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긴장 (3)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길드장님."
무려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조한성과의 회의가 드디어 끝났다.
"죽겠네 죽겠어······"
조한성이 사라지고 난 회의실, 김세진은 그대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시야가 흐물거리고 머리는 지끈거린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길드원들이 아직도집에 가지 않고 남아있었다. 이부자리까지 끌어안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오늘 여기서 캠핑이라도 하려나 보다.
─진 무도유파가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에 특히 효율적이라는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가 밝혀짐에 따라, 현재 '진 무도'는 유례없는 활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단장 이유진······.
TV 뉴스에서 이유진과 '진 무도'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안색이 상당히 좋아진 이유진의 기세등등한 잇몸미소가 보였다.
[진 무도유파 단장/더 몬스터 길드원]
─현재 전 세계적으로 2000여 개소의 도장을 개설하였고, 십만에 가까운 무도인들이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아주 경이로운 성장세군요. 근데 단장님은 진 무도유파의 장점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단 무기에 구애받지 않는,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적을 상대할 수 있어대(對) 몬스터 전에서 상당히 유리합니다. 또한 건틀렛의 경우에는 다른 병장기보다 제조공정이 간단해, 같은 품질일지라도 물량이 많고 값이 쌉니다. 그런 여러 면들이 합쳐져 저희 무도가 몬스터 토벌에 각광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벌써 저렇게 커다래졌어?“
김세진은 인터뷰의 내용에 감탄했다. 물론 더 몬스터가 무지막지한 지원을 해주기는 했지만, 2년도 채 안되어 저 정도의 규모라니.
"저거 요즘 엄청 유명해요. 교본과 체식이 엄청 구체적으로 남아있어서 배우는 게 쉬운데다가 효율도 좋거든요. 말도 안되는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이죠. 저희 기사단도 이번 신입기수에 진무도인이 무려 4명이나 끼었다니까요. 10명 밖에 안 뽑았는데.“
이혜린이 Tv를 보며 대답했다.
"오호라.“
"근데, 저 단장이라는 아이도 우리 길드원이죠?“
김유린이 손에 턱을 괴고 물었다. 그 대답은 주지혁이 대신했다.
"예. 몇 번 만나봤는데, 좋은 사람인 것 같더군요.“
"······당신이 저 사람을 왜 만나요?"
그런데 별안간 이혜린이 눈을 가자미처럼 좁히고서 주지혁을 째려본다. 당황한 주지혁이 더듬더듬 변명을 하는 순간에, 별안간 이어지던 뉴스 화면이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그러더니 앵커가 긴급속보라며 대본을 바꿔서 읊는다.
─강원도 도처에 '마인'이 출몰했습니다. 이 마인은 오우거 계통으로 보이며······
거구의 사내가 눈알이 시뻘개진 채 난동을 부리는 영상이 선명하게 흐른다. 순간 회의실의 모두가 숨을 죽이고 화면을 응시했다.
근 10년간 '마인'이라는 족속은 몸을 드러내지 않았다. 만약 출몰했다면 그 즉시 척살당했다. 그만큼 현대사회에서 '마인'은 뱀파이어보다도 더한 공적으로 여겨진다.
뱀파이어는 시민을 습격하는데 있어 '생존을 위해'라는 이유가 있지만, 마인은 그저 파괴와 살육을 즐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마인이 출몰했다. 그것도 아주 대놓고.
"······출동할까요?“
김유린이 이불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나 김세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렇게 나대는데, 이미 진압 당했을겁니다.“
─이 마인은 방금 출동한 그리핀 라이더 '김인수'에게 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때마침 앵커가 말을 덧붙였다. 김세진이 어깨를 으쓱하자, 김유린은 다시 이불을 끌어안았다.
"근데 저 김인수. 길드장님이랑 인연 좀 깊은 사람 아니에요?“
돌연 이혜린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조금 악연이 있었죠.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세정이가 알려줬어요. 김인수랑 길드장님이 자기를 두고 경쟁했다던데~?“
"풋.“
경쟁이라······.
김세진은 마냥 웃었다.
김인수와의 첫만남은 그다지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미운정이라는 건 정말 실존하는 감정이었다.
김세진은 세 달전 즈음에 김인수를 만났고, 그때 자신이 그의 무기를 부숴버렸던 게 생각나 오크제 무기를 하나 선물해주었다. 김인수는 고맙다며, 또 과거의 어리석었던 자신을 회개하며 눈물을 글썽였었지.
"뭐? 경쟁을? 오히려 세정이가 세진 씨 지키려고 노력해야 되는거 아닌가? 안 뺏기면 다행일텐데······"
"농담이겠죠 뭐."
"농담이라도, 세정이 요즘 너무 거만해.“
하젤린이 탐탁잖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허나 그 즉시 김유린의 날카로운 눈빛이 쇄도한다.
"······아니, 그, 그냥. 근데 객관적으로 봐도 그렇잖아.“
"그렇긴 하지.“
난데없이 동의하는 김유린, 김세진은 마냥 흐뭇했다.
"그래도 그런 말은 삼가하는게 좋아.“
"알아써······.“
하젤린은 혀를 꼬부랑거리며 김유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김유린은 그것이 부담스러운 듯 옆으로 살짝 비켜난다.
김세진은 그런 둘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 마탑의 탑주 임명 소식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예상대로 커다란 반향과 논란이 동시에 일었다. 비록 하젤린이 국가 공인 A급(상급) 마법사이긴 하지만, 근 8년 동안 경력이 단절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하젤린이 더 몬스터의 길드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중의 여론은 금세 호의 쪽으로 돌아섰다. 물론 '대중의' 여론만.
"저, 물 더 없습니까?“
"······조금만 참아요."
새벽&TM 마탑의 최상층.
김세진은 하젤린의 집무실 앞에 섰다. 허나 동행이 있었다. 바로 김유린.
하젤린의 일터에 찾아오는건 처음이었기에, 그녀는 누구보다도 긴장한 듯 아까부터 계속 물을 찾고 있다.
"저,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먼저 들어가 계세요.“
"예? 아니······.“
김세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쏜살같이 달려나간다. 그는 그 뒷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지켜보다 집무실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누구세요······
처음에는 분명 힘도 없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김세진입니다. 유린 씨도 함께 왔어요.“
그러나 그렇게 말한 즉시 반응이 뒤집힌다.
"잠깐만요!"라는 다급한 외침에 이어, 우당탕탕- 문 저편에 부산이 일더니 마법의 기운도 미약하게나마 아른거린다. 아무래도 어지럽혀진 내부를 마법으로 청소하고 있는 듯하다.
김세진은 여유로이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약 5분정도 지나니 문 너머에서 사무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시지요.
괜시리 냉엄하다. 김세진은 설핏 웃으며 문을 열었다.
하젤린은 다리를 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저게 바로 마탑주 스타일인가? 김세진은 웃음을 삼키며 집무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착석했다. 하젤린은 김세진의 뒤를 기웃거렸다. 김유린을 찾는거겠지.
"화장실 갔다 온답니다. 그건 그렇고 어디, 벌써 열흘 째인데 일은 괜찮아요?“
"네? 아······ 괜찮아요."
하지만 안색은 좋아보이지 않는다. 김세진이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자, 그녀는 떠듬떠듬 말을 덧붙였다.
"좀 적응은 안 되지만."
"뭐가 적응이 안돼요?“
"마법계요. 너무 오랜만에 돌아와서.. 그들의 생리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흠."
사실 대강 내용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파격적인 인사로 인해 파벌이 벌써부터나뉘어진 것이다.
헌데 파벌이라는 단어도 무색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한 쪽은 하이엘프 '샤혼'을 주축으로 한 정통파인 반면, 다른 쪽은 하젤린 혼자 뿐. 나머지는 아무 액션 없는 중립이다.
"그거 말고는요?“
"나머지는 괜찮아요."
하젤린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마 심려를 끼치기 싫어서일 터.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하젤린이 먹히는 건 시간문제. 그렇게 되면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다만 다행히 그녀에게도 확실한 아군 한 명 쯤은 있다. 그리고 그 아군은 다른 썩어빠진 인간들을 모두 합친것 보다 훨씬 든든할 테지.
"그럼, 뭐. 하젤린 씨가 스스로 적응하실거라 믿어요 저는.“
"그럼요. 걱정하지말아요.
아주 찰나, 하젤린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스치긴 했지만 그것 뿐이었다.
"아, 맞다."
그럼 장난은 이만 됐고. 이어서 김세진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두 권의 장서를 꺼냈다.
"이거. 잊어버릴 뻔 했네.“
아직 미발매 상태인 방배동 No.27과 No.28 마기서.
그 겉표지를 확인한 순간 하젤린의 얼굴에 경악이 번져간다.
"이, 이걸 왜 저한테?"
"곧 발매할 마기서인데 검수할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한 2~3명정도. 그 검수할 마법사를 뽑는 걸 하젤린 씨한테 위임할게요."
이건 방배동 마법사가 하젤린을 인정한다는 상징이며, 하젤린에게 어마어마한 칼자루가 되어줄 것이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세요.“
"네, 네? 어디 가시는데요? 세진 씨. 갑자기 이렇게 툭 내던지고서 바로 돌아가면저 곤란합니다?“
"쓰고 싶은대로 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곧 유린 씨 올텐데, 둘이서 얘기 나누셔야죠.“
그때 마침 김유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세진은 그녀와 바통터치하듯 나갔다.
김유린이 황급히 어디가냐며 목놓아 부르짖었지만, 김세진은 냉정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10일 뒤. 하젤린이 마기서를 이용하여 마탑을 정복했다는 희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흐뭇할 틈은 없었다.
김세진은 김선호에게서 한 통의 문사메세지를 받았다.
김유손이 위급하다는 내용이었다.
김세진은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급히 달려갔다.
"길드장 님.“
"오셨어요······?"
병실에는 이미 김선호를 비롯한 길드원들이 모여 있었다.
분명 2주 전에 병문안을 왔었는데, 김유손의 상태는 그때보다 훨씬 안 좋았다. 피골이 상접하다는 형용이 진정으로 이해되었다.
김세진은 김유손이 누운 병상 옆의 의자에 앉았다.
때마침 그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세진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진다.
세진은 뼈만 남다시피한 그의 손을 잡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김유손. 가장 먼저 자신의 모든 비밀을 밝혔고, 그렇기에 가장 의지했었던 사람. 그를 보며, 그 같은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고집이 참 강하십니다.“
여러 의미가 담긴 김세진의 말에, 김유손은 그저 웃었다. 그리고는 눈을 찡긋한다. 김세진은 그의 입에 귀를 가까이 댔다.
-오셨습니까.
"그럼 왔죠.“
김세진은 웃었다. 다만 떨리는 목소리와 눈가에 고인 눈물은 어찌할 수 없었을 따름이다.
-오랜만에 꿈을 꿨습니다.
김세진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김유손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왜요?"
-가까운 미래에서는 한 영웅이 나타나 세상을 구했습니다.
김유손이 김세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건, '아마', 김세진 씨. 당신이었을 겝니다. 그래서 저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김세진은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무슨 소리인지, 그때처럼 정정한 목소리와 모습으로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영영 없었다.
김유손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이해할 틈도 주지 않고, 영원히 눈을 감아버렸으니까.
-그럼. 이만.
그게 김유손의 마지막 한 마디였다.
"하아······"
김세진의 짙은 한숨이 너저분하게 가라앉았다.
"아, 아버지!"
김선호가 침대로 달려들었다.
뒤이어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울음이 병실을 가득 채웠다.
아직 중학생이 채 안된 김선호의 딸은,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보며 흐느꼈다.
슬픈 소리가 가득하던 그 날.
창밖에는 담백하리만치 화창한 여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 * *
김유손의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김세진이 참석한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은 몹시 많았다. 허나 김세진과 김선호는 모두 거절했다.
김선호는 아마 그들이 모두 참석했더라면 부조금으로 10억은 벌지 않았을까, 따위의 농을 하며 슬픔을 달래고자 했다.
그러나 단 한명, 만남을 거절할 수 없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에밀리아'였다.
거절하면 보란 듯이 살해당할 테니까.
"무슨 일이지?“
김세진이 눈가의 물기를 닦아내며 물었다. 왠지 모르게 피곤해보이는 바토리는 시덥잖은 말은 건너뛰고서 본론부터 말했다.
"너, 진세한이라고 아니?“
"······알지.“
순간 뜨끔했지만, 김세진은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놈을 죽인 놈이 엘 라스의 뱀파이어거든? 근데 그 엘라스 놈들이 마인이랑 결탁했어. 아무래도 나도 몰랐던 비밀이 있었던 것 같아.“
김세진이 얼굴을 굳혔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나는 그냥 그걸 알려주려고, 오해하지 말라는 의미로 온 거란다. 약속을 안지키는 것처럼 비쳐지기는 싫거든."
바토리는 그렇게 말하고 냉정하게 뒤돌아섰다. 하지만 김세진은 아직 할 말이 남았을 따름이다.
"기왕 온 김에, 도와주라.“
"······.“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허나 곧 뒤돌아선 그녀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도와달라고.“
"······너 진짜 미쳤니?“
"왜. 같이 하면 좋잖아. 어차피 균열은 막을 수 없는 거라며. 그럼 상부상조 하자고.“
김세진은 당당하게 웃었다.
바토리는 아무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얼굴에 새겨졌던 무서운 주름은 사라지고, 다만 기가막혀 할 뿐이다.
< 46. 긴장 (3)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