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영웅, 오크, 인간 (1) >
레비아탄이 직접 시전한 마도, '순간전이'는 과연 성공적이었다. 도착한 장소는 여태 줄곧 머물렀던 회의실. 허나 너무 급히 사용하였기에, 여덟 명 모두 땅에 발을 디딘 상태로 이동시킬 수는 없었다. 즉 몇몇은 머리 혹은 여타 다른 부위가 땅에 박힌 채 이동되었다는 뜻.
"꺅!“
"악!“
"아악!"
그래서 약간 고통스런 비명이 울리는 소란이 있었지만, 주변을 둘러본 김세진은 한명의 낙오도 없음을 확인하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마나를 남용한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비틀거리던 김세진을 바로 옆에 있던 김유린이 부축했다. 사람이 용을 부축하는, 다소 기이했던 광경은 김세진이 인간화를 취하면서 자연스러워졌다.
"아, 예. 괜찮아요. 근데 머리가 어질하네요.“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말한다. 김유린은 그를 근처 소파에 앉혀주었다.
"청룡으로 변하는 특성이셨다니, 나 참. ······아, 근데 이 마법은 길드장 님이 사용하신 겁니까?“
"······뭐, 그런 셈이죠.“
"그런 셈이라니, 그건 무슨 셈입니까? 덧셈? 뺄셈?“
김유린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아재개그를 던졌다.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구나,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본 순간.
김세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입가와 하관 부근에는 다량의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유, 유린 씨. 안 아프세요?“
"네? 아, 별로 안 아픕니다."
"아파 보이는데.."
당황하며 묻자,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허나 뼈가 아예 개박살이 났는지 팔의 일부가 두동강이 난 모양새로 달랑달랑- 흔들린다. 그 기괴한 광경에 김세진의 입이 뜨악 벌어지고, 김유린도 그제서야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란다.
"악! 이거 뭐야!“
"······풉.“
그녀의 생생한 반응이 웃음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이, 이 정도는 포션 마시면 다 낫습니다. 마침 저기 포션이···"
"아니, 줘봐요. 이 정도로 부서졌으면 포션마시면 안 돼요. 뼈 이상하게 붙으면 어쩌시려고.“
김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마나를 적당히 조정하여 피부 속으로 불어넣는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병원에 가면······ 어?“
바스러진 뼛조각들이 알아서 제자리를 찾고, 서로서로 단단히 뭉쳐 파괴 전의 형태로 복귀한다. 단순히 외상만을 치유해주는 포션과는 다르다. 이는 '복구'의 개념으로, 사멸한지 오래된 '치유마법'과 맞닿아 있다.
"됐어요. 한 번 움직여 보세요."
"이, 이······ 뭐야?“
어리둥절한 김유린은 팔을 요리조리 둘러보며 놀라워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신겁니까?“
"배웠습니다. 바토리한테서, 조금."
일순 그녀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짓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엄연한 사실인데.
사실, [바토리가 지닌 마도의 지식을 이해한다.]는 문장은 '마도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마도를 구사하기 위해 수없이 긴 세월동안 '대'를 이으면서 쌓아왔던 바토리 가문의 모든 경험과 관록까지 모조리 재현한다는, 더 포괄적인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김세진은 현대마법사의 역량 부족으로 사멸되었거나, 혹은 관리 소홀로 소실된 여러 마법들까지 모조리 '33%(진척도)'만큼은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운 좋게도 그 '여러 마법' 중에 치유마법이 포함된 거고.
"고, 고년이 순순히 알려주던가요?“
“협상을 좀 했거든요."
"협상이라니······ 그 정신 나간 여자랑 어떻게 협상을?"
그때. 방금의 치유과정을 힐끗 봤는지, 이혜린이 주춤주춤 다가왔다. 아니, 기어왔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길드장님 저 척추가 무너져 내린 것 같아요. 하반신에 감각이, 감각이 없어요오······.“
이혜린이 눈물을 글썽이며 김세진을 올려다본다. 그는 걱정하지 말라 말하고는, 그녀의 옷을 살짝 벗겼다. 접촉면에 옷가지가 있으면 방해되니까. 그러나, 이혜린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으갹! 뭐하시는겁니까! 몸도 못 움직이는 여자를 상대로! 대장님! 도와주세요 대장니임!!“
"······.“
그녀는 그나마 움직이는 두 손으로 양껏 발버둥을 쳤지만, 그 '대장님'도 한통속일 따름이다. 김유린은 이혜린의 상반신을 단단히 붙잡았다.
"어서 하시죠.“
"어? 뭐, 뭘해! 뭘해요! 하지마!“
"치료 인마, 치료.“
"..예? 아, 아하······."
김유린이 그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발버둥이 잦아든다. 김세진은 옷을 더 위로 올렸다. 허리결이 움찔 떨리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없다. 그러나 난데없이 김유린이 짓궂은 표정을 짓더니,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소리가 나도록 세게 두드렸다.
"아! 뭐야! 누구야!"
"혜린이 몸매 좋네~"
"예, 예? 아, 하지마요!"
찰싹. 찰싹. 청량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린다.
"하, 하지마! 아흣! 하, 하앙!"
"······빨리 치료 먼저 할게요.“
그러나 이대로 있으면 남자로서 조금은 부끄러운, 그러니까 기발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기에, 김세진은 김유린을 밀어내고 환자의 새하얗고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댔다. 그리고는 김유린에게 했던 것처럼 마나를 불어 넣는다.
번쩍! 얼마 지나지 않아, 마나가 스며든 허리 부근이 푸르게 번뜩였다.
그리고, 고작 그걸로 치료는 끝.
"됐어요. 일어나봐요.“
이혜린은 우선 옷매무새부터 퍼뜩 가다듬고는 서서히 다리를 움직였다.
"오, 된다! 돼!“
이혜린이 감격스런 얼굴로 천천히 일어선다. 그렇게 이혜린의 치료가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하젤린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후드를 뒤집어 쓴 그녀는 겉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여서 김세진은 의아했다.
"하젤린 씨? 어디가 아파요?“
"아, 저, 그, 그게 말이에요 세진 씨······?“
그러나 입술만 뻐끔뻐끔 거릴 뿐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그녀로서는, 혹시 머리통이 훤하게 비어있는 모습을 그가 혐오스러워 할까봐 두려웠다. 심호흡이라던가 청심환이라던가 하는 여러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혜린이 손을 벌처럼 뻗어 그녀의 후드를 벗겨버렸다.
"악! 아니, 이 미친년이!“
"······.“
"······.“
잠시 내부가 무척 고요해졌다. 마치 게걸스런 무엇인가가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듯하다.
그 치명적인 적막 속에서, 하젤린은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아, 저··· 미안해요 언니.“
"어? 아, 아니, 아니야. 내가 너무 깜짝 놀라서······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나 원래, 그, 욕 자주 안하는데··· 진짜 깜짝 놀라가지고······ 미안해.“
두 사람이 서로 화해를 하는 와중, 김세진은 하젤린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휑한 정수리. 그는 피식 웃고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쓰담쓰담.
그녀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준다.
"···아?"
멍하니 벌려진 하젤린의 입에서 단말마가 튀어나왔다.
"길이는 잘 모르겠는데, 적당히 복구해놨어요."
김세진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고, 하젤린은 두 볼에 홍조를 붉힌 채 수줍게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런 하젤린에게 김유린의 날카로운 눈빛이 쏘아진다. 그녀는 몸을 크게 떨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난다.
"고, 고마워요 세진 씨!"
"오히려 제가 고맙죠. 근데, 주지혁 씨는 괜찮으세요?“
"예. 저는 괜찮습니다.“
주지혁은 늠름하게 대답하고서 포션을 들이켰다.
"내상 뿐이라서요. 허허허.“
"유백송은?"
"···나한테는 왜 반말이야? 나도 괜찮아."
그녀는 스트레칭을 한번 하고는 카이저 2세에게 다가갔다.
* * *
혹시 모를 바토리의 반격에 대비하여 1주 마다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기로 한 것으로, 급작스런 납치사건은 어쨌든 마무리가 되었다.
물론 펑펑 우는 세정이에게 뺨과 가슴과 턱과 복부와 머리통을 가격당하는 일은 피할 수 없었지만, 예상치 못한 급성장을 하게 되었으니 대충 좋게 끝났다 할 수 있겠지.
'아쉽긴 하네.‘
여기는 참 오랜만에 돌아온 마이 홈, 김세진은 허벅지 위에 누운 세정이의 머리를쓰다듬으며 아쉬움을 삼켰다.
고작 33%에 불과한 마도의 지식으로도 순간전이는 물론, 그 근저를 이루는 여러 마법들의 구성과 개념을 모조리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만족하는 게 옳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적어도 50%까지 도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자꾸만 떠오른다.
"으으. 아니다 아니야.“
김세진은 고개를 거세게 저으며 아쉬움을 털어냈다. 어차피 시간이 더 늘어졌으면 완전히 회복한 바토리한테 살해당했을 것이다. 그러니 별로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그때. 정규 편성이었던 드라마이 끊기더니 갑작스런 긴급속보가 화면을 가득 매웠다.
[긴급속보입니다. 보스 등급의 거대 몬스터 '쓰리 헤드 트롤 오우거'가 출몰했다는 소식입니다. 오우거의 머리 두 개와 트롤의 머리 하나가 합쳐진 이 보스등급 오우거는 현재 강원도 몬스터 필드에서 민가 쪽으로 진군을 하고 있으며······]
분명 범상치 않고 심각한 상황이지만, 요즈음에는 다소 평범하게 받아들여지는 내용이었다. 1년에 한 번도 많다던 보스몬스터는 이제 옛말이다. 3주에 한 번 꼴로 출몰하는 실정이니까. 그러니 이름이 긴 것 빼고는 아무것도 특별할 거 없는 놈이다······
허나, 그 다음 이어진 앵커의 말은 김세진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몬스터 필드의 다른 오우거들을 휘하로 흡수하며 계속 진군하는 '쓰리 헤드 트롤오우거'의 군단은 현재, 영웅 오크의 부락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어?“
김세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웅오크 부락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몸이 벌떡 일으켜진 상태였다.
콰당!
"끄으으······ 아우.“
그 탓에 세정이는 바닥에 굴러떨어졌고.
"세정아?“
"진짜··· 뭐야 오빠, 또."
"아니 그게······ 너 출근 안하니?“
유세정은 눈을 찡그린 채 허리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나 어제 카레로트 레이드 끝내고 휴가 얻었는데. 왜?“
"어? 아······ 아니야.“
"···뭐야. 또 어디 위험한 거 하려고 하지?“
의심스런 눈길로 노려본다. 약간 찔렸으나, 고개를 젓고는 손을 휘적인다.
"음? 아닌데? 내가 널 놔두고 어디로 간다고··· 이리로 와봐. 이리온~“
"내가 강아진줄아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 슬그머니 김세진의 품에 안긴다. 세진은 등을 토닥여주며 그녀가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당장 어제 레이드를 마친 터라 피곤했던 그녀는 금세 다시 잠에 들었고, 세진은 그녀를 소파에 눕혀두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쪽지에는 '잠시 길드 일이 있어서, 금방 올게'라고 쓰고, 적당한 옷을 갖춰입은 뒤, 집을 나선다.
'오랜만에 오크로 활약하겠네.‘
몸을 꽤 써야할 것 같으니, 스트레칭까지 제대로 해두자.
* * *
오크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려야 하나? 김세진은 영웅오크 폼으로 몬스터 필드를 걸으며 고민했다.
몬스터 필드의 분위기는 언제나와 비슷하다.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만이 들리는 짙은 적막 속, 곧바로 몬스터가 튀어나올 것같은 긴장감이 흐른다.
허나 이곳은 고작 중급지대. 무려 '영웅오크 족장'께서는 긴장할 필요가 결코 없다.
그렇게 당당한, 황제의 걸음걸이로 걷다 보니 어느새 부락지의 입구가 보였다.
헌데, 굳게 닫힌 문 앞에는 오크가 아니라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단정한 기사단 정복 위에 갑옷 대용 아티팩트 코트를 걸치고, 허리춤에는 황금색 무구가 매여있다.
대한민국에서 여섯 번째로 강하다는 기사, 김유린이다.
김세진이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자, 그녀가 인기척을 느낀 듯 허리춤에 손을 댄채 뒤를 돌아보았다.
"..아."
"큼."
서로를 알아보았음을 알리는 짤막한 음성.
그렇게, 여기사와 오크는 다시 한번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 43. 영웅, 오크, 인간 (1)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