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긴장 (1) >
짙은 어둠 속, 환하게 드리운 달빛 아래. 김유린은 더 몬스터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상념에 잠긴 모습이었다.
김세진은 심호흡을 하고서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실망입니다.“
그러나 그가 채 다가오기도 전에, 김유린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는 뒷목을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 내 참, 어쩐지 조금 이상하더군요. 오크가 그렇게 인간을 닮은 것부터가······아. 지금 생각해 보니 김세진 씨랑 비슷한 부분도 몇몇 있었네."
그러나 그녀가 내보인 반응은 김세진으로서는 예상 외였다. 길길이 날뛰지는 않더라도, 화는 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속았다는 분노도, 영웅오크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슬픔도 아닌, 자신을 탓하는 자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미안했다.
김세진은 김유린이 앉은 기다란 벤치의 끝자락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저 하늘에 드리운 보름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 또 애초에 지능이 돌고래만도 못한 오크가 말을 배운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그때부터 이상함을 눈치 챘어야 했는데······ 괜한 고블린 때문에.."
갑작스런 화제 전환에 김세진이 몸을 흠칫 떨었다. 고블린. 그것은 아마 꽤 오래 전의 과거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일 터······
"아 맞다. 길드장 님, 혹시 고블린도 배우면 말할 수 있는거 아십니까?"
"고, 고블린이요?“
"네. 고블린은 몬스터 중에서 가장 똑똑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똑똑한 고블린 중에 특히 똑똑한 고블린은, 한국어를 배우면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착각했습니다. 오크도 돌연변이라면 충분히 말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누구나 저같은 경험이 있다면 속았을 거라고요."
그 말에 김세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행동이 눈에 띄게 어색해지고, 호흡도더없이 거칠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진짜입니다. 제가 직접 겪었어요.“
"······.“
김세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너무 미안한데, 또 거짓말을 씨부릴 순 없지 않은가.
허나 그녀는 그런 그의 반응을 오해한 듯 답답해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안 믿으시네······ 하, 참. 됐습니다. 믿는게 이상하지요."
"아니, 믿어요.“
그는 단호하게 대답하고는 김유린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갑작스런 적극성에 김유린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아, 예. 믿어주시니 감사하네요······"
"왜냐하면 그 고블린도 저였거든요."
"······에?“
김유린의 작동이 정지했다. 입이 반쯤 벌려지고, 눈은 동그라진 상태 그대로.
김세진은 그런 그녀가 혹시라도 믿지 않을까 마지막 쐐기까지 박았다.
"선물, 잘 받았습니다. 비싼 반지던데요.“
"어······"
잠시 생각했다. 반지와 선물. 선물로 준 반지는 그 고블린과 나밖에 모르는건데.
"음. 그렇구나.“
풀썩. 그녀는 멍하니 한마디를 내뱉고서 쓰러졌다.
로드를 처단하는데 쌓인 육체적 피로와, 두 번이나 연속된 정신적 충격이 야기시킨 혼절이었다.
"뭣! 유린 씨! 왜!"
화들짝 놀란 김세진은 치유마법을 시전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아 황급히 안아들고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 * *
김유린을 병원에 입원시킨 김유린은, 여러 이유로 사이가 틀어진 길드원들의 교통정리까지 한 뒤에 비로소 저택으로 돌아왔다.
시각은 오후 5시.
요즈음 세정이도 마탑의 일로 바깥을 나돌아다니는 일이 잦아졌기에, 집은 오랜만에 텅텅 비어있었다.
"어후······."
그간 쌓인 피로를 한숨으로 토해내며 소파에 몸을 파묻는다. 왜인지 모르게 공허하고 허무하다. 일은 끝났는데, 전신에 탈력감이 맴돈다. 허전해서 그런가 싶어 TV를 켰다. 타이밍 좋게 유세정의 얼굴이 화면 가득 채워졌다.
─새벽&TM 마탑의 주식상장은 언제쯤 하실 예정입니까?
─마탑 주식 상장이요? 그걸 꼭 해야하나요? 저희 마탑은 충분히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데요.
뉴스 인터뷰의 한 장면이었다. 유세정, 엄청 자신만만.
화면으로 보고 있자니 보고 싶어지네. 그는 세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우웅- 우우웅- 신호음이 서너번 정도 울린 뒤에 연결되었다.
"세정아. 어디야?“
─우웅. 나 지금 마탑 관계자 될 사람들이랑 회식중이야.
약간 꼬부라진 목소리다. 술을 마시고 있나? 순간적으로 미간이 팍 좁혀진다.
"어딘데?“
─아 여기? 횟집이야.
그녀가 말하는데 '누구랑 통화하시는 겁니까?' 따위의 남자 목소리가 잡음처럼 끼어든다. 김세진은 무의식적으로 목뼈를 풀었다. 우드득- 우드득- 소리가 참 청량하다.
"횟집 어디?"
─어응? 아, 근데 오빠 무슨 일로 전화했어?
"······너 어디 갔나 싶어서. 아 근데 어디냐니까.“
─아 요기? 어······ 모르겠다.
"죽을래 너?“
─아잉~ 좀 봐줘. 마탑 미팅인데, 오빠 오면 나 찬밥신세란 말이야.
그래. 그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다. 다만 자꾸 옆에서 웬 이상한 '누구십니까? 누구십니까?'라며 지껄이는 남정네가 신경쓰인단 말이다.
"오케이. 알았어. 그럼 스피커 폰좀 해줘봐. 한 마디만 해줄게.“
─······어? 어.. 아..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이쓰까? 내가 대신 해주께!
"진짜 한 마디만 할게. 안 해주면 일주일간 가출한다.“
─아이···. 알아써. 기다려. ······됐어. 했어 스피커폰.
김세진은 일단 목청을 가다듬어 목소리를 살짝 변조했다. 그리고는 저 횟집에서 맘편히 친목을 도모하고 있을 마법사들에게 폭탄을 내던졌다.
"으음. 안녕하세요, 방배동 마법사입니다. 지금 김세진 씨와 함께 있는데, 막 상의가 끝난 김에 공지를 드립니다. 곧 제가 No.27, No.28 마기서를 동시에 발매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혹시 그 두 권의 검수를 맡아줄 마법사를 딱 두 분을 구하고 있습니다. 혹시 원하는 분 계신가요?"
그 한마디를 하고 3초 대기.
검수에 참여하기만 하면 무려 '방배동 마기서'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다. 그것만으로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명성이 드높아질 터. 그 절호의 기회를 거머쥐고자 하는 마법사들의 짐승 같은 호흡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도 느껴졌다.
그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근엄하게 말했다.
"아무도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 즉시 마법사들이 반응했다.
분명 처음에는 서로 자기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입증하려는 조곤조곤한 학술토론이었다.
-방배동 마법사 님이 요즘 파괴마법을 연이어 발매하시는데, 그렇다면 파괴마법 외길인생을 걸어온 제가 검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요. 오히려 파괴마법은 오히려 다른 종류의 마법과 합쳐져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마법의 활용과 응용에 사활을 걸어온 제가······
-두분 다 안 됩니다. 애초에 이런 중요한 건은 커리어로 따지는게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허, 커리어라니요. 지금 이런 중요한 건에 비실체적인 조건을 들이대시겠다는 겁니까?
하지만 반박과 재반박이 오가면서 점차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종국에서는 아예 격양된 고함은 물론, 접시며 탁자며 온갖 가구들이 깨부숴지는 소리까지 더해진다.
"허허. 잘 싸우시네."
그 난리통을 즐겁게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소리가 뚝 끊긴다. 아무래도 유세정이 그 자리에서 뛰쳐나온 듯했다.
─이 사람들 미쳤어. 마법까지 쓰려고 했다니까 방금.
"흐흐. 그럼 이긴 사람 데리고 와.“
─······진짜 못됐어 증말.
자리는 파토났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즐거워보였다.
─근데 마기서 두 개 동시발매 한다는 거, 진짜지? 거짓말이면 화낸다?
그거 때문이구나. 김세진은 피식 웃었다.
"그럼. 당연하지.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오예~ 요기 테부동 사시미. 빨리와요 오빠~
"오냐.“
김세진은 겉옷을 입으며 통화를 끊었다. 헌데 집을 나서려는 그의 귓가에, 아직 꺼지지 않은 뉴스가 들려왔다.
─긴급속보입니다. 현재 서유럽 일대에 거대한 균열이 생긴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유럽은 서유럽의 역사상 최대 크기로······
"······뭐야?"
이건 약속이랑 다르지 않은가. 김세진은 품속에 있는 수정구로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바토리에게 연락은 없었다. 배신인가? 싶어 뒤통수가 저려오는 순간에, 다행스럽게도 바토리의 목소리가 수신되었다.
─내일 찾아와. 지금은 바쁘니까.
*
이튿날, 김세진은 곧바로 바토리를 찾아갔다.
"임무 성공실패 여부는 이미 알고 있겠지?"
"그럼. 이미 들었어. 엘 라스랑 그 심복 놈들이 난리를 피우더라고.“
바토리는 짐짓 태연을 가장하였으나, 목소리에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선명했다. 또한 김세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김세진이 담겨져있지 않았다. 물결처럼일렁이는 그 동공 속에는 머나먼 과거의 기억이 슬프게 넘실대고 있었다.
"엘 라스는 또 뭐야?“
김세진이 묻자 바토리는 어벙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나사가 두어개 빠진 듯한 모습이다.
"아. 엘 라스? 걔네도 가문이야. 바토리, 노스페라투, 엘 라스. 이 세 개만 남았지.“
그녀는 억지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 말이 맞았어. 로드가 원하는 건 시공이 아닌 차원을 이동하는 것이었고, 고서의 내용을 해석해본 결과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더구나.“
"그래?“
"그거 때문에 엘 라스는 물론 로드의 심복들도 분노하고 있어. 그 분위기를 보아 하니 로드 혼자서 도망치려고 한 것 같아.“
"······.“
"게다가 뱀파이어들의 흡혈본능을 조절하는 보물도 오래전에 잃어버렸다네. 눈이 멀어가지고. 한심하게."
바토리의 말이 멈췄다. 그러나 김세진은 입을 다물었다.
바토리가 호출하였을 때에는 분명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이번 서유럽에 벌어진 균열사건, 로드라는 구심점을 잃은 뱀파이어들의 비전, 바토리의 목표, 그리고 사회에 녹아들면 안되겠냐는 회유도 하려했는데.
김세진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바토리의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이 그 이유였다. 자기가 죽이라고 해놓고 또 자기가 슬퍼하는 변덕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녀가 지금 느끼는 애통함 만큼은 진심이었기에.
"겁쟁이 놈, 죽이길 잘했네.“
그렇게 말하는 바토리의 목소리는 서글펐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어제 벌어진 대사건을 두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
김세진은 우선 서유럽 균열사건에 대해서 띄엄띄엄 물었다.
"그건 우리 소행이 아니란다.“
"······뭐? 진짜?“
"어. 우리는 한국에 있는 균열 말고는 건드리지 않았거든.“
"그럼 뭐 다른 배후가 있다는 뜻인가?“
"아니. 자연의 섭리겠지. 애초에 균열이 열린 순간부터, 이 지구라는 행성의 미래는 가시밭길이었어."
"뭔 소리야?"
"이 지구라는 행성도, 우리 고향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소리야. 로드는 그 전에 도망치려고 했던 거고. 근데 나도 자세히는 잘 몰라. 방금 들은거거든.“
"누구한테?"
"내 부하들한테. 걔낸 지금 로드 연구 결과를 해독하고 있거든. 실시간으로 전해 듣는 중이지."
그 말을 끝으로 바토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가려무나. 약속대로, 더 이상 너희들을 건드리거나 균열을 억지로 늘린다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을게. 그러면 일년 정도의 여유가 더 생길거야.“
"···일년?"
"그래. 그 동안 결정하고 준비해. 너희도 우리가 그러했던것처럼 균열을 타고 다른 세상으로 도망갈 건지, 아니면 이곳에 남아 끝까지 싸울건지.“
"너는 어떻게 할건데?“
바토리는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우리의 목표는 언제나 같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뿐. 그러니 이제 제발 꺼져.“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김세진의 정수리를 콱 움켜쥐었다. 순간 세상이 뒤틀리는 듯한 불쾌한 느낌에 그는 눈을 꽉 감았다. 뒤이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바토리는 온데 간데 없고 서울 강남 한복판의 전경이 보였다.
"왜 하필 강남이야?"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의 귓가에 시민들의 수근거림이 스며든다.
-뭐야, 저거 김세진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야. 가서 자세히 함 봐봐.
고작 1분 지났을 뿐인데 인파가 슬금슬금 몰려들기 시작한다.
과연 유명세가 하늘을 들끓는구나, 김세진은 감탄하며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허나 그 행동은 시민들에게 어떠한 확신을 줘버린듯 했다.
"김세진이다!"
"오빠 싸인좀 해주세요!
"오빠아아아악!"
그 괴성이 두려워 김세진은 내달렸다.
< 46. 긴장 (1)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