌이세요.“
그렇다면 이 줄은 잡아야겠지.
"어차피 곧 그만두려고 했으니까, 뭐. 어차피. 1년 굴러도 250에서 동결인데, 나이를 생각하면. 예. 아시죠? 나같은 남자들 사정.“
"몇 살이신데요?“
"······예?“
"나이요."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기억이 안나 지갑을 꺼내서 확인해야만 했다.
"25살입니다.“
"풋. 무슨 자기 나이를 다 확인하고 그래요?"
대충 웃으며 얼버무렸다.
*
어쨌든 그렇게 경호원에서 걸그룹의 매니저로 이직한 지, 자그마치 2년이 흘렀다.
그 동안 그래도 일을 아주 못한 건 아니었다. 운전재능은 있는 듯 면허를 따자마자 회사 전체가 감탄하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었다. 또 운이 참 좋게도 물어오는 방송 족족 대박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덕분에 2년 만에 실장 겸 매니저로 승진까지 했다.
일은 여전히 바빴지만 늘어나는 월급으로 흡족스런 삶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오빠. 오늘 나랑 파티 같이갈래?“
그러던 어느 날.
유아의 솔로앨범 음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유아가 볼에 홍조를 띄우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파티?“
"오늘 엄청 중요한 파티 있거든. 운 좋게 초대받았어.“
"뭔데?“
"유세정 언니 생일파티.“
"······유세정?“
뭔가 익숙한 이름이다. 아니, 익숙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인데.
유아는 무척이나 설레이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응. 알지? 우연찮게 예능 한번 했었거든! 그때 생일파티를 하신다길래, 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초대장 주셨어! 근데 하나 더 있거든? 갈거지? 나랑 같이 가줄거지 오빠?“
"..흠."
고민하는 척 했지만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네가 가라면 가야지.“
난리 피우는 유아의 모습이 귀여워, 웃으며 엑셀을 밟았다.
* * *
TM이 자랑하는 크루즈의 선상에는 파티가 한창이었다. 화려한 조명과 각지 특산의 산해진미, 고급스런 선율과 정중한 웨이터들. 참석한 하객들 전부가 경탄을 마지않는 이 모든 파티는, 고작 한 사람의 생일을 위해 준비되었다.
새벽의 차기 후계자이자 새벽&TM마탑의 탑장, 유세정. 그녀는 충분히 이런 성대한 자리를 생일로 삼을 만한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갖춘 여인이다.
"그럼 이제 세정이도 곧 있으면 서른이네?“
"와, 그러네요?“
하젤린의 말에 유세정은 짐짓 놀라워하며 손뼉을 쳤다. 그 틈을 유백송이 끼어들었다.
"너는 곧 마흔이고.“
갑작스런 기습에 하젤린이 미간을 좁힌다.
"······너도 마흔이잖아.“
"우리 일족 나이로는 아니야.“
"그렇게 따지면 나도 아니거든?“
"엘프는 오래 못 살잖아.“
"120까진 무리 없이 살아.“
엘프의 수명은 인간의 1.5배 가량이다. 허나 미의 종족이라는 명성 답게, 수명이 다하는 그 순간에도 엘프의 노화는 인간의 반에 반도 못 미친다. 주름 잡힌 엘프는 얼마 가지 못해 죽는다, 라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어쩌라고 40대.“
"······쫑알쫑알 시끄럽다 고양아."
유백송과 하젤린은 서로를 노려보며 신경전을 벌인다.
까칠하고 유치하기만 한 두 사람의 만담도, 그러나 멀리서 관찰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고상한 대화를 나누는 사회지도층의 경외 어린 모습으로 비쳐질 뿐이었다.
"나이로 따지자면 제일 문제는 우리 유린 대장님이죠. 하젤린 언니랑 나이차도 별로 안 나는데, 엘프도 수인도 아니라 인간이니까.“
이혜린이 후훗 웃으며 곁에서 음식을 게걸스레 탐하던 김유린을 끌어들였다. 화들짝 놀란 유린은 체한 듯 가슴을 두드리며 기침했다.
"······켁. 거, 거기서 갑자기 왜 내 얘기가 나와.“
"걱정돼서 그러죠. 결혼은 몰라도, 연애는 언제 하실 거예요? 나이는 늙어만 가시는데."
불만스럽지만 차마 반박할 논거가 없어 유린은 말 없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그때 주지혁이 헛기침을 험험하며 말했다.
"그래도 대장님은 여전히 아름다우시니까, 괜찮으실겁니다.“
"······뭐라고? 저기요. 누구 남편이야 당신?“
"아니, 그냥······.“
"나 말고는 눈길도 주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이혜린은 주지혁의 양 볼을 꽉잡고서 자신에게로 고정했다.
유세정은 그 둘의 모습을 보며 아늑하고도 슬픈 과거를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익숙한 기척이 느껴져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왜인지 모르게 익숙한 남자가 있었다. 이런 파티가 처음인 듯 맹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남자.
유세정은 무언가 홀린 듯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잡힐 듯 가까워 졌을 때.
"오빠~“
누군가가 다가와 그의 손을 낚아챘다. 유세정은 흠칫 놀라 뒤로 두어발자국 물러났다. 그 유별난 인기척에 두 사람이 그녀를 발견했다.
"어, 세정 언니!“
여자는 반갑게 인사했다. '그'를 닮은 남자는 그저 가벼운 목례를 했다.
"어, 어······"
"무슨 일이세요?“
”아, 아니. 아니에요. 그냥······.“
"뭐에요. 왜 갑자기 존댓말······.“"
"그, 아무것도 아니야. 바, 방해해서 미안.“
하지만 유세정은 감히 아무런 물음도 못하고, 다만 도망치듯 그들에게서 멀어져야만 했다.
< 에필로그. 재회 (1)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