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영웅, 오크, 인간 (4) >
비록 오우거보다 신장은 작을지라도, 오크 족장의 무위는 압도적이었다.
그가 휘두른 메이스가 오우거에 닿으면 놈들의 사지가 뜯겨나갔고, 지면에 격돌하면 크레이터가 깊게 패였으며, 심지어 허공을 휘젓더라도 거대한 진동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놈들에게 핵심적인 전력인 '대장 오우거'가 콘락을 탄 김유린에게 정신을 팔린 터라, 전황은 오크 쪽이 우세했다. 대략 스무기 정도의 오우거를 오십 하나의 오크가 상대하는 모양새였으나, 한 오크가 워낙 괴물이기에.
'순조롭네.'
여기저기서 메이스의 둔탁한 파열음과 살갗이 짓이겨지는 고어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무엇인가 거대한 것이 무너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숲의 나무를 뭉개뜨리며 쓰러지는 수많은 오우거들이었다.
놈들의 숫자가 줄면 줄수록 오십 하나의 정예오크들은 승리에 고취되어 더욱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30분.
대장 오우거를 제외한 모든 오우거들이 정리되는데 까지는 30분이면 충분했다. 스물의 오우거를 궤멸하는데 희생당한 아군은 스물 뿐.
근처를 빙빙 돌며 대장 오우거의 신경을 돋구던 김유린은 그제서야 콘락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녀의 정면에는 대장 오우거가 분통을 터트리며 쫓아오고, 뒤에는 피투성이의 오크들이 자리를 잡았다.
"모두 대장 오우거를 막아주세요."
첫 번째 전투가 방금 끝났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그 한마디에, 오크들은 다시금 대장 오우거를 향해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대장 오우거를 막아주는 틈을 타, 김유린은 궁니르를 발동했다. 순백의 검신이 찬란한 황금으로 빛나며 창의 형태로좁혀진다.
이 일격에 담을 목적은 간단하다.
'1분간의 기절'.
일상에서는 짧디 짧은 찰나였겠지만, 전장은 다르다. 전장에서 1분은 감히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것이었다.
"···!“
허나, 별안간 몸 안의 마나가 전부 빠져나갔다. 이는 목적을 담아내기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김유린은 궁니르에 불어넣었던 마나를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왜······'
채 회수하지 못한 마나가 체외로 빠져나가, 마나의 잔량은 50% 뿐. 아무것도 못하고 절반을 그대로 날린 셈이다. 물론 김유린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레비아탄도 5분이나 재웠던 기술인데, 왜 저 오우거는······
"크아악!“
망연해하는 그녀의 귓가에 오크 정예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러는 틈에도 시간은 흐르고, 오크들은 죽어나간다.
이가 아니면 잇몸으로라도 가자.
그녀가 이를 아득 깨물은 그 순간.
오우거의 등 뒤, 귀여운 생명체 하나가 날개를 펄럭이며 솟아올랐다. 짜증이 팍 솟을 정도로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저것은 오크와 자신이 지하에 갇혔을 때, 자신의 마나를 빼앗아 갔던 젠장할 놈.
'뱁새'였다.
"저 씹새가!“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당장 모든 깃털을 뽑아서 바베큐로······
그러나 김유린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과 쿵쾅쿵쾅 박동하는 심장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일단, 일단 저 오우거부터 처리해야 한다.
그녀는 다시금 궁니르에 마나를 모았다. 이번에는 목적따윈 없다. 다만 남은 마나를 모두 담아내어 놈의 심장을 꿰뚫을 뿐.
우우우우······ 궁니르가 김유린의 마나와 공명하며 황금색으로 일렁인다. 신묘한기류를 방출하며 대지를 진동시키던 궁니르는 이내─새하얀 광채가 번뜩이는 한줄기 섬전을 뿜어냈다.
콰아아아─!
격발과 명중은 그야말로 동시였다. 쓰리헤드 오우거는 순식간에 심장을 관통당하고, 때맞춰 높이 도약한 김세진이 온 힘을 담은 '강타'로 놈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분명 김유린의 참격만으로는 부족했을 것이었다. 허나 김세진의 가공할 만한 강타와 합쳐졌으니, 놈은 그 질긴 생명력을 자랑할 틈도 없을 터.
그어어어─
결국 대장 오우거는 낮은 비명을 내지르며 서서히 쓰러졌다. 이어서 오크들의 포효가 산 속을 널리 울렸다.
"아니요! 아직······ 큭!“
그러나 아직 승리는 이르다. 오크들에게 알려야 할 것이 있다. 허나 김유린은 심장을 움켜쥔 채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마나를 사용한 부작용이었다. 다행히,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은 김세진이 대신 소리쳐주었다.
"아직이다! 괜찮나?“
김세진은 오크들의 긴장을 유지시키며 김유린에게 다가갔다.
"네, 네. 괜찮습······!"
일순 김유린이 멍하니 굳었다. 뒤이어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김세진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오우거가 섬찟한 안광을 발하며 암기(暗氣)로 타오르는 주먹을 내뻗고 있었다─김세진은 김유린을 안은 채 재빨리 뒤로 후퇴했다.
쾅! 다행히 놈의 일격이 한 발짝 늦었다. 그러나, 그 찰나. 그런 그를 향해 어디선가 반원형의 브레스가 쇄도했다.
"꺄아아······!"
김세진은 일단 김유린을 저 멀리, 적어도 산등성이 몇 개는 가벼이 넘을 만큼 멀리 던져놓고 브레스를 회피했다. 허나 브레스는 그의 경로를 따라 곡선으로 휘어지며 따라왔다. 동시에 쓰리 헤드 오우거의 날렵한 주먹도 쇄도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놈의 눈빛이 달랐다. 전보다 훨씬 더 흉폭하고 폭압적이었다.
그제서야 떠올랐다. 몇몇 트롤은, 죽기 직전에 가까스로 살아나면 '회광반조'라는특수한 발악을 한다는 것을.
"씹!"
흉폭한 권골이 브레스와 엇갈리며 날아들었다. 이 주먹을 피하면 브레스에 직격당하고, 브레스를 피하면 주먹에 직격당한다. 그러나 선택지는 하나 더 남아있었다. 그리고 오크의 본능은 김세진을 그 선택지로 이끌었다.
우선, 체내를 순환하는 혈류량을 급속시킨다. 동시에 역전의 전사도 중첩하여 사용한다. 여기에 바토리로부터 얻은 강골의 힘이 더해진다.
순수하게, 오로지 강함에만 치중한 육체의 정수. 그것은 싸우기 위해 태어난 종, 오크에게 일생 최고의 고양감을 선사했다.
대지를 크게 딛고 전신을 뒤덮는 브레스를 견뎌낸다. 김유린을 구출하느라 메이스는 내던져버려서 없다. 그러나 상관은 없다. 그저 정권을 내지른다······!
콰아아아앙─!
오우거와 오크의 주먹이 맞부딪혔다. 주먹과 주먹끼리 부딪힌 단면에서 거대한 폭발이 벽력처럼 솟구쳐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고, 대지를 흔적도 없이 무너트렸다.
보이는 것은 없다. 그러나 김세진은 자신의 주먹에 닿은 오우거의 팔이 서서히 소멸되어 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조건 완료: 헌신과 희생]
[포밍 몬스터가 오크 족장에서 오크 대족장으로 변화합니다]
[오크의 고유스킬 '오크의 정수'를 습득합니다.]
['오크의 정수'가 '바토리의 근육조직과 근밀도', '마나지체'와 감응합니다! 특질, '가장 순수한 신체'를······]
***
김세진은 흐릿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빌어먹을 뱁새 놈······ 가장 먼저 화가 나는 걸 보니 아직 오크 상태인 것 같았다. 헌데 문제가 많다. 눈만 껌뻑여질 뿐, 몸이 도통 움직이질 않는다. 오우거한테 쳐맞고 브레스까지 온통 뒤집어썼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흐.“
목소리는 대충 나온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오우거는 어떻게든 동귀어진했지만, 뱁새는 어떻게 되었을지. 고 놈, 저번에 봤을때보다 몸뚱아리가 조금 커진 것 같던데.
"···하암~“
졸려서 하품이 저절로 나왔다. 눈을 데굴데굴 굴려 숯검댕이처럼 검어진 몸을 바라본다. 살아남은 게 기적인 수준이다. 영체화 정보가 [90/100]으로 되어있는 걸로 보아, 10개 분량의 포션을 모두 소모한 듯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만큼 흘렀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크 족장은 이대로 퇴장하는게 좋겠지.'
이제 효용있는 포밍이 나뉘어졌다. 아무리 대족장이 되었다 한들, 오크라는 종족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한계가 없는 레비아탄과, 포텐셜이 높은 라이칸슬로프를 중점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참고로 고블린 폼은 오래전에 버렸다.)허나 그러기에는 걸리는 점이 있다.
김유린. 그녀는 오크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 그 종류는 자신으로서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우애나 동료애라 하기에는 그 정도가 조금 깊다고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 그것보다 우선해야할 건···
"일단 집으로 가자······.“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는지 모르지 않은가.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김세진은 레비아탄 폼으로 변해 남은 마나를 쥐어짜내 '마도'를 시전했다.
***
이동 장소는 지하의 회의실이었다. 오자마자 날짜를 확인해보았는데, 고작 하루만 지나 있었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누운 그는 세정이에게 전화를 해야한다는 생각도 잊은 채 그대로 잠에······
"오셨습니까?“
"엄마야!“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릴리아였다.
"뭐, 뭐야? 여기 왜 당신이 있어?“
"도망쳐왔습니다. 계획이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아하.“
"그리고, 김세진 씨께서 직접 말하셨잖습니까. 더 몬스터 부지의 지하에 우리 도시를 만들라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세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포션을 따서 그에게 건넨다.
"이대로 주무시면 안 됩니다. 포션이라도 드시고 주무셔야지요.“
"아, 고마워요.“
벌컥벌컥─ 포션을 마신 김에, 김세진은 TV까지 슬쩍 켰다.
평양 쪽의 난리가 진정되었다는 소식이 짤막하게 보도되는 가운데, 오크 쪽의 소식이 대서특필 되는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다행히 김유린은 살아남았다. 브레스 한 줄기와 흉악한 두 주먹에 의해 원자폭탄급 폭발이 발생하였음에도, 콘락이 김유린을 구출해 나왔다고. 그러나 반경 10km 범위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말은 즉, 나머지 오크들의 생사는 모른다는 뜻.
그들은 모두 죽었을까? 김세진은 괜히 가슴이 먹먹해져옴을 느꼈다.
"난리입니다. 제 몸을 희생해서 험악한 보스 몬스터 하나를 처치했다면서요?“
"···하하.“
"하젤린 씨는 보고서 깜짝 놀라더군요. 혹시 당신 죽은 거 아니냐고. 언론에서는 오크 족장이 오우거와 함께 동귀어진했다─ 고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거든요.“
김세진은 릴리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족장이 아니라 대족장으로 수정해달라고 하세요.“
"후훗.“
릴리아의 눈꼬리가 설핏 휘었다. 그 여유로운 반응에 김세진은 미간을 좁혔다.
"근데 뭐,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웃습니다?“
"제가 그랬나요?“
"..뭐야. 진짜 알고 있었어요?"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저는 이만, 할 일이 많아서요."
***
맑은 오후. 김세진은 김유린의 병문안을 왔다. 오자마자, 침대 옆에 몸집이 다소 작아진 콘락이 보였다. 그는 필사적인 눈빛으로 "아는척을 하지 말라─" 고 일렀다.콘락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가만히 있었다.
"어, 김세진 씨. 오셨습니까?“
김유린은 김세진의 예상과는 달리 몹시 환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당황한 김세진은 왠지 모를 섭섭함까지 느끼며 그녀 옆의 소파에 앉았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김세진은 의외라는 듯이 답하고는 LED TV를 바라보았다. 오크의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TV 때문일까. 둘 사이에는 별다른 대화가 오고가지 않았다.
김세진은 조심을 기해야 했고, 김유린은 TV를 보며 넉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영웅오크의 족장은 폭발에 휘말려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많은 시민들은 슬픔에 잠겨 추모의 행렬이 줄을 잇고······
앵커의 목소리에, 김세진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 오크, 죽었을까요?“
"아니요.“
김세진도 놀랄 만큼 즉답이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꽉 쥔 채 말을 이었다.
"분명, 어디선가 살아있을 겁니다.“
그리고는 그를 바라보며 웃는다.
그는 그녀의 오른손에 쥐어진 오크의 휘장을 보았다. 그래서 그저 따라 웃었다.
"맞다. 길드장 님.“
"예?“
열려진 창틈 사이로 바람이 밀려들어와 그녀의 머릿결이 벚꽃처럼 흐드러졌다. 참 아름답구나, 생각하는 순간에. 그녀가 다소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아직도 저 꼬시고 싶으신가요?“
"······뭐라고요?“
< 43. 영웅, 오크, 인간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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