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마인 (1) >
평온한 바람이 은은하게 부는 강.
김세진은 김선호와 함께 횡성의 섬강으로 나왔다. 김유손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를 강줄기에 흘려내기 위함이었다.
상류는 굳이 배를 타야 하나 싶을 정도로 얕았지만, 중하류에 다다르니 배를 만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륵- 사륵-
급조한 조각배로 물결 가르는 소리를 즐기며 항해한다.
야트막한 선상에 와 닿는 선선한 바람과 하천의 침식이 일궈낸 경승지들. 그 고색창연한 자연의 산물을, 김세진은 갑판 위에 서서 감상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처음 만나셨던 장소입니다. 매일 꿈속에서 이곳을 그리셨겠지요.“
김선호가 손으로 강물을 쓸으며 말했다. 추억에 잠긴 듯한 목소리였다.
김세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첫 만남 장소가 이만큼 아름다운 곳이라니, 참 행복하셨겠습니다.“
"하하······ 그렇죠. 그런데 말입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나이는 제가 더 많은데 길드장 님이 더 의젓하신 것 같습니다.“
"흠. 저는 부모님 두 분이 꽤 오래전에 모두 돌아가셨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이미 인생에서 가장 쓴 교훈을 배운 셈인거죠. ······그런데 형님. 말 편하게 하셔도 된다니까요?“
"에이. 그러면 오히려 제가 불편합니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절대로요."
"······후우."
그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할 말이 없었다. 허나 둘 다 어색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경치를 감상하며 오랜만의 평화로움을 즐길 뿐.
그렇게 잠자코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데, 어느 순간 김선호가 물었다.
"함께 하시겠습니까?“
유골함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김세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선호 씨의 몫입니다.“
"······."
김선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유해를 강물에 흩뿌렸다. 순백의 가루는 천진하고 명랑한 모습으로 강물에 스며들어 아래로, 그리고 아래로 가라앉았다. 순간, 유골이 스미는 강표면을 바라보던 김선호의 눈가에 눈물 한방울이 고여 별빛처럼 반짝인다.
김세진은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저 멀리 고산 주위로 늘어선 나무들은 이미 가을을 느꼈는지, 다채로운 단풍이 들어 있었다.
그는 왜 김유손이 이곳에 자신의 유골을 흘려달라고 부탁했는지 이해되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 * *
김세진은 적적한 마음을 채 털어내지 못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멘탈이 약간 많이 긁힌 터라 편안한 마음으로 쉬고 싶었는데, 주위에서 가만히 두질 않았다. 여전히 혼란스런 세계는 그에게 참 많은 걸 요구했다. 아티펙트, 무기, 용병, 그리핀, 포션, 그리고 마기서······.
"아 맞다. 오빠. 영웅오크 다시 발견됐데.“
김세진이 조한성과의 통화를 끝내자마자, 유세정이 그의 허벅지에 누운 채로 말했다. 그 즉시 피로에 절었던 김세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
"응. 또 어린 기사 한 명 구해줬다고 하네.“
"어디서?“
폭발에 휘말려 모두 산화한 줄로만 알았다. 오우거와의 결전 때문에 부락지가 완전히 궤멸되었으니.
"부락지 근처에서. 다시 재건하고 있는 것 같데.“
"······다행이네.“
김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 시일내에 다시 한번 가봐야겠다. 마침 나 대신 양산형 무기를 만들어 줄 인재가 필요했었는데.
유세정은 그런 그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아 맞다, 오빠. 근데 오늘 무슨 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
"미뤘어.“
"······응? 그거 미룰 수 있는 종류 맞아? 분명 스페인 대사 만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정정하자면, 대사가 아니라 수상이다. 포션협약을 비롯한 여러 상의를 하기 위해서, 더 자세히 말하면 그 자리에서 체결하기 위해서, 수상이 직접 찾아오려고 했었다.
헌데 타이밍 안 좋게 김유손이 별세하였기에 시일을 조금 늦췄다.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알잖아.“
김유손도 공식적인 더 몬스터의 길드원이다. 게다가 몬스터 용병단의 1대 단장이셨기에, 몇몇 언론에서도 지면을 할애하여 그의 별세에 유감을 표했다.
떠올리니 다시 울적해진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언제나 마음 아픈 일이구나.
"오빠?"
어느새 그늘이 드리운 김세진의 얼굴을 바라보며, 유세정은 몸을 일으켜세웠다.
"······어어?"
그리고는 김세진을 순식간에 자빠뜨린다. 침대에 넘어진 그의 눈앞에 말랑말랑한감촉이 진하게 와닿았다.
매번 생각하던 건데, 요거요거. 첫 만남때에 비해서 분명히 커졌다. 언제 수술이라도 한 건가······
"남자들은 이러면 기분 좋아진다는데.“
그녀의 기특한 말에 김세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잘 배웠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그녀는 그의 목을 꼭 껴안았다.
몰캉몰캉하고 어쩐지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부위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다 보니, 울적한 파문이 일었던 정신이 점차 온유해져간다.
"근데 어째 예전보다 좀 커진 것 같다?“
"······특성의 힘을 조금 빌렸지. 그리고 앞으로도 빌릴 예정이야.“
세정이는 짐짓 결연하게 말했다. 김세진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서 눈을 감았다.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이 안정되니 솔솔 졸음이 오네.
필름이 드문드문 끊겨가던 그때.
별안간 세정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 맞다. 오빠 근데 요즘 김유린 기사님이랑 너무 자주 같이 있는 거 아냐?"
"······스읍. 갑자기 또 무슨 소리야.“
곧 잠에 들기 직전이었는데. 김세진은 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요즘 밥 같이 먹는다면서. 사진도 자주 찍히는데? 어째 나보다 더 빨리 스캔들 나겠다?“
방금 까지는 현모양처였으면서, 이번에는 비아냥거리며 째려본다. 위에서 아래로 노려보니 왠지 모르게 위압적이다. 그래봤자 귀엽지만.
세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 때문이야."
아무래도 상의할 대상이 김유린 밖에는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부친상을 당한 김선호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젤린은 마탑 일로 미친 듯이 바쁘고 유백송은 너무 어린애 같은데 반하여, 김유린은 작전경험도 풍부하고 듬직하며 믿음직스러우니까.
아마 그녀가 남자였으면 평생토록 형님으로 모셨을지도 모른다.
"맨날 일 때문이래 진짜.“
견제할 대상이 또 늘었어- 유세정은 투덜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처음에는 팔로워가 무려 1억 5천에 달하는 김세진의 SNS를 기웃거리다가, 그 1/10 수준인 김유린의 SNS를 염탐한다.
최근에 업로드 된 10개의 사진 중 무려 8개가 김세진과 함께 찍은 사진. 이거 때문에 팔로워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고 들었다.
"와, 어이없네. 이거 뭐야? 스승님 그렇게 안 봤는데, 요즘 너무하신다야. 나보다300만이나 높아졌잖아.“
"또 뭐가 그렇게 화나셨으까······.“
"됐어. 조용히해.“
퉁명스레 대답한 유세정은 SNS가 아닌 뉴스란을 살폈다. 혹시라도 스캔들 비스무리한 기사가 떴나 안떴나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는데, 찾으려는 스캔들은 안 나오고 꽤나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 저. 오빠. 스페인에 무력시위가 발생했다는데.“
"엉, 왜?“
"'무능한 외교능력으로 김세진과의 만남이 결렬되었기 때문에'······ 오빠, 그 스페인 괜찮은 거 맞아?“
"······.“
두사람은 침묵했다.
* * *
과연, 사회적 위상과 영향력이 드높다는 건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김세진은 부랴부랴 스페인 수상과의 회담을 가졌다. 수상은 스케쥴을 그렇게 쉽게 조정할 수 있는 직책이 아님에도 한 달음에 달려와 주었다.
갑작스런 회담에서 김세진은 포션협약과 그리핀 임대, 오크제 무기의 일부 수출계약까지 체결했다. 그렇게 수상의 절절한 감사인사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의 시위가 진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참,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쉴 시간은 없었다. 장례식장에 될대로 대라는 식으로 던졌던 부탁을, 바토리가 응낙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로 다음 주에 회의실로 찾아왔다.
"안녕."
"······.“
바토리가 들어서자 장내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뭐예요······?“
이혜린이 조심스레 묻는다. 김세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탁상위에 놓인 신문을 가리켰다. 헤드라인에는 '마인, 또다시 출몰' 이라는 활자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설마, 그것도 저 여자의 짓이라는······.“
"말버릇이 나쁘네. 저 여자라니.“
"흐으아."
바토리가 살짝 성을 내며 다가왔다. 이혜린은 그녀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겁 안 먹으셔도 돼요. 도와주기 위해서 온거니까. 그때 우리가 로드를 사살하는 데 협력해준 대가라고 보면 돼요.“
"그래. 그게 맞아. 약속 안 지키는 로드가 되기는 싫거든. 엘 라스가 하는 짓거리도 영 마음에 안 들고."
바토리는 상석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그리고 뭔가 말을 하려다, 문득 바닥에 배를 깔고 앉아있는 콘락을 발견한 듯 눈을 반짝인다.
그녀는 크릉 크릉 재채기를 해대는 콘락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김세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묻는다.
"······얘 누구꺼니?“
"아. 일단 내 스킬로 만든거긴 한데. 회의실 NPC."
"그래?“
바토리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탐욕이 담긴 눈동자다.
"나 줘.“
"안 돼!“
그런데 별안간 김유린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 바토리가 당황할 정도의 대범함이었다.
"······뭐야?“
"회의실 NPC라니요! 콘락은 저희 가족입니다!“
열렬하게 성토하며 콘락을 감싸안는다. 안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커다란 늑대에 사로잡힌 모양새였지만, 어쨌든 그만큼 필사적이었다. 그에 바토리는 기가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 뭐야 저······."
"안 돼!“
김유린이 빼액 고함을 내지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대응은 옳지 않았다. 보통 남에게 소중한 것일수록 더욱 빼앗고 싶어하는 심보를 못된 심보라고 부르는데, 바토리는 그 못된 심보의 표상이나 마찬가지니까.
바토리는 얼굴을 무섭게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냉엄한 목소리로 고한다.
"······내놔. 지금 당장.“
그렇게 잠시동안, 콘락을 사이에 둔 실갱이가 벌어졌다.
* * *
콘락의 소유권 쟁탈은 바토리의 승리로 끝났다.
바토리는 펑펑 우는 김유린을 바라보며 승리감과 우월감에 고취되었지만, 김세진은 바토리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소환을 취소하고 다시 회의실에 콘락을 소환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바토리가 조금은 미안한 목소리로 연락을 해왔다. 콘락이 집을 나간 것 같다고.
그러한 후일담은 어찌되었든, 김세진은 그 날 바토리가 조언해준 내용들을 토대로 더 몬스터의 지하 정보망을 가동했다.
과연 정보원들의 능력은 출중했기에, '엘 라스'의 소재는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엘 라스 지도자의 위장신분은 제약회사 대표의 아들, 그리고 나머지 수하는 그 회사의 직원.
"어떻게 할거니?“
바토리의 물음에, 김세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엇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죽여야지.“
"······머릿 속에 죽인다 살린다 두 개밖에 없냐?“
"그럼 다른 뭐가 있는데? 뱀파이어를 너무 얕보지 마.“
김세진은 그런 바토리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에너지 바 하나를 꺼냈다.
"뭐야 이건?“
"배고파?“
"······별로.“
"그럼 부하들한테 먹여봐.“
바토리의 입장에서는 난데없는 개소리였기에, 그녀는 얼굴을 있는 힘껏 찌푸렸다.
"내가 왜? "
"뱀파이어 전용 식량이야. 식량 문제만 해결되면, 고향으로 안 돌아가도 되는거 아닌가?"
"..뭐?"
김세진은 적당히 혼날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다. 왜 주제넘은 일을 했냐고 말이다.
"······너 미쳤구나?"
하지만 그 날.
김세진은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 진짜 죽기 직전까지 처맞았다. 포션이 없었으면 아마 쇼크사 했을 정도의 격통이었다.
바토리는 분명 김세진과 똑같은 고통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손 속에 자비가 없었다.
세진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고향'은 그녀의 역린이구나.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거구나.
마지막으로 그녀는 시체처럼 널브러진 김세진의 등허리를 짓밟으며, 다음부터 이딴 짓을 하면 협력따윈 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 47. 마인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