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진입 (3) >
(전화, 155화를 110분! 155화 맨 뒷자락에 추가되고 바뀐 내용이 몇몇 있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한번만 다시 봐주세요오...)
* * *
─인간과 오크인가. 내 피조물을 찢어죽인 그대들의 활약상은 잘 보았다네.
"···?“
김유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로드의 목소리라는 건 알겠지만, 내용이 이해가지 않았다. 로드가 언급한 오크와 인간. 그 중 인간은 여기 있다. 그런데 오크는 어디있다는 거지? 그녀는 후방을 기웃거려 보았다. 그러나 아득한 어둠 뿐, 오크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세진은 그런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쳤다.
─내 처소에는 어인 일인가?
김세진에게는 천만다행이게도 로드의 준엄한 목소리가 화제를 전환한다. 다급해진 김세진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재빨리 발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김유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서가려는 김세진의 손목을 꽉 붙잡고서 로드에게 질문했다.
"무슨 말이지?“
─무엇을 말인가?
"방금, 오크와 인간이라고 했잖아. 인간은 여깄지만 오크는 어딨는다는 거냐.“
─흠······
길고 낮은 침음성, 마치 동굴 벽면에 진득하게 들러붙는 듯 하다.
"대답해.“
─적어도 경어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태도는 조금 곤란하지 않겠나, 인간이여.
로드는 아무래도 김유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했다.
"······하.“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놈이 감히 예의를원한다는 말인가. 그녀는 뿌득 이를 갈고서 궁니르를 뽑아들었다.
"그럼 줘 패서라도 입을 열게 해주마.“
─역시 세상이 달라져도 인간은 여전히 건방지고 오만한······
"닥쳐. 갑시다 길드장님."
김유린은 공격적으로 뇌까리고선 성큼성큼 앞장섰다. 김세진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둠을 헤치며 통로를 걸었다. 그럴수록 점차 통로가 넓어진다는 느낌이 또렷해졌다.
통로의 모습은 확실히 변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좁고 기다랬던 지형에서 점차 완만하게 넓어지고 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를 끊임없이 걷기만 했을까.
마침내 두 사람은 더없이 광활해진 공동에 발을 딛고 서게 되었다.
"허, 이거 참. 얼마를 더 걸어야 될 지 모르겠네."
김세진이 뒷목을 굵적이며 중얼거렸다. 김유린은 그런 그를 보며 흐뭇하게 웃더니, 널찍한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어쨌든 다행이네요.“
"······뭐가요?“
"로드가 있는 걸 보면, 그래도 저희 쪽이 진짜 길인 것 같아서요. 팀 중에서는 저희가 가장 강하잖습니까.“
강하고 까다로운 상대를 오히려 자신이 만나서 다행이라는, 역시 김유린 다운 이타심이었다. 김세진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척 올렸다. 그리고 곧바로아차- 싶었다. 이는 영웅오크일 때 그녀에게 가끔식 하던 습관이었으니.
"저기······?“
실제로 자신을 바라보는 김유린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는 재빨리 손을 떼고서 헛기침을 했다.
"아, 죄송합니다. 키가 너무 조막만하셔서.“
그리고 짐짓 장난스레 둘러댄다.
"······168인데요. 이게 너무 작으면 여자는 여기서 얼마나 더 커야 하는 겁니까.“
김유린은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볼에 오묘한 홍조가 오른 모습에, 그는잠깐 '원래 애 취급 받는걸 좋아하나?‘ 따위의 생각을 했다. 금세 털어버렸지만.
그가 통로의 저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일단 빨리 갑시다. 너무 긴장하는 것도 좋진 않지만, 너무 여유로운것도······“
쿠우우웅!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별안간 지면이 크게 들썩였다.
쾅! 쾅! 곧이어 마치 노면 아래에서 무엇인가가 비집고 올라오려는 듯, 커다란 진동이 울린다.
"전투준비!"
김유린의 직업병이였다. 그녀는 김세진을 자신의 뒤로 밀어넣고 검을 뽑았다.
콰직!
동시에 노면이 박살났다. 뒤이어 그 틈을 비집고 거대한 무엇인가가 올라왔다. 적어도 인간 몸체 만한 크기의 우람한 두 손이 드러나고, 그 손 너머로 핏빛 안광을 발하는 두 쌍의 눈동자가 달린 두 개의 머리가 보인다.
'오우거'였다.
허나 역시 평범한 오우거와는 거리가 멀다. 우선 머리의 갯수, 그 다음은 그 머리의 생김새. 두 개의 머리 중 하나는 평범한 오우거의 머리지만, 다른 하나는 파수꾼 케르베로스의 머리다.
"까다로운 번견의 머리를 달아뒀군요.“
김유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큼 참 혐오스러운 몰골이었다. 하지만 케르베로스와 오우거가 합쳐진 이상 그 강함을 얕볼 수는 없을 터. 그녀는 오우거를 노려보며 궁니르를 꽉 움켜쥐었다.
사르륵-
그렇게 그녀가 놈의 약점을 가늠하고 있을 때, 투명한 볕같은 기운이 그녀의 정수리 위로 하롱하롱 가라앉았다.
"..응?"
그녀는 긴장도 잊고 짤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광원이 몸에 스며들자 신기하게도 육체가 가벼워지고, 혈관을 내달리는 마나의 활력이 크게 고양되었기 때문이다.
김유린은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준 그 장본인, 김세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환한 미소로 화답하여 그녀를 살짝 설레게 만들었다.
"보조마법입니다. 가세요. 마법으로 보조할게요.“
그렇게 말하고는 레비아탄의 폼을 취한다.
"감사합니다."
레비아탄이 등을 맡아준다, 그 더할 수 없는 듬직함을 느끼며 김유린은 오우거에게로 뛰어올랐다.
─크어어어!
오우거는 고성을 내지르며 새까만 몽둥이를 휘둘렀다.
쿠웅!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의 검과, 흑철로 이루어진 단단한 압제가 서로 맞부딪친다. 그 마찰면에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노면에는 거대한 분화구가 생겨나고, 매캐한 연기 속에 옮겨붙은 불씨가 타닥타닥 타오른다.
단 일 합이 일으킨 장관이었다.
그러나 곧 검은 연기가 걷히고, 결과는 명확해졌다.
흑철과 함께 통째로 사라진 오우거의 오른팔이 그 이유였다.
김유린은 팔을 잃은 채 괴로워하는 오우거에게로 다시 한번 뛰었다. 김세진의 격이 다른 보조마법 덕분일까. 지금의 일신은 2배, 아니 3배는 더 맑고 활력이 넘친다.
평생토록 느끼고 싶은 고양감이었다.
*
처음의 투-헤드-오우거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러나 모두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었다. 김유린이 말하길- '절묘한 팀워크 덕분'이었다. 팀워크라고 해봤자 김세진이 한 일은 김유린에게 여러 보조마법을 걸어준 것 뿐이지만.
물론 그저 '보조마법'이라고 잘라 말하기에는 그 마법의 격이 너무 탁월하긴 하다. '마도'를 기본 뼈대로 이루어지는 마법이라, 김세진도 레비아탄 폼이 아니었다면 유지하기 힘들 고난도의 버프이니까. 그만큼 효과도 탁월하고.
어쨌든.
그렇게 키메라들을 하나 둘 씩 처치하며 통로를 계속해서 거닐다 보니, 그들은 과연 의심스러운 문 하나를 맞딱드렸다.
딱 봐도 이 안에 최종보스 있소─ 라는 식으로 생긴 고풍스럽고도 클래식한 문. 검은색의 바탕에 기묘한 그림이 새하얗게 양각되어 있다.
"······갈까요?“
김유린이 말했다. 김세진은 말 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제가 열려고 했는데, 그녀는 가볍게 투덜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피식 웃고서 문고리를 밀었다.
끼이이익-
낡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문턱 너머, 가장 먼저 남루하게 헤진 검은색 로브를 걸친 노인이 보였다. 축 늘어진 어깨와 새하얗게 변색되어 생기를 잃은 두 눈.
그는 이미 눈이 멀은 채였다.
"눈이······."
그제서야 김세진은 왜 노스페라투의 반란이 확실하고, 바토리의 행각이 의심스러움에도 로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집단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우두머리는 더 이상 우두머리로 인정 받지 못한다. 도전자에게 잡아먹히거나, 아니면 알아서 물러나거나, 두 결말 중 하나 뿐이겠지.
"모든 걸 보는 눈이 있다고 들었는데.“
김유린이 비아냥거리며 칼날의 끝에 로드의 목을 두었다.
로드는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또 비추지 않는 눈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분명히 기능을 잃었음도 불구하가고, 표리(表裏)를 동시에 꿰뚫는 듯한 안광이었다.
"보시다시피, 이미 멀어버렸다네.“
로드의 가래낀 목소리는 평온하고 잔잔했음에도, 두 침입자를 준열하게 꾸짖는 듯했다. 온화함 속에 얼려진 분노가 그 원인이었다.
"······그럼 쉽게 죽일 수 있겠네.“
이번에는 김세진이었다. 그는 바토리의 선물을 손에 움켜쥔 채, 당장이라도 놈에게 쇄도할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김유린이 손을 뻗어 막았다. 그녀는 잃어버릴 뻔 했던 궁금증을 가까스로 다시 상기시킨 얼굴이었다.
"궁금한 게 있다.“
"무엇이지?“
순간 김세진의 얼굴이 낭패로 물들었다. 그녀가 로드에게 물어볼 만한 내용은 뻔하고 뻔하다. 당연히······.
"당신은 분명 처음에 오크와 인간이라고 말했어. 오크도 여기에 있다는 건가? 그리고 그 오크는 어떤 오크를 말하는 거지?“
"······.“
로드는 침묵했다. 그에 김세진이 먼저 레비아탄 폼을 취하였다. 로드가 입을 열기전에, 기공포를 쏘아 죽여버릴 생각으로.
하지만 오히려 그게 악수인 듯하였다.
"과연, 인간인 주제에 여러 다른 생명의 형체를 취하는 특성인가. 실제로 보니 더욱 흥미롭구나.“
눈이 먼 사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정확한 지적이었다.
"여기사여, 무슨 말을 하는겐가? 오크는 저 남자의 속에 있지 않은가. 내 키메라를 죽인 저 남자의 형체가 오크였기에 그 모습이 깊게 각인되어 있었어. 그래서 저 남자를 오크라 대신 부른 것이지.“
"······.“
일순 김유린의 모든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휘이잉- 훤히 열려진 문 너머에서 차갑고 불길한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그 서늘함에 정신을 차렸는지, 김유린이 고개를 돌려 김세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커진 동공에는 당혹, 놀람, 배신감 등 여러 감정이 뒤채였다.
김세진은 그녀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고 로드를 응시했다.
두 사람이 침묵하는 사이에 로드가 말을 이었다.
"혹시 옆에 그녀는 모르는 건가? 의문이 느껴지는군.“
"······무슨, 말입니까.“
그 말에 결국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해명을 부탁한 대상은 로드가 아닌 김세진이었다.
그제서야 김세진은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가녀리게 떨리는 눈동자, 그 속에는 레비아탄의 형체가 비친다. 순간 너무 흉하게느껴져, 그는 다시금 인간폼을 취했다.
이를 꽉 깨문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간질입니다. 속지 마세요.“
"이간질이라니? 그건 무슨소리더냐?“
하지만 로드가 방해했다. 음산하고도 간교한 미소를 지으며.
"여기사여. 진실은 언제나 증거를 남기기 마련이라네. 그리고 그 증거는, 아마 자네도 어렴풋이 느꼈을 것일세.“
김유린은 여전히 김세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로드의 말을 들었다.
그렇게, 그녀는 하나 둘 씩 떠올렸다.
김세진이 만들었다는 오크제 무기의 문양과 오크 족장이 들고 있던 무기의 문양이 같았던 의심을, 오크가 김세진을 이상하리만치 신뢰했던 사실을, 김세진이 은연중에 보여줬던 영웅오크와 비슷한 습관들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몬스터로 변할 수 있다'는 특성까지······.
동시에 그동안 품었던 여러 의문들이 되새겨졌다.
그때에는 그저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식으로 일축했던 그 의문들이 의혹이 되어 의식의 표면으로 부유했다.
"길드장 님.“
김유린이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그녀는 침묵으로써 김세진을 강요하고 있었다.
진실을 알려주어야 할까, 하지만 저어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자신이 여태 오크인 채로 별 생각 없이 행했던 작태들은,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농락과도 다를 바가없을 테니.
"나중에. 지금은 처리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김세진은 일단의 상황을 만회하고자 나중을 기약했다. 그보다는 우선 해야할 일이 있으니, 은나이프를 움켜쥐고 로드에게 발걸음을 옮긴다.
"아니요."
그러나 김유린은 단호했다.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저는 한 가지 대답만 원합니다. 그리 길어지지 않을 겁니다."
굳게 다물린 입술과 날카롭게 좁혀진 눈. 그녀는 김세진에게는 단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던, 심각하고도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영웅오크였습니까? 그 특성, 레비아탄 말고도 다른 폼으로도 변할 수 있는 것이지요?"
< 45. 진입 (3)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