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의심과 협력 (3) >
"······이상한 술수를 부리네.“
바토리는 그렇게 말하며 김세진을 째려보았다. 단지 눈빛 뿐임에도 위압감이 목을 조르는 듯하다. 이토록 서슬퍼런 눈을 마주한 대상이 일반인이었다면, 아마 그대로 급사했겠지.
"무슨 소리야?“
세진은 최대한 평범하게 대꾸했다. 바토리는 그가 인위적인 마법을 사용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기에,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됐어."
전신을 짓누르던 마기가 쑥 빠져나간다. 세진은 일말의 탈력감을 느꼈다.
"으어."
"어쨌든, 협력 할거니 말거니?“
바토리가 탐탁잖은 기색으로 팔짱을 꼈다. 그러나 세진은 그녀의 저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그때에는 로드를 의심하는 것만으로도 사지를 찢어 죽일 기세더니,이제 와서 무슨······.
바토리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허나 본론과는 많이 비껴난 주제였다.
"근데 얘야. '더 몬스터'가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요란하니? 뭐만 하면 사람이 몰려들어서 불편해 죽겠어. 오는 길에도 몇 놈 죽이고 싶었는데, 간신히 참아야했단다?“
엘프 마법사 에밀레르는 인기가 많다. 물론 바토리의 마나에 내재된 매혹의 기운 때문일 확률이 높지만, 팬덤은 김유린 바로 다음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TV에 비춰지는 그녀의 모습은 인기가 많을만 하다. 시원시원한 파괴마법으로 모든걸 분쇄하는 문자 그대로의 '여제女帝', 완전 폭군이다 폭군.
"tv보면 알잖아. 세계 최고의 길드. 세계 최고의 혜택. 세계 최고의 복지. 전세계 기사 혹은 마법사들의 워너 조인(wanna join) 길드.“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였다.
"흐음······ 근데 이런 쥐새끼만한 땅덩이에서 세계를 논하는건 이르지 않니?“
"그런 쥐새끼만한 땅덩이에서 니들은 도대체 뭔 짓을 벌이려고 하는거냐?“
세진은 바토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맞받아쳤다. 그녀는 화난건지 기쁜건지 모를 미묘한 표정이었다. 허나 이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서 묻는다.
"······협력, 할거야 말거야.“
"내용을 말해줘야지.“
"말했잖아. 로드를 죽이게 도와줄게.“
불과 얼마 전까지 로드를 섬기던 모습과는 정말로 딴판이었다. 사람이 왜 갑자기 이렇게 변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성가신 존재가 하나라도 더 없어져준다면 오히려 고맙다.
하지만 문제는, 바토리가 로드가 된 다음이다.
"그리고 나서는?“
김세진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그리고 나서는 너네가 알아서 해야지."
바토리는 조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얘야,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통로가 열리는 건 확정된 사실이란다. 너네가 노력한다고 바꿀 수는 없어. 너네는 그 이후를 대비해야지, 그 전에 통로부터 막겠다~ 따위의 생각은 안 돼."
"그럼, 로드를 죽이는 건 '그 이후'를 대비하는 일이라는 뜻인가?“
"그렇지. 네 추측대로면, 로드는 지구의 과거로 갈거라면서.“
"······.“
그는 입을 다물었다.
로드는 지구의 과거로 가고싶어한다고, 분명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정답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로드의 계획은 과거로 가는 것이 아닌, 지구라는 무대와 시간은 유지한 채 '다른 차원'으로 가려는 것일 확률이 높다.
김세진은 그것을 바토리에게 설명해주었다.
"······복잡하잖아. 더 쉽게 말해봐.“
"그러니까, 로드가 지구의 과거로 갔으면 지금 '현대'가 영향을 받았어야지. 왜, 과거로 간 로드에 의해 이미 뱀파이어의 제국이 되었다든가 해야겠지. 근데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 처음 가정이 틀렸다고. 놈은 '차원'만을 넘어갈 생각인거야. “
"······그 차원이란 건, 같은 공간에 여러 개가 있는거야?“
"그래. 균열의 정의는 '차원과 차원의 세계와 세계 사이의 틈'이니까, 충분히 차원도 넘어갈 수 있어.“
그러니까 결국 세진이 이 말을 한 이유는, 로드를 죽인다고 해서 현재 지구의 '그 이후'를 대비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다른 차원의 지구란, 엄연히 말하면 이쪽과 전혀 상관 없는 일이니까.
바토리는 용케도 그 속뜻을 알아들었는지 얼굴을 나찰처럼 일그러뜨렸다.
"그래서, 협력 안하겠다고?“
"······.“
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바토리는 마나를 방출시키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대답 안하니?“
대답 안 할 필요는 없다. 어찌됐든 로드를 처단하는 걸 도와준다는 것은, 오히려 고마운 일이니까.
그러나 그는 여전히 침묵한 채 늑대 폼을 취했다.
일단 협력을 하러 왔다는 건 적어도 죽일 생각은 없다는 뜻일 터······ 그렇다면, 그녀의 피를 섭취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
"너는 진짜 답이 없구나.“
바토리는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망설임 없이 뛰어든 김세진은 앞발로 그녀의 두 어깨를 내리찍고, 아가리는 하얀 목으로 들이밀었다.
[바토리의 피를 섭취합니다······]
기분 좋은 알림창과 함께, 거대한 충격이 뇌를 뒤흔들었다. 바토리는 단지 옆통수를 후려친 것 뿐이었다. 하지만 컨디션이 100%인 그녀의 위력은 그야말로 흉폭······
"꺄아아악!"
다행인 건, 바토리도 세진과 똑같은 피해를 입는다는 것. 김세진은 포션의 힘을 빌려 다시금 바토리에게 달려들었다.
*
김세진은 바토리에게 딱 죽기 직전 까지 쳐맞고서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제안을 응낙했고, 바로 다음 날 회의를 소집했다.
김유린, 이혜린, 하젤린, 유백송, 주지혁, 릴리아, 김선호, 릴리아, 그리고 로스한델까지. 총 아홉명의 인원이 비밀 회의실에 모였다.
김세진은 우선 바토리와 협력을 해야 한다는 끔찍한 사실의 개요를 털어놓고서, 그 다음 해야할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바토리와 함께 다니는 건 로스한델이 계속합니다.“
"······예?“
김세진의 말에 로스한델은 나라 잃은 얼굴이 되어 무너져내렸다.
"일단 감시책이 있어야될 거 아니냐. 그리고 따로 정보수집과 탐색은 유백송 씨랑 김선호 씨가 정보원들과 함께 하세요."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유백송과 김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둘의 시선은 김세진의 허벅지 위에서 교태를 부리는 카이저 2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기사분들은 강해지는데에 집중. 김유린 씨는 그리핀에 서투실테니, 둥지에 가셔서 그리핀 다루는 법도 완벽히 익혀두세요. 아, 물론 공로전 끝나고 나서."
"예 알겠습니다!"
김유린이 힘차게 대답한다. 그렇게 김세진은 빠르게 회의를 마쳤다.
그 다음은, 이혜린의 장난기 서린 감탄이었다.
"오올~ 우리 길드장님 폼나는데~“
"······장난치지 마세요.“
"이히힛. 아, 근데 여기 단원 아닌사람이 껴있는데 괜찮아요?“
김유린이 뜨끔한 얼굴로 어깨를 들썩였다.
"어차피 합격은 거의 확정이시니까 괜찮습니다. 어서 모두 해산! 시간 없습니다!“
바토리는 10월~12월 사이에 균열이 열린다고 하니 시간이 촉박하다.
* * * *
그로부터 10일이 지난, 4월 2일.
드디어 공로전이 끝났다. 기사부문 합격자는 김유린과 주오형, 둘 다 고위기사였다. 마지막 합격이 발표난 파이널 무대에서는, 김유린의 담담한 입단소감과 주오형의 눈물어린 헌사가 극적으로 대비되는 꽤나 재미난 그림이 그려졌다.
한편 마법사부문 합격자는 브레틴이라는 엘프 남자와, 바토리와 약속했던대로 에밀레르였다.
바토리는 뭔가 고풍스러워 보이려고 했는지, 사자성어를 인용해 입단소감을 전했다. 그러나 틀려도 너무 틀린 활용이었다. 김세진은 도대체 왜 그런 기쁜 자리에서 '읍참마속'이라는 사자성어를 쓴 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훗날 들으니 로스한델이 알려준거라고 했다. 바로 다음 날, 인터넷을 통해 사실을안 바토리는 로스한델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며 길드 건물로 쳐들어왔다.
다행히, 일시적인 협력관계는 아직 원활하게 유지되고 있다.
─새벽&TM 마탑 완공식, 새벽과 더 몬스터의 합작품.
─압도적인 자금력과 더 몬스터가 합쳐지다.
─새벽曰 불안정한 시국일수록 투자금액을 늘리고 다각화할 것. 목표는 국내 1위는 물론, 세계 1위의 마탑.
그리고.
또 다른 핵폭탄이 터졌다. '새벽'과 '더 몬스터'가 지분을 각각 5.5:4.5로 나눈 마탑이 공식적으로 출범한 것이다.
물론 단지 그 사실만으로는 국내가 들썩일 만큼의 파급력이 없었다. 재계 1위 새벽이 뛰어들었다 한들, 현대의 마탑은 수 십년에 걸쳐 겹겹이 쌓은 경험과 지식이 낳은 지혜의 산실.
아무리 새벽이라도 적어도 몇 십년은 적자와 비아냥의 늪에서 헤아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게, 여타 마탑과 전문가들의 냉소적인 중론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특종'이라는 딱지를 붙인 기사가 터지면서 상황은 180도 급변했다.
그 어느 마탑에도 적(籍)을 두지 않았던 마법사.
'불세출의 마법사'라는 범세계적 수식어는 물론 천재의 아이콘이 된, '방배동 마법사'.
그가 새벽 마탑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No.1부터 No.25에 해당하는 마기서 제공은 물론, 이 다음 발매할 마기서까지 모조리 기증하겠다고 블로그를 통해 공언했다.
그야말로 핵폭탄급 특종이었다.
그저 진흙탕 속에 신생아가 빠진 것 쯤으로 여기던 여러 마탑들은 기함할 수 밖에없었다.
그리고 이곳은, 그런 마법계의 소용돌이와는 딴 세상인 김세진의 자택.
"어때? 여론은 괜찮아?“
김세진이 노트북에 딱 달라붙은 세정이를 껴안으며 물었다.
"엄청 좋아. 지금 베뎃 1위가 [새벽이랑 더 몬스터랑 방배동 마법사랑 합쳐진거면, 생태계 교란종 아님?]이야. 히히히."
"그래? 근데 너 마탑 사업에 관심이 되게 많네?“
"응, 당연하지. 이거 내가 추진한 사업이거든.“
"진짜?“
"어. 그래서 마탑장도 나지롱.“
유세정이 세진의 볼에 쪽- 입맞춤을 하고는 싱글벙글 웃었다.
참고로 마탑장과 마탑주는 다르다. 마탑장이 이사장이라면, 마탑주는 학장이나 마찬가지. 물론 마탑장의 권한이 훨씬 강력하다.
"뭐야. 왜 말 안했어. 그럼 더 여유롭게 협상했을텐데.“
이 일의 책임자인 조한성은 새벽쪽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끈질기게 협상했다. 그의 말로는, 과거 자신을 못살게 굴었던 새벽의 상사가 협상 책임자로 나와서 그랬다고는 하는데······.
"괜찮아. 어차피 내 지분은 30% 고정이니까. 나머지는 할아버지랑 아빠꺼거든. 차라리 오빠가 가지는 게 나아.“
"······.“
뿌듯해야할지 미안해야할지. 김세진은 객쩍은 미소를 지으며 세정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리고 함께 노트북을 바라본다.
"오. 이 사람 서울마탑 부탑주 아니야? 이쪽은 부산마탑 탑주고.“
"응. 별 아쉬움 없을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지금 자리 없냐고 엄청 문의오네. 자기PR용량이 무슨 1GB나 된다니까? ······아, 맞다. 외국에서도 왔어. 봐봐. 세계 5위 벨리 마탑 탑주야.“
유세정이 사진을 띄웠다. 벨리 마탑주는, 탑의 이름답게 쫙빠진 몸매의 엘프였다. 과연 벨리댄스 잘 출···
“하, 어이없네. 어딜 보는 거예요 아저씨?”
"······아, 아니. 크흠. 잘 됐네. 마탑도 금세금세 발전하겠어.“
"..응. 방배동 마법사 영향이 엄청 컸어. 비치된 마기서가 100권밖에 없는데, 지금 몰리는 마법사는 1000명이 넘는다니까?“
마기서는 비싸다. 그리고 구하기 힘들다. 대강 중급 이상의 마기서의 시세는 수십억대에 달하고, 무엇보다 돈이 있어도 매물이 풀리지 않아 매입할 수가 없다.
새벽도 고작 75권(100권에서 방배동 마기서 제외)밖에 구하지 못했을 정도이니······.
이는 마탑에 보관된 마기서는 마법사들이 시간을 들여 자체적으로 발명해낸 것이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유세정이 므흣한 미소를 지으며 세진의 허벅지를 은근슬쩍 쓰다듬었다.
"오빠가 조금만 더 열심히 일해주면······ 우리 엄청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손길이 점점 더 야릇하고 대담해진다. 김세진은 피식 웃으며,
"그러면 마탑주는 내가 정한다."
협상을 개시했다.
세정이의 동공이 아기새처럼 푸르르 떨렸다.
< 44. 의심과 협력 (3)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