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긴장 (2) >
새벽&TM 마탑의 핵심직책은 대부분 채워졌다. 일반회사로 따지면 임원격인 부탑주와 7인의 수석마법사, 사원급인 상급 중급 하급의 자리까지 모두.
헌데 여기서 '부탑주'의 이름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부탑주에 임명된 마법사가 뉴욕의 심장부에 위치한 세계 2위 마탑, '트리티니' 마탑의 부탑주이자 하이엘프'샤혼'이었기 때문이다.
임명발표가 난 직후, 샤혼은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받아준 새벽&TM마탑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것도 언제 배웠는지 모를 유창한 한국어로.
또한 바로 아래 간부인 수석마법사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서울마탑 전 부탑주, 부산마탑 전 탑주 등등······ 모두 한국 혹은 외국의 명망높은 마법사들 뿐이었다.
허나, 다른 모든 직함이 채워져 가는 와중에도 아직 가장 중요한 한 자리는 여전히 공석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의문을 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곳은 방배동 마법사, 그가 거머쥘 자리이니까.
그리고 한때는 마법계에 몸을 담갔지만, 불의의 사건으로 인해 스스로 물러난 하젤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방배동 마법사, 김세진이 자신을 직접 호출하기 전까지는.
"······네?“
김세진의 사무실에서, 하젤린이 멍하니 되물었다. 휘둥그레진 그녀의 눈동자엔 의아와 의문이 가득했다.
"어때요? 저는 하젤린 씨가 적임자라고 생각하는데.“
김세진은 웃으며 말했다.
그가 하젤린을 부른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를 탑주의 자리에 앉히는 것.
언론은 뭔 거지같은 인사냐며 기함할지 모르겠으나 마냥 난데없는 인사임명은 아니다. 지금은 비록 저명한 '연금술사'인 하젤린이지만, 처음 그녀의 시작은 마법이었으니까. 다만 자신의 감정을 도사리지 못한 죄로 인하여 스스로 물러났을 뿐.
그러나 김세진은 그녀가 여전히 마법에 미련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매일같이 마법사 커뮤니티를 들여다볼 이유도, 마법 하나를 익히고선 아이처럼 방방 뛰며 좋아할 이유도, '셰나린'이라는 가명과 위조신분을 만들어가면서 몰래 마법사로 활동할 이유도 없으니까.
"······.“
하지만 하제린은 침묵했다. 아마 김유린 때문이겠지. 해묵은 갈등과 그로 인한 죄책감이 해소되지 않는 이상, 그녀는 평생 마법계로 돌아갈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게······."
하젤린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약하고도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세진 씨. 제안은 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실력이······“
"아마 샤혼보다 뛰어나실겁니다. 방배동 마기서를 완전히 습득하셨잖아요?“
하젤린은 요 근래 길드서고에서 살다시피 했다. 물론 방배동 마기서 때문.
현재 그녀는 No.01부터 No.26까지 모두 익혔고, 이미 자신만의 방법으로 파생마법을 창조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니 능력은 충분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아니, 용기가 없었다.
"그건 오롯이 마나문신 덕분이에요. 테크닉으로 안 되는 걸, 불어난 마나량으로 커버한 것 뿐이지요. 그리고 저는······.“
더 잇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입술만 달싹거릴 뿐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다.
김세진은 그 이유를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대강은 알고 있었다.
"김유린 씨도 허락 하셨어요.“
"······예?“
놀랍다기 보다도 차라리 현실감이 없는 말이었다. 김유린이 자신을 용서해줄 리가 없으니까.
김세진은 놀라 굳어버린 그녀를 바라보며 당장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
"제 의견을 묻는 것이라면, 저는 반대입니다. 반대. 결사반대! 겨얼사아바안대애“
병상에 누운 환자 답지 않은 단호함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적의까지 엿보였다.
"왜요?"
"그 여자는 정상이 아닙니다. 사람 포션에 독을 타는 미친년이 세상 천지에 어디있단 말입니까. 또 다시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잖아요.“
"······어쨌든 반대입니다. 위험합니다.“
김유린이 입술을 삐죽 내뺐다. 그녀가 누운 병상의 끝자락에는 오크와 아탄이의 인형이 사이좋게 올라가 있었다. 김세진은 손을 뻗어 오크 인형을 쥐었다. 혹시 뺏어가려는 걸까, 김유린의 눈에 불안함이 깃든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그래요?“
그는 오크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병상 옆의 서랍 위에 올려 놓았다.
"······복잡합니다, 많이."
김유린은 차가운 나무 위에 올려진 오크를 제 손으로 구출했다. 그리고 이불 속에꼭꼭 숨긴다.
"뭐, 그 과거는 제가 끼어들 일은 아니긴 한데······ 마탑주 자리에는 하젤린 씨가 어울려요. 적어도 저랑 가장 가까운 마법사를 그 자리에 앉히고 싶기도 하고요.“
"다른 어울리는 마법사 많을 겁니다. 아니 그것보다, 왜 저한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저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길드장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년······ 그 사람을 탑주로 임명 하시면 되는 겁니다.“
여전히 단호했다. 30년간 모태솔로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문자 그대로의 철벽.
"그거야, 유린 씨 허락 없이는 하젤린 씨가 안 하려고 할 테니까 그렇죠.“
"······설마요.“
"진짭니다.“
김유린은 믿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김세진이 계속 말을 이어가려 하자,화제를 전환하기까지 한다.
"그 이야기는 일단 나중에 하시죠. 그것보다, 길드장님. 궁금한게 있습니다.“
"······말해요."
"마지막에 얼핏 봤습니다만, 로드가 뭐라고 말한겁니까?"
로드가 죽기 직전에 속삭였던 말.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되었고,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기억은 하고 있다.
"무슨 예언 비스무리한 말이었는데, 무슨 의민지는 잘 모르겠어요. 게다가 드문드문 뱀파이어 언어로 말한건지 아예 알아듣지도 못한 부분이 많았고."
레비아탄이 성장하고서부터 몇몇 뱀파이어의 언어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지만, 그건 정말 '몇몇' 뿐이다. 심지어 그마저도 오직 욕설 뿐.
허나 김유린은 호기심을 잃지 않았다.
"어떻게 말했는데요?"
"······'노스페라투의 보물로 전해지던 뭔가를 훔쳐봤다. 사상 최악의 괴물이 영웅이 될 것이다.' 뭐 이런식이었는데요.“
"흠······.“
김유린은 짐짓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렸다.
"흐음······. 으으음······."
"풋."
김세진은 일부러 심각한 '척'을 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리고 미리 가져온 선물을 꺼냈다. 고블린을 귀엽게 미화한 인형이었다.
고블린이 귀여워봤자, 라는 형언은 이 인형에 만큼은 통하지 않는다. 동글동글한 얼굴과 작달막한 팔다리. 이건 김세진도 자부할 만한 귀여움이다. 고블린을 바라보는 김유린의 얼굴이 스르르 녹아내렸던 것이 그 증거.
그러나 그녀는 다시 얼굴을 굳히고서 말했다.
"고블린 입니까······ 그때는 참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민다. 어서 인형을 달라는 탐욕스런 얼굴이다. 허나 김세진은 쉽게 줄 생각이 없었다.
"하하··· 그렇게 고마운데, 제가 부탁한 내용은 그렇게 쉽게 거절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김유린의 길게 뻗은 눈썹이 찌푸려진다. 김세진은 그 틈을 노렸다.
"······만나서 한 번이라도 얘기를 나눠봐요. 하젤린 씨도 많이 후회하고 있었어요. 인형도 덤으로 받으시고"
살랑살랑- 고블린이 엉덩이를 흔들며 유혹한다.
*
김세진은 놀란 하젤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박수를 짝짝 쳤다. 그러자 사무실의 문이 끼이익 열리고, 저벅저벅- 무거운 발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진다.
하젤린은 망부석처럼 굳었다. 차마 뒤를 돌아볼 생각은 못하고, 눈알만을 필사적으로 굴린다.
어느새 하젤린의 등 뒤에 다다른 누군가가 딱 한 마디를 했다.
"야. 나 좀 봐.“
하젤린의 어깨가 크게 들썩인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역시나 김유린이 있었다. 다만, 언제나처럼 분노어린 얼굴은 아니었다.
"·····얘기나 좀 하자."
왠지 모르게 씁쓸한 목소리였다.
"어, 어······ 아, 알았어.“
하젤린은 멍하니 대답했다. 김유린은 뒤돌아서면서 말했다.
"근데 둘이서만. 괜찮죠 길드장님?“
"물론이죠.“
김유린이 먼저 사무실을 나섰고, 뒤이어 하젤린이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 이후로 정확히 어떤 대화가 어떻게 오고갔는지는 모른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젤린의 울음소리가 크게 울려퍼지고, 김유린이 등을 토닥여주는 소리도 작게나마 들린 것으로 미루어보아, 어느정도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까 예측할 뿐이다.
*
무더위가 쏟아지는 8월.
본래 피서지가 활황을 누리고 있어야 할 계절이지만, 세계의 형국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쏟아지는 보스 몬스터, 서유렵의 거대 균열, 그리고 이 상황이 단기적이 아닐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측까지.
지구촌은 유례없는 혼란으로 무더위조차 서늘하게 느꼈다.
그러나, 악화 일로를 걷는 세계와는 달리 더 몬스터의 위상은 급격하게 높아져만 갔다.
보스 몬스터 사태부터 점진적으로 상승 기미가 보이다, 서유렵에 열린 대사건을 기점으로 빵! 가파른 폭등, 또 폭등. 더 몬스터의 자회사 TM의 주가는 대기권을 넘어 성층권으로 도약하고 있다.
미국이 세계 1차 대전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김세진은 피부로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재 더 몬스터가 관리하는 그리핀 둥지에 서식하는 그리핀은 약 600기, 서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신의주에서 부산까지 '어떠한 준비도 없이' '고작 3분' 만에 갈 수 있는 이 비행수단을 빌려달라며 애걸했다. 그들이 제시한 비용은 한 기당 1000만 유로. 그러나 기간은 고작 한 달.
게다가 용병단의 수요 또한 무지막지하게 늘어났다. 더 몬스터의 용병은 2300명인데, 그중 놀고 있는 용병은 부상자 50에 불과할 정도로.
한편. 더 몬스터는 그 급변하는 시류에 맞춰 의사 결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관제탑을 개설했다. 개설했다기 보다 원래 두뇌 역할을 하던 사람들을 한 장소로 옮겼다.
그 위치는 더 몬스터 길드 사옥의 지하. 주 1회 이상 길드원들의 만남이 이뤄지는회의실이다.
"지금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 각각 100명의 기사가 그리핀 면허를 요청했습니다. 아티펙트와 오크제 무기의 주문도 대기표가 모자랄 만큼 밀려 있고요.“
조한성이 서류를 훑어보며 말했다.
그러나 김세진은 한숨만 뻑뻑 내쉬었다.
아티펙트와 무기를 만드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등급에 따라 다르다. 손재주를 비롯한 여러 스킬의 등급이 늘어났다 하더라도, '최고급' 혹은 '명품'으로 분류할 수 있는 아티펙트와 무기들은 최소 2시간 가량 필요하다.
심지어 그것들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장인정신이라도 생겨버린 건지, 불만족스런아티펙트는 팔고 싶지 않아 10개중 만족스럽지 않은 3개는 버리기까지 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봤는데 아무래도 본능이다. 보자마자 화가 나서 깨부수고, 이성을 되찾으면 후회하길 반복.
"······모든 게 많이 밀려있습니다.“
조한성이 김세진의 눈치를 힐끗 살피며 넌지시 중얼거린다. 재촉 아닌 재촉이었다.
"면접이든 뭐든 해서 적당히 짤라요. 하루에 3개가 최대니까.“
"그러면 유럽 국가들 간에 출혈경쟁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 지금 사태는 지구촌이 함께 힘을 모아야만······"
"뭐라고요? 방금 무슨 말 하셨나?"
"······아닙니다.“
"······노력 할테니까 지금은 이걸로 봐줘요."
"예!"
그걸로 무기와 아티펙트에 관한 주제는 끝이었다. 하지만 주제는 하나 뿐이 아니다.
"그리고, 이번에 프랑스의 대통령, 또 영국과 스페인의 수상께서 직접면담을 요청하셨습니다. 용병단을 비롯한 여러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각자 다들 자기부터 만나달라며 우리 정부에도······"
"와. 우리 길드장님 바쁘시네~ 멋지다 멋져~“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이혜린이 나지막한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나 김유린이 그녀의 뒤통수를 날렸다.
"아우! 아프잖아요!"
"바쁜거 알면 방해하지 마."
"흐, 흐흠."
그리고 그 둘을 왠지 묘한 시선으로, 정확히는 부러워하던 하젤린이 그 둘 사이에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유, 유린아 도시락 맛있니?“
"······어. 맛있네.“
"그래? 나, 나는 무척 배가 부른데······ 내 고기 가져갈래?“
얼굴이 붉어진 하젤린이 손을 꼬물꼬물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마찬가지로 홍조가 발그스레 떠오른 김유린이 어색한 얼굴로 쭈뼛거리고 있는데, 바로 옆에 있던 유백송이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나섰다.
"그럼 나 줘.“
"아, 앗! 야 내려놔 인마!“
"배부르다면서.“
냠냠. 뭔가를 하기도 전에 스테이크를 삼킨다. 이번에는 분노로 얼굴이 시뻘개진 하젤린이 벌떡 일어나서 삿대질을 했다.
"아니 이 미친! 도둑 괘양이······“
"괜찮아.“
"······그러니?“
허나 김유린의 손짓 하나에 바로 주저앉는다.
그 명확한 갑을관계를, 이혜린은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았다.
< 46. 긴장 (2)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