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몬스터-153화 (153/174)

< 45. 진입 (1) >

새벽&TM 마탑 완공기념 커팅식이 서울 서초구의 신축마탑 앞에서 치러지고 있다. 참석한 면면은 하나같이 각 그룹에서 내로라하는 유력인사들 뿐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을 꼽자면 TM은 CEO 조한성, 새벽 쪽은 회장의 외동손녀 유세정.

"새벽에서는 유세정 기사가 왔군."

이 마탑은 서울에 지어진다. 이는 필연적으로 서울 최고, 한국 최고 마탑을 표방한 '서울마탑'과 경쟁을 하게 된다는 뜻. 그래서 서울마탑장은 분위기의 흐름을 느끼기 위해 몸소 이곳까지 찾아왔다.

짙게 코팅된 차창 너머로 유세정을 바라보며 마탑장이 말했다.

"TM에서는 조한성이라.. 김세진의 오른팔이 직접 참석할 정도면 그쪽에서도 거는 기대가 꽤나 크다는 뜻이겠지."

"예. 아무래도 TM과 새벽 모두 전력으로 뛰어든 것 같습니다.“

조한성은 대쪽같은 성품과 끈질긴 추진력으로 정재계에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인물이라 정평이 나있다. 물론 이유가 단지 그 뿐만은 아니다.

김세진의 최측근.

그 수식어는 조한성이라는 사람이 가진 다른 모든 것을 가뿐히 압도한다.

그리핀과 크라켄을 위시로 한 대규모 방산사업부터, 아티펙트와 오크의 무기, 마나문신 등등의 현 시국에 결코 없어선 안 될 창조적인 능력까지.

방배동 마법사가 현대 마법의 혁신을 나타내는 아이콘이라면, 김세진은 현대 그 자체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다.

특이한 일이다.

대중은 보통 특성의 도움으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인간군상을 싫어한다. 그러나 그 엄격한 잣대 속에서 김세진만큼은 예외다.

아마 상황이 특별한 탓일 것이다. 한 달에도 몇 번씩 보스몬스터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김세진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오래 전에 무너져내렸을 테니까.

그가 아니었다면 중상급 기사들의 무기수요를 충족시켜줄 오크제 무기가 없었을 것이고, 그들의 생존확률을 90%까지 끌어올린 아티펙트도 없었을 것이다. 출동시간을 비약적으로 단축시킨 그리핀도─출동과 동시에 도착하는 그리핀의 도입은 아예 '경찰혁명'이라 불린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증진시킨 범세계적 방위서비스 '크라켄'도 마찬가지다.

위기와 위험 속에서 길잡이별처럼 듬직하게 타오르는 존재.

그런 남자가 마탑이라는 지혜의 사업에 뛰어든 건, 경쟁자 입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재앙이었다.

"부탑주 헤밍 그 놈은 벌써부터 이력서 넣었다는 소문이 돌던데.“

마탑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할수록 짜증난다. 그 박쥐같은 놈.

"···헤밍 부탑주님은 어제부로 사표를 내셨습니다.“

"하, 뭘 믿고? 저기서 확답을 듣지는 못했을 텐데."

"탑주의 말로는 "승부수를 던지겠다"라고 말하고 사표를 냈답니다.“

"..승부수가 아니라 도박수겠지."

마탑장의 한숨이 차창에 달라붙어 성에가 되었다. 날짜는 완연한 봄임에도 불구하고 날씨는 여전히 차다.

"뭐, 향후 예상은 낙관적이겠지?"

"······예. 그나마 단점이라고 할 건덕지라고는 100권밖에 없는 마기서 보관량 뿐인데, 그 중 25권이 한 권당 1년은 파고들어도 모자랄 명품들이니······.“

마기서의 가치는 '기록된 마법 하나를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마기서에 사용된 원리와 구성을 응용하여 또 다른 파생마법을 창조해내는것. 그것이 '마기서'의 가장 큰 의의다.

그런 점에서 혁명에 가까운 방배동 마기서는 최고의 가치를 지닐 수 밖에 없다. 방배동 마기서 1권이면 다른 마기서 10권은 족히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헌데 신축마탑에는 그 25권이 모두 들어있으니, 250권, 2500권으로 불어나는 건 그저 시간문제에 불과할 터······.

"으음?"

그때였다. 마탑장은 멀리서 커팅식을 구경하는 한 명의 사내를 발견했다. 익숙하다. 강건한 골격, 기다란 다리. 선 굵은 턱과 오똑한 콧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썼음에도 그 예술적인 태는 결코 숨겨지지 않는다.

수백, 수천번을 봐서 봐서 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비밀이지만, 마탑장 '진요셉'은 김세진의 열광적인 팬이었기에.

"······잠깐만.“

마탑장은 황급히 차문을 열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김세진 씨 아니십니까?“

그의 선글라스 아래, 낭패 어린 기색이 짙게 떠오른다.

*

김세진은 갑작스레 찾아온 서울마탑장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탑 놈들은 다 자존심만 드럽게 센 아집 덩어리들이다─ 라는 인상과는 달리, 마탑장은 온건한원칙주의자였다. 대화도 잘 풀리고 정중한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그 행동과 목소리속에 담긴 열정이 진심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요. 선물입니다.“

그래서 커팅식 홍보 겸 가져왔던 물건을 그냥 줘버렸다.

"이건 뭡니까?“

마탑장이 무테안경을 고쳐세우며 장서 한 권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표지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다. 다만 No.26라는 영어와 숫자만 은은히 새겨졌을 뿐.

넘버 26, 26번째, 숫자 26······

되뇌이던 마탑장은 어느 순간 그 뜻을 깨달았는지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이, 이건······.“

"잘 쓰세요. 26번째 마기서는 아마 전 세계에 17권, 아니 그거 포함 18권 밖에 없을 겁니다."

김세진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 26번째 마기서는 마법과 마도의 경계에 있다. 바토리의 마도 지식과 레비아탄의 마나지체가 합쳐지지 않았더라면 결코 되살아나지 못했을 마법, '메테오'. 화속성의 정점에 위치했다던 이 전설 속 마법은, 이제 곧 마법계에 커다란 크레이터를 남기겠지.

"어. 어어······ 하지만 이, 이런 귀한 물건을 받을 수는······.“

마탑장의 손이 덜덜 떨렸다.

"받으세요. 이런 마법을 익힐 수 있는 마법사는 어차피 얼마 없습니다.“

김세진은 일부러 공격마법을 택했다. 훗날 있을, 김유손이 예언한 '몬스터 대재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물론 혹시라도 뱀파이어의 손에 들어가 악용될까, 메테오를 익힐 역량이 충분한 탑주가 있는 마탑만을 미리 선별하여 총 17개의 마탑을 골라서 직접 증정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중에는 한국 마탑은 없다. 하지만 뭐, 한 권 더 만들면 되니까.

"가져가세요. 그럼 저는 이만."

"예? 아, 가, 감사합니다! 저, 사실 김세진 씨 팬입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김세진은 몸을 덜덜 떠는 마탑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기자들이 친 진을 탱크처럼 뚫어내며 커팅식으로 향했다.

갑작스런 장신이 밀고 들어오자 기자들은 저마다 저도 다른 짜증을 토해냈다.

그렇게 중간지점에 이르렀을 때.

김세진은 선글라스를 벗고서 유세정을 바라보았다.

언질은 일체 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고, 기자들은 카메라 렌즈를 그에게로 돌렸다.

그는 기자들이 터준 길 사이를 저벅저벅 걸어갔다. 모세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그는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유세정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어준다.

"이제 몇몇은 눈치채겠지?"

"······아우 증말. 미리 말이라도 좀 해주던가."

유백송은 짐짓 힐난하듯 말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갑작스런 김세진의 출현으로 커팅식은 성황리에 마쳤다.

* * *

"로드의 낌새가 지하에서 느껴진답니다.“

로스한델이 말했다. 힘없는 목소리였다. 또한 두 눈두덩이에는 검은색 멍이 가득하고, 머리털은 거의 반절이 쥐어뜯겨져 있다. 바토리의 연설문에 재를 끼얹은 대가를 톡톡히 치른 듯한 모습이었다.

"어디 지하?“

이혜린이 그에게 삶은 달걀을 쥐어주며 물었다. 로스한델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달걀로 눈두덩이를 마사지했다.

"강원도 몬스터 필드의 지하. 왜, 그때 균열 두 개가 겹치면서 지반이 어그러졌던장소 있잖습니까.“

"아! 그 마나가 움직이지 않던 곳?“

이혜린이 생각났다는 듯 손뼉치며 말했다. 그에 김유린은 뭔가 추억에 잠긴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 곳은 오크와 처음 만났던 장소였다.

"예. 거기에서 심복들과 함께 무슨 연구를 하고 있답니다.“

"무슨 연구?“

"저도 모릅니다 그건. 뭔가 하고 있겠지요.“

"······길드장님? 어떻게 할까요.“

김유린이 김세진을 바라보며 묻는다. 김세진은 가만히 고민하다가 김선호를 바라보았다. 김선호는 주지혁에게 바통을 넘겼다. 주지혁은 다시······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 시선의 끝은 김유린이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쩔 수 없잖습니까. 작전지휘 경험이 많은 건 대장님이잖아요.“

"알았어 알았어. 일단 지도부터 봅시다.“

김유린은 로스한델이 가져온 내부지도를 펼쳐보였다. 가장 눈길을 끈 점은 통로가 동해와 가까이 있다는 점, 어쩌면 레비아탄을 이용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이 기다란 통로로 진입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떠오른다. 막무가내로 지하에 구멍을 내서 얼굴부터 들이밀던가, 아니면 잠입하던가······.

그녀가 고심하는 사이 로스한델이 말을 덧붙였다.

"아, 맞다. 바토리가 계획일이 정해지면 연락 주랍니다. 도와준다고."

"그래? 그럼 좋······ 잠깐, 로드는 다 볼 수 있다매. 너 우리랑 만나는거 다 보였을 거 아냐. 이미 다 들킨거 아니야?“

이혜린이 물었다.

“아. 그건 맹세를 한 뱀파이어에 한하는 겁니다.”

"맹세?"

"꽤 오래전 일입니다. 예전에 뱀파이어 척살령 아시죠. 그게 내부소행임이 확실했거든요? 여차저차 살아남은 뱀파이어들은 이제 배신자를 찾아 죄값을 치루게 해야 하는데, 웬걸. 숫자가 워낙 적으니까 '안 그래도 적은 숫자의 동포끼리 죽고 죽이지 말자. 대신에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여 목숨을 로드에게 맡기자······' 이런 식으로 생각이 옮겨간 겁니다. 근데 저는 척살령 이후에 태어난 어린이라 피의 맹세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이······.“

이혜린은 경멸과 몰이해가 섞인 눈빛으로 로스한델을 바라보았다.

"왜 이러십니까. 애초에 여기서 제가 막내인데. 김유린 기사님이나 하젤린 마법사님은 이미 30대를 넘으셨잖습니까. 저는 파릇파릇한 20대라고요.“

별안간 언급된 두 사람은 동시에 이를 까득 갈았다. 격렬한 살의가 눈동자에서 불타오른다. 로스한델은 짐짓 휘파람을 불며 그 눈을 피해야만 했다.

"아니, 그래도. 몇몇 뱀파이어가 그거 잘못 걸리면 다 죽는거 아냐? 노스페라투까지?“

"아뇨. 그것도 아니랍니다. 로드는 연구를 하느라 지금 지하에 처박혀 있어서 그런걸 살필 여유가 없을거라더군요."

"어쨌든. 문제가 없다는 거네. 그럼 이렇게 하는건 어떨까? 자, 한번 들어보세요······"

김유린은 짧은 시간동안 구상한 계획을 늘어놓았다. 일단 굉장히 복잡했다. 무슨 포크레인, 레비아탄, 크라켄 등등을 모두 활용하는 작전이었다. 허나 듣고 보니 꽤나 그럴 듯한 방법이어서, 모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역시 대장님."

"역시. 괜히 김유린 김유린 하는게 아닙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럼 길드장님. 이 계획으로 할까요?"

"좋습니다. "

김세진은 허락을 내렸다.

띵!

그런데 그때 회의실 엘리베이터가 열리더니 새하얀 중학생-처럼 보이는- 여자 한 명이 뒤늦게 도착했다.

"나 왔어. 무슨 일이야."

"아, 유백송 씨. 어서 앉으세요. 설명할 계획이 있습니다.

김유린은 그녀에게 다시금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나 유백송은 별안간 고개를 갸웃하더니, 묵직한 돌덩이를 툭 내던졌다.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해? 좌표만 알아내면, 마도로 들어갈 수 있는 거잖아. 야 김세진. 너 그때 우리 순간이동 시켜줄 때 썼던 마도, 또 쓸 수는 없는거야?“

"······“

"······"

"······"

그 간단한 방법을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회의실에는 자조 섞인 침묵이 짙게 가라앉았다.

< 45. 진입 (1) > 끝

ⓒ 지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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