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그 끝에. (3) >
수십억의 시민들은 드높게 솟아오른 흉물의 존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육안, 또는 전파를 통해.
무엇보다도 압도적이고 거대한 공포를 앞에 두고서는 흔히들 종말의 전조라 일컫는 현상조차 없었다. 예컨대 약탈과 폭력과 강간 등이 자행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단지 모두 절망에 젖은 눈동자로 놈을 바라보기만 했다. 군과 기사와 마법사가 전혀 통용되지 않고, 그저 꼿꼿이 서서 언젠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놈을.
[현재 1세대 이주민들의 증언으로 이 존재가 '차원 포식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이 존재는 '성운 포식자'보다는 아랫 격이지만 여태 수많은 세계를 파괴해 왔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뉴스는 충실히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이 피를 토해내는 심정으로 실어나르는 한 토막의 정보였으나, 다만 전장에서는 절망어린 조사(弔詞) 일 뿐이었다.
"상황은? 저 놈에게 총 공세를 퍼부을 시간이 있나?“
총사령관 김현석은 전신이 피와 짓물로 범벅이 된 채 부하기사에게 물었다.
"균열에서 범람한 몬스터와, 저 놈 때문에 폭주하는 몬스터들을 막는 것만으로도벅찹니다.“
"······하."
김현석은 낮은 침음을 흘렸다. 사실 그도 짐작했을 터였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다른 몬스터의 폭주를 제압하거나, 포식자를 지켜보는 것 뿐이란 것을.
그러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애써 전선을 지켜오던 부대는 놈의 주먹질 한번에 갈려나갔고, 절반 이상의 기사는 이미 놈이 보인 압도적인 무력에 제정신이 나가 있다. 닷새 동안 잠을 자지 못한 군과 기사의 피로도는 극에 달했으며, 도망가는 군인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은 없다.
"..그래도 전선은 유지해라."
그러나 김현석은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기사와 군대는 시민들의 심리적 마지노선. 헌데 그런 우리가 물러선다면 국가는, 더 나아가 세계는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다. 그들이 여태 우리에게 베푼 아량과 사랑을 갚기 위해서라도, 물러설 수는 없는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부하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갔다.
김현석은 목을 끝까지 올려도 온전히 보이지 않는 놈을 바라보며 괜시리 검을 움켜쥐어보았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것 뿐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힘의 부족을 절감했다.
시간은 정오가 되었으나 해는 여전히 흑운에 가려 빛을 잃은 채.
한국 최고의 기사가 자신에게 도리가 없음을 통탄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뭔가 기묘하다고 밖에 형용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저거 뭐야.“
처음 시작은 누군가의 멍한 읊조림, 그 뿐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허나 그는 무관심에 포기하지 않고 제 옆의 기사를 팔꿈치로 두드렸다.
심신이 피폐한 그 기사는 짜증을 낼 여력도 없어, 한참을 시달리다가 결국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기사가 똑같은 행동을 자기 옆의 기사에게 했다.
그렇게 기사들의 시선이 점차 하늘로 올라갔다.
시간이 지나자 옆사람을 찌르거나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마지막에는 카메라의 렌즈까지 그 존재를 담았다.
마치 짙게 드리운 암운을 헤쳐내기라도 하려는 듯 휘몰아치는 질풍 속에서, 신비한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결하고 고결한 청색 날개를 흐트러뜨리며, 짙고 고고한 눈동자로 세상을 굽어보며, 강맹하고도 굳게 담긴 아가리로 포식자를 겨냥한다.
기사와 병사와 시민들은 그 존재의 정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짐작은 되었다.
그 존재는, 실로 전설 속에서나 듣고 보았던 용의 형상을 빼다 닮아 있었다.
"무슨······."
기사들이 지금의 상황에 기뻐해야할지,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도 놓아버려야 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그 존재는 채 깨어나지 않은 포식자에게로 돌격했다.
질주가 만들어낸 가공할만한 공기압과 소음에 세상이 잠시 어그러졌다.
시간축을 뒤틀어 현재가 아닌 과거에 도착한 것만 같은 찰나, 용은 꼬리로 포식자의 허리를 감싸쥐고 아가리에 마나의 입자를 모았다.
순간 그 동안 고고하리만치 행동이 없던 포식자가 다급히 손을 움직여 바하무트의 꼬리를 부여잡았다.
그러나 이미 한 발 늦은 대응이었다.
특별한 효과음 없이 쏘아진 흑색의 브레스는 포식자의 머리를 앗아갔다.
"뭐······."
"허······?"
별 짓을 다 해도 상처 하나 내지 못했었는데, 기사들은 텅 비어버린 포식자의 목 위를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
하지만 포식자는 죽지 않았다. 머리를 잃고서도 한 손과 두 다리를 움직이며 처절하게 반항했다.
바야흐로 대지를 진동시키는 치열한 육탄전의 시작이었다.
주먹과 앞발, 꼬리와 다리가 오고가는 기이한 격투가 펼쳐졌다.
그러나 머리를 잃은 포식자는 앞을 보지 못하여 그저 마구잡이로 팔과 다리를 휘두르기만 할 뿐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날개를 제어하기 힘들었던 김세진은 눈 먼 주먹에 얻어맞아 저 멀리 튕겨나가기도 하고, 다리에 복부가 채이기도 했다.
저 빌어먹을 것에 마법으로 대응하겠노라, 결심한 건 검은 피를 토하고 나서였다.
하지만 포식자는 만만치 않았다. 놈은 마법의 기운을 느끼자 역시 같은 마법으로 맞대응하였다. 다만 놈의 마법은 바하무트에 한하지 않았다.
대상은 전 세계. 목적은 오로지 파괴 뿐.
바하무트는 황급히 놈에게 브레스를 뿜어냈다. 그러나 놈의 손아귀에서 뿜어지는피보라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 결국 다시 육탄전을 재개할 수 밖에 없었다. 놈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전보다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머리가 날아간 포식자과, 몸이 온전한 바하무트.
애초부터 승자가 명확한 싸움이었다.
놈은 시간이 지날수록 판단력을 잃었고, 결국에는 마법을 사용하는 법도 잊어버린 듯 두 팔과 손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다 바하무트의 브레스에 심장을 꿰뚫리고 말았다.
대적할 자가 없을 것처럼 보였던 포식자는 그렇게, 짐승을 연상시키는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검은 안개와 함께 흩어졌다.
그 이후에는 적막이 있었다.
비명도, 환호도, 고함도, 찬송도 없었다.
생중계를 진행하던 리포터도, 그 소식을 다시 시민들에게 전하던 앵커도, 그것을함께 감상하던 시민들도 마찬가였다.
아마 이곳에 모인 수만의 군중들은 지금이 차라리 꿈이라고 생각할 만큼 비현실적이고 고요한 침묵이었다.
그 암묵 속에서 바하무트는 천천히 날았다.
전신에서 피를 철철 쏟아내며, 자신의 몸을 치유해 줄 동해 쪽으로 필사적으로 날았다.
그리고 그가 동녘으로 천천히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결사대(決死隊)들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존재가 쓰러진 곳으로 다가갔다.
놈이 발을 디뎠던 곳엔 커다란 구멍만 남아있을 뿐,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이것이 현실임을 느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하늘이 개이며 여러 줄기의 서광이 지상을 찬란하게 비추었다.
그날, 근 닷새만에 본 태양의 아름다움을, 세계는 결코 잊지 못할 터였다.
* * *
끝내고 나서도 뭐가 뭔지 모르겠는, 허무하고도 버거운 싸움이었다.
그렇기에 죽음이 가득한 몸으로 바다 깊이 가라앉으면서도 아무런 감회가 없었다.
다만 지구의 고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감사의 의미란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그 감사를 말미암아 확신했다생명은 살고 싶어 한다.
인간도, 짐승도, 몬스터도. 그렇기에 '지구' 또한 마찬가지다.
지구는 살고 싶어 했다. 포식자로부터 자신의 구원을 바랐다. 그래서 일부러 특성이란걸 만들어냈다. 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하던, '균열이 특성을 만들어냈다'는 인과는 사실 그 반대였던 것이다.
아주 희박한 생존의 가능성이라도 만들어내기 위한 발버둥의 산물. '뭐든 하나라도 얻어 걸려라'는 무책임한 정신이 무한대로 발휘된 그것이 바로, 특성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언젠가 반드시 깨어날 것이다.
심해 속에서도 내 몸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은혜가 그것을 증명한다.
'가이아'의 부탁을 완수했다는 문장이 그 증거다.
이번에도 그저, 잠시 깊은 잠에 드는 것 뿐이다.
그러니 이제 곧 다시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렇게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 * * * *
전설 속 존재 '바하무트'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다.
대재앙 차원포식자는 바하무트에게 패배하였고, 세계 곳곳에 열린 균열들은 모두 소멸했다.
그러나 동시에 미진한 혼란도 일었다. '특성'이란게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특별했으나 이제는 평범한 존재가 된 몇몇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거나 꿈속을 헤매며 괴로워해야만 했다.
물론 주지혁과 유세정을 비롯한, '특성이 자아를 규정하는 모든 것'이 아니었던 사람들에게는 별 문제가 없었다.
반면 몬스터와 마나는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하지만 몬스터의 경우에는 이제 더 이상 외부의 충원 없이 생존하고 번식하고 절멸하는 야생동물의 섭리를 따라야만 했다. 물론 몬스터가 없어지면 전세계는 꽤나 큰 타격을 받기에 멸종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에게 사육받는 삶을 살아가겠지.
대재앙 이후 1개월이 지나자 바하무트 교(敎)가 생겨났다. 어느 모로 보나 명확했던 멸망의 위기에서 실증적인 도움을 주지 않은 기존 종교에의 불신과 불만, 그리고 때마침 등장한 바하무트의 추종자들 탓이었다.
기존 종교들은 나름대로 "우리의 신이 바하무트를 내려보냈다─" 는 변명을 하였지만, 일부를 제외한 현대인들은 그런 허무맹랑을 믿을 정도로 몽매하지 않았다.
그렇게 종교가 생기자 교단이 설립되었고, 이후에는 차원포식자를 무너뜨린 곳에 바하무트 교단의 최대 교회가 증축되었다. 그곳은 일종의 성지가 되어 세계 방방곡곡의 여러 교인들이 찾아와 순례 혹은 귀의를 했다.
정말 한 순간에 세계 최고의 종교 중 하나로 도약한 '바하무트 교'.
그 교단의 지도자는, 릴리아였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다른 여자가 더 좋아져서 도망간건지, 아니면 멸망에 지레 겁먹고 다른 세계로 이주한건지······
그나마 자세한 내용을 아는 사람은 바토리 같은데, 그녀는 대하기가 어려웠고 또 간신히 물어봐도 결코 내막을 알려주지 않았다.
원망할 대상도 없이 홀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고통이 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러나 언젠간 다시 모습을 보일 것이라 굳게 믿고 꿋꿋이 견뎌냈다.
그렇게 그가 없는 채로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더 몬스터의 정기모임날이 다가왔다. 그렇기에 한껏 치장하고서 찾아갔다.
'정기 모임에는 모든 단원이 참석해야 한다.'
자기가 직접 제창한 길드 유일의 규율을 자기가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원래는 매달 17일에 하기로 했는데 자기를 배려해서 매년으로 기한을 늘려준 거니까.
이번만큼은 꼭 오겠지.
7시에 열리는 모임이기에 6시 30분에 찾아갔다. 헌데 이미 모든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유린 언니, 하젤린 마탑주, 유백송 의원, 주지혁과 이혜린 부부, 바토리와 로스한델, 그리고 김선호와 나머지 신입멤버들까지.
모두 나를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주었다.
그곳에는 오직 한 명만 없었다.
"왔니?“
유린 언니가 먼저 물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네. 언니, 요즘 엄청 바쁘시다면서요? 스케쥴 내기 힘드셨을 텐데······ 와주셔서 고마워요.“
수가 한정된 몬스터가 이제 보이는 즉시 토벌해야 하는 존재에서 미래를 위해 목축해야 하는 존재로 격상되면서, 유린 언니는 기사의 일에 미련을 버렸다.
그리고 일단 연예계 쪽에 시선을 집중했다.
고정 예능만 서너 개를 성공시켰고, 연기자 데뷔 또한 성공적이었다.
그렇기에 요즘 '김유린'이라는 이름 석자는 기사보다 연예인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그만큼 연예 쪽 일로 공사가 다망하시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여전히 '오크 애호가'의 일만은 계속하고 계시다. 아닌 게 아니라 영웅오크들이 아직도 살아남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몬스터가 폭주하던 상황에서 도망치던 몇몇 시민들을 구해 부락지에 머물도록 하여, 아예 한국의 영물로서 자리를 잡아버렸지.
"그렇긴 한데, 이 모임은 꼭 나와야지.“
"아냐 세정아. 이 언니, 그 사람 오나 안오나 보러 온거야. 조심해야돼. 이 사람도너 못지 않게 보고싶어 했······.“
"어머. 무슨 소리니?“
이혜린이 놀리듯이 덧붙였지만, 기사로서의 무거운 책무에서 벗어나 느티나무같은 여유를 얻은 그녀에겐 먹히지 않았을 따름이다.
"하핫.. 그러는 혜린 언니는, 사랑하시느라 바쁠 줄 알았는데.“
이혜린과 주지혁 부부는 아마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부부일 것이다. 함께 하는 고정 프로그램만 두 개인데, 그 프로그램에서 선보이는 금실이 얼마나 닭살인지······
"사랑은 야외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잖아~"
뭔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하며, 이혜린은 주지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때 하젤린이 그런 둘을 불만스럽다는 듯 흘겨보고선 한탄하듯 읊조렸다.
"근데······ 오늘도 안오시려나? 한창 바쁜 마탑 일도 내팽개쳐두고 왔는데."
하젤린은 현재 세계 최고 마탑의 탑주로서 군림하고 있다.
기사와는 달리 몬스터가 사라지더라도 큰 효용을 발휘하는 마법은, 쇠락은커녕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였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파괴마법과 대중에게 도움을 주는 실용마법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던 마법사들이 이제 실용 쪽으로 완전히 치우쳤기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새벽&TM마탑은 자타공인 세계 최고가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방배동 마법사의 유산······ 은 아니고,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스물 여덟개의 기록물 대부분이 실용마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까지 광대했던 그 업적 덕분에, 홀연히 사라진 방배동 마법사의 이름은 이제 마법계에 영영 찾아오지 않을 불멸의 전설로 남았다.
그 과정에서 바토리가 살짝 불만어린 투로 말하긴 했다. 모두 자기 머릿속에 있던마법을 난잡하게 조잡한 것들 뿐이라며.
그때 유백송이 하젤린의 로브자락을 꾸깃 끌어당겼다.
"야, 나 선거자금 좀 대줘.“
"······내가 미쳤니. 고양이가 선거하는데 돈주게. 그리고 벌써 당선 됐잖아.“
"나중에 더 필요해. 지역구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아? 적어도 삼선은 해야 돼."
"그래도 아직 많이 남은거 아냐?"
"나는 보궐이라 1년 뒤에 다시 선거야."
가장 특이한 진로는 유백송이었다. 그녀는 무려 국회의원이 되었다. 게다가 언젠가부터 점점 커다래지던 그 야망은 드디어 숨길 수 없을 만큼 심상치 않아져, 파란 기왓집을 열망어린 눈으로 응시하는 일도 잦아졌다.
"얘. 내가 오늘 찍은 인터뷰 반응은 어때?"
한편 바토리는 그들에게는 전혀 관심없는 듯, 핸드폰만 보며 옆의 가신에게 물었다.
"좋습니다. 칭찬일색!"
"흐응."
로스한델의 힘찬 대답에 아주 살짝 만족한 듯 콧소리를 흘린다.
이쪽의 1년간 진로도 예상하기 무척 힘들었다. 바토리와 로스한델은, 그러니까 그 '바토리'가 뱀파이어 화합의 선두주자가 되었으니까.
처음에는 에밀리아와 바토리의 모습을 번갈아 활동했던 바토리였지만, 로스한델의 도움으로 바토리 이미지메이킹이 절묘하게 먹혀들어 이제는 아예 바토리로서만 활동하고 있다. 평화와 화해의 여신이라는,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과, 같은 뱀파이어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름으로.
"선호 씨는 오늘 무슨 일 없으셨어요?“
"아, 저는 뭐. 애기 보는 거 빼고는 한량이죠.“
그리고 김선호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이란성 쌍둥이를 낳았다. 적절하게 아들과 딸.
"선호 씨 애기 엄청 귀여워, 한번 보러가자.“
"······네."
이혜린의 말에 나는 여유롭게 웃었다.
그렇게 자유로운 수다가 시작되었다. 웨이터들은 진귀한 음식과 값비싼 술을 내왔고, 단원들은 대화가 비는 틈이 없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신입단원, TM의 진로, 새벽의 후계 등등······
그러나 처음 말고는 아무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모두가 모두를 위한 배려이기도 하였으며, 아직 희망과 기대가 남아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그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 말이다.
그렇게 단원들은 시덥잖고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한시간, 두시간, 세시간, 네시간······ 시간이 지나도 그들은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결국 자정이 넘어 하루가 지나버렸다.
이제 정기 모임 날은 끝났다.
그러므로 그와 만날 가능성도, '오늘은' 끊어졌다.
단원들은 슬픔을 애써 숨긴 채, 서로 간의 덕담을 남기며 헤어졌다.
눈물을 참았다는 것에, 스스로 대견해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텅 빈 집에서 느껴지는 으슬으슬한 한기에 결국 눈물을 쏟았다.
하루 일과의 끝에 그가 없다는 건 치명적인 괴로움이었다.
모든 잘해준 것들이, 잘해주지 못한 것들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그대의 얼굴을, 당신의 이름을 다시 한번 되뇌이고 싶은데.
그가 없어서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나도 괴로웠다.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울다 지쳐 잠들었다.
그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떠나서,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는 애초에 없던 사람이 아니기에, 만약 그렇더라도 이미 가슴 속 절절히박힌 그의 모습은 도저히 잊혀질 수 없기에, 단 하루를 보내는 것조차 괴로웠다.
내일이 오지 않을 것같은 두려움에 시달렸다.
하지만 꼭 돌아오겠다는 그의 말을 믿었다.
당장 내일은 아니게 됐지만, 그래도 언젠가 돌아온다면 용서해주기로 했다.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어버버거리는 그를 껴안아주면서.
그런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하루를 견뎌냈다.
이틀을 삼켜냈다.
사흘을 버텨냈다
그렇게
꽃이 피는 봄,
맑은 바람이 부는 여름,
나뭇잎이 성숙해지는 가을,
그리고 눈이 세상을 뒤덮는 겨울을 지나.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다음 해가 또 다시 찾아왔다.
< 50. 그 끝에. (3)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