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파도 (2) >
대지는 재가 되어 스러졌고 하늘은 붉게 타오르며 갈라졌다. 무너진 지상에는 괴이한 점액이 들어섰으며 그 속에는 검은 무엇인가가 부글거렸다. 피막에 둘러싸여 부화를 기다리는 그것은 지독하리만치 새빨간 안광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파괴적인 눈빛에 난생 처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저 놈들에게 대항할 방법따윈 없다는 걸 그 순간에 직감했다.
살기 위해서는 도망가야만 했다.
기억을, 미련을, 후회를 남겨두고서 다른 세계의 저편으로.
하지만 뱀파이어에게, 인원이 한정된 통로를 허락할 인간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평생 그들의 골칫거리로서 살아왔던 자신들이기에.
그래도 가로막는다면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통로에 도달했다.
그러나, 인간은 오히려 우리를 도와주었다.
'인간' 마법사는 몰아치는 열풍을 흐트러뜨렸고, 역시 '인간' 기사는 정체불명의 괴마들을 필사적으로 막아세웠다. 허나 내 눈에 그들은 대항이 아니라 목숨을 버리는 행위로 비쳐졌다.
-무얼 하고 있느냐, 엘리! 어서 이리 와!
인간들의 분투를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대부가 외쳤다. 긴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통로를 건넜고, 고향을 탈출했다.
그렇게 난생 처음 보는 세계가 눈 앞에 펼쳐졌다.
"당신들이, 다른 세계의 피난민이십니까?"
또 다른 인간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인간들은 왜 도망치지 않을까? 어째서 우리를 도와주었을까?
그 이유를 당시의 나는 알지 못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다.
"······.“
과거에 사로잡힌 바토리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까마득한 아래로, 아래로 침잠했다.
불현듯 무연고의 자신감이 일었다.
우리의 고향은 균열을 극복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우리가 봐왔던 풍경을 회복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평온하고 따스한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넋이 나간 채 멍하니 균열 속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
"뭐 하는 거야!“
그러나 누군가가 팔을 붙잡았다. 흐릿했던 동공이 다시 선명해졌다. 바토리는 김세진을 힐끗 보고 다시 균열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이 순간에도 땅은 무너지고 있다. 아직 불완전하긴 하지만, 통로의 형상을 일정부분 갖추었다. 이 어둔 파도속을 항해하다 보면 그리던 고향에 도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순간,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우악스레 움켜쥐었다.
"너······."
"모두 꽉 잡아요!"
김세진은 바토리를 품에 끌어안은 채 소리쳤다. 모든 길드원들이 자신을 붙들었음을 확인한 그는 황급히 레비아탄 폼을 취했다. 그리고, 마도를 시전했다.
*
발 아래 끝없이 넓어지던 균열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일행은 순식간에 회의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모두 충격에 빠진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곳에 있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마치 지면이 통째로 균열화 되어버린 광경, 그토록 거대한 균열은 본 적이 없다.
"어떻게 된 겁니까?“
무거운 적막을 어렵사리 깬 사람은 김유린이었다. 그녀는 용기있게 물었다. 물론 대답을 요하는 대상은 바토리였다. 바토리는 복잡한 눈으로 김유린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뭐긴. 내 마나와 자기 육신, 그리고 이프리트의 깃털을 이용해서 균열에 자극을 준거지."
"이프리트의 깃털이요?“
"그 왜, 너네가 죽을뻔 한거 있잖니. 문어 다리처럼 생긴거.
"아.“
김유린은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토리는 그런 모습에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서 말을 이었다.
"그건 과거 우리 고향에 있었던 '마신'의 흔적이야. 주인을 직접 불사지르지 않는 이상 없어지지 않고, 머금은 마나의 '격'에 따라서 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말을 잠시 멈춘 바토리는 퍽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그 깃털은 무려 내 마나를 흡수했어. 그러니 이제 그 무구는 엘 라스의육체와 함께 균열을 확대시키는 연료로서 소모될거란다. 아무리 늦어봤자 이틀 뒤에 모든 일이 끝날테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라는 말이다. 김유린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선택을 해야하겠지. 고향을 버리고 다른 세계로 이주할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서 지구와 함께 스러질 것인지.“
바토리의 말이 끝나자, 유린은 다리에 힘이 살짝 풀렸는지 비틀거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때 바닥에 시선을 처박은 채 잠자코 듣고 있었던 김세진이 고개를 들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바토리는 시선만을 살짝 옮겨 김세진을 바라보았다.
"그 깃털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야?“
"..얘야. 마신이라고 마신. 신(神)이라는 한자가 들어간다고. 너는 어째 나보다 언어를 못하니?“
"어쨌든.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거지? 그럼 아직 시간은 있어.“
"······너는 진짜 어마어마한 병신이구나?“
바토리의 경멸스런 눈초리에도 그저 피식 웃어준 그는 품 속에 쟁여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이는 순간적인 기지의 결과물, '이프리트의 깃털'로 추정되는 새까맣고도 단단한 깃털이었다.
그걸 본 바토리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너··· 어떻게?“
"반응 보니까 맞나보네. 본능적으로 이게 약점이란걸 알았거든. 그래서 뺐었지.“
"······뭐, 칭찬해줄 만은 하지만, 그래도 이미 늦었어. 당장 내일 열릴 걸 고작 한두달 지연시켰을 뿐이야.“
맞는 말이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그것까지는 부정할 수 없었기에, 장내에는 다시금 묵직한 비관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밤이 되었다.
할 일도 없다. 회의를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집으로 감히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해결하려고 한 건데, 오히려 일을 그르쳐버렸다. 너무 급히 달려들었기 때문일까······
그건 다른 길드원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들도 회의실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새 바토리는 없어지고, 마음은 더없이 답답해져만 갔다.
김세진은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
"······저, 길드장 님?"
누군가의 목소리가 몽롱한 의식에 파문처럼 퍼졌다.
"할 얘기가 있습니다.“
눈을 게슴츠레 뜨니 릴리아였다. 꿈결처럼, 유달리 아름답게 느껴진다.
"무슨······.“
"일단 자리를 내주세요.“
김세진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 자고 있어서 상관 없을 것 같은데······.“
궁시렁거리며 일어나 회의실 한 켠에 있는 결계실로 걸음을 옮긴다. 결계실의 결계까지 가동한 뒤 대충 땅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하품을 하며 릴리아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뭔데요?“
릴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김세진은 왠지 모르게 그 미소가 자애롭다고 느꼈다.
"이제 우리, 시간이 별로 없지요? 균열이 곧 완전히 열리게 될 테니까요."
"아······."
잊고 있었는데. 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착잡한 탄식을 내뱉었다.
"잠깐. 근데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릴리아에게는 이 과정을 말해준 기억이 없는데.
그러나 릴리아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뭔가 오묘한 말을 건넸다.
"괜찮을거예요, 우리는. 그리고 지구는."
"······예?
릴리아는 확신에 차있었다. 세진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태연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균열은 세계에 빈틈을 새겨넣어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빈틈으로 인하여 아주 한없이 낮은 확률의, 균열이 없었다면 결코 있을 수 없었던, 아주 촘촘이 이어진 '기적'이 발생할 수도 있답니다."
그녀는 품 속에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거의 다 부서진 노트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는 김세진에게 내밀었다.
"한번 읽어보세요."
세진은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로 노트를 건네받았다.
"열면 부서질 것 같은데.."
"마법처리가 되어 있어요."
"아. 그래요? ······근데 이거, 뭔가 익숙하네."
뭔가 오묘하게 익숙하다. 김세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그 즉시, 그 익숙함의 이유를 알아챘다.
구체적으로 적혀진 날짜와, 그 아래 뭉뚱그려진 하루 일과, 그리고 그날의 감정까지.
이건 누군가의 '일기장'이었다.
"이건······.“
충격적이었다. 뒤통수를 에밀레종으로 얻어맞은 양 머릿속이 댕- 댕- 하고 울린다. 순간 숨이 막힐듯 괴로워져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릴리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 글자 씩 또박또박 찍어내듯이 말한다.
"이건, 당신이 쓴 일기랍니다. 정확히는, 미래의 당신이 쓴 일기······이지요."
"······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균열을 통해서는 시간을 넘나들 수 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긴 하지만, 그게 이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는데.
"모두 읽어보세요."
"일단, 일단······ 자리부터 옮깁시다."
김세진은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일기장을 품 속에 넣었다.
*
그는 근처 호텔로 자리를 옮겨서 일기를 읽었다. 꼬박 하루를 지세웠다. 도저히 보여주기 낯부끄러운 내용도 있었고, 바빠서인지 아예 누락된 날도 많았으며, 가장중요한 균열이 '완전히' 열린 이후의 부분은 아주 희미했다.
"이 예언서는, 아니 일기장은 저희들에겐 성경이나 다름이 없었지요. 이게 없었다라면 저희는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허망한 꿈을 믿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걸 제가 언제······ 줬습니까? “
"70년 전이었지요 아마.“
"근데 그런 것 치고는 젊으시네요."
"외면만 젊을 뿐이에요."
"하하.."
그건 그렇고 70년이라니. 되게 오래 걸리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전일지도 모른다. 김세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릴리아는 그런 그의 손을 꼭 붙잡아주었다. 그리고는 왠지 어색한 얼굴로, 영 갑작스런 말을 건넸다.
"지구는, 그리고 저희는 구원받을 운명이었던 겁니다. 세진 씨 덕분에요.“
결연한 존경이 담뿍 담긴 목소리였다.
"······그렇게 어르고 안 달래도 안 도망가요. 어차피 정해진 일인것 같은데요 뭐. 덕분에 저도, 지구도, 소중한 사람도 지켜낼 수 있게 됐으니 오히려 좋죠. ······앞으로 닥칠 일을 생각하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지만.“
애써 미소지은 김세진은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근데 이건 로드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요?"
그 놈이 했던, 아직까지도 머리속에 아른거리는 예언.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원본은 제 몸속에 영체화하여 넣어두고, 복사본은 '고서'의 형태로 번안하여 지하의 창고에 넣어뒀습니다. 로드는 그 복사본을 가져가서 연구했던 겁니다“
"······잠깐. 그럼 여태 뱀파이어들은 제 일기를 연구했던 겁니까?“
"후훗, 아니요. 아무리 그래도 그정도는 아니에요. 세진 씨의 일기를 연구한 건 로드 뿐이에요. 다른 뱀파이어들은 저희 고향에서 가져온 진짜 고서를 연구 한 거구요.“
"아하.. 제가 좀 멀리 나갔네요.“
"네, 그렇지요."
그러나 웃음기를 띠었던 대화는 잠시 뿐, 묘한 침묵이 두 사람을 채웠다.
똑각똑각. 초침의 흐름도 지금은 예민하다.
일기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김세진이 약간 체념어린 투로 말했다.
"근데, 이 일기대로 실천하려면.. 조금 많이 우울해질 것 같네요. 아, 우울함 보다는 지루함이 크려나."
"······뭐가 되었든. 많은 걸 포기하셔야 하겠지요."
릴리아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김세진을 바라보았다. 김세진은 그녀와 눈을 맞췄다.
"혹시, 위로가 필요하신가요? 저는 언제든지 준비가······"
그런데 릴리아는 그의 눈빛을 두고 뭔가 착각을 한 듯했다. 옷의 단추를 슬며시 풀어헤치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나가요. 혼자 있고 싶네요."
"네? 어 뭐야, 일기장에는······ 아, 장난을 치셨군요!"
"······풋. 나가요 나가."
그녀 덕분에 그나마 유쾌해졌다.
*
새벽해가 떠오를 적에야 김세진은 호텔을 나서, 이프리트의 깃털을 손에 쥔 채 멍하니 길을 거닐었다. 마신의 유해. 이걸 가지고 뭘 해야할 지는 명확하다.
그렇다면, 굳이 벌벌 떨며 지체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김세진은 고민없이 깃털을 꽉 쥐고 입 속으로 털어넣었다.
일기장에 쓰여있던 것처럼, 여러 알림창이 떠올랐다.
다만 언제나처럼 진화의 즐거움은 없었다. 그렇다고 음울하지도 않았다. 사명감도 없었다. 그냥, 무미건조하게 해야 할 일이라는 느낌만이 있었을 뿐.
[조건 완료: 신살의 늑대, 펜릴.]
-이프리트의 깃털을 섭취함으로써 내재된 가능성이 폭발합니다.
-그러나 정량이 아니므로, 단 '하루' 동안만 펜릴 폼을 취할 수 있습니다.
펜릴은 또 뭐냐.
절로 한숨이 지어졌다.
< 48. 파도 (2)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