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영웅, 오크, 인간 (2) >
오크와 기사는 서로를 오랫동안 마주보았다. 겨울바람이 불어 헐벗은 가지들이 스치며 울고, 흐려진 하늘에서는 아주 작은 진눈깨비들이 지상에 닿지 못한 채 허공에서 녹는다.
그런 고요한 자연 속에서 얼마만큼의 침묵이 흘렀을까,
둥─
엷은 진동이 노면을 흔들었다.
"아! 저, 저기요!“
먼저 반응을 보인 건 김유린이었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오크 앞에 다가와 섰다.시린 계절에 얼굴마저도 유달리 하얗기 때문일까, 얕게 붉어진 두 볼이 특히 도드라진다.
"곧 적이 옵니다. 오우거······ 그러니까, 두 머리 오우거, 한 머리 트롤 오우거라고..“
그러나 약간 설명에는 다소 애를 먹는 듯 한 모습이다. 아닌 게 아니라 놈은 이름이 참 길다. 쓰리-헤드-오우거, 더 자세히 들어가면 투-오우거헤드-원-트롤헤드-블랙스킨-오우거. 여기서 고유명사를 제외한 영어를 빼고 말해야 하니 어쩔 도리가없겠지.
"아우······ 그, 그러니까······ 혹시 '오우거'는 아십니까?“
답답한 듯 이리저리 손을 휘적이던 그녀는 결국, 배경지식 설명부터 들어갔다.
"안다."
"그, 오우거는 머리가 많고 피부가 새까말수록 강하다는 것도?“
"안다.“
"휴우, 다행이네요. 지금 머리 세 개인 오우거가, 세 머리통 중 두 개는 오우거고 하나는 트롤인 오우거가, 게다가 피부도 쌔까만, 그런 오우거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김세진은 짐짓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명이 메마른 듯 스산하고 삭막한 겨울의 풍경 뿐. 사람의 흔적은 없다.
"너 밖에 없나?“
"예? 아, 예. 저 뿐입니다.“
"흠. 인간은 놈과 싸우지 않겠다는 뜻인가?“
"아, 그게······.“
곤란한 듯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김유린의 모습에서, 김세진은 대충 짐작이 갔다.
지금 한국 상황은 꽤나 어지럽다. 평양 쪽의 데몬 미노타우르스와 부산 쪽의 베히록벨, 그리고 이 곳의 오우거까지, 총 세기가 보스 몬스터가 강토를 유린하고 있으니.
게다가 위험도로 따지자면 보스몬스터가 당장 턱밑까지 치민 평양과 부산 쪽이 가장 급박.
영웅오크다, 한국오크다, 하면서 아무리 찬사를 하더라도 결국 오크는 오크인 법.
정부는 영웅오크가 죽든 말든 관심이 없고, 다만 오우거의 발목을 최대한 오래 잡아주길 바랄 뿐인 것이다.
"싸울 인간은 너 밖에 없나 보군."
"···예. 지금은 그렇습니다."
오크로 있을 때는 오크의 감정이 더욱 진하게 옮아오는 법이지만, 솔직히 이해할만 하다. 오히려 김유린이 그 계획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명령까지 거스른 채 이쪽으로 뛰쳐나온 거겠지.
"도망가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몬스터 필드와 시가지의 경계에 함정을 만드는 중이니, 그곳에서 저희 병력과 함께······“
"아니.“
그러나 김세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비록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언정, 오크에게 후퇴란 없다. 무엇보다 오우거 따위에 죽지도 않을 테고.
"싸운다.“
짙게 깔리는, 매력적이면서도 고고한 목소리였다. 김유린은 침을 꿀꺽 삼킬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하던 그녀가 고민 끝에 결연히 꺼낸 말은, 김세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럼, 저도 도와줄 수 있게 해주십시오.“
혹시라도 거부를 당할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허나 김세진은 별다른 말 없이 부락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승낙의 의미임을 알아차린 김유린은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그의 뒤를 따랐다.
꽤나 오랜만에 방문한 부락지는 예전보다 훨씬 발전되어 있었다. 훈련장소, 식량창고, 거주지, 대장간 등등 철저하게 분업된 모습이 참으로 신기했다. 오크가 스스로 발전시켰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와······ 정말 많이 발전하셨군요.“
김유린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 휘둥그레진 눈동자로 부락지를 감상하였다. 김세진은 저벅저벅 다가가 오크들을 불렀다. 절도있고 품위있게 다가온 그들은 물경 일천은 가벼이 넘겼다.
김세진은 오크들을 한번 쓰윽 훑고는, 김유린에게 시선을 두었다. 강렬한 눈빛을 느낀 그녀는 얼굴을 붉혔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애꿏은 머리카락만을 베베 꼬아댔다.
세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지휘해라."
* * *
"거봐. 없잖아.“
같은 시각. 바토리는 어두운 내부를 둘러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꽤나 오랜 시간동안 공들여 세웠던 지하도시는 순식간에 없어져버리고, 남은 것은 오직 휑뎅그렁한 공동(空洞) 뿐.
이렇듯 노스페라투들은 모조리 도주했다. 꽤나 예전부터 준비했던 일인지, 아무런 흔적도 증거도 남지 않아 이곳에 도시가 존재했었다는 말조차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로드 님의 눈을 피해 지하에 마을을 만들었을 때부터 의심을 했어야 하는데······."
장로의 떨리는 목소리가 바토리의 귓전을 간질였다.
그렇다, '장로'다. 피의 고귀함으로 따지면 사도의 윗 등급이자, 영주(領主)인 자신의 바로 아래격인 '장로'.
헌데 그 정도 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이토록 가냘프다.
결코 나이 때문은 아니다. 만약 그 때문이라면 제 아랫 사람을 질책할 때도 저런 소심하고 나약한 태도였어야 했다.
"죄송하다고?“
"예, 예. 송구스럽습니다······“
"뭐가?“
"그, 의심을 하지 못한 것을······.“
"니들이 왜 죄송해? 노스페라투 새끼들 잘못이지.“
"어······."
"하여튼 너네는 전부 짐승처럼 나이만 처먹었구나. 기백이 없고 자존심도 없고······ 아니, 힘이 없으니까 당연한 일인가?“
하루 전. 바토리는 무례를 무릅쓰고 로드를 찾아갔건만 로드는 자리에 없었다. 대신 로드의 수하가 "쓸데없는 의심을 하지 말라─" 고 충고하였을 뿐.
하지만 한번 생긴 파문은 그렇게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적어도 제 수족(手足)으로 직접 파헤쳐보고, 두 눈으로 명확히 '그것이 아니다' 라는 결과를 직시해야만 성에 찰 테지.
"···얘들아?“
바토리는 자신을 따라온 수십의 사도, 장로들에게 세상 그 어느 무엇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미혹된 그들은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몸을 굽혔다. 그러나 바토리는 그들에게 가장 어려운 선택을 요구할 것이었다.
"결정해.“
꾀꼬리마저도 홀려 제 혀를 집어삼킬만큼 고혹적인 음성은, 가장 충격적인 말을 이었다.
"로드를 따를건지, 아니면 나를 따를건지.“
이는 반역을 도모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로드의 눈이 미치지 않는 지하라서 망정이지, 만약 훤히 트인 개활지였다면 흡혈본능을 억제하지 못해 피를 갈급하며 죽었을지도 모른다. 로드는 뱀파이어의 흡혈본능을 조절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있으니.
"바, 바토리님 그것은······."
"얘들아. 아쉽게도 나는, 균열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단다.“
일순 바토리 주변 500m 반경에서 암색 마나가 반구(半球)형을 그리며 하늘로 솟았다. 도주를 막는 결계였다.
"근데 적어도 선택에 도움이 될 몇몇 정보는 줘야할 것 같아서 말이다? ······앉아보렴. 내가 지금 말해주는 내용 잘 듣고서,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해."
바토리의 발밑에는 어느새 화려한 권좌가 들어섰다.
장로와 사도들은 바닥에 몸을 조아린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
* * *
김유린은 오크들을 모아놓고 열정적인 브리핑을 시작했다. 헌데 대규모 전투를 앞둔 기사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활기찬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녀가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을 듣는 대상은 '오크'다. 범고래보다 지능이 좀 더 나은 수준이라는 오크─물론 평범한 오크의 이야기지만─.
"오우거는 본래 동족끼리도 싸우는 파괴의 화신입니다. 그런데 그런 오우거들이 결속하는 이유는 단 하나, 이 '대장 오우거'뿐입니다.“
그녀는 동굴의 편편한 벽에 그림까지 그렸다. 머리 세 개 달린 오우거로 추정되는생명체와, 그 주변을 졸졸 따르는 오우거로 추정되는 존재.
"그러니 이 대장 오우거를 죽이면 오우거들은 결속력을 잃고, 서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녀가 지금 브리핑하는 계획의 내용은 간단하다. 다른 오우거는 무시하고 대장만 줘팬다는 것.
허나 문제는 그 대장이 규격 외의 존재라는 점이다.
몬스터 학자들이 정밀한 실험으로 파악해낸 결과, 오우거는 머리 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그 강함이 대략 '4배' 정도 곱연산 된다. 그런 점에서 이 대장 오우거님은 머리가 두 개 더 달렸으니 평범한 오우거보다 최소 16배 이상은 강하다.
그런데 여기서 '피부'라는 또다른 변수를 추가해야한다.
오우거는 피부가 무채색에 가까워질수록 강력해지는데, 무채색의 양 극단인 백색과 흑색은 평범한 갈색 오우거보다 2배 가까이 강하다는게 정설.
그러니 이 대장 오우거는 단순 계산만으로도 평범한 오우거의 32배만큼 강한다는 말이 된다.
또, 설상가상으로 세 머리중 하나가 '트롤'이다. 기사들이 치를 떨 정도로 생명력이 질긴 트롤 .
"물론 어려울 겁니다. 이 대장 오우거는······ 무척 강하거든요. 하지만."
김유린은 영웅오크의 모습을 한 김세진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여러분들의 노동력과, 족장님의 무력, 그리고 콘락이 있으면 가능할겁니다.“
*
오우거는 1일 2끼를 섭취하고, 식사 후 반나절 동안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니 오우거의 부대들이 도착하기까지는 하루에서 이틀 사이의 유예기간이 있었다. 김유린은 그 유예를 이용하여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오크들을 교육시켰다. 혹독한 훈련이었는지 오크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좀 늦게 올걸······.‘
그리고 김세진은 지금 대족장실에 앉아 후회 중이었다. 오우거의 생리를 자세히 몰랐던게 문제였다. 그저 생김새처럼 미친놈 마냥 돌격해올 줄 알았는데, 무슨 쉬는시간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물론 그 덕에 준비할 시간이 많이 주어지긴 했지만, 영체화를 통해 핸드폰을 가져와서 망정이지······
[유세정: 오빠 진짜 너무한거 아냐?! 전화는 왜 또 못 받는다는 건데! 쪽지 하나 달랑 남기면 그게 끝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막대해도 내가 평생동안 남아있을 것 같아? ······헤어지잔 말은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말고.]
[유세정: 아니, 방금 한 말은 취소. 평생 남아있을거야. 오빠가 가라고 해도 거머리처럼.]
손가락이 뭉툭해서 타자를 치기 힘들다. 하지만 답장은 해야만 한다.
[너 자고 있어서 말 못했다. 그리고 내가 일을 해야 한다는데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이틀이면 들어가니까 짜증나게 굴지마. 한 번 더 그러면 한 달동안 안들어간다.]
오크 상태였기에 평소보다 문자가 과격하고 신경질적이었다. 빈정이 꽤 상할 만큼 보낸 것 같은데, 답장은 10분 만에 도착했다. 방금보다 훨씬 누그러진 어투였다.
[······미안. 나는 그냥 갑자기 사라져서 놀래가지구 그런거야······ 근데 오빠 혹시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
[아니. 없어. 나도 보고 싶어서 미치겠으니까 신경 돋구지 말라고.]
다소 여러 부분으로 과격한 문자였다.
[(햄스터가 하트를 움켜쥔 이모티콘)아잉 모양~ 난 또~ 알았어 빨리와~]
[최대한 빨리 가볼게······ (하트)]
답장을 마친 그때 잔잔한 발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세진은 그 즉시 핸드폰을 영체화했다. 그야말로 신속.
똑똑-
노크를 할 건 없었다. 문이 없으니까.
"무슨 일이냐."
그의 말에 김유린이 얼굴만을 빼꼼 내밀었다. 방금 샤워를 하고 온 건지, 촉촉이 젖은 머릿결이 스르르 흘러내린다.
"······콘락은 어디갔습니까?“
조심스런 물음에 김세진은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미리 소환해두었던 콘락이 동굴방 안으로 거칠게 들어왔다. 오자마자 곧바로 김유린을 덮친 콘락은 그녀와 한바탕 애정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먼지가 흩날리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인다.
미간을 좁힌 김세진은 크게 샤우팅을 치려했지만,
"아하하핫 잠깐, 잠깐. 알았어 콘락 꺅! 아, 알았다고······."
김유린의 환한 미소와 행복한 얼굴 때문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