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몬스터-154화 (154/174)

< 45. 진입 (2) >

─방배동 마법사가 직접 서술한 No.26 마기서의 해설의 한 단락에는 '아득한 창공에서 쏟아지는 불덩이'이라는 문장이 적혀져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마치 '메테오'를 연상시키는 이 놀라운 문장을 두고 마법계와 전문가의 의견이 분분하게 갈리고 있지만, 방배동 마법사는 정확한 마법 명칭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이 방배동 마기서는 가장 먼저 새벽&TM 마탑에 비치될 예정이며, 이는 마법사들의 새벽&TM마탑을 향한 구애행위를 더욱 증폭시킬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언론과 방송사는 아직도 난리다. 그만큼 마기서를 향한 마법사들의 관심과 열정도 뜨겁다. 전설 속 마법이 실제로 구현된다고 하니 그런거겠지만.

어쨌든 그 덕에 마탑에 지원한 마법사만 국내외 포함 무려 6785명. 대한민국 마법사가 8만명 임을 감안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인데, 심지어 '자신은 가망이 없을 것이다' 라고 지레 짐작한 C등급 이하 마법사들이 빠져 모두 알짜배기들 뿐이다.

덕분에 유세정은 할아버지에게 사업수완을 인정받아 하루하루를 몽실몽실한 구름 위를 나는 듯한 기쁨 속에 살고 있으나, 정작 김세진은 별 관심이 없었다.

"좌표는 아직이야?“

길드의 지하에 위치한 '비밀의 방'에선 회의가 한창이다.

"잠시만요. 좌표는 받았는데 내부 모습이 아직입니다. ······아, 받았습니다 주인님!“

로스한델이 김세진을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그러나 호칭이 심히 거슬려서, 김세진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 주인님이라고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지?“

"그러면 뭐라고 부릅니까. 저는 길드원이 아니라서 길드장이라고도 부르지 못하는데······.“

로스한델은 의도가 다분한 투정을 부렸다. 그 은근한 길드 가입요청은 이혜린이 대신 진압했다.

짝!

찰진 등짝 스매싱의 소리였다.

"좌표부터 말해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아으 아파.. 진짜. 알았어요, 알았어.“

로스한델이 종이에 좌표를 적은 뒤 의념을 통해 김세진의 머릿속으로 동굴 내부의 풍경을 전달했다. 그는 눈을 감고 동굴의 구조를 조감하여, 적당히 숨어들 수 있는 위치를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됐어요 주인님?"

"..그래. 됐다. 됐어."

김세진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로스한델의 얼굴이 굳었다. 그새 바토리에게서 뭔가 송신이 온 듯하다.

"왜?"

"그, 주인님."

"···주인님 하지 말라니까."

"바토리가 오랍니다."

"그럼 가면 되지."

"아니, 저 말고······ 주인님 오랍니다."

김세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갑자기 왜?"

"저도 모릅니다."

* * *

호출을 받은 김세진은 과거 노스페라투가 머물던, 그러나 이제 바토리의 것이 된 근거지로 내려왔다.

"5월 6일, 알았어. 우리가 도와줄게.“

"······어떻게 도와줄건데?"

"로드와 함께 연구중인 심복 놈들을 불러낼거야. 급히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몹시 무성의한 대답이었다.

"어떻게 불러낼 건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 걱정하지 마렴. 흐음 흐음······.“

태도가 참으로 불성실하지 않은가. 직접 호출까지 했으면서 연신 핸드폰만 붙들고 있는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뭐가 그렇게 바쁜거냐?“

"아, 내 기사 좀 보고 있었어. 개미들이 참 귀여워. 여기 엄지손가락 아래에 달린 숫자는 나를 찬양하는 의견에 동의한 개미들의 수를 나타내는 거겠지?“

손가락으로 핸드폰 액정을 가리키며 묻는다. 에밀레르의 무용을 찬양하는 기사에달린 댓글이었는데, 7300의 좋아요와 3400의 싫어요가 매겨져 있었다.

"어. 맞아.“

"그럼 7300명이 에밀레르를 좋아한다는 뜻이겠네. 근데 나머지 3400명은 뭘까? 누군지 알아낼 수 있니?“

"알아내면 어쩌려고.“

"죽여야지.“

"······.“

어딘가에 사는 익명의 누군가들은 핸드폰 화면을 터치한 죄로 만악의 근원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농담이야. 농담. 그런 심각한 표정은 짓지 마렴. 이 바보야.“

바토리는 다시금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상자 하나를 김세진에게 건넨다. 구약(舊約)의 한 장면에나 나올 법한 낡고 고풍스런 상자다.

"이건 뭐야?"

"안에 로드의 약점이 들어있어. 별 건 아니고, 부디 성공하라고 주는 선물."

"······약점?"

"그래. 아무리 로드라 하더라도 이젠 노쇠한 몸이라 청각 시각을 비롯한 여러 감각이 감퇴되었어. 그만큼 '모든 것을 보는 눈'도 예전만큼의 기백은 아니지. 하지만 만약 계획에 실패하더라도, 이걸로 그 눈만큼은 모쪼록 없애주었으면 해. 거슬리거든.“

김세진은 혹시라도 부서질세라 조심스레 상자 뚜껑을 열었다. 은색 나이프가 상자의 어둠 속에서 차갑게 번뜩였다.

"은?“

"그래. 근데 평범한 은이 아니야. 우리 고향의 강렬한 볕으로 제련한 은이지. 보통 뱀파이어의 약점은 두 개야. 햇볕과 은. 그 두 개가 집약되어있는 물건이지."

"그럼······.“

나이프를 움켜쥔 김세진은 오묘한 눈빛으로 바토리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그녀의 눈꼬리가 설핏 휘었다. 그러나 분노를 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뱀파이어의 약점이라고 해봤자 젊을 때는 느껴지지도 않아. 그런데 로드는 다르지. 늙은 사람이거든. 아마 이걸로 살갗을 베이면 절삭면의 살이 썩어 문들어갈거야. 게다가 한 번 베이면 회복도 못 해.“

"흠."

그는 은색 나이프를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외견은 무척 평범하다. 피부가 아니라 스테이크를 썰어야 될 것 같은데. 것도 레어는 너무 질기니까 웰던.

그런 그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바토리가 충고를 덧붙였다.

"얘야, 근데 너무 방심하지는 마렴. 로드는 키메라 공학의 일인자거든.“

그러나 그 말을 끝으로 온 신경을 핸드폰에 집중한다. 꼼지락꼼지락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아마 혼자서 여론조작을 하려는게 아닐까.

김세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간다.“

"······.“

바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타닥- 타닥- 하는 핸드폰 특유의 타자소리만 공허 속에 메아리칠 뿐.

***

계획은 10일 뒤, 4월 20일로 잡혔다. 여태 태연한 척을 했지만 '로드'라는 이름이주는 중압감은 역시 허술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무거워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김세진은 노스페라투의 지하도시로 산책을 왔다.

고블린 도시 바로 옆 자락에 지어진 노스페라투의 터전은 과연 아름다웠다. 중세에서나 볼법한 고풍스런 고성 하나가 지반을 뚫을 듯 높이 드리우고, 그 주변에는 평범한 벽돌저택들이 늘어서있다.

어둠 속에 지어진, 고향을 빼다박은 도시. 햇볕을 싫어하는 뱀파이어들에게는 아마 지상의 낙원이 아닐까.

"성공하실거예요.“

가만히 감상하는데, 어느새 다가온 릴리아가 커피 한 잔을 쥐어주며 말했다.

그 정도로 우울한 얼굴이었나? 김세진은 애써 웃었다.

"그러길 바라야죠."

"그렇게 될 거예요. 로드는 죽고, 일행은 모두 무사귀환. 세진 씨는 집으로 돌아가 그날 있었던 일을 술회하며 일기를 쓴다. 그런 베스트 엔딩일거예요. 물론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김세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그는 커피를 홀짝이며 문득 궁금해진 부분을 물어보았다.

"근데, 생활은 괜찮아요?“

뱀파이어는 피 이외의 수단으로는 영양섭취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들에게 입과식도를 제외한 여타 소화기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신체의 구조와 생존의 방식이 다른 것이다.

뱀파이어가 인류의 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건, 그렇기에 필연적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세진은 지금 '현대'에 필연은 없다고 생각했다.

뱀파이어들이 살았던, 과학이라곤 중세 언저리에도 미치지 못했던 세계와, 현대의 지구는 다르다. 마나와 마법이 아무리 활개치더라도, 현대에는 과학이란 지혜가 엄연히 존재한다. 마나라는 격량에 휩쓸렸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걸 넘어, 오히려 마나와 마법을 자양분삼아 차근차근 발전해왔다.

그래서 현대에 불가능은 없다.

다만 시도를 하지 않은 것과, 시도를 한 것으로 나뉠 뿐.

그리하여 김세진은 뱀파이어만의 음식을 만들기로 했다. 뱀파이어에게도 포션은 적용된다, 는 간단한 사실에서 착상한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그 막연한 아이디어는 6개월의 노력 끝에 실체적인 프로토타입이 되었다.

마시자마자 모든 영양분이 전신으로 퍼지는 마법의 음료.

이거면 뱀파이어들이 소나 돼지의 피를 마셔야 한다는 혐오스러움도 없을 터.

물론 제조과정에서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가 필요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TM마탑의 지원자는 무려 6785명이니까.

그리고 노스페라투는 그 음료를 이용하여 대대적인 식단개선에 나섰다.

"아직 적응에 힘들어 하는 뱀파이어들이 많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저희는 잘 나아가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나중에는 당신들이 평생 경험해보지 못했던 '고기'맛도 출시할 예정이니까 기대해도 좋아요.“

물론 몇몇 마법사들이 갈려나가겠지만.

"후훗,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기대할게요.“

"릴리아 당주님! 이리 와보십쇼!“

그때 어디선가 남자의 고함이 들려왔다. 그 사람 냄새 가득한 외침에 릴리아는 웃으며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세진 씨도 이제 그만 들어가보세요. 물론 더 지켜보셔도 되구요.“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그는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예. 가보세요. 저도 이만 가야겠어요.“

릴리아가 떠나가고, 김세진은 도시의 반대편에 있는 출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사소한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일기를 쓴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허나 곧 '발 씻고 자라─'같은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의미로 여겼겠지, 단정한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시간이라는 거인은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어느새 10일이 지나 4월 20일이 되었다.

대망의 날.

계획에 참여할 멤버들은 모두 값비싼 아티펙트를 몸에 덕지덕지 두른 채 회의실에 모였다.

"우리 한 명당 1조 가까이 되는 거 아니에요?“

이혜린이 혁대모양의 고급 아티펙트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아마 긴장을 풀기위한 질문이었으리라.

"1조는 무리고, 5000억은 되겠는걸.“

"마나문신까지 합치면 1조는 족히 넘겠죠. 요즘 시국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얼마나 심한데요.“

유백송과 김선호의 말이었다. 김세진은 피식 웃고는, 레비아탄 폼으로 변했다.

"잡담은 이만 하고. 출발합시다. 모두 모이세요.“

"왁, 뭐야?“

"레비아탄으로 말도 할 수 있으세요?“

레비아탄의 매력적인 음성에 김유린이 놀라워하며 물었다.

"예. 근데 그 얘긴 나중에 하고 어서 모이세요. 정확도를 높이려면 제 몸에 달라붙으셔야 하거든요.“

일행들은 처음 순간전이를 경험한 당시, 땅바닥에 머리가 처박힌 기억이 떠올라 슬금슬금 레비아탄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예상 외로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피부결, 그들은 가만히 눈을 감는다.

김세진도 따라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좌표를 숙지한 뒤 미리 봐 두었던 풍경을 떠올린다.

"갈게요.“

일순 뇌가 쏠리는 어지러움이 일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뿐, 일행은 곧 비틀거리며 눈을 떴다. 짙은 어둠이 그들을 반긴다.

기다란 동굴 저편을 바라보며 김세진은 다시 인간의 형체를 취했다. 레비아탄이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물 속이 아니고서야 속도가 너무 느리다.

"후······ 갑시다. 이제부터 김유린 기사님이 대장입니다.“

"예. 모두 숨죽이고 따라오세요. 호흡도 조심."

김유린의 뒤를 따라, 일행은 어둠에 파묻힌 채 동굴 속을 거닐었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팽팽히 조여진 긴장감 속에 일행의 얼굴은 이미 땀에 젖어 반들거렸다.

그렇게 약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구우우우우──

불길한 진동이 귓등에 퍼졌다. 김유린은 이 위급함을 다급히 외치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어둠이 새하얗게 탈색되더니 공간이 반전되었다.

김유린은 갑작스런 순백에 눈이 부셔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잠시 눈을 괴롭게 했던 백색은 이미 남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그런데 분명 같은공간 속에 있어야 할 단원들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한 명. 김세진을 제외하고는.

당황한 얼굴의 김세진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이거, 아무래도 로드가 눈치챈 것 같네요.“

김유린은 낭패어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때.

로드의 음성이 나직하게 울렸다.

두 사람은 똑똑히 들었다.

─오크와 인간인가. 반갑구나.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로드의 목소리를.

< 45. 진입 (2) > 끝

ⓒ 지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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