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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몬스터-169화 (169/174)

< 49. 기다림, (4) >

비를 내리게 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대기 중에 퍼져있는 수증기를 끌어 모아 적란운을 형성하니, 바로 다음날에 비가 내렸다.

"오, 저기 왔사!"

주륵주륵 장대비가 쏟아지는 회색 하늘 아래, 삿갓으로 비를 흘려내며 주막에 들어서자 예의 사내들이 놀라운 얼굴로 맞이해주었다.

"자네, 신기가 있구만!“

개중 나에게 가장 처음 말을 걸었던 남자가 특히 유별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전투적으로 다가와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하하. 주모, 국밥 한 그릇 주소.“

우선 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남자는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안거요?“

"그저 신령님에게 여쭤본 것뿐입니다."

남자의 두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신령님과 대화를 나눌수 있다는 말이오?"

"뭐, 비슷합니다."

"대단하구려!"

껄껄 웃으며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주문한 국밥이 탁자 위로 올라왔다.

과연 어제보다 두 배는 푸짐한 양이었다.

"오, 맛있겠네.“

"요 옆 고을도 가뭄에 시달리는데, 혹시 언제쯤 비가 나릴지 알 수 있겠소?“

남자의 물음에 국밥을 입에 퍼 넣으며 웃었다.

"아마 이틀 뒤에는 올 것입니다.“

"이틀 뒤라······ 아, 참. 통성명을 안했군. 나는 이시읍이라 하오. 자네는······"

"언니~ 재료 가져왔드래요~“

그때 청아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몄다. 힐끗 보니 앳된 소녀였다. 남자는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음흉하게 웃으며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보는 눈이 있구만. 우리 고을 최고의 미녀라네. 나이는 아직 어리긴 하지만 저쯤되면 혼기도 충분히 찼지.“

"······.“

최고의 미녀라기에는··· 기준치가 너무 높은 건지 평범에서 아주 조금 나은 정도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런거겠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임자 있습니다."

"상투도 안 틀었는데?“

"······큼. 고향으로 돌아가면 틀 겁니다."

"그런가? 아쉽구만. 험험. 어이 주모, 나도 여기 이 사내 거랑 똑같은 국밥 한 그릇 주소.“

그러나 주모는 내 절반 수준의 국밥을 가져오고서 남자를 타박했다. 외상값부터 갚으라는 말이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그 둘을 바라보는데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방금 들어온 '고을 최고의 미녀'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흡!"

눈이 마주치자 수줍은 듯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곧 슬그머니 눈알을 굴려 곁눈질을 하다, 또 다시 시선이 부닥친다.

"···! 어, 언니 저 이만 가보겠드래요.“

결국 그녀는 도망치듯 주막을 떠났다.

"흐흠."

흠. 확실히 내 외모에 대한 가치관은 고금을 막론하는구나.

괜한 자부심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지만 고을 사람들은 외모보다는 아무래도 비를 예측한 신기에 더욱 관심이 있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주민들이 주막으로 몰려왔다.

그새 소문이 퍼졌는지 헐레벌떡 다른 고을의 사람들도 찾아왔다. 그들은 모두 '비'에 대해서 물었다.

"······그 쪽은 아마 사흘 뒤에 내릴 것 같습니다.“

"저희, 저희 고을은 어떻드래요?!“

"곧 내릴 거니까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그 날 이후로는 별안간 신령의 대변인 노릇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순박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었던 터라 퍽 재미있었다.

그렇게 고을에서 머물다 보니 나를 흠모한다는 아낙네들도 몇몇 생겼다.

마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소녀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세정이와 함께하며 눈이 높아질대로 높아진 터라··· 하루하루를 방랑하는 유랑객이라는 핑계로 모두 거절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다시 숙면을 취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이제 가는 것이오?“

"예. 3개월 뒤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3개월이라······ 아쉽게 됐구려. 자네가 그나마 말이 통하는 상대였는데. 이쪽 지방 사람들은 너무 순박하이.“

"하하. 저는 오히려 그래서 좋았습니다. 이시읍 옹.“

꾸벅 목례를 했다.

"가시게. 또 오시게."

남자, 이시읍의 정중한 작별인사를 등 뒤로 남기며 어느새 정이 든 고을을 떠났다.

*

태양빛을 집어삼키는 짙은 바다 속에서 눈을 떴다. 벌써 3개월이 지난 것이다.

가장 먼저 정보창을 켜보았다. 레비아탄의 성장률은 고작 소수점 뿐이었다.

실망이 담긴 한숨을 저절로 나온다. 한데 그 입김에 거센 해저 폭풍이 일어 수면 위로 치밀었다. 깜짝 놀라 황급히 물길을 다잡고서 인간 폼을 취했다.

뭍으로 올라가 기지개를 켜고, 스트레칭까지 하고서 다시 그때의 고을을 찾아갔다.

고작 3개월이 지났을 뿐이지만, 나를 흠모한다던 소녀는 다른 누군가와 살림을 차린 채였다. 남편은 고을에서도 착실하다고 소문난 농사꾼이었다. 왠지 모르게 면목없어하는 그녀였지만, 나는 웃으며 축하해주었다.

이시읍은 반가워하며 나를 맞이해주었다. 이번에는 비를 묻지는 않았다. 다만 추수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흔쾌히 들어주었다. 적어도 소보다는 우직하게 일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한데 처음에는 꽤나 애먹었다. 힘보다는 기술이 중요한 작업이었기에.

그러나 고블린의 손재주 덕분인지 급속도로 성장하여, 사흘이 지났을 때에는 지상 최고의 농사꾼이 되어 모든 고을의 일을 도맡아서 끝내주었다.

그렇게 추수를 도와주다 보니 1주일은 참 쏜살처럼 흘러, 다시 잠에 들어야 하는 때가 다가왔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욱 아쉬운 작별을 건네고 바다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는 꼬박 3개월, 계절이 변할 때 마다 고을을 찾아갔다.

주민들은 나를 반가워하며 맞이해주었고, 고을에서는 항상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퍽 마음에 드는 소박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나와 그들의 세월은 서로 달라, 시간이 흐를수록 슬픈 일이 잦아졌다.

3년이 지나자 나에게 가장 처음 말을 걸어주었던 이시읍이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2년 뒤에는 그의 아내가 죽었다.

1년 뒤에는 자주 가던 주막의 주모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았다. 자연스레 주막도 문을 닫았다.

그들에게는 6년, 나에게는 3달 남짓한 일이었다.

그쯤 시간이 흐르니 이제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모두가 늙지 않는 나를 의심스럽게 여긴 것이다. 몇몇은 나를 신령으로 취급했으며, 악귀취급 하는 작자들도 나타났다.

그래서 그 고을을 완전히 떠나야만 했다.

이후로는 한 고을에 머무르지 않고 정처없이 유랑하였다.

꽃이 몇 번이나 피고 졌고, 장마는 몇 번이나 세상을 적셨으며, 눈은 몇 번이나 강토를 물들였다.

세월을 흘려보내는 것을 업으로 삼으며, 모든 것들을 관조하며 살아갓다.

우연찮은 기회에 다산 정약용을 만났다.

그는 과연 듣던 대로 성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나라를 패망으로 몰아넣을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노다니는 고을 고을마다 인심이 더없이 야박해지고, 유랑객을 습격하는 화적도 많아졌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고종의 대원군 이하응이 집권하였다.

그는 외척을 장악하고, 쇄국정치를 펼치며 한껏 기세를 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야망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강화도의 영해에 이름 모를 군함이 한 척 다가왔다.

'운요호(雲楊號)'였다.

고작 하나의 함대에 굴욕적으로 유린당한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갑신년에 급진적인 정변이 일어났다. 하지만 호기로웠던 젊은이들은 눈이 채 녹기도 전에 목숨을 잃거나 도주를 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좌절되고, 을사늑약이 공표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3월 1일, 나라를 잃은 국민들의 한과 비통함이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제국주의의 탐욕에 의해 징용당한 나라의 젊은이들을 보았다.

그래도 내일의 해는 떴고, 시간은 여전히 흘렀다.

1440년에 도착한 지 정확히 500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은, 해방을 5년 앞둔 1940년 8월 15일이다.

"술.. 이라."

경성의 길가를 거니는데 근래에 생겨난 듯한 서양식 술집이 보였다. 요 100년 동안은 영 마시질 않았지. 순간 흥미가 동해,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딸랑-

문을 열자 종소리가 울렸다. 술집에는 꽤나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큰 키와 중후하게 기른 수염은 역시 뭔가 있어 보이나보다. 단박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대충 중절모를 깊게 눌러쓰고 바 쪽에 앉아 고급양주를 시켰다. 가만히 홀짝이고 있는데, 문득 조금 먼 옆자리에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올곧게 쭉 뻗은 눈썹과 굳게 다물린 입술, 그리고 저 멀리를 내다보는 듯한 형형한 눈빛.

외면만으로도 어딘가 압도되는 남자이지만 정작 일을 하는 데에는 서투름이 역력했다.

가방 속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화약의 향기와, 연신 시계를 확인하며 불안해하는 모습.

거사를 치르기 전의 사내임이 틀림없었다.

직원에게 말해 그에게 가장 비싼 술을 전달했다.

처음에 그는 당황하는 기색이었으나, 이내 이쪽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는 그에 그치지 않고 말까지 걸었다.

"이름이 뭡니까?“

남자는 내 한국어에 당황한 듯 몸을 움찔 떨었지만, 이내 대답해주엇다.

"유형진이라 하오.“

유형진, 유형진······ 곱씹자니, 뭔가 한 번쯤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이름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혹시 아들이 있습니까?“

남자는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있소.“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웬 아들의 이름을 묻소이까."

"술값으로 치면 안되겠소?"

그는 탐탁잖은 얼굴로 말했다.

"······유대호.“

순간 뇌리에 섬광이 번뜩였다.

유대호.

유세정의 조부이자, 새벽의 창업자.

그리고, 유정혁. 유대호의 아버지. 그는 독립운동가로 광복 5년전 폭탄 테러를 거행하고, 5년간의 옥살이 끝에 새로운 해를 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다.

아마 새벽이 사회의 의인들에게 주는 상이 '유형진 상'였지.

"그런 걸 묻는 당신은 누구시오?"

유형진은 의심스런 눈길로 물었다.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는게, 권총이라도 집으려고 그러나 싶다.

"당신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품 속에서 샛노란 덩어리를 꺼넸다. 화폐의 흐름이 번거로와 현물화폐를 종종 지니고 다녔는데, 이럴 때 쓰기 딱 좋겠구나.

유형진은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같은 사람..?"

"일부러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일부러 나를?"

"예. 거사를 치른다고 해서 가장 가까운 가족이 굶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가져가서 아이 교육비로 쓰십시오.“

500g짜리 금괴 네 개를 건넸다. 유정혁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황금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황금입니다. 가져가시지요."

"이, 이걸 나한테 왜······"

"말했잖습니까. 교육비라고."

유정혁이 침을 꿀꺽 삼킨다. 허나 그의 눈동자에는 탐욕따윈 없었다. 다만 두고갈가족들을 생각한 절박함만이 있었을 뿐.

"뭐하십니까, 어서 가져가지 않으시고."

다시금 말하자 그는 머뭇머뭇하면서도 금괴에 손을 뻗었다.

"단!"

그의 손이 황금에 닿았을 때, 거칠게 움켜쥐었다.

"절대 당신이 쓰시면 안 됩니다. 단체에 주셔도 안되고, 오로지 가족을 위해 쓰십시오."

이건 훗날 유대호의 사업자금이 되어야 하는 물건이니까.

유정혁은 나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뜻밖의 인물을 만나고서, 머물던 호탈로 돌아왔다.

가져온 양주를 잔에 따르고 탁자에 앉아 일기장을 폈다.

그리울때마다, 내가 나를 잊을 것 같을 때마다 펴봤던 일기장. 손때가 많이 탔고, 눈물자국도 선명하다.

"참 많이도 기다렸다······."

50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 이제 드디어 릴리아를 만나야 할 날이 다가온다.

시일은 해방 5년 뒤.

릴리아가 가장 처음에 찾았던 장소는 전해 들어서 알고 있다.

두근- 두근-

아주 오랜만에, 심장이 뛰었다.

* * * *

마침내 광복이 찾아오고, 찢어지는 가난함 속에서 5년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은 1950년 6월 20일, 6.25전쟁이 발발하기 5일 전.

나는 릴리아가 미리 말해주었던 강원도의 해저동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노스페라투의 지도자로서, 먼저 통로를 넘어와 거주지를 탐색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역시 보였다. 고심하는 듯 거듭 고개를 갸우뚱하며 동굴을 둘러보는 등 굽은 노인의 실루엣이. 저 로브를 벗기면 다시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오겠지.

그녀의 등 뒤로 슬그머니 다가가 어깨를 톡 두드렸다.

"안녕."

"으악! Gracehobiack!"

순간 그녀의 로브가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릴리아는 뭔가 격정적인 욕설을 내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

잠시 당황했다. 릴리아의 성격이 원래 이랬었나···? 얼굴은 확실히 릴리아인데···.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얼굴이 벌개진 그녀는 계속해서 분노를 토해냈다.

"stpem Fabohac racehobiack!"

"···한국어로 해."

"fragh!"

"한국어로 하라고."

그제서야 말을 알아들은 듯 릴리아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서.

"씨발, 너 누구야 개새끼야!"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하지만 나이는 허투루 먹은 것이 아니다. 급작스런 일에도 당황하지 않고 그 이유를 추론해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하였다.

그래. 70년 전이면 이 여자, 딱 혈기왕성한 나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선 이런 다이나믹한 변화도 충분히 있음직하다.

"뒤져! 뒤져 뒤져!"

마음을 가다듬기도 전에, 릴리아가 손톱을 공격적으로 휘두른다.

그러나 가볍게 피하고서 손을 쭉 뻗어 그녀의 모가지를 움켜쥐었다.

그로부터 5분 뒤.

"죄송합니다······.“

그녀는 눈탱이가 부어오른 채 바닥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 49. 기다림, (4) > 끝

ⓒ 지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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