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몬스터-170화 (170/174)

< 50. 그 끝에. (1) >

뱀파이어의 수명은 보통 현대인의 2배 이상이다. 게다가 핏줄이 고귀할수록 기대여명이 늘어나고, 엘 라스처럼 아예 불노와 장수가 특징인 뱀파이어 또한 존재한다.그런 점에서 릴리아는 김세진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인간이신데 그렇게 오래 살아오셨다고요···?“

그녀는 다소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건 세상을 살아가는데 참으로 중요한 요소여서, 시간의 궤가 달라진 김세진은 문득 자신이 인간이라는 자각과 자아를 잃어버릴 뻔하였으니까.

"······그렇게 오래 살지도 않았어. 실제로 깨어있었던 시간은 50년 남짓이니."

기다리는건 지겨웠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버거웠다.

심지어 중간엔 최악의 질병인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하였으니······ 무려 2년 가까이 잠에 들지 못했더랬지.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어떻게 여기까지 견뎠나, 참으로 신기하고 또 자신이 대견하다.

어쨌든 그 덕분에 레비아탄의 성장률은 95%를 달성하였다. 이제 70년 정도만 더지나면, 완전한 성체가 될 수 있을 터.

"릴리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단다.“

무릎 꿇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살풋 웃었다. 그 가벼운 행위에도 그녀는 몸을 애처롭게 떨었다. 단 한 번의 마법에 정신없이 구타당했던 방금이 떠올라서였다.

"대답은?"

"예, 예. 뭐든지 물어보시와요······.“

날카로웠던 방금 전에 비해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답한다. 원래의 릴리아와 비슷한 목소리여서 김세진은 퍽 만족스러웠다.

"혹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니?“

어쩌면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에 잠시 멍하니 있던 릴리아는, 이내 거세게 고개를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그 지옥은 이제 돌아갈 수 없어요······.“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예?“

솔직한 말로, 지금 넘어오려는 로드와 엘 라스를 조기에 쓸어버리면 균열이 미래처럼 빠르게 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바토리의 말마따나 100년은 지나서야 열릴 일이었겠지.

하지만, 많이 이기적인 생각이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훗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들이 '김세진'이라는 존재를 잊어버릴 지도 모른다.

무엇을 위해서 600년에 가까운 세월을 기다렸고, 또 기다려야 했는가.

오로지 그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아니었던가.

과거로 돌아와 세상을 구하려는 이유는, '이기(利己)를 위한 이타(利他)'.

거창할 것 없이 단지 그 뿐이다.

그렇기에 미래를 어그러뜨리는 행위는 결단코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신지······"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주마. 우선, 나는 미래에서 왔단다 릴리아야.“

"에이 갑자기 이상한······ 으, 뭐, 꺄!“

긴 말 할 것 없이 레비아탄 폼을 취했다. 릴리아의 놀람-당황-패닉 3단 변화는 꽤볼만했다.

그러나 간과한 점은, 근래에 자신의 몸집이 너무나 불어버렸다는 것.

한강을 꽉 채우고도 모자랐을 정도인데 비좁은 해저동굴이 당해낼 수 있으랴. 용의 형상을 한 바다괴수는 끝도 모르고 거대해지더니, 동굴의 천장과 바닥에 맞닿아 굉연한 진동을 일으켰다.

"으악!“

릴리아가 괴성을 내지르며 나자빠진다. 세진은 황급히 인간 폼을 취했지만, 동굴의 수명은 이미 다한 듯 크게 진동하며 부스스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도, 도망쳐야······ 꺄아악!"

쿠구구궁! 이내 해저동굴이 와르르 무너진다.

김세진은 비명지르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서 순간전이를 사용했다.

눈을 뜨니 노스페라투 일족이 머물던 장소, 절벽 아래였다.

"으······."

릴리아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세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이제 여기서 머물도록 하렴. 로드의 눈도 피할 수 있고, 내부를 깎아 도시를 지어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단다.“

그제서야 릴리아는 눈을 떠, 그의 입가에 떠오른 부드러운 미소를 넋이 나간 채 바라보았다.

"따라오거라."

세진은 한쪽 벽면에 손을 대고 마법을 시전했다. 마법이 흘러가는 경로에 주루루룩- 통쾌하게 통로가 난다.

"공간은 내주었다. 건축은 너네가 더 잘하겠지."

대충 1만 정도의 노스페라투가 머물 수 있을 만큼 공간을 내놓은 김세진은 곧바로 일기장을 꺼내려다가, 문득 의심이 들어 릴리아를 힐끗 보았다.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은 어리숙하기 짝이 없어 아직 믿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았다.

"······헌데 그 전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짙게 울렸다.

"나랑 같이 수행을 좀 떠나자꾸나.“

"네?“

릴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또 무슨······ 저기요, 저는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조차 안되거든요. 저희 만난 지 하루 밖에 안되었······"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세진은 순간전이를 사용했다.

뒤바뀐 풍경은 이제 망망대해 위의 무인도였다.

"우왓!"

"성격을 죽여라. 미래의 너는 지금처럼 망나니가 아녔어."

"망나니라니······ 아니, 안돼요. 저는 노스페라투의 차기 지도자가 될 몸으로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수는 없고, 뭣보다 저희 진짜 만난 지 하루 밖에 안됐······ 꺄악!“

세진은 말 없이 공기파를 쏘아냈다. 파동에 밀려 바다에 빠진 릴리아는 허우적거리며 외쳤다.

"저, 저 수영 못한단 말이에요! 살려주세요!"

"껄껄. 알아서 올라오거라."

어푸- 어푸- 입으로는 물을 뱉어내고 손과 발로는 격렬하게 물장구를 치며, 릴리아는 꼬륵 꼬륵 가라앉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줘!"

"안 된다. 그것도 다 수련의 일환······."

"살려달라고 이 씹새끼야아악!"

"······."

이제는 화를 내는 법도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김세진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깨물었다.

* * *

이따금씩 지구로 이주해온 노스페라투 일족을 근거지로 안내하기 위해 시내로 마실을 나갔던 것을 제외하면, 김세진과 릴리아는 반 년 남짓한 세월을 함께 무인도에서 머물렀다.

그동안 참 많은 갱생(?)훈련이 이뤄졌다. 마법과 수영을 가르쳐주고, 식량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으며, 미래에 있었던 일들을 들려줌으로써 릴리아의 정신개조에힘썼다.

그 결과 릴리아는 미래에 봤던 그 자약하고 여유로운 성품을, 비슷하게나마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 김세진은 딱 200일이 되는 날에 작별인사를 건넸다.

"이제 가보마.“

"네?"

"왜, 가지마?“

"아, 아니요!"

그동안 꽤나 혹독했던 탓일까, 릴리아는 기쁨과 아쉬움 사이의 얼굴로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물론 기쁨 쪽이 더욱 컸다.

김세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래. 이제 네가 바라 마지않던 해방이다. 그런데 말이다, 혹시라도 로드의 근거지를 알게되면 꼭 전언마법으로 전해주렴.“

"네······ 예? 근데 그건 왜······?“

"해야 할 일이 있단다.“

로드는 흡혈본능을 조절하는 보물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지독한 노화로 인해 극렬한 치매가 오지 않는 이상, 그토록 진귀한 귀물을 그저 잃어버렸을 리 없다. 적어도 누군가가 훔쳤다는게 오히려 말이 된다. 그리고 그걸 훔친 도둑은 아마······ 말해 무엇하랴.

"네. 알겠어요.“

릴리아는 그저 김세진을 빨리 보내고 싶어하는 일념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딱!

"아악."

그 태도가 괘씸해 딱밤을 한 번 때려준 김세진은, 이번에야 말로 일기장을 꺼넸다. 릴리아는 멀뚱멀뚱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간신히 되물었다.

"······이건?“

"과거의 내가 적은 미래의 일기다. 다른 일족들에게는 예언서라고 뭉뚱그려서 설명하는게 좋을 게야. 그러면 더 잘 믿을테니.“

"아, 그러면 여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그래. 고서의 형태로 번안하여 로드에게도 은근슬쩍 건네주거라."

릴리아는 일기장을 훽 낚아채고선 다짜고짜 열어젖히려 했기에, 김세진은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크흠!“

그리고는 내가 없을 때 열어- 라는 무언의 압박이 담긴 눈빛으로 노려본다.

릴리아는 그 뜻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떡이고선 일기장을 품 속에 갈무리하였다.

"그래. 그럼, 다녀오마. 나중에 보자. 더 늦기 전에 한 번 정도 더 찾아오마.“

번쩍! 김세진은 푸른 빛이 되어 떠나갔다.

홀로 남은 릴리아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사위를 유심히 살핀 후에야 일기장을 열었다.

*

릴리아를 만나고서 3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렀다.

이계의 존재가 점차 민중들에게 퍼져가는 그 시점에, 릴리아가 드디어 로드의 위치를 파악해냈다. 로드는 영국 런던의 지하에 있었다.

좌표를 전해받은 김세진은 순간전이를 이용하여 로드가 기거하는 장소에 도착했다.

고향에서 막 넘어온 터라 쇠약해 있던 로드는 수면포션을 한 모금을 마시고는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김세진은 허무하리만치 손쉽게 로드의 보물을 빼앗을 수 있었다.

붉게 빛나는 고귀한 혈석, 귀혈석(鬼血石).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되었든 뱀파이어의 로드에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고귀한 무구렸다.

콰득!

김세진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깨부수었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는, 아무리 진귀하다 하더라도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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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마나의 농도가 나날이 짙어져 이상현상이 발생하고, 이계인들의 이민이 세간에 밝혀지며 지구는 큰 혼란과 변혁을 동시에 겪었다.

몬스터가 출몰하였기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기사'와 '마법사'라는 직업군이 새로이 생겨났다. 세계 최초의 마탑과 기사단이 미국에 설립되었고, 이에 뒤처질세라 세계 각국에서 기사단과 마탑을 조직했다.

한편 그 과도기 속에, 사회상에 적응하지 못한 이계인들이 여러 범죄를 일으켰다.

끝도 모르고 거듭되는 마인의 난동과, 뱀파이어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실종사건들.

그 범죄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번에는 '용병'이라는 직업군이 생겨났다.

1990년, 참다 못한 세계 각국은 협의 하에 우선 마인을 상대로 '척살령'을 내렸다. 수천 수만의 마인이 교화의 기회도 갖지 못하고 사살당했다.

다시 5년이 지나, 이제 눈 먼 분노의 창끝은 이제 뱀파이어를 겨냥했다. 바야흐로'뱀파이어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나와 우리가 알던 미래대로 흘러갔다.

그리고, 2010년의 어느 가을날.

나는 강원도의 한 시내로 나왔다.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과 재회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만나고 싶었지만 많이 참아왔다. 혹시 무슨일이라도 생길까 멀리서 지켜보는 것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번에도 만나서는 안 될지 모른다. 이 만남이 어떤 나비효과를 야기시킬 지 모르는 것이다······.

허나 나는 한 가지 단서에 희망을 걸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분명 어느 낯선 남성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다.

그러나 엘 라스는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나서는 바토리에게 혐의를 돌리기 위해 일부러 바토리의 문양까지 놔두었던 놈들인데, 일부러 뒷꽁무니를 잡힐 일은 하지 않을 테니까.

기억 속에 각인된 날, 어머니의 기일 바로 전 날, 함께 사진관을 갔었던 그 때를 기억한다.

나는 어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던 다리를 찾아왔다.

곧 있으면 어머니가 어렸을 적의 나와 함께 오시겠지.

그리고 아직 어린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기시겠지.

"아······."

나이가 불어 눈물이 어느 정도는 메마른 줄 알았는데,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흐른다.

이제는 희미해진 얼굴과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러나 이를 꽉 깨물어 눈물을 삼켰다.

그때였다.

저 멀리 환하게 미소 짓는 모자(母子)가 보였다. 서로 너무나도 닮은 그 모습에, 애써 꾹 참았던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정신적 탈력감이었다.

"세진아, 엄마 잠깐 회사에 다녀와야 하는데······."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애써 진정시키던 심장이 다시 무너져내렸다. 목이 메어 차마 말을 할 수 없고, 굽혀진 무릎을 도저히 일으켜세울 수 없었다.

"우리 세진이 혼자 들어갈 수 있지?“

어머니는 할 일이 있다며 나를 먼저 돌려보낸다.

그러니 이제 곧 아이는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겠지.

그리고 어머니는 나를 영영 떠나가시겠지.

"응!"

그러는 사이 아이는 힘차게 대답하고서 집을 향해 뛰어갔다.

어머니는 아이의 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이게 정녕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므로, 이대로 멈춰있을 수는 없다.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억지로 억지로 일어섰다. 눈물범벅인 얼굴을 닦아내고, 느릿느릿 걸어갔다.

그토록 만나길 고대하던, 당신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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