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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몬스터-163화 (163/174)

< 48. 파도 (1) >

굿. 모. 닝~ 띵띵띵띵띵 띵띵······

"······스읍. 머야."

핸드폰 알람소리에 잠에서 깼다. 살짝 당황스러웠다. 알람이 울릴 때까지 쭉 잔 적은 별로 없는데······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잡아 힐끗 보니 무려 7시다.

새벽 6시에 마지막 회의를 잡아뒀었는데. 불안 속에서 메신저를 켜보니 과연 김유린과 하젤린을 비롯한 길드원들의 불만어린 문자폭탄이 잔뜩 쌓여있었다.

급히 몸을 일으키려다 문득, 무엇인가가 얹혀진 듯 약간 묵직한 왼팔 쪽을 바라봤다. 역시 세정이었다.

어제, 아니 오늘 새벽에 꽤나 격렬하게 달렸기 때문일까. 고른 숨을 내쉬며 아이처럼 푹 잠에 들어있다. 단 한 겹의 옷도 안 입은 채, 기절한 것처럼 고요하다.

"춥겠다."

이불을 덮어주면 되긴 하지만 그냥 꽉 안아주었다. 우윳빛 살결의 곱고 보드라운 감촉이 참 좋다. 이대로 한 번 더 괴롭혀주고 싶을 정도로.

"우응······.“

세정이의 볼에 내 볼을 맞대고 부비적거리니 그제서야 꼬물거리며 잠꼬대를 한다. 그 발버둥이 너무 귀여워서 더 꽉 껴안았다.

부르르-

가능하다면 계속 이렇게 있고 싶지만, 아쉽게도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번에는 전화다. 발신인은 김유린.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지. 세정이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몸을 일으킨다.옷을 입는 와중에, 별안간 세정이가 허함을 느꼈는지 베개를 꽉 껴안고 비비적거린다.

"귀엽네.“

뒤척거리는 등을 토닥여준다.

그렇게 그녀를 다시 편히 재우고서야, 나는 집을 나섰다.

* * * *

김세진은 회의실에 도착하자마자 무시무시한 시선을 맞딱드려야만 했다. 눈코 뜰새도 없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무려 새벽 여섯시에 모였는데, 정작 회의를 소집한 장본인이 한 시간 반 가량 지각해버렸으니.

"죄송합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상석에 앉았다.

"뭐, 어쩔 수 없지요. 죄송할 것도 없어요. 저희는 기다리면 되는 걸요. 어차피 총책임자는 세진 씨니까.“

요즘 마탑의 일로 신경이 다소 날카로워진 하젤린의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괜찮다니까요. 어서 회의나 시작하세요. 뭐 연애질 하느라 늦었겠지. 안 봐도 눈에 선해."

"······.“

김세진은 로스한델에게 힐끗 눈길을 보냈다.

"아, 예. 일단 기본적인 브리핑 부터 시작하겠습니다."

*

엘 라스의 제약회사 지하에는 이천여 명의 뱀파이어가 고서의 해석과 연구에 몰두하는 중이고, 나머지 이만 팔천은 사회를 활보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보건데, 열 명이서 이천 명을 상대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상대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건 학살이 되고 만다.

그래서 김세진은 방법을 강구해냈다.

2000명 중 가문의 영주가 있는 핵심적인 장소로 이동한 뒤, 결계를 사용하여 오직 영주와 그 최측근들 만을 상대하는 것.

기나긴 회의 끝에 나온 마지막 계획이었다.

"그러면."

김유린이 준비물을 챙기며 말했다.

"바로 출발합시다.“

"······당장이요?“

허나 이혜린은 뭔가 당황스런 얼굴로 어물쩍거렸다.

"그럼. 늦어봤자 좋을건 없잖아.“

"아직 준비가 잘 안 됐는데······.“

"무슨 준비가 필요한데?“

김유린은 이해가 안된다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회의실에는 아티펙트, 포션, 장비, 무기를 비롯한 귀중품들이 널려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저것들 다 훔쳐서 팔면 1조는 나온다.

허나 이혜린은 얼굴을 붉힌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모두가 그 모습을 두고 의아해하고 있을 때, 주지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김유린 기사님?“

"예?“

그는 김유린을 불러 살짝 속삭였다. 그제서야 뭔가 부끄럽고 또 납득한 얼굴이 된김유린이 헛기침을 큼큼 하고서 말했다.

"잠시 편의점좀 다녀오겠습니다. 혜린아. 너도 갈래?"

"네? 아, 네. 갈게요.."

"······아.“

그제서야 김세진도 눈치챘다. 회의 도중에 갑작스레 진한 혈향이 느껴지길래 로스한델이 몰래 수혈팩을 처먹은 줄 알았더니, 대자연의 마법 때문이었구나.

이혜린은 주지혁에게 들릴 듯 말 듯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고서 일어났다.

"고마워요······.“

주지혁은 아무 말 없이, 다만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

그걸 계기로 8시간 가량의 휴식을 충분히 취한 뒤.

"준비 되셨습니까?“

김세진은 일행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레비아탄의 팔과 다리를 비롯한 여러 부위를 꽉 붙잡고 있었다.

"""예.“"

"

"그럼, 이동합니다. 아 참. 계획은 '대화'라는 걸 잊지 마세요. 싸움은 그 다음입니다.“

좌표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이동할 공간의 풍경을 감겨진 눈꺼풀 앞으로 둔다. 그리고 순간, 공간이 뒤틀리는 듯 역한 감각이 인다.

뒤이어 눈을 뜨니 가장 먼저 어린아이가 하나 보였다.

귀엽고 천진하게 생긴, 외면상으로는 많아봤자 열 살 남짓한 소년. 소년은 갑작스런 적의 출몰에도 놀란 기색 없이, 어둡게 침잠한 눈동자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지만, 엘 라스 영주의 인상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김세진은 곧바로 결계를 쌓아올렸다.

그 즉시 공간이 새까맣게 물들며 세계와 분리된다.

결계의 풍경은 술자의 심상을 닮는다. 문득 이혜린이 겪었던 대자연이 생각난건지, 결계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녹음이 창연하게 우거진 자연이 되었다.

그 풍경 속에서, 김세진은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엘 라스의 지도자, 맞지?"

"······저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소년의 말은 뜬금없었다. 그래서 김세진은 감히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분의 아들이지요.“

세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뭔 무슨 소리야. 나를 두고 하는 소린가?“

"당신이 아니고서야, 그 분의 아들이 누구겠습니까“

"..그걸 알고 있는 셈 치고는 나이가 조금 많이 적은데.“

"네. 적습니다. 엘 라스의 핏줄에 나이 마흔이면 아직 한참 어린아이지요. 저는 8살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 모습이었습니다.“

세진은 문득 바토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분명 뱀파이어는 핏줄에 따라 별개의 특색이 있다고 했다.

"불노, 라는 건가.“

"예. 그건 그렇고, 당신 아버지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궁금하다. 자세한 내막은 확실히 모르기에, 미친 듯이 궁금하다. 허나 지금은 그런 걸 주제로 삼을 자리가 아니다.

"지금은 그딴 이야기를 하러온게 아니야.“

"그럼 무슨 말을 하고싶어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셨나요?“

김세진은 간단히 대답했다.

"마인. 그리고 균열."

"아. 그렇구나.“

소년은 나른한 얼굴로 눈썹만을 살짝 들어올렸다.

"죄송하지만 협상은 결렬이네요. 저희는 균열을 놓을 생각이 없습니다. 저희의 지상목표는 언제나 '귀향'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왜? 고향에 가지 않더라도, 조금만 있으면 별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을텐데."

"흠······ 우선, 저희가 더불어 사는건 불가능합니다. 근데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저는 당신의 부모를 언급해야만 합니다.“

"뭐?“

"괜찮으시겠습니까?"

김세진은 미간을 좁혔다. 소년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렇게 길진 않습니다.“

소년의 말은 이어졌다. 말대로 길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김세진의 아버지와 어머니. 에덴의 기사였던 두 사람은 뱀파이어 척살작전 일명 '뱀파이어와의 전쟁' 당시, 인륜을 한없이 저버린 잔혹한 처벌광경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임무 중에 우연찮게 엘 라스를 만나게 된 두 사람은 감정에 호소하는 그에게 속아넘어갔다. '과거로 돌아가 고향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는, 겉보기에는 결코 이상할 것 없는 대의(大義) 덕분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주 잠시 동안 엘 라스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노스페라투가 접촉하자, 그분들은 저를 배신하셨습니다. 저는 의아했지요. 균열을 연다는 계획은, 당시에는 노스페라투도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어떻게인지 알아내셨고, 그것에 관련되어 확고하고도 굳은 믿음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버지는 '믿음'을 들먹이며 저희 계획은 실패할 것이라고 매도하셨지요. 그리고 저는 그를 죽였습니다."

세진은 소년의 눈을 노려보았다. 도대체가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공허하고도 허무한 눈이었다.

"근데 그를 죽이고 나니, 그 믿음의 근원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에덴에 당신 아버지의 기록물을 비치해놓았죠. 만약 그 믿음의 대상이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혹시라도 찾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조금은 막연한 생각이었습니다“

세진의 머릿속에 섬광이 번뜩였다.

이제야 모든 일의 아귀가 짜맞춰지는 느낌이다.

에덴을 장악했다면 기록물의 처분도 분명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버지에 관한 사실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 이유는······.

"그리고 찾아왔습니다. '진세한'. 그가 당신 아버지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은 세계를 구원할 '믿음'이 될 자질이 충분했지요.“

김세진의 입가가 씰룩였다. 과연, 과거 진세한의 위용은 이런 오해를 야기시킬 만했지. 6개월만에 중상급기사라니. 저가 생각해도 영 말이 안 된다.

"······.“

"하지만 진세한은 죽었습니다. 저희가 죽였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당신들에게 이제 믿음은 없습니다. 희망도 없을겁니다.“

이것이 소년이 굳이 이 길지 않은 이야기를 꺼낸 이유였다.

더불어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는 걸 알리기 위해.

"···그럼, 너희는 그걸 믿고 이런 일을 벌인건가?“

"예.“

"아, 그게 말이지······ 약간 미안하긴 한데."

이번에는 이쪽이 진실을 알릴 차례였다.

"진세한은 안 죽었어, 애기야.“

대답은 하젤린이 대신했다. 김세진은 피식 웃으며 모습을 변용했다. 당연하게도,진세한의 얼굴이었다. 여태 여유로웠던 소년의 낯짝이 마치 수라처럼 일그러졌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로 경악했다.

"당신······!"

"이제서야 표정이 조금 변하네."

그러나 마음 놓고 여유를 부릴 틈은 없었다.

촤아아악-

흡사 악귀가 된 소년의 뒤에서 정체모를 촉수가 솟구쳤다. 그것은 열 갈래로 나뉘어 기습적으로 길드원을 모두 움켜쥐었다.

"무구, 라고 합니다. 로드가 저희에게 준 호신용품이지요. 안타깝게도 로드는 자신이 먼저 습격당할 거란 예상은 하지 못했지만요.“

김세진은 레비아탄 폼으로 변했다. 허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로테스크한 촉수는 끊기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을겁니다. 왜냐하면······."

그러나 소년이 무구의 견고함을 자랑하려던 바로 그때.

결계가 갈라지고, 소년이 자부하던 무구 또한 동시에 파괴되었다.

모두 피안개처럼 피어오른 적색 마나의 소행이었다.

"······더러워. 더러워.“

유혹적이면서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엘 라스는 갑작스레 나타난 그녀에게로 암색 마창을 쏘아보냈으나, 그 일격은 그녀의 살결에도 닿지 못하고 녹아내렸을 따름이다.

"풋. 이게 뭐니?"

피식 웃은 그녀는 단지 손가락 하나를 까딱함으로서 엘 라스의 전신을 결박했다.

"끄으.."

"포기하렴, 아가야.“

바토리가 말했다. 엘 라스는 이를 꽉 깨물었다.

"또, 또다시 동족을 죽이시려는 겁니까?“

"음.. 말에 어폐가 좀 있네. 나는 마인과 결탁한 놈들을 동족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단다.“

파괴와 패악으로 점철된 본성, 평균을 밑도는 지성, 그리고 책임질 수 없는 힘. 이세가지 원죄가 합쳐진 구제불능의 존재. 그것이 바로 마인이며, 따라서 마인은 만민의 적이다.

뱀파이어에게든, 엘프에게든, 인간에게든, 수인에게든. 예로부터 마인은 몬스터와 비슷한 취급을 받아왔다.

"······그럼 로드님은 왜 죽이셨습니까?“

순간 바토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로드도 마인과 결탁하였습니까?

그녀의 분노가 마냥 즐거운 듯, 엘 라스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분은 단지 저희의 살길을 찾으려 노력하셨던 것 뿐입니다.“

"닥치렴.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고."

"그건 무엇보다 당신이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로드는, 당신의 대부셨으니까요.“

결국 바토리는 참지 못했다. 그녀의 몸에서 쏟아져나온 새빨간 마나가 격랑처럼 치밀었다. 엘 라스는 그 마나의 해일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연구실의 바닥이 가라앉았다. 그 속에는, 세계와 세계의 틈, 들여다 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균열'이 존재하고 있었다.

"..너, 이 미친놈!"

찰나, 소년의 의도를 눈치챈 바토리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제 이 다음은 당신의 몫입니다. 고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바토리 님.“

소년은 자신의 몸을 균열에 내던졌다.

그리고 엘 라스와 그 속에서 휘몰아치는 바토리의 마나를 집어삼킨 균열은, 위협적으로 꿀렁이기 시작했다.

< 48. 파도 (1) > 끝

ⓒ 지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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