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의심과 협력 (2) >
공로전이 시작한 지 정확히 2주가 지났다.
길드원 따위를 뽑는 행사에 과연 국민들이 불안을 덜어내고 단합을 할까? 라는 김세진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성황리에 진행 중이다. 오히려 너무 많은 불안을 덜어낸 것은 아닌지 불안스럽고, 과도할 정도로 끈끈히 단합한 단합력이 문제로 돌변했다.
왜 팬덤은 항상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치켜세우는 것만으로 멈추지 않고, 다른 후보들을 들쑤시고 공격하는 걸까. 김세진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렇게 기사 15명 마법사 15명. 총 30명의 최종후보가 간추려졌다.
이제 이들은 '기사격전'이니 '마법대전'이니 하는 결투의 형식을 빌려서 점수 쟁탈전을 하게 될 것이다.
"완전 난리도 아니야. 새벽에서도 다 그 이야기 뿐이라니까.“
유세정은 생글생글 웃으며 눈으로는 TV를 보고, 오른손으로는 노트북의 마우스를 조종하며, 왼손으로는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날렸다. 과연 신기에 가까운 멀티태스킹이었다.
"근데 세정아. 너는 뭐가 그렇게 바빠?“
"어? 아. 나도 오빠 못지않게 엄청 바빠. 오빠가 너~무 나랑 안 놀아주다 보니까,사교의 중요성과 재미를 깨달아버렸거든. 그래서 여러 모임 나가고 그러는데 사람들이 진짜 엄청 궁금해해. 다음 시험은 뭔지, 내부적으로는 누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지. “
"······그래?“
김세진은 은근슬쩍 눈알을 굴려 그녀의 핸드폰을 살펴보았다. 실제로 웬 단체방에서 메시지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그런데 단체방의 이름이······ '새벽기사단 1팀-슈퍼 엘리트 모임'이다. 뭔가 굉장히 유치한 이름이긴 한데, 보통 '1팀'은 기사단의 가장 핵심적인 전력이 모인 팀이라서 허언은 아니다.
"···!"
그때, 늑대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러나 단톡방 때문은 아니다. 유세정이 그를 바라보는 틈을 타, 핸드폰의 중앙에 떠오른 기다란 박스모양의 개인 톡.
[김정호: 세정 씨 뭐하세요?]
힐끗 보기에도 남자 이름이고, 프로필에는 남자 사진이 떡하니 들어있으며, 누가봐도 관심을 표하는 것 같은 문자 내용이 대미를 장식한다.
"남자잖아.“
저도 모르게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세정은 약간 벙 찐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어?“
"얘. 얘말이야 얘. 남자잖아.“
김세진이 핸드폰의 액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개인톡이 왔음을 나타내는 알림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녀는 그의 손가락을 좇더니, 이내 미간을 살짝 좁혔다.
"뭐야. 왜 내 핸드폰 훔쳐봐.“
"훔쳐보다니. 그냥 보인건데.“
"치. 자기는 내가 핸드폰 못 보게 하면서, 내꺼는 왜 맘대로 봐?"
짐짓 화났다는 듯 볼을 부풀린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아니다. 그런데 귀엽긴 하니까 일단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아니, 남자한테 카톡이 왔잖아 방금. 누가봐도 끼부리는 내용이었어."
"이거 단톡인데 무슨··· 오빠 설마 단톡이 뭔지 몰라? 단체톡방 단체톡방. 이거 사람들이 단체로 모여서 문자 메시지로 대화를 나누는······“
김세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요게 지금 누굴 80대로 보나.
"알아. 근데 방금 온 건 단톡 아니야. 방금 개인톡 왔어. 내가 봤어“
"······응?“
그녀의 얼굴이 일순 멍하니 흐물거린다. 세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을 쫙 뻗었다.
목표는 강탈, 그 대상은 핸드폰.
그러나 그녀는 재빨리 핸드폰을 등 뒤로 숨겼다.
반응속도는 상급.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욱 의심스러움.
세진의 눈썹이 불만으로 꿈틀거렸다.
"줘봐. 왜 안줘."
"잠깐. 잠깐만 있어봐. 이거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
"그러니까 줘보라고. 근데 얘는 왜 너를 세정 씨라고 부르냐?“
"그··· 재성기업 부사장 아들이야. 막내라서 기업을 못 이어. 그래서 기사 쪽에 집중해서, 지금 칠흑기사단에 상급기사로, 전도유망한 기사······“
세정이는 시뻘개진 얼굴로 횡설수설을 한다.
"아니 신상은 읊을 필요가 없고. 일단 줘보라고.“
"지, 진짜 별거 아니야. 오빠도 하젤린 언니랑 가끔식 갠톡 하잖아. 그런거야.“
“뭐?”
갑자기 순간 화가 팍 났다. 자신이 하젤린과 가끔씩 했던 톡은······ 아뿔싸, 이게 내로남불이구나! 김세진은 잠시 숨을 추스르며 진정하고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 그건 그럴 수 있지. 근데 말이다, 이 사람 너랑 나랑 사귀는 건 알고 있어?"
하젤린은 그 사실을 알고도 그랬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에 솔직한 엘프라는 변명거리라도 있지, 이 김정호라는 남자 놈은······
그의 물음에 세정이는 뭔가 생각이라도 하는 양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서 자그맣게 말했다.
"아니, 몰라.“
김세진이 약간 충격을 받은 틈을 타, 그녀는 추가타를 속속들이 뱉어냈다.
"우리 동거하는 거, 기사단에서 아는 사람 별로 없어.“
"······어떻게 그래?“
"그거야 직접 말 안했으니까 모르지.“
"적어도 눈치가 있으면 알지 않나? 이렇게 대놓고 같이 사는데? 아니 모를 수도 있긴 한데. 대기업 막내라매. 근데 몰라?“
유세정은 피식 웃었다. 물론 일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은연중의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극히 함구하고 있어서, 그 흔한 찌라시로도 돌지 않았다. 더 몬스터와 새벽에게 눈총을 사면 그 길이 바로 사장길일니까.
"응, 몰라. 그 사람은 가족이 내놓은 자식이거든. 불쌍한 사람이야. 기사단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우리 친한 오빠 동생 사이로 알아. 주지혁 씨 빼면."
"그래?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고놈 분명 알고 있을걸? 아무리 내놨다고 하더라도 대기업······.“
"자, 자. 받아. 직접 보고 판단해."
이쯤 되면 김세진이 충분히 누그러졌다고 생각한 것인지, 유세정이 핸드폰을 순순히 건넸다.
"봐봐. 진짜 별거 없어.“
아마 아량이 하해처럼 넓은 남자라면, 엄숙하고 근엄하지만 동시에 자상한 목소리로 "아니, 나는 너를 믿는다─" 따위로 말하며 핸드폰을 돌려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해는 레비아탄을 담기에는 너무나도 좁단 말이다.“
"······뭔 소리야 그게?“
그는 변명 아닌 변명을 중얼거리며 핸드폰의 내용을 확인하였다.
[세정 씨 오늘 기업회의에 참석하시나요?] (2월 13일 AM10:03)
[아니요. 그걸 제가 왜 가요.] (2월 13일 PM9:43)
[하하. 그래요? 저는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자리인데..] (2월 13일 PM9:45)
==(이하 비슷한 구조 반복)
[김정호: 세정 씨 뭐하세요?] 3월 4일 PM6:33]
세정이의 철벽은 만족스럽다. 근데 이 김정호란 놈은 뭐가 이렇게 끈질긴 건지······ 그렇게 그가 핸드폰에 집중하고 있을 때, 세정이가 고양이같은 손을 잽싸게 움직여 그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오빠것도 볼게.“
순간 김세진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허나 다행히 요즈음은 여자와 연락을 거의 하지 않는다.
물론 하젤린도 없다. 그녀는 요즘 눈치가 보이는지, 이따금씩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에 "사진 잘 나왔네요" 따위의 댓글만 달 뿐 사적인 연락은 일절 하지 않는다.
"흠흠. 그래. 좋아.“
고작 3분만에 검열을 끝낸 유세정은 만족하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세진의 품에 포옥 안긴다.
"아 맞다 오빠. 근데, 방배동 마법사는 왜 후보로 안 올라갔대?“
"음?“
"아니 왜, 그분 우리랑 사이 좋은거 아니었나? 우리한테만 마기서 전부 주고 그랬잖아. 이번 공로전에 마법사들이 열정적인 것도 다 그거 때문이래. 방배동 마기서가'풀 세트'로 있는 더 몬스터 도서관 열람하고 싶어서. 이번에 마기서 No.25까지 나왔다고 그랬나?“
이틀 전 방배동 마법사는 마기서 No.25를 발매했다.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아쉽게도 현재까지 그 마기서가 비치되어있는 장소는 '더 몬스터 길드원 전용도서관' 뿐이다.
왜 마탑에는 없냐면, 치열한 물밑 전쟁 때문이다. 그야말로 지독한 전쟁이다. 고약한 견제는 물론이거니와, 마기서 입찰을 포기하지 않으면 비리를 터트리겠다는 일차원적인 협박부터, 정부에게 로비까지 하여 외국 마탑은 쫓아내자는 국내 마탑의 담합까지······
이토록 저열하면서도 처절한 전쟁을, 김세진은 알지 못한다.
"아, 방배동 마법사?“
"응. 나 그분 한번 보고싶은데."
세정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묻는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귀여운 모습에, 김세진은 입가를 씰룩이며 결심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말해야 될 때가 다가온 것 같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특성이 레비아탄으로 변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인간일 때에는 레비아탄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다는 것 또한.
"내가 방배동 마법사야.“
"······응?“
잠시 동안의 침묵 이후, 유세정이 다소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방배동 마법사 이름이 '내'라고?"
말장난인가 싶었지만 표정과 목소리가 사뭇 진지하다. 김세진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아니, 내가 방배동 마법사라고. 전혀 눈치 못챘어?“
"어, 어··· 뭐어?! 어, 어떻게! 거짓말이지!“
화들짝 놀란 그녀는 방방 뛰어오르며 그의 어깨를 붙잡고 뒤흔들었다.
"잘 생각 해봐. 레비아탄은 마법을 쓰는 존재야. 그리고 우리랑 아무 접점 없는 방배동 마법사가 왜 마기서를 줬겠어?“
"······헐.“
더 커질 수 없이 커진 유세정의 눈과 입에 경악이 들어선다. 오크 대장장이 때와 비슷한 고백인데, 아무래도 그때보다 더 큰 충격인 듯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린 그녀는 현실적인 이해타산을 따지기 시작했다.
"오, 오빠. 그러면 방배동 마법사 마기서, 우리 새벽한테 맡겨주면 안 돼? 우리 알지? 마탑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는거“
"······뭐야. 더 안 놀라는 거야?“
"어? 아, 엄청 놀랐어! 우와, 우와아아아! 오빠 너무 대단해 진짜!“
과장한 몸짓과 손짓으로 '내가 놀랐다'를 더없이 표현하는 그녀는, 분명 예전보다는 몇 천배 명랑하다. 첫만남 때의 모습과 지금을 비교하면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우리 오빠는 잘생겼구, 몸도 좋구, 무기도 잘만들구, 이제 마법도 잘하네······?“
유세정은 그의 몸속을 파고들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째려보던 김세진은 피식 웃고는,
"이렇게 하자. 더 몬스터랑 새벽이랑 마탑 지분 나눠. 그러면 방배동 마법사 마기서 전권 비치는 물론, 방배동 마법사 이름까지 그 마탑에 올려둘게.“
협상을 개시했다.
순간 유세정의 동공이 바르르 떨린다.
"······어? 왜, 왜? 왜지? 그건 말이 안되는데··· 더 몬스터는 우리가 마탑 세우는 데 도와준 게 없잖아.“
"곧 도움을 주는거잖아. 엄청난 도움을. 방배동 마법사 마기서 플러스 이름값이야. 그러면 마탑 세우자마자 곧바로 네임드 될 걸?“
"······.“
3초 간의 정적. 이후 그녀는 슬그머니 김세진의 곁을 빠져나오더니, 핸드폰을 집어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김세진은 여유롭게 '그쪽'의 의견을 기다려주었다.
* * *
3월의 중순. 매회 4만명 이상의 직관관중을 동원한 기사격전과 마법대전이 드디어 끝났다.
기사 부문에서는 김유린이 14승 0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이었고, 마법사 부문에서는 에밀레르 라는 미모의 엘프 마법사가 마찬가지로 14승 0패를 거두었다.
이후 몬스터 처치, 공익적 공로, 이벤트 격인 상식배틀 등등··· 여러 시험을 거치면서 서른 명중 스무 명이 탈락했다. 탈락자들은 아쉽거나 억울하거나 분한 표정을 짤방으로 남기며─심지어 대성통곡을 한 마법사도 있었다─ 사라졌다.
그리고 김세진은 남은 열 명의 후보들과 대면상담을 가지기로 했다. 일단 심성을 가려내야 했을뿐더러, 방송사도 그런 그림을 원했다.
"반갑습니다. 에밀로르 마법사님"
"네. 안녕하시와요."
대면상담의 첫 타자는 에밀로르라는 마법사였다. 뭔가 음험한 기운이 느껴지긴 하지만, 김세진은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기로 했다.
"상식점수가······ 0점이에요? 댓글을 보니, 이 정도면 거의 영장류나 파충류 수준이라고 하던데··· 여태 공부를 많이 안하셨나봐요?“
그는 일부러 민감한 질문을 던지며 늑대의 동공을 발현했다. 이 마법사의 속과 심성을 꿰뚫어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무슨 개수작이니?“
그녀는 씨익 웃더니, 사방으로 마나를 살짝 방출함으로써 설치된 카메라를 모두 박살내버렸다.
"뭣···!"
"그런 저열한 눈으로 나를 보지말아주렴. 애써 협상을 하러 왔는데,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어지잖니.“
진한 살의와 함께, 엘프 에밀레르의 겉피부가 반죽처럼 흘러내렸다.
뒤이어 나타난 존재는 '바토리'.
김세진은 그녀의 완벽한 변용술에 감탄했다. 과연, 만전(萬全) 상태의 여제는 늑대의 감각까지 속여낼 수 있을 정도란 말인가.
"안녕 얘야. 오랜만이구나.“
바토리는 그렇게 말하며, 손톱으로 그의 목젖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일순 방 안이 시꺼매지며 세계와 분리되었다.
"······워후. 오랜만이다. 결계야?“
여유로운 감탄사와는 달리, 김세진의 심장은 미친듯이 뛰고 있었다.
"너무 긴장하지는 마. 협력을 하려고 찾아온거니까.“
"협력이라고?"
"그래.“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얼굴의 김세진을 보며 바토리는 방긋 웃었다.
"내가, 우리 로드를 죽일 수 있게 해줄게. 어때?“
"무슨······."
그녀의 미소에 김세진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러나 잠시 뿐이었다. 뒤이어 스킬이 발동되었다는 알림창들이 파바밧 떠올랐으니.
[고유스킬 '가장 순수한 신체'가 발동합니다.]
[바토리의 극상급 미혹마법에 저항합니다!]
[미혹마법의 일부가 술자에게 반사됩니다!]
순간 바토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이유는 알림창이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김세진은 모르는 척 고개를 갸우뚱했다.
'후우..'
이 스킬이 이렇게 도움을 주는구나. 그는 '가장 순수한 신체'의 정보창을 살펴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순수한 신체]
■ 육체가 불순물이 없는 형태로 정화됩니다.
■ 개인의 의지에 따라, 육체의 강함을 최대 1000%까지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퍼센테이지가 높아질 수록 지속시간이 짧아집니다.
■ 스킬 '저항력'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또한 방어기제의 일환으로, 저항한 마법 혹은 공격의 일부를 반사합니다.
■ 이는 모든 폼에 적용됩니다.
< 44. 의심과 협력 (2)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