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마인 (2) >
엘 라스는 뱀파이어 특유의 불면과 현혹마법을 이용하여 꽤나 많은 사업체를 일궈냈다. 심지어 개중에는 취준생이라면 이름만 대면 알 회사도 있었으니, 과연 등잔밑이 어두웠다 하겠다.
그리고 10월의 어느날.
김세진은 일부러 엘 라스의 제약회사 근처로 놀러왔다. 표면적으로는 업무미팅이었으나, 실상은 엘 라스의 핵심인물을 납치하기 위함이었다.
새벽과의 형식적인 미팅을 끝낸 그는 보디가드 김유린과 함께 근처 맛집으로 향했다. [명인 수산]이라는, 제약회사의 정문이 훤히 내다보이는 횟집이다.
"길드장님 여기 보시지요.“
횟집 창문을 통해 회사의 전경을 관찰하고 있는데, 앞에 앉아 있던 김유린이 말했다. 힐끗 보니 전면 카메라를 이쪽으로 향한 채 사진을 찍고 있었다.
"웃으세요~“
억지로 입가를 비틀어 올리니, 찰칵─ 하고 사진이 찍힌다.
그녀는 결과물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곤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뭘 하는 지는 안 봐도 뻔하다. SNS에 업로드 하려는 거겠지.
"······요즘 SNS가 활발하십니다?“
은근한 목소리로, 비꼼의 의도도 한 스푼 섞어서 말했다. 그새 사진 업로드를 마친 그녀는 쓰게 웃으며 뒷목을 긁적였다.
"아 그게, 처음에는 기사단이 시켜서 했는데······ 더 몬스터 입단하고, 길드장님이랑 찍은 사진도 올리고 하니까 팔로워 수가 갑자기 확 늘어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천만명이 넘는데··· 그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켜드릴 순 없잖습니까."
세진은 소리내어 웃었다. 참 김유린 다운 변명이지 않은가.
"재밌나 봐요?“
"······옙. 이게, 색다른 세상이네요.“
유행하는 매체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김유린은 덧붙이며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실시간으로 파바바밧 올라오는 팔로워들의 반응을 확인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조심히 하세요. 세정이는 저랑 기사님이랑 스캔들 날까 걱정하던데.“
"에이. 어떤 기자가 감히 길드장님 스캔들을 내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간 길드장 님이 한 행각을 떠올려 보세요. 이정도는 감내하셔야 할 겁니다.
“
······그렇게 말하니 또 유구무언이다. 영웅오크와 인간폼을 번갈아가며 그녀를 농락한거나 다름이 없는데, 줘패지 않고 용서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지.
"..크흠. 마음껏 하세요. 하반신 제외 벌거벗은 몸도 찍혀드리겠습니다.“
"후후. 감사합니다~"
김유린은 곱상한 눈웃음을 치며 사진을 한 장 더 찍었다.
확실히 이 사람. SNS를 하면서, 또 기사단장의 미련을 내려놓으면서 곱절은 명랑해지셨다. 그게 너무 매력적이라서 조금은 곤란하지만.
그렇게 10분정도 수다를 떨고, 주문한 음식이 식탁 위를 가득 메웠을 때.
퇴근시간에 딱 맞춰 회사사람들이 하나 둘 씩 나오기 시작했다.
세진은 늑대의 동공을 발현한 채 그들의 면면을 샅샅들이 관찰했다. 과연, 모든 회사원들에게서 흐릿한 피의 흔적과 암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뱀파이어 맞네요. 회사 안에 몇 명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153명이면 충분히 많죠?“
"예. 그렇긴 한데······ 길드장님 직접 오실 필요가 있으셨나요?"
"정보원들은 뱀파이어 구분을 못하거든요."
예전에 개발한 뱀파이어 구분용 기구가 있긴 하지만, 뱀파이어는 그것을 교묘하게 피하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순간.
김세진은 피의 잔향과 암기가 유별나게 또렷한 놈을 발견했다. 숨겨지지 않는 위화감, 횟집 앞을 쌔애앵- 지나친 한 외제차였다.
그는 황급히 수정구를 꺼내 어딘가에서 대기하고 있을 정보원들에게 전했다.
"방금 페라쉐 타고 간 남자 있죠. 그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가장 강합니다.그 사람을 최우선 타겟으로 삼으세요.“
수정구에서 확인했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김세진은 식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갑시다.“
"······?“
그러나 김유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요?“
"예?“
확실히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꼭 밥을 먹으려고 온 게 아닌데······
눈이 동그래진 김유린이 의심하지 말라는 듯 다급히 손을 휘적였다.
"아니, 그 꼭 다 먹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 너무 빨리 벗어나면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의심을 사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어차피 납치는 첩보원과 용병의 몫이잖습니까."
"······흠."
일견 타당한 의견이었기에, 김세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회를 음미했다.
그렇게 20분이 지나자 그 많았던 회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김세진은 고작 열점 남짓을 먹었을 뿐이다. 나머지는 김유린이 다 처먹었다.근데 한 번에 회를 무려 4점씩 넣어서 싸먹는건 민폐 아닌가?
어찌되었든, 식사를 마친 김세진은 계산을 하고서 주차장까지 걸어갔다.
"타세요······ 뭐야?"
헌데 차 문고리를 잡고 뒤를 돌아보니 김유린이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는 사이 그녀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왜인지 모르게 양 손에 큼지막한 핫바를 든 채로.
"오는 길에, 맛있어 보여서······ 드시겠습니까?"
세진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자, 수줍게 변명하며 핫바 하나를 조심스레 건넨다.
그러나 '내가 먹을 거니까 받지 마라'고 얼굴에 다 쓰여 있다.
굳이 먹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일부러 받았다. 역시 예의상의 질문이었는지,김유린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다. 김세진은 피식 웃고서 다시 핫바를 돌려줬다.
"운전해야 돼서.“
"아, 어쩔 수 없군요. 제가 다 먹겠습니다."
그제서야 얼굴이 풀어진다.
"타세요."
그가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을 때. 수정구에서 연락이 왔다-타겟을 확보했습니다.
"오? 벌써?“
"우물우물. 과여, 더 모스터의 첩보워니네요. 대다납니다."
"······다 먹고 말하세요."
*
바로 다음 날. 납치당한 엘 라스의 젊은 장로 '데니얼 킴'은 바토리의 정신마법에 지배당해 모든 사실을 불어놓았다.
"그때, 길드장님을 미국까지 쫓아와 두억시니를 소환한 것도 그 놈들이라더군요.진세한을 죽인 것도 그놈이고요. "
"그래요?“
김선호의 보고에 김세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태 자신이 '당했던' 사건들은 죄다 엘 라스인가 하는 놈들의 소행인데, 도대체 바토리는 뭘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살짝 일었다.
"예. 그리고 에덴의 상층부를 절반 가까이 장악했다고 합니다. 에덴의 기록물을 이용하여 마인과 접선했고, 현재 빌딩 지하에 위치한 곳에서 마인들과 균열을 넓힐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는군요. 그 연구가 답답해서 뛰쳐나온 몇몇 마인들이 난리를 피운거구요.“
김선호는 관련 내용을 모두 적어놓은 보고서를 내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정부에게 제출하면 정부와 합작하여 엘 라스를 소탕할 수 있겠지.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그 많은 놈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렇다고 바토리의 말처럼 음지에서 학살하는 건 영 내키지 않는다.
"근데, 그 일은 어떻게 됐어요?“
고민하던 김세진은 돌연 떠오른 생각을 물었다. 약 한 달 전, TM사는 교도소에 수감된 뱀파이어에게 '에너지 바'를 납품하고자 한다는 계획을 정부에게 제출했었다.
"자세한 내용은 조한성 씨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아마 다음 주부터 돼지 피를 대신하여 공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 잘 됐네요."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만을 마시며, 여타 축생들의 혈액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대중들은 그런 오만함을 비난하지만 그들의 생리에 따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도 배가 고프다고 똥을 먹지는 않지 않은가. 뱀파이어에게 축생의 피는, 인간에게 배설물 이상의 더러움이다.
"다행이네요. 다양한 맛 개발은 거의 완료됐죠?“
"예. 마탑 마법사들을 동원하니 개발속도가 아주 빨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교도소에 납품될 에너지 바는 삼겹살 맛입니다.“
"좋네요.“
김세진은 흡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제 정말 머지 않았다.
바토리만 회유할 수 있다면. 그 무지막지한 강함을 인류의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뱀파이어 로드가 했던 말처럼, '괴물, 바토리가 영웅이 되어줄 것이다'.
***
그로부터 1주 뒤, 대한민국 유일 뱀파이어 수감시설 군산형무소에 에너지 바가 전격 공급되었는 소식이 메스컴을 타고 흘렀다.
뱀파이어들은 싸그리 죽여야 한다, 아니다 회유할 수 있따면 그렇게 해야한다─ 로 갑론을박을 펼치던 대중들도 그 에너지 바의 성과만큼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2주가 더 지나, 군산형무소의 소장이 그 성패를 알리기 위해 기자들 앞에 섰다.
교도소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는 이례적으로 김세진도 직접 참석했다. 헌데 소장은 요즘 한국에서 대통령보다도 권력이 막강하다는 그가 바로 눈 앞에 있으니 정신이 아찔할 노릇이었다.
소장은 떨리는 심장을 쓸어넘기며 침을 삼켰다. 마지막으로 심호흡까지 한번 한 뒤, 입을 연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실거라 생각하니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TM사에서제조한 이 에너지 바를 재소자들에게 공급한 '첫날'에는, 역시 모든 뱀파이어들이 거부했습니다.“
섣부르게 실패라 단정지은 몇몇 기자들이 탄식을 터트렸다.
"하지만 간수들의 노력을 통해 적어도 먹는 뱀파이어가 생겼습니다.“
'노력'.
대본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소장은 바꿔 말했다.
"······아니, 솔직히 강제로 먹였습니다.“
카메라 플레쉬가 번쩍인다.
"그렇게 강제로 먹이길 일주일 째.“
소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모인 사람들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뱀파이어들이 자발적으로 이 에너지바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소장이 미소 지으며 한 말에, 기자들의 환호소리가 회견장을 울렸다. 김세진은 소장의 목소리에 거짓이 없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쿵쾅쿵쾅. 미친 듯이 박동하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킨다.
"물론 에너지바의 비교대상이 축생의 피라서 그런건지는 자세히 모릅니다. 하지만, 재소자들은 모두 감탄했습니다. 인간의 피보다도 훨씬 맛있다면서요."
그럴 줄 알았다. 뱀파이어들은 조리된 음식을 평생 먹어보지 못했으니, 난생 처음맛보는 삼겹살은 신세계였겠지.
"그리고 마침내 2주가 지난 지금. 하루에도 수십번씩 벌어지던 소요행위는 하루에 한 번꼴로 줄어 들었습니다. 그마저도 아직 에너지 바를 맛보지 못한 신입 재소자들 뿐이었습니다.“
김세진은 감정이 벅차올라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기어코 따라와 그의 옆자리를 꿰찬 몇몇 국회의원들도 무척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따라했다.
"형벌의 목적은 범죄자들의 '교화'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태 뱀파이어 관할 교도소의 소장으로 있으면서 그러한 견해에 회의적이었습니다. 하지만이번에는 난생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뱀파이어들을 교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소장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기자회견을 끝내고 단상을 내려왔다. 그리고 김세진에게 감사하다 말하며 손을 건넸다. 방금까지 웃고 있던 국회의원들이 눈을 부라리며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과민반응을 했지만, 김세진은 그들을 물리고서 소장의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세진의 말에 소장은 고개를 한사코 저었다.
"아니요.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이 악수는 여러 방송국에 실시간으로 방영되고 있을 것이었다.
지금 현재를 지켜보고 있을 뱀파이어들은, 그리고 바토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김세진은 그게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 47. 마인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