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몬스터-166화 (166/174)

< 49. 기다림, (1) >

스러진 낙엽과 헐벗은 나무, 두꺼워진 외투와 서늘해진 공기. 계절에 특히 민감한강원도의 몇몇 지방에는 이미 진눈깨비가 내리기도 하는, 그런 나날들.

11월의 중순은 가을과 겨울의 사이 즈음에 있다.

시간의 흐름이 헛되지 않도록, 세진은 여러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우선 강원도 동해 근처에 여의도 크기 만한 인공섬을 조성해 '그리핀의 둥지'를 만들었고, 하루에 절반 가량을 아티펙트와 무기를 제조하거나 마기서를 기록하는 데에 할애했다.

당연하게도 잠이라는 사치를 부릴 시간은 없었다.

여느때보다 활발하게 대외활동을 나섰다.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타국의 총리도, 대통령도 활발하게 만나고 다녔다. 그리고 말했다. 현재의 절망적인 사태는 분명히 극복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러니 조금만 버티고 견뎌내자고.

혹자들은 터무니 없는 희망 전도사라며 비난했지만, 김세진은 그만두지 않았다.

정부와 협조하여 균열이 자리잡은 엘 라스의 근거지 근처를 통제했다.

예측되는 균열의 크기는 약 일천 평. 역대 최악의 재앙을 불러일으켰던 아프리카 균열이 고작 20평 남짓에 불과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절망적인 넓이였다.

실제로 측정조사를 나선 더 몬스터의 직원과 정부의 각료들은 균열의 크기를 보고는 패닉에 빠졌다. 아마 로스한델의 정신마법으로 균열의 크기를 1/100 수준으로 축소시키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대공황에 빠졌겠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바쁘게 지내다보니, 어느새 '기한'은 1개월 남짓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저기 있네.“

그리고 오늘. 김세진은 자신의 일기장에 적혀진 대로 부산 영도 근처 해안을 찾아왔다. 저 멀리 뱁새가 흐릿하게 보였다.

바토리는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뱁새를 잠시 감상했다. 귀여운 실물에 흡족스러워 하는 얼굴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조금 더 크네.“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단답, 이후 바토리는 뱁새를 향해 마나를 쏴아아 내뻗었다. 김세진은 분명 반항할것이라 생각했지만, 뱁새는 신기하게도 그 마나를 쫓아서 살랑살랑 내려왔다. 삐약- 삐약- 비음 섞인 애교를 지저귀며.

과연 주인은 알아본다는 것인가, 김세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뱁새가 어느정도 가까워지자 바토리는 손을 쭉 뻗었다. 웃으며 다가오던 뱁새는 바토리 옆에 있는 김세진을 발견하곤 잠시 경계 어린 태세를 취했지만, 이내 슬그머니 다가와 그녀의 팔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귀여운 앵무새처럼.

"오호라."

그제서야 세진은 뱁새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우묵한 부리, 넓대대한 얼굴, 그에 비해 또랑또랑하고 맑은 눈. 그러나 그런 귀여운 외모보다 더욱 눈에 띄었던 건, 날갯죽지에 새겨진 흐릿한 글씨였다.

영어도, 한글도 아니다.

하지만 이 문자가 어떤 의미인지, 왜인지 김세진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엘리 폰 바토리. 내 이름이야."

바토리가 씁쓸하게 읊조렸다. 잔잔한 슬픔이 담긴 목소리였다.

할 말이 없던 김세진은 대충 지꺼렸다.

"이름 예쁘네."

"······닥쳐."

그런데 아무래도 오답인 듯하다.

바토리가 눈을 흘겨본 그 순간.

"뻬액!"

방금까지만 해도 바토리의 팔에 몸을 비비적거리던 뱁새가 김세진에게 불길을 내뿜었다.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는 인간놈은 용서치 않겠다 이건가. 김세진은 숯검댕이가 된 얼굴을 찌푸렸다.

"후훗. 잘했어 슈크림."

"줘봐. 한대만 때리게."

"꺼져."

허나 바토리는 쌤통이라는 듯 웃고는 뱁새와 함께 순간전이를 사용했다. 덩그러니 남은 김세진은 얼굴의 재를 닦아내고서 그녀의 기운을 좇았다.

아직 받아야 할 피가 조금 남아있거든.

* * *

12월 1일.

"······.“

"······.“

"······.“

김유린과 김세진, 하젤린과 유세정, 그리고 유백송은 길드 휴게실 탁자 위에 놓인 직사각형 모양의 카드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이게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청첩장이에용.“

이혜린이 낭랑한 목소리로 해답을 말했다. 그제서야 네 사람이 고개를 번쩍 들어올린다.

"이렇게 갑자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데, 그래도 어떻게 되기 전에 결혼식은 해봐야 되지 않겠어요?

웃는 얼굴과는 다르게 꽤나 우울한 말이었다.

"지혁 기사님은······ 너랑 결혼 하는거 알고 계시겠지?“

김유린의 조심스런 물음에 김세진이 피식 웃었다. 정작 당사자가 모르고 있으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코미디겠네.

이혜린은 이맛살을 찌푸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썸까지 연애로 치면 저희 이미 1년 가까이 됐을걸요.“

하긴. 썸을 죽어라 타긴 했었지.

"그래, 뭐. 주지혁 기사님은 좋은 사람이니까 걱정은 안하지만······“

김유린은 약간 의심스러웠다. 열애설보다 결혼발표가 먼저 날 판국은, '속도위반'밖에는 떠오르지 않으니까.

필연적인 의혹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상관하지 않는 건지. 이혜린은 생글생글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다가 돌연 짓궂은 얼굴로 너스레를 떨었다.

"근데 우리 대장님, 은근슬쩍 길드장 님 옆자리를 딱 차지하셨네. 여기 정실부인도 계시는데.“

"아. 그러고 보니까 그러네요. 자리 바꿔요.“

때마침 전전긍긍하던 유세정이 벌컥 나섰다.

"아하하··· 미안 미안.“

김유린이 뒷목을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정이가 빈 자리를 잽싸게 차지한다.

"주례는 칠흑 기사단장님, 그리고 축가는 길드장님이 해주시기로 했어요.“

"······잠깐. 축가가 저라고요?“

"넵.“

"저 노래 못하는데? 아니, 그것보다 저한테 얘기 안하셨잖아요.“

꿈속에서 조차 축가를 하겠다- 고 말하는 자신의 모습은 보지 못했는데. 그렇게 김세진이 황당해하자, 이혜린도 덩달아 당혹스런 얼굴이 되었다.

"저 세정이한테 허락 맡았는데? 그때 기사들 술자리에서.“

김세진이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세정이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시선을 슬그머니피하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말한다는걸 까먹었네······."

"앗. 근데, 그래도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유명하잖아요. 그러니까 노래도 분명히 잘 하실 거예요. 저 벌써 다 길드장님이 축가한다고 자랑까지 해놨는데······"

김세진은 이혜린의 애처로운 눈빛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세정은 처벌해야만 한다.

"알겠어요. 일단 할게요. ······그런데 유린 씨. 다시 자리 바꾸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 안 돼. 잘못했어요 오빠.“

"바꿔.“

"······으으."

그렇게 유세정은 다시 좌천당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김유린은 김세진의 간식을 탐한 죄로 이번에는 하젤린에게 자리를 빼앗겼다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혜린은 소리내어 웃었다.

"껄껄껄“

평생 이렇게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혜린은 그런 소박한 생각을 했다.

*

[더 몬스터 길드원, 톱스타 이혜린 전격 결혼 발표. 상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히 기사가 터졌다. 뉴스의 연예란을 넘어 사회란까지 결혼발표로 도배될 만큼, 이혜린의 인지도와 영향력은 과연 대단했다.

그리고 기사가 발표된 바로 다음날에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식장은 더 몬스터 길드사옥의 앞뜰.

명목상으로는 '소박한 비공개 결혼식'이었지만, 참석인원의 면면은 실로 억소리가 나올만한 거물들 뿐이었다. 칠흑기사단의 단장부터 시작해서 한창 일로 바쁠 국무총리, TM사의 CEO 조한성 등등······

그리고 그 거물들이 모인 속에서, 김세진은 축가를 불러야만 했다.

선곡은 '그대 내 품에'. 얼굴로 노래를 부르는 듯 시뻘개진 김세진의 표정이 꽤나 웃기긴 했지만, 워낙 목소리가 좋았던 탓에 장내는 금세 노래에 빠져들었다. 낭만적이고도 장려한 분위기였다.

어쨌든, 결혼식은 그렇게 끝났다.

"다녀오겠습니다~"

주지혁과 이혜린은 길드원과 양가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말이 여행이지 사실은 2박 3일동안 이혜린의 개인자택에서의 휴가였다.

참고로 이혜린의 집은 서울시에 위치한 시가 600억 상당의 대저택이다. 그 위용과 위엄은 주지혁이 놀라 기절할 정도였다고.

그리고 김세진은 휴가를 낸 유세정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시국상 그리 먼 곳을 가지는 못하기에, 해안에 있는 새벽의 별장으로.

즐겁게. 단 둘이서가려고만 했다.

"······단 둘이서만 가는거 아니었어?“

그러나 예상치 못한 혹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로스한델, 김선호, 하젤린, 유백송 등등······ 그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김세진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한다. 그런 둘의 눈치를 힐끗 살핀 하젤린이 염려하지 말라는 듯 덧붙였다.

"방향만 같을 뿐이고, 엄연히 다르답니다. 저희도 마지막 휴가는 즐겨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왜 내 개인 차 트렁크에 짐을 쑤셔넣으시는지. 김세진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출발~"

어느새 차에 올라탄 하젤린이 소리쳤다.

그렇게 일행은 휴가를 떠났다.

*

유세정과 김세진은 새벽의 별장에 짐을 풀었고, 나머지 일행은 별장 바로 옆에 있는 펜션을 통째로 빌렸다.

바로 옆에 산과 계곡이 늘어선 이 곳은 예전에는 유명한 휴양지였지만, 이런 시국에 휴가를 떠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일행은 가장 먼저 사람없이 텅텅빈 계곡을 즐겼다. 그 와중에 하젤린이 유백송에 의해 익사할 뻔 한 건 덤.

그 다음에는 바베큐파티, 그리고 마지막 캠프파이어까지, 모두 함께.

초반까지는 불만어린 얼굴로 축 처져있던 유세정은, 모닥불을 앞에 두고서는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이 되어 "함께라서 더 좋네요-" 라고 말해주었다.

"내일봐요~"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일행은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김세진과 유세정은 별장으로 들어오자마자 함께 샤워를 했다. 함께라기보다는, 유세정이 씻는데 김세진이 쳐들어간거였지만.

"오빠 나 피곤해.. 피곤해.."

욕탕에서 너무 많은 힘을 쏟았기 때문일까, 세정이는 정작 침대에서 곯아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처음에는 노력해보던 김세진은, 그러나 이내 포기하고 그녀를 꽉 껴안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바람이 스치고, 산속의 나무가 쏴아아- 울음을 터트린다.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세정아."

김세진은 쌕쌕- 고른 숨을 내쉬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응?“

잠이 가득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맞춘 채, 진중하게 말했다.

"결혼하자."

순간 잠이 싸악 달아난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대신······ 나중에."

이번에는 불만스러운 듯 모로 좁혀진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빼고서 물었다.

"······왜?"

"조금 먼 곳으로 출장을 다녀와야 될 것 같거든. 자세한 내용은, 돌아오면 말해줄게.“

세정이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달이 없는 어두운 밤에서는 표정을 관찰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녀가 지어준 미소 만큼은, 유달리도 선명했다.

"이번에는 언제 올건데."

"몰라.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몰라."

"······기다려주면?"

세진은 피식 웃었다.

"날 줄게."

"으윽. 오그라들어."

세정이는 짐짓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나 이내 그에게 진한 입맞춤을 선물해주었다. 그는 그 입맞춤을 허락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쿵-

헌데. 그렇게 점차 고조되어가는 분위기를 묘한 진폭이 방해했다.

대단할 건 없으나 그저 흘려보내기에는 심상치가 않다.

역시 그 불길함을 느낀 세정이는 눈을 번쩍 뜨고 침대를 나서려고 했지만, 김세진이 그녀를 붙잡았다.

"오빠, 지금······.“

"괜찮아. 괜찮을거야. 그러니 오늘은 같이 있자.“

단지 정도 이상으로 커진 균열에 의해 지반이 살짝 무너져내렸을 뿐이다.

아직, 2주라는 시간이 남아있다.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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