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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몬스터-145화 (145/174)

< 42. 구출 (4) >

시간이 얼만큼 흘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결계가 초등학교 운동장 크기로 넓어진 것은 확실히 안다.

암울한 상황이지만 위로 삼을 부분도 분명 있었다.

바토리와 치고 박고 싸우다보니 '골밀도와 근육조직의 진척도'가 오르고 올라, 마침내 [근육은 순수하게, 뼈는 정순하게 변하였다]라는 알림창이 떠오르며 진척도 100%를 달성한 것이다.

그 효능은 무척 쉽게 실감할 수 있었다. 패악질을 부려 바토리의 거스르고, 발길질과 주먹질을 맞아본 결과, 느껴지는 고통이 확연히 경감되고 그 바토리를 상대로 '몸싸움'이 어느정도는 가능해졌다. 물론 마법에 속수무책인 건 아직 그대로지만.

한편, 바토리는 갑작스레 완성된 내 강골(?骨)을 두고 꽤 미심쩍어했다. 그러나"네 무지막지한구타에 적응이 된 거다."라는 변명을 하니 금세 의심을 풀었다.

어쨌든 그렇게 바토리가 지닌 ‘육체의 정수’ 체득을 완료하고, 다음으로 체득할 수 있는 항목은 [300여년간 축적된 마도의 지식]이었다.

내심 몸을 마나로 기화시키는 기술을 바랐지만, 그래도 마법보다 한 단계 월등하다는 '마도'다. 레비아탄 폼으로 활용하면 바토리보다도 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을 터.

그리고 지금, 그런 마도의 진척도는 15%.

"흐흥, 됐다~“

그 15%만큼 쌓인 마도의 단편적인 지식들을 조립하고 있는데, 별안간 바토리의 므흣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별다른 말은 필요 없다. 이렇게 보고만 있으면 저가 알아서 씨부릴 테니.

"후훗.“

근데 이번에는 굳이 바토리의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바토리 앞에 지그재그 모양으로 차곡차곡 쌓여있는 트럼프 카드의 성. 내가 알려준 방법으로 증축한 고작 50cm 정도 되는 성의 모습에, 바토리는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심술이 나서 바람을 후 불었다. 트럼프 성이 부르르 떨다가 무너지고, 바토리의 얼굴이 콰득 일그러진다.

"뭐하는 거니!“

"재밌냐? 괜히 알려줬네.“

"하여튼, 누가 곧 뒈지기 직전 아니랄까봐 심보가 아주 못 됐어. 그건 그렇고. 얘야, 우리 카드게임이나 한 번 할까?“

바토리가 말하는 카드게임은 '원카드'다. 심심해보이길래 몇 번 놀아줬더니, 하루에도 열 여덟번은 요청한다. 물론 여기서 하루는 '결계에서의 하루'를 뜻한다. 결계에서의 하루가 바깥에서 며칠인지는 잘 모르기에.

"안해."

"···어이없네. 언제는 지가 하자고 했으면서. 맨날 져서 하기 싫나봐?"

"그렇게 생각하시든가."

투덜거리는 바토리 앞에 무너진 카드의 성, 그 성의 꼭대기를 차지했었던 에이스 한 장이 유달리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 시시한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별안간 머릿속에 전기가 한 줄기 번뜩였다. 직관적인 기시감(旣視感), 라이칸 슬로프의 직감이었다. 다만 미래의 장면이 힐끗 보였다던가 한 건 아니다. 그저 짤막한 의심이 뇌리를 섬광처럼 스쳤을 뿐.

"······어이.“

"왜.“

그녀는 카드를 섞으며 즉답한다. 신경질적인 어투여서 살짝 고민되었다. 지금 물어볼 말은 카드를 무너트린 것 보다 훨씬 더 심한 행패일테니.

"뭔데? 말하렴. 어차피 곧 죽을텐데 왜 어물쩡거리는 걸까?“

"풋.“

그러나 바토리의 말에 웃음이 피식 터졌다. 고성에 갇혀서─인간과 같은 공기를 마시기 싫다, 는 다소 거만한 자의(自意)이긴 했지만─ 살았다고 하더니만, 이상하게 호기심이 많다. 그리고 호기심이 많다는 것은 즉 의심도 잦다는 뜻.

그렇다면, 대개는 단지 이간질로 치부할 만한 내용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겠지.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묻는데. 그 계획, 너네 로드가 직접 "성공한다"고 단언했던 거냐?“

조심스레 운을 띄우자 바토리는 자랑스레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로드께서는 모든 걸 볼 수 있으시거든. 비록 연로하셔서 잠들어 계시는 시간이 많지만.“

"흠, 그럼 그 작자는 시간과 공간, 두 축을 '동시에'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네?“

바토리가 미간을 좁혔다.

"그래. 둘 다.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똑바로 말 해!“

"아니, 나는 궁금해서. 말이 안 되잖아. 너 혹시 '모순' 이라고 알아?"

바토리는 모르지만 아는 척 고개를 사선으로 끄덕였다.

"..설명은 나중에 하고. 어쨌든 너네는 시공간을 '동시에' 뒤집길 원하는 거 같은데. 시간과 공간, 도대체 무엇이 선행되어야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까?“

"······그게 뭔 개소리야. 누가 똥개 아니랄까봐 말도 짖으면서 하네.“

역시나 퉁명스런 얼굴이다. 아니, 뭔 말인지 이해도 못한 거 같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봐. 만약 시간 축이 먼저 뒤집힌다면, 네가 있는 시간대에는 균열이 없는데 공간을 어떻게 뒤집지? 그리고 또, 만약 공간이 먼저 전이된다면 너네가 있는 공간에는 균열이 없는데 시간 축은 어떻게 뒤집냐?”

미시적으로 보면 '동시(同時)'는 불가능하다. 적어도 마이크로 초 만큼의 차이는 반드시 존재할 터.

그러니, 놈들의 계획에는 필연적인 모순이 끼어있다. 그것도 시간만 적당히 주어진다면 일반인도 어렵지 않게 추리해낼 수 있을 만큼 난해하지 않은 모순이.

그리고 이 모순은 뱀파이어들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의심을 원천에 차단하는 ‘맹목적인 믿음─뱀파이어 로드─’이 없다면.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로드가 너네를 이용하는 것 같단 말이야.“

고작 한 마디를 꺼냈을 뿐인데, 대기에 짙은 살기와 압박이 더해진다. 그러나 바토리의 강골을 체득한 이상 이런 물리적인 위박(威迫)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래도 너, 죽는 것도 싫은가봐? 평생 몬스터한테 뜯어먹히면서 살고 싶니?”

서슬퍼런 목소리였다. 허나 조용히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에선 숨길 수 없는 동요 또한 느껴졌다.

"그리고, 로드께서는 그런 짓을 벌일 이유가 없어.“

"이런거지. 너네는 과거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잖아? 근데 로드는 그게 아닌거야. 그는 이미 '과거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단 걸 알고 있는거지.“

"······.“

"내 생각에도 시간 '혹은' 공간을 뒤집는 건 분명 가능해. 하지만 시간축을 뒤집든지, 아니면 공간을 뛰어넘든지 둘 중 '하나'만 가능한 거지. 즉, 로드께서는 니들을 고향으로 뚝 던져놓고 나서, 자기 혼자만, 혹은 니네를 제외한 충실한 심복들만 데리고 '과거, 다른 차원의 지구'로 돌아가려 한다~ 이 말이지. 무방비 상태의 지구를 꿀꺽 집어삼키려고."

"개소리 지껄이지 마!“

말이 끝난 즉시 바토리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몸놀림이 성급하고 우아하지 않았다. 동요를 하고 있다는 방증이겠지. 나는 두 손으로그녀의 면상을 밀어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로스한델이 너를 두고 말을 하더라고? '차기 제왕'이라고. 근데 말이야, 로드가 그걸 용납할까? 욕망으로 똘똘 뭉친 니들 뱀파이어는, 특히 핏줄이 고귀하면 고귀할수록 지위에 대한 집착이 더 심하지 않나?“

"Kobhack! 로드께서는 연로한 자기를 대신해 직접 후계자를 고른다고 하셨단······!“

"그거야, 지가 백년만년 해먹겠다고 하면 누가 좋아해. 뱀파이어들의 흡혈본능을조절할 수 있다지만, 그 전에 암살당하기 딱 좋지. 게다가 로드 자리를 넘겼다가 니네가 폭동이라도 일으키면 어쩌려고."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여유롭게 조소를 짓는다.

"아니 그보다 그 로드, 잠만 잔다는 것도 사실이냐? 내가 듣기론 수명이 100년은더 남았다고 하던데?“

그러자 바토리의 마나가 크게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피부 위로 요란하게 들끓는 핏빛의 마나는 그녀의 분노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함을 드러냈다

"로드는 그럴 분이 아니다."

나는 웃으며 과연 그럴까? 라고 마지막 마디를 덧붙였다. 그것으로 드디어 임계점이 넘었는지, 그녀는 내 전신을 해부할 기세로 달려들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죽지에 이빨을 박아넣고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뒤이어 내장이 뽑히고 등골이 박살나는 듯한 고통이 치민다.

그러다 돌연. 바토리가 행동을 멈춘다.

쯉쯉-

"···뭐야 이 모기새끼는!"

피를 빨고 있는 나를 떼어낸다. 아, 30%밖에 못 채웠는데. 아쉬워하는 순간.

별안간 결계가 쩌저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오? 아무래도 구조대가 도착했나보네.“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뒤덮인 털을 집어넣고, 인간의 풍모로 변화한다. 바토리는 그런 나를 기묘한 눈빛으로 보다가 입가를 비틀어올렸다.

"그래? 그럼······ 다 죽여야겠네."

* * *

황금빛 검광이 결계를 가르자, 불락(不落)일것만 같았던 새까만 반구체에 균열이 생겨났다. 그러길 3초. 쩌저저적- 한 면에만 생겼던 균열이 점차 결계로 전체로 번져가고, 이내 유리조각처럼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됐다!"

"세진 씨!"

그 결계의 속에는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예상대로, 바토리와 김세진.

허나 자세가 조금 이상했다. 바닥에 엎어진 김세진과, 그 위에 올라탄 바토리. 뭔가 조금 음란하고도 강압적인 자세······

"저, 저 미친년이!“

그 광경을 본 즉시 하젤린이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질렀다.

"뭐?"

난데 없는 욕설에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바토리, 그녀는 온 사방으로 자신의 마나를 뿜어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하젤린의 '마나억압'이 발동된다. 더 몬스터에서 긁어온 모든 마나석을 재물로 바토리의 마나를 억압한다.

"이런 잡년들이······ 끅!"

마나가 강제적으로 갈무리 당한 바토리에게로, 수백의 석궁이 쏘아진다. 날카로운 볼트(Bolt)는 그녀의 전신을 고슴도치처럼 꿰뚫었다.

허나 이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걸 모두 알고 있다. 이혜린의 장도와 주지혁의 대검,백호의 앞발과 김유린의 궁니르가 동시에 쇄도한다.

쪽수가 딸린다. 목숨은 하나 뿐이고.

바토리는 굴욕을 속으로 삼키며, 부하들에게 구조신호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콰아아앙! 수많은 검격이 쇄도한다. 그러나 바토리는 견뎌내고, 또 회피했다. 마나따윈 없이 오로지 맨 몸으로.

심장으로 향하는 황금빛 검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다. 기이한 각도로 휘는 사복검은 한 손으로 움켜쥐고 바닥으로 내리친다. 사복검을 든 검사, 이혜린은 검을 손에 쥔 채 노면에 내리꽂혔다.

"끄악!“

"혜린아! 괜찮······!”

그리고 김유린에게 쇄도해 복부에 주먹을 박아넣는다. 김유린은 용캐도 견뎌냈지만, 잇새로 다량의 피가 터져나왔다. 바토리는 김유린을 마무리 짓고자 달려들고, 그런 바토리를 주지혁과 유백송이 막아선다······

그 모든 전투를 보며, 김세진은 패배를 직감했다.

하젤린의 마나 억제는 이제 곧 한계고 기공포를 사용하기에는 마나가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으면 뱀파이어 구원군까지 도달하겠지.

여기서는 후퇴가 답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속도'로 바토리를 따돌리는 건 미친짓이다. 음속은 가볍게 뛰어넘어, 1초에 1km는 가볍게 주파할 미친년이다.

그러니 생각하자. 생각하자.

돌연 마도지식의 단편이 떠올라, 김세진은 머릿 속에 꽁쳐뒀던 마도의 지식을 급히 헤집었다.

찾아보니, 있었다.

'순간전이'.

바토리가 자신을 납치하였을 때 사용했던 마도다.

콰아아아앙!!

때마침 김유린의 궁니르와 바토리의 주먹이 맞부딪치며 거대한 흙먼지가 일어 시야를 가렸다. 김세진은 동료들의 좌표를 파악하고서 머릿속으로 마나를 가동했다.

그리고 역시, 레비아탄의 마나집적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순간 마나가 하롱하롱 피어오르며 전투중인 동료들을 감싸더니,뿅!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뭐, 뭐야?"

바토리는 처음엔 어리둥절을,

"뭐냐고! 어디갔어! 어디갔어 이 빌어먹을 잡종년들! 아아아악!"

그 다음엔 분통을 터트렸다. 방금 김유린에게 면상을 한대 얻어맞았기 때문일까, 붉게 부어오른 볼이 더욱 처절하고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듯 하다.

"여, 여왕님!"

"하아··· 하아··· 너네, 왜 이렇게 늦었니?"

"죄, 죄송합니다! 바로 쫓아갈까요?! 마나의 흐름은 포착했습니다!"

장로와 사도들이 헐레벌떡 뛰어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바토리는 흘린 피를 닦아내고 흐트러진 머릿결을 정돈하며, 차가운 분노를 토해냈다.

"아니. 흥이 식었어. 그리고 가서 뭐해? 또 똑같은 방법으로 도망갈텐데······."

"그, 그럼?"

고민하던 그녀는 돌연 김세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로드가 뱀파이어들을 속이고 있다'는 말이.

그것은 분명, 분명히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만큼 불경한 말이다. 그러나······

"···로드를 만나러 간다.“

"예? 저, 여왕님? 여왕님의 진노는 충분히 이해갑니다. 허나 로드께서는 아직 깨어나시지······.“

나약한 목소리를 듣자니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았다.

왜 내 아랫놈들 중에는 이렇게 재미있는 놈이 없지? 왜 모조리 빌빌대는 것 밖에 할줄 모르지?

무릎은 물론 머리통까지 땅바닥에 접착시킨 이 남자같지도 않은 수컷들을 굽어보며, 바토리는 방금까지 곁에 있었던 남자를 떠올렸다. 동시에 여러 가지 의미로, 많은 화가 났다.

"닥쳐 이 버러지같은 놈들아! 로드한테 갈테니까 길이나 닦아라!"

그녀의 커다란 호통이 산세를 울렸다.

< 42. 구출 (4) > 끝

ⓒ 지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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