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기다림, (3) >
"한 달? 아니면 두 달?“
마지막 밤, 세정이가 내 품속을 꼬물거리며 묻는다. 그러나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 지 확신할 수 없기에 아무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그러면 세 달?“
세정이는 아까보다 조금 더 작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네 달?“
이번에는 거의 속삭이는 수준이다. 세진은 애써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최대한 빨리 올게. 당장 내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올 수도 있어.“
"거짓말.“
"진짜로.“
확정되어 있지 않은 미래이니 만큼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는 법. 설핏 웃으며 말하자, 그제서야 세정이는 조금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럼, 나는 식장 잡고 청첩장 돌리면 되는거야?“
"······응. 준비하고 있어.“
그렇게 대답하며 세정이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자그마한 몸은 오늘따라 더 가녀리게 느껴졌다. 문득 눈물이 흐를 것 같았지만, 참아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잔잔한 흐느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세정이의 울음소리였다.
토닥토닥-
다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는 것 뿐일 따름이다.
오늘 밤은, 조금 느리게 흘렀으면 한다.
*
동 트기 전 푸르스름한 새벽, 일기장을 영체화하여 몸에 담아둔 채 지하의 통로를찾아갔다.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인데, 지옥도라는 형언이 지극히 어울리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본격적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한 뱀과 개 형체의 괴마들, 그리고 점액 속에 꿈틀거리는 미지의 생체······ 그곳에서 바토리는 혼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이미 전세계에 많은 새끼통로가 파생됐어.“
곁눈질로 이쪽을 힐끗 바라본 그녀는 놈들을 불사지르며 말했다.
"새끼통로 중 절반은 다른 세계와 이어진 작은통로가 될 테고, 나머지 절반은 몬스터들이 쏟아져오는 지옥문이 되어버려.“
그녀는 이제 기한이 다 되었다는 말을 조금 늘려서 했을 뿐이다.
대답없이 통로 쪽으로 다가갔다.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까마득한 아래에서부터 역류하는 기이한 존재들,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꽉 막힌 듯한 이 통로 속을, 헤집고 뛰어들어야만 한다.
간단하지만 상상 이상의 용기를 요하는 일이라 술이라도 마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얘, 듣고 있니?“
바토리의 목소리에 고개만을 살짝 비틀었다.
"어.“
"진짜 계획대로 할 생각이야? 만약 네가 성공하더라도 멸망은 변하지 않아. 통로를 닫아도, 이 세계에 남은 잔존물들을 처리할 수는 없어. 그리고 만약 실패하면 그건 말 그대로 개죽음일 뿐이고.“
"······잔말 말고, 하나만 묻자. 바토리. 너랑 네 수족들은 이 아래로 안 뛰어들 거지?"
이 통로 속에는 과거 혹은 다른 세계, 차원으로 향하는 문이 있다. 그곳이라면 내가 과거로 가려는 것처럼 바토리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
바토리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하는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나 그 고심 끝에 나온 말은, 퍽 마음에는 드는 명문이었다.
"여기 남을 거야.“
"오우."
내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말했다.
"······네 설득 때문은 절대 아니야. 놈들에 집어 삼켜진 고향은 고향이 아닐테니까."
"좋은 선택이야."
바토리도 협력하기로 했으니, 이제 걸리는 건 없다. 거창할 것 또한 없다. 따라서 머뭇거릴 이유도 없다.
곧바로 늑대 폼을 취했다. 그리고 통로의 저편을 응시한다.
통로는 마치 폭발하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내뱉어내고 있었다. 인간의 살덩어리와도 비슷하고, 혼자 꿈틀거리는 미생물과도 유사한, 살아있는 무엇인가를.
그 고어한 광경은 역하고 또 두려웠다.
허나 용기를 자아내야만 했다.
'내가 살아남으려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다녀올게."
카운트 따위도 필요 없다.
시간은 흐를수록 내 용기를 갉아먹을 뿐이니까.
단 한 번의 얕은 도약, 나는 통로 아래로 뛰어들었다.
"뭐, 야, 야! 잠깐······.“
등 뒤에서 바토리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허나 곧 모든 소리가 스러지고, 나는 아무런 색도 없는 허무의 틈으로 침잠했다.
*
물컹한 점액들의 불쾌감도 처음에만 있을 뿐,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마치 모든 감각이 절멸한 듯하였다.
눈을 굴려보았다.
균열 속은 본래 대자연의 풍경이라고 들었건만, 온사위가 새까맣다. 드문드문 빛나는 별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에 잡아먹히고 만다.
마치 우주를 닮은 풍경이다.
아, 우주도 자연에 포함되는 거였나?
정신이 몽롱해지고 생각이 흐릿해졌다.
숨을 쉬고 있는 건지, 내가 움직이는 건지, 살아있는 건지 아니면 죽어있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일순 거센 탁류가 나를 스쳐 위로, 그리고 위로 치밀어올랐다.
흑색 탁류 속에 숨겨진 놈들의 맥박이 보이고 안광이 느껴졌다.
그 놈들 덕에 내가 이곳으로 온 목적이 돌연 떠올랐다.
놈들이 왔던 방향을 거슬러 가야하므로, 탁류 진행방향의 반대편으로 뱃머리를 고정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일 분일까, 한 시간일까, 하루일까, 한 달일까, 그것도 아니면 일 년일까.
기묘한 환경 속에서 이성은 무뎌지고 흐트러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저거······'
얼마 지나지 않아, 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 저 멀리 블랙홀처럼 생긴 거대한 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블랙홀은 거듭 꿀렁이며 괴이한 존재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돌연 눈이 번쩍 뜨였다. 본능이었다.
노곤하고 나약했던 몸에 생기가 돌고 머리가 뜨겁게 달궈진다.
그 변화를 눈치챈 것일까, 블랙홀에서 튀어나온 존재들이 경로를 이탈하여 나에게 달라붙었다. 예상 외로 차갑고 또 아팠다.
그래서 펜릴으로 변했다.
[펜릴의 폼을 취합니다! 앞으로 12시간동안 신살의 늑대, 펜릴으로······]
순간 눈높이가 달라지고 시야가 지극히 선명해졌다.
내 허리를 옥죄던 괴마가 먼지보다 작아져보였다.
블랙홀도 마찬가지로 그저 조금 큰 솜사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블랙홀은 종잇장처럼 어그러지며 내 입속으로 빨려들어왔다.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몸에 담깁니다······.]
이게 내야 해야 할 일이었다면, 거창할 것 없이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미 지구로 떠나버린 놈들이 많다. 바토리를 도와 놈들을 처리를 하려면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조금 아픈데······.'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소화불량인가. 아니면 죽어가는 건가.
아무 움직임도 없이, 공허를 부유하며 생각했다. 여태 필사적으로 거부했던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에 스쳤다.
혹시, 미래의 나는 죽어서 없어진 게 아닐까.
왠지 그런 것 같아서, 참으로 설득적이어서 나는 항해를 멈췄다.
이제 내 몸을 감싸는 차갑고도 뜨거운 별의 감촉들, 내부에서 꿀렁이는 얄궃은 모든 것들과 함께 사라지자.
추억이 차례로 떠올랐다.
어렸을 적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던 장면······ 한데 그로부터 15년 동안은 기억이 없다.
어찌보면 당연하다. 특성이 생기기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잔영처럼 살았으니까하지만 최근 5년의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하다.
김유린을 만나고, 하젤린을 만나고, 세정이를 만나고, 김유손을 만나고, 주지혁을 만나고 만나고······ 만남과 인연으로 점철된, 그렇기에 선명하게 빛났던 인생.
그제서야 목적과 결단이 의식이라는 수면 위로 부유했다.
분명 세정이에게 돌아간다고 약속했으니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해야할 일이 하나 더 있지 않은가. 무슨 일이든지 성공하기 위해선 '사후처리'가 확실해야만 한다.
머리가 어느때보다 맹렬하게 회전했다.
행방이 묘연한 미래의 나.
차원포식자라 불리는, 바토리 조차도 대적할 수 없는 존재.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설의 괴수 '레비아탄'이 성체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
그 속에서, 답을 찾았다
감았던 눈을 뜨니 저 멀리 어둑한 빛이 보였다.
나는 그 쪽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발장구를 쳤다.
"우읍!"
구역질이 났다. 저 멀리 과거로 향하는 통로가 있는데, 세계의 틈이, 억제력이 나를 강압한다.
견뎌내기 위해 이를 꽉 깨물고 레비아탄이 되었다.
[스킬 '최상급 저항력'이 작용합니다. 세계의 섭리와 억제를 잠시 거부합니다.]
알림창만 그렇게 떠올랐을 뿐, 관절이 뒤틀리고 전신은 타오르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저 빛깔을 향해 허공을 내달렸다.
모든 비늘이 타 없어지고 눈이 멀어 세상이 암흑으로 물들고서야 비로소, 마침내.
나는 찬연한 태양빛에 닿을 수 있었다.
* * *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풍경은 환한 태양과 우거진 녹음이었다. 족히 5분동안은 멍하니 현실을 파악하다,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인간인가?
인간이다.
정보창이 켜지는가?
켜진다.
"후우······.“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그렇게 자아를 다잡고서야 주변 경관을 확인할 여유가 생겼다.
"······."
그러나 잠시 말을 잃었다.
고층빌딩이 없었다. 도로도 없었다. 현대식 빌딩도 없었다.
대신 기와집과 초가집이, 성채와 망루가, 마차와 소거름의 냄새가 있었다.
그렇다, 지금 보이는 풍경은 완전한 '조선'이었다.
"······일기에 안 써놓은 이유가 있었구만.“
혼잣말을 읊조려본다.
몇 년도인지 조차 가늠하기도 어렵다. 레비아탄 성체로 성장하려면 한 500~600년 정도 필요할 거라 생각했으니, 어림잡아 550년 전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한 번 잘 때 반 년씩 잔다고 하더라도 1000일 가까이 깨어있어야 하네.
"흠.“
자꾸 흠. 흠. 흠.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다시 한번 제대로 생각해보자.
500년이면 그래도 레비아탄 성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성체 레비아탄이라면, 바토리가 말했던 '차원포식자'라는 놈들 또한 상대할 수 있겠지.
어차피 기다림은 각오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겠지만.
문득 고개를 들어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창연한 바다가 햇볕을 받아 보석처럼 곱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 경관은 동해가 확실하다. 때마침 침대가 저기 있다는 뜻이다.
"······기다려야지 뭐.“
조금만 기다리자.
견디고 견디고 또 견디다 보면, 어느새 알맞은 세월이 되어 있겠지.
* * * *
레비아탄은 한 번 잠들면 3개월 가량을 잠들었고, 한 번 깨면 일주일 정도는 깨어있어야 했다. 대부분의 시간은 동해의 밑바닥에서 잠들었고, 깨어있는 시간에는 조선을 구경했다.
그 결과 훈민정음이 창제되는 역사적인 순간, 왜란의 참혹, 호란의 굴욕······ 그 모든 것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
외적에 의해 유린당하는 강토와, 현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부조리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보며 몇 번이나 주먹을 꽉 쥐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혹시라도 역사가 뒤바뀔만한 일은 벌이지 않았다.
내가 영향을 주어야 하는 일은 몇가지로 한정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기다림 속에 시간이 흘렀다.
1년 중 깨어있는 시간은 고작 3주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남은 세월이 너무 많았다.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때로는 그리움이 미칠 듯이 차올랐다.
때로는 성욕이 문제가 되었다.
때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하루 하루가 괴롭고,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때때로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갔다.
신기하게도 몇몇 발음과 단어의 용례에만 차이가 있을 뿐, 대화는 원활하게 할 수있었다.
"주모, 국밥하나 주시오."
문득 곡기가 그리워져 주막을 찾았다. 188cm정도 되는 거구가 목청껏 주문을 하니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멍하니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나를 묘한 눈빛으로훑어보던 한 남자가 말했다.
"기골이 참 장대하시구려.“
"하하. 감사합니다.“
"혹시 장졸이오?“
"아닙니다. 그냥 일반 백성입니다.“
"흐음."
남자는 길게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주문한 국밥이 나왔다.
나는 그 자그마한 뚝배기에 담긴 한없이 적은 양을 멍하니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근데 요즘 사람들 상황이 많이 팍팍하나 봅니다?"
"그렇지. 요즘은 신령님이 노하셨나 통 비가 내리지 않으니.“
"비요?“
"그렇소. 예년보다 훨씬 가뭄이 길어지고 있으니, 걱정일세 걱정.“
남자가 걱정스런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쉰다.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비······ 비, 비 말이지요. 비는 아마 오늘 내릴 겁니다."
"······무어라?"
고개를 갸웃한 남자는 곧 조소를 입가에 띠우며 되물었다.
"혹시 당신, 무당이오?"
"뭐, 비슷 합니다."
"허허허."
남자가 웃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자 혼자만이 아니었다. 주막에 있는 모두가 웃었다.
"웃기는 사람이구려."
"생긴 건 멀쩡해가지고 웬······."
저마다 한 마디씩 비아냥거리는 사람들.
"하하, 한번 두고 보시지요."
그러나 나는 그저 진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49. 기다림, (3)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