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진입 (4) >
대답을 요구하는 김유린과, 흥미롭게 지켜보는 로드. 그 사이에서 김세진은 고민했다.
1분 1초, 아까운 시간이 초조하게 흘러간다.
그동안 로드는 참 친절하게도 아무런 공격없이 기다려주었는데, 아무래도 지금 상황의 심각성을 너무 경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김세진이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한 김유린의 침 삼키는 소리가 요란하다.
"내가······."
그러나 그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복강을 꿰뚫는 날붙이의 서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을 크게 뜬 김유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명치에 은색의 나이프가 깊게 박혀 있었다.
"끄으으··· 네이노옴!“
로드는 피와 분노를 동시에 토해냈다.
"심장을 노렸는데, 용케도 피했네.“
아마 단검의 체공시간은 불과 0.1초도 안될 찰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로드는 몸을 가까스로 비틀어 나이프가 심장에 박히는 것만큼은 회피했다.
그렇게 선제공격으로 전장이 조여졌기에 대화의 틈은 없어졌다. 김유린은 이를 까득 깨물고서 궁니르를 꺼내들었다.
김세진은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다음부턴 본분을 잊지 마세요. 끝나고 모두 말해드리겠습니다"
"그 말, 꼭 지키십시오.“
그와 동시에 노면이 변화했다. 아니 공간 자체가 변화했다. 딛고 있던 대지가 핏빛으로 물들고,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던 로드는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서 이쪽을관조한다.
이어서 적색대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거대한 몬스터가 동시다발적으로 솟아올랐다.
개중 특히 인상적인 놈이 하나 있었다.
뿌연 회백색으로 덧칠된 거대한 뱀 형상, 실체이되 실체가 아닌 허구의 존재.
'유령 황혼,'
언데드 계열에서는 최고봉이라 불리는 최악의 괴마.
그러나 몬스터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투 헤드 오우거, 크림슨 와이번, 데스나이트 등등······ 하나만 나타나도 일대 도시가 마비될만한 몬스터가 열댓개체 넘게 득실거렸다.
"이거, 둘이서는 힘들 것 같습니다.“
김유린이 낭패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김세진은 고개를 저었다.
"버티기만 하면 돼요. 저 나이프에 기생마나와 맹독을 묻혀 뒀습니다. 이 공간을 마나로 유지하는 거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거예요.“
"······그렇다면, 저도 도와야겠군요.“
김유린이 검을 역수로 움켜쥐었다. 순간적으로 섬전을 방출하여 로드를 쏘아 죽이려는 의도이리라.
한편 김세진은 레비아탄 폼을 취해 위험을 분담해줄 최선의 우군 '크라켄'을 소환했다.
크라켄이 바닥에 빨판을 내딛었을 때, 콰아아아아! 김유린의 섬전이 벼락처럼 쇄도했다. 로드의 몬스터들은 그 경로에 달라붙어 몸으로 공격을 막아내려 했으나, 섬광은 모든 피육을 뚫어내고 로드의 한쪽 팔을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모든 것을 관통한다'는 목적성이었다.
"끄아아악!"
로드의 비명을 신호로, 열댓의 몬스터들이 광분하여 돌격했다. 김세진은 절반 이상의 마나를 할애하여 기공포를 쏘아냈다. 정확히 절반의 몬스터가 즉시 소멸되었다. 그러나 가장 까다로운 유령황혼과 날렵한 데스나이트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오히려 이빨과 검날을 들이대며 고약한 살의를 표출했다.
"저는 저 뱀새끼 맡겠습니다! 데스나이트를 부탁!"
"알겠습니다!"
유령황혼, 놈은 '모호'의 경계에 있는 몬스터로서 실체이면서 허상이다. 자신의 속성과 성질을 취사선택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형체를 흐트렸다가 다시 구성함으로써 공격을 회피하거나, 공격을 가할 수 있다.
지금처럼.
"큽!"
김세진은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뱀의 꼬리에 명치를 가격당했다.
멀리 튕겨나가면서, 그는 놈을 죽일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대충 도감에 서술된 내용으로만 따져도 일반적인 공격으론 놈을 처치할 수 없다. 저 기민한 놈에게 범위가 한정된 기공포를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라이칸 슬로프는 약점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을 노리자······.
그는 라이칸슬로프 폼을 취했다. 그런데 별안간 머리 위로 커다란 그늘이 드리웠다. 그그의 머리를 쪼갤기세로 내리쳐지던 데스나이트의 묵직한 거검은, 그러나 김유린이 쏘아올린 황금색 검격에 튕겨져나갔다.
"늑대라니, 신기, 하네요! 그래서, 계획은?!“
김유린은 곡예에 가까운 검술로 데스나이트들의 검격을 막아내며 물었다.
"우선 그 다른 졸병부터 죽입시다! 보스몬스터랑은 일대일을 해야 하잖습니··· 으억!“
그렇게 대답하던 때에 다시금 꼬리가 명치를 가격했다. 쿵쾅쿵쾅! 허공으로 튕겨지는 과정에도 쉼 없이 공격이 내다꽂힌다. 전신이 곤죽이 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맞다 보니 아프고, 아프니까 화가 났다.
그래서 늑대의 동공을 발현했다.
동공을 통해 보이는 놈의 몸은 역시나 흑백 뿐, 약점이 없다는 뜻이었다. 허나 안광으로 심장을 겨냥하자 점차 빨간색이 스며든다. 그렇게 놈의 심장에 약점이 하나 생겨났다.
김세진은 자신감 있게 내달렸다.
"넌 뒈졌··· 으어억!“
하지만 약점을 만들어냈다 한들 힘에서 밀리는 걸 깜빡했다. 김세진은 꼬리 한방에 저 멀리까지 내팽개쳐졌다.
"아읏!“
동시에 김유린의 비명도 울려퍼졌다. 그녀는 다섯의 데스나이트 중 세 개체는 놀랍게도 혼자의 힘─버프마법이 아직 적용되고 있긴 하지만─으로 처치했다.
그러나 그 무력이 보스의 준위에 근접한 데스나이트를 하나도 아니고 다섯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불가능하다. 크라켄이 도와주고 있긴 하지만, 레비아탄 폼을 포기하여 크라켄의 힘도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였기에······.
그때. 데스나이트의 거검이 지친 김유린에게로 그어졌다.
김세진은 재빨리 달려가 그 검격을 막아세웠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공간이 다시금 축소되고 잔여 몬스터들이 사라졌다.
늦지 않게 로드의 기력이 모두 소진된 것이리라.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호흡을 추슬렀다.
그러나, 왜인지 유령 황혼만큼은 남아 있었다. 놈은 실체를 유지한 채 쓰러진 로드를 보호하듯 그 앞에 섰다.
"뭔 개수작을 하셔도 곧 죽으실텐데. 포기하시지?"
"흐··· 흐흐.“
김세진의 비아냥에도 로드는 마냥 웃었다. 동시에 유령황혼이 로드의 곁으로 움직였다. 로드가 유령황혼의 심장에 손을 쑤셔넣었다. 심장이 사방에 피를 흩뿌리며 뜯겨졌다.
"뭔.."
"이 놈은 나와 피를 나눈 존재다. 내 영혼을 바쳐 만들었지.“
이유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그 심장을 아그작아그작 씹어먹는다.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지만,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곧 로드의 혈색이 회복되고 몸은 거대해지기 시작하였으니.
"크하하하!"
커지길 반복하여 오우거 만큼 거대해진 놈은 광포하게 웃으며 김세진과 김유린에게 돌격했다.
거대한 주제에 속도 또한 발군이었다. 놈은 빠르게 달려 흉측한 주먹을 내리쳤다.막아내는 순간 뼈마디가 몸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듯했다. 그만큼 흉폭한 위력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그 무력을 분담했지만, 둘 다 눈알이 터질 것만 같았다.
1초, 2초, 3초..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그 어마어마한 압력은 놈의 근육처럼 부풀어만 갔다.
이대로라면 찌그러져 죽는다.
김세진은 핏발 선 눈으로 로드를 노려보았다.
놈은 웃고 있었다.
그 간교한 미소는 죽이고 싶을 만큼 혐오스러웠다. 짜부라질 것같은 뇌를 필사적으로 굴려 방법을 하나 떠올렸다.
오크, '가장 순수한 육체'.
이 능력은 근력을 1000%만큼 증폭시킨다. 거기에 역전의 전사까지 합치면, 힘에서만큼은 자신을 당해낼 존재가 없을 터.
옆에 김유린이 있다 한들 어차피 진실은 말해주려 했으니,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생각은 빠르고 행동은 더욱 빨랐다. 그의 전신에 돋아난 털이 사라지고, 근육이 꿈틀거리며 피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오크가 되어 눈을 부릅뜬 그는 역전의 전사를 발동하면서 근력을 한계까지 증폭했다.
─그어어어어!!
참을 수 없을 만큼 거칠게 분류하는 힘을 입 밖으로 토해낸다. 실로 경이로운 힘, 내부에서부터 터져나오는 고양감. 그는 고작 한 손으로 로드를 밀어냈다.
"으읏······."
로드의 위압에서 벗어난 김유린이 바닥에 스르르 쓰러졌다. 그녀는 멍하니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김세진이 아닌 오크가 있었다.
"···하, 참 내 진짜···"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일평생 처음 애틋한 감정을 느껴본 대상이 오크가 아니라니. 다행스러워야 하나, 아니면 나를 가지고 논 이 남자한테 화를 내야 하나.
그러나 깊은 생각은 불가능했다.
심신이 모두 피로하여, 참을 수 없는 탈력감이 몰려들었다. 그녀는 그대로 탈진하여 기절했다.
"아이여, 이성을 잃었구나."
전신이 붉게 타오르는 김세진을 바라보며, 로드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잠시 진정을 하는게 어떤가······."
"뭔 개같은 소리야!"
김세진은 로드에게로 뛰어올라 나이프가 박혀있는 복강을 다시 한번 헤집었다. 로드는 피를 토했다. 그리고는 이상한 말을 읊조린다.
"Ogribahack Sobet"
"뭐라고?"
"흐흐······."
불길한 웃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드의 몸이 바람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비틀거리며 쓰러진 놈은 어둠 뿐인 천장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구나."
"그래?"
"내 눈이 멀어, 이런 결말을 맞이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여, 이리 와보거라. 기왕 파국을 맞이한 김에, 말해줄 게 있다. 내가 여태 해온 연구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궁금하지 않느냐?"
로드가 손짓했다. 오크는 고개를 갸웃하며 로드에게 다가갔다.
로드는 오크의 귓가에 이상한 말을 속삭였다.
김세진은 미간을 좁혔다. 몬스터, 미래, 과거. 이 세 키워드로 이루어진 말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로드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호흡을 멈췄다.
*
그렇게 로드는 죽었다. 과연 노쇠한 왕 다운 비참하고 허무한 최후였다.
반면 김유린은 포션의 힘으로 무사히 깨어났다.
두 사람은 함께 일행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서로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지독한 침묵 속에서 둘은 일행을 하나 둘 씩 회수해갔다.
이혜린과 주지혁은 거의 얼어붙기 직전이었고, 하젤린과 유백송은 둘이 서로 싸운 듯 얼굴을 붉힌 채 씩씩대고 있었으며, 로스한델과 김선호 쪽은 중태였다. 그 둘은 팔 한쪽 씩을 잃어 조금만 늦었더라면 사망했을 것이었다.
어쨌든 다행스럽게도 전원 생존인 상태.
김세진은 마도를 이용하여 안락한 회의실로 복귀했다.
이혜린과 주지혁이 몸을 녹이고 김세진이 로스한델과 김선호의 치유를 해주는 와중에, 유백송과 하젤린은 한번 더 싸웠다. 말싸움 같이 귀여운 종류는 아니었다. 격투라는 말이 어울렸다.
"진정, 진정 좀 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멈춰요 멈춰!"
이혜린은 하젤린의 팔을 잡았고 주지혁은 유백송의 몸을 붙들었다.
"쟤가 자꾸 나보고 고양이라고 놀리잖아!“
"내가 언제 그랬니! 네가 먼저 나한테 세진 씨 좋······.“
유백송의 외침은 널리 퍼졌지만 하젤린의 반박은 채 이어지지 못하고 멈췄다. 하젤린은 김세진의 눈치를 살피며 힘없이 쪼그라들었다.
그때.
생각에 잠긴 채 의자에 앉아있던 김유린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김세진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 네. 가, 가보세요."
"저랑 같이 안 가시렵니까?"
"..예?"
김세진은 당황했다. 그러나 때마침 조한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만요. 전화 먼저. ······무슨 일이에요?“
─아, 길드장님. 지금 아티펙트의 주문이 너무 밀렸습니다. 그래서 일단 면접 일자를 잡긴 했는데······
아티펙트의 이야기였다. 요즘 더 몬스터가 시국의 특별성을 감안하여 아티펙트의가격을 꽤나 내린 덕에 전 세계적으로 주문이 폭주한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면접'을 보고 있다. 아티펙트 주인이 될 사람을 가리는 면접을.
"아, 그건 제가 나중에 알아서 할게요. 일단 객관적인 지표를 우선해서 판매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김세진은 전화를 끝마쳤다. 그러나 김유린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어."
"올라갔어요. 따라가보세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혜린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그는 그녀의 뒤를 황급히 쫓았다.
< 45. 진입 (4)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