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의심과 협력 (1) >
"저, 아직도 꼬시고 싶으신가요?"
김유린이 스치듯 꺼낸 그 말이 길드와 관련된 것임을 알아차리까지는 5분이면 충분했다. 살가죽이 경직된 김세진의 모습에, 그녀가 웃으면서 덧붙인 덕분이었다.
"길드 말이에요 길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신 겁니까?“
"······아하.“
그는 괜히 흠흠 헛기침을 했다. 도대체 뭔 생각을 한 건지, 부끄러워서 뒷목에 땀이 살짝 흘렀다.
"근데 갑자기 왜요? 칠흑기사단장이 될거라면서 한사코 거절하셨잖아요.“
김세진이 물었다. 김유린은 씁쓸한 얼굴로 나직이 읊조렸다.
“징계를 받았습니다. 명령불복종으로요. 국립기사단은 징계기록이 있으면 단장이 될 수 없습니다. 아니, 무엇보다 고위기사 자리도 위태위태해요.”
아무래도 오크 사건 때문이겠지. 대장 오우거 토벌은 성공하였지만, 결과가 좋다고 해서 상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기사단의 기강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
그는 깊이 캐묻지 않고,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예. 저희야 당연히 좋죠. 때마침 신입단원 뽑는 행사도 하고 있으니까.”
"······네? 자, 잠깐만요. 저보고 거기에 참가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김유린은 살짝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잠시 멍하니 생각하다가, 이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요. 길드장 추천은 오래전에 물건너 갔는데, 뭘 바라시는 거예요? 게다가 고위기사 자리도 위태위태 하다면서요. 만약 고위기사 딱지 떼이면 우리도 받아줄 이유가 없는데?“
"예?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녀는 약간 불만어린 기색으로 입술을 삐죽 내뺐다. 그러나 여기서 갑을관계는 확실했기에, 할 수 있는 거라곤 자그마한 투덜거림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와드렸는데······ 언제는 자기가 나서서 애걸했으면서······.“
"그때랑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거든요. 저희 더 몬스터가 들어가고 싶다고 막 들어올 수 있는 길드가 아닌지라··· 외국의 베리타스 기사단 아시죠? 거기 기사단장도가입문의를 넣었답니다?“
"······.“
김유린이 눈을 가자미처럼 좁히고 볼까지 빠방 부풀렸다. 삐졌습니다─ 고, 면상으로 말하는 듯하다. 그래봤자 귀엽기만 하지만.
"그래서, 참가 할 거예요? 말 거예요? 아 맞다. 참고로 우리 길드원의 혜택을 대충 설명해 드리자면··· 매달 최고급 포션꾸러미를 보내드리고, 길드원 카드로 TM 아티펙트 샵에서 아티펙트 최대 세 개 까지 무료 대여하실 수 있고, 년에 한 번씩은 오크의 장비 우선 구매권을······"
김세진은 기사나 마법사라면, 아니 적어도 현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눈이 튀어나올 만큼 파격적인 혜택을 줄줄이 읊었다. 처음에는 마냥 삐진 얼굴이었던 김유린도 들으면 들을수록 눈과 입이 확대되어갔다. 이건 실로 어마어마한 대박이다. 왜 기사들이 더 몬스터 더 몬스터 노래를 부르는지, 그녀는 바로 지금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또 원하신다면 마나 문신······"
그의 말이 채 끝맺기도 전에, 김유린이 그의 두 손을 턱 붙잡는다.
"하, 하겠습니다!"
맑고 씩씩한, 깊은 결심의 목소리였다.
* * *
여러 기업과 기사단, 마탑까지 발을 들이민 'THE MONSTER 공로전'은 과연 전국민들로부터 폭발적인 관심을 이끌어냈다.
때마침 세간을 어지럽히던 3기의 보스 몬스터도 정리되었기 때문일까, 나라가 온통 공로전의 이야기 뿐이었다. 포털사이트, TV, 신문과 SNS까지 모조리. 분야는 고작 '기사'와 '마법사' 두 부문 뿐이었지만 현 시국으로는 그 둘이 가장 중요한 직업군이기에.
일단 지금은 범국민 투표가 한창 진행중이다. 이는 전문가가 매긴 순위로 상위 200명을 간추리고, 공로전에 참가하는데에 동의한 총 198명의 후보들 중, 분야당 30명, 총 60명을 본선후보로 '국민들이 직접' 뽑는 투표다.
그런데 팬덤간의 싸움이 워낙 격렬한 탓에 SNS와 커뮤니티사이트는 거진 팬들의치열한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허나 개중에서도 압도적인 1위는 분명 존재했으니.
─저는··· 쑥쓰러워서 이런건 잘 못하지만······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꼭 뽑아주세요!
청순하고 아름다운 미모로, 부끄러운 듯 자기PR을 전했던 '김유린'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한편, 그렇게 관심이 활활 타오를 수록 김세진은 급격히 바빠져만 갔다. 일단 일을 벌렸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여러 인터뷰, 방송, 강연 등등······ 하루에 8시간은 대외행사를 하는데 쏟아부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 질문입니다! 자, 김유린 씨의 홍보영상을 보시죠!"
방송사가 통째로 빌린 카페 안에는 수십의 카메라가 한 인물만을 중점적으로 찍고 있고, 카페 밖에는 수없이 많은 인파가 통유리를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당연히, 모두 김세진 때문이었다.
─저는··· 쑥쓰러워서 이런건 잘 못하지만······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꼭 뽑아주세요!
"이번 기사 부문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는, 김유린 기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앗, 길드장님 얼굴을 보니 이미 홀려버린 것 같으신데요?!"
리포터는 김유린의 홍보영상을 보여주며 물었다. 이게 마지막 스케쥴의 마지막 질문이다. 김세진은 날아갈 것 같은 마음으로, 가볍게 대답했다.
"저는 특히 김유린 후보를 중점적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김유린 씨 같은 타입은 별로거든요.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그냥 저는 모든 후보 분들이 똑같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오~ 미인계는 통하지 않겠다는 말이시군요!“
"그렇기도 한데.. 사실 뭐, 이번 더 몬스터의 길드원은 제가 아니라 국민분들 께서 뽑는거 아니겠습니까?"
"역시 길드장님이십니다~ 아, 그리고 이거. 정말,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혹시······.“
마지막 질문을 끝마친 김세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리포터가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마지막에 마지막이 어디있단 말인가······ 그러나 카메라 앞이다. 김세진은 딱딱히 굳어가는 얼굴을 애써 피고서,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다.
*
그 많은 스케쥴을 끝낸 김세진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참 냉정하게도, 연장근무였다.
"크라켄을 또요?“
─예. 이번에는 일본입니다.
요즈음의 인기폭발. 국민을 생각하는 제대로 된 나라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구입해야 하는─물론 내륙은 재외─ 잇 아이템(it item), '사랑이 서비스'다. 여기서 사랑이란 크라켄의 이름인데, 그 이름이 많은 국가와 국민들에게 꽤나 낭만적으로 먹혀들고 있다. 전혀 의도치 않은 마케팅이라 하겠다.
"지금 당장이요?“
─예, 급한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대신 출동비를 배 이상 주겠다고 합니다.
"무슨 야간할증인가.. 근데 뭐, 저는 상관 없는데 사랑이가 버티려나 모르겠네요······.“
구라다. 그냥 소환해서 보내면 된다. 그러나 김세진이 괜히 뻐팅기는 이유는, 지금 유세정이 입고 있는 고혹적인 란제리 때문.
사랑이를 소환하면 사랑이가 일을 끝낼때 까지 레비아탄 폼으로 있어야 한다. 당연 그 시간동안은 인간으로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고.
"괜찮아. 나 지금 사실 오빠보다 청룡 보고싶거든. 엄청 귀여워.“
"뭐?“
그런데 별안간 세정이가 나서서 크라켄의 출동을 독촉했다.
"너 누구 편이야?"
"하핫, 농담농담. 근데 일본 쪽은 국민들의 안전이 달려있잖아. 그쪽에 더 신경쓰는게 옳지. 오빠는 한번 시작하면 2~3 시간은 기본이잖아.“
그녀는 그의 등을 꼭 껴안아주며 속삭였다. 그러나 그 백허그보다 그의 기분을 더욱 좋게 만든 건, '2~3 시간은 기본이잖아'라는, 남자의 자존심과 에고가 충만해지는 말이었다······
"흐, 흐흠. 그래. 어쩔 수 없지. 두 시간이나 하는데. 그럼그럼."
* * *
어둑어둑한 지하의 폐허, 본래 노스페라투의 근거지였던 이곳은 바토리에 의해 복원작업이 시행되고 있었다. 바토리가 이 장소를 그녀의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현재 뱀파이어들은 마법을 이용하여 부서진 건물을 복원하거나 아예 새로운 주택을 짓는 등, 공사작업에 열중하는 중이다.
"저 오징어도 김세진 꺼라고?“
물론 정작 대규모 공사를 지시한 장본인은 편히 소파에 늘어져서 TV나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다. '사랑이'라는 낯간지런 이름의 크라켄이 활약하고 있다는 내용의 뉴스.
"예. 그렇습니다.“
"..내가 탐내는건 다 가지고 있네. 쟤도 나랑 취미 비슷한가봐. 그때 그 백호도 가지고 싶었는데.“
크라켄과 관련된 뉴스는 금세 끝났다. 귀여웠는데······ 바토리는 입술을 핥으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다음으로 흘러오는 영상은, 그보다 더 관심이 동할 만한 소식이었다.
─현재 더 몬스토 공로전 국민투표의 총 투표수가 1000만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이는······.
더 몬스터, 이제 길드라는 단어도 부족한 세계 유수의 거대길드. 그리고 그 길드의 우두머리는 바로 김세진이다.
바토리는 문득 그때의 아릿한 추억(?)이 떠올랐다. 서로 물고 물리고 뜯고 뜯기던. 그런 잔혹하고 짐승적인 나날들을.
"······어, 잠깐. 저기, 후보중에 우리 마법사 쪽에도 위장신분 있다고 하지 않았니? 조금 유명한 놈 있잖아.“
"예? 아, 예. 그렇습니다. 혜안의 에밀레르라고. 르에밀 사도님의 위장신분이십니다. 저들말로는 A급, 혹은 상급 마법사이시죠“
"엘프로 위장한거니?“
"예.“
흠······
바토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했다.
요즘, 로드의 행보가 이상하다. 이상하다기 보단 모습을 드러내질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직감을 꽤나 믿는 편이었는데, 지금의 로드에게서는 구린내가 풀풀 풍긴다. 하수구보다 더한 구린내가.
그리고 무엇보다, "로드가 배신할 것이다"라고 말하던 김세진의 확신에 찬 눈빛. 그것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이렇게 하자. 내가 그 애로 위장해서 공로전에 나갈게. 얼굴 변용마법은 식은 죽먹기니깐.“
"예······ 예?! 뭐, 뭐슨 말이십니까?!“
갑작스런 선언에 깜짝 놀란 사도는 말도 똑바로 할 수 없었다. 곧있으면 균열이 완전히 열리는 가장 중요한 시국에, 이게 도대체 벌써 몇 번째 돌발행동이란 말인가.
"김세진이라는 빌어먹을 놈이랑 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그리고······ 잘하면 협력도 가능할 수 있고.“
'균열'이 끝까지 열려 '통로'로 완성되는 건 기정사실이다. 열리는 균열을 도로 닫을 수 있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
하지만 '로드'가 정말로 배신을 결심했다면, 당연히 선수를 쳐야만 한다. 그 지점에서 그때 그 인간 놈과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놈과 살살 협력하는 척 하여 먼저 로드를 배제하고, 나중에 그놈들까지 모두 말살한 뒤 혼자서 '통로'라는 과실을 독차지하는 것이다.
"혀, 협력이라니요. 어찌 인간 따위와······?“
"너는 로드가 아니라 나를 선택한거잖니? 그래서 여기에 둥지를 튼 거고. 만약 로드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먼저 쳐내고 계획을 바로잡아야지 않겠어?“
의문을 표하는 사도, 그러나 그럴수록 바토리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짙어진다. 그 아름답고도 위험한 미소 앞에, 사도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 44. 의심과 협력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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