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구출 (3) >
김종혁은 훤칠한 서양인과 함께 파티장에 들어섰다.
"흠.. 적당히 꾸몄네."
김종혁은 조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여배우, 여기사들이 많다.오늘은 그런 걸 챙기러 온 게 아니지만, 그래도 놓고 가면 너무 아쉬울 것 같은 여자들이다. 사실 아쉬움 보다는 괘씸한 감정이 더 크다. 자신이 직접 불렀을 때는 코웃음을 치던 년들이, 여기서는 알랑방구를 끼며 꼬리를 흔들고 있으니.
"트루드 씨?“
김종혁이 은근한 시선으로 트루드를 돌아보았다. 트루드는 미간을 살짝 좁혔지만이내 고개를 까딱였다.
"한계는 3명이다. 저항력이 뛰어난 기사는 안 돼.“
"하하하, 그거면 충분합니다.“
트루드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김종혁은 품 속에서 반지 하나를 꺼냈다. 반지의 중앙엔 묘한 기운을 발하는 핏빛 보석이 박혀있었다.
흐흐······ 김종혁이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여배우들의 품 속으로 뛰어가려 할 때.
"어? 김종혁 씨 아니세요? 반갑습니다.“
칠흑기사단 소속 상급기사, 더 몬스터의 길드원 이혜린이 다가왔다. 그 뒤에는 김유린도 있었다. 드레스 차림의 두 사람은 엘프 못지 않게 아름다웠으므로, 음심이 동한 김종혁은 일순 모든 동작을 멈추고서 침을 꿀꺽 삼켰다.
"······아하하, 이거 참. 귀빈을 만났군요. 반갑습니다.“
"후훗, 귀빈이라니요. 그건 저희가 할 말이 아닌가 싶어요? 근데 이분은 누구신가요?"
이혜린이 웃으며 말한 순간, 뇌리에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장로입니다.
로스한델의 텔레파시였다.
"롤레이나 인트루드의 부사장 님이십니다. 다국적 투자기업인데 기사분 께서 아실라나 모르겠네······.“
"물론 알고 있어요. 그럼 이것도 인연인데, 같이 술이나 한잔 하실래요?“
이혜린은 눈웃음을 치며 김유린의 눈치를 살폈다. 오호, 대장님 수줍어하는 표정연기 죽이는데?
"대장님도 괜찮아 하시는 것 같은데."
"······뭐, 원하신다면야. 하하하.“
김종혁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트루드에게 눈길을 보냈다. '내가 이 정도 되는 사람이다'라는 거만한 눈빛이었다.
"..흠."
트루드는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장로 급의 현혹마법이라도, 상급기사들에게는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김종혁의 바지 주머니에 숨겨져 있을 '최상급 미약'.
뱀파이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미약은 충분히 상급기사들에게도 먹힐 것이고, 거기에 술까지 곁들여지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저도 좋습니다.“
트루드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럼, 아래 층의 객실로 가서 마실까요? 제가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
"뭐, 좋지요. 갑시다."
네 사람이 일행을 이루어 크루즈의 계단을 내려가고, 그리고 그 뒤를 한 뱀파이어가 아무런 기척 없이 따랐다.
터벅터벅-
그렇게 계단을 내려가던 트루드는 어느 순간 묘한 불안을 느꼈다.
비단 계단을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뒤쪽에서 희미하게 흘러드는 익숙한 기척······.
트루드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세상이 어둡게 반전했다.
'결계'였다
"뭐, 뭐야!“
기겁하며 주변을 둘러본 김종혁에게 둔탁한 칼집이 쇄도한다. 콩! 아무 쓰잘데기없는 제 3자는 그렇게 칼집에 미간을 처맞고 기절한다.
'함정이다!'
트루드는 재빨리 이동술식을 사용했으나, 그보다 먼저 김유린에게서 뿜어져나온황금 섬광이 그의 오른 팔을 베어냈다.
"끄아아악!"
술식을 구성할 팔을 잃자 이동술식도 무효로 돌아간다. 당황한 트루드는 우선 한쪽 팔로나마 '베놈 스피어'를 시전했다.
일순 트루드의 등 뒤 허공에 수십 수백의 흑색 창이 떠오른다.
맹독으로 범벅되어 있는 이 창살은 살짝 스치기만 해도 빌어먹을 인간 놈들에게 치명상을 선사할 터──그것은 분명 고위마법이지만, 참 아쉽게도 상성이 맞지 않았다.
이혜린의 검(劍)은 공간을 왜곡하고, 마법을 베어내기에.
샤악!
이혜린이 휘두른 검은 창 하나를 튕겨내더니 기이한 각도로 계속해서 굴절되며 모든 창을 쏜살같이 격파해갔다.
그리고 트루드는 참 불쌍하게도 당황할 틈 조차 없었다. 찰나, 김유린의 궁니르가그의 다른 쪽 팔로 쇄도하였으니······.
"크아······“
김유린은 참격의 목적을 '벙어리'로 설정했기에 트루드는 비명도 내지를 수 없었다. 양팔을 잃은 그는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마침 결계도 산화하고, 트루드는 그녀들의 어깨 너머에서 기웃거리는 가증스런 배신자을 보았다.
'네놈은 로드가 무섭지도 않더냐······!‘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성대를 억지로 억지로 밀어내며 꺽꺽 거리던 트루드는, 순간 뇌리에서 묘한 목소리가 윙윙거리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장로님도 의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 계획은 실패할 가능성이 더욱 높다는 걸. 저는 제가 살 길을 선택한 겁니다.
로스한델이 보낸 텔레파시. 트루드는 맞바로 격렬한 욕설과 분노를 내보냈지만, 이미 그의 생각은 굳게 닫혀진 채였다.
도발에 말려든 트루드의 얼굴이 시뻘개지고, 발버둥을 친 탓에 팔이 잘린 단면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혈액을 잃어 점점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트루드는 핏발 선 눈으로 로스한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듣지 못한 격노와 저주와 증오는, 언제까지나 그 누구도 듣지 못한 채로 남을 것이었다.
* * * *
무의미한 심연 속에서 얼마나 헤매었을까,
"겨론하자.“ 어눌한 발음으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한 남자가 떠올랐다. 그 즉시 눈이 번쩍 뜨여졌다.
통통통통-
가장 먼저 웬 절구 찧는 소리가 들려오고, 뒤이어 심장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눈물이 흐른다. 황급히 일어나려던 유세정은 그만 발을 헛디뎌 콰당탕!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엄마야!“
절구 소리가 멈추고, 그것을 찧던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언니?“
"세, 세정아. 깼니?“
하젤린은 절구를 내려놓고서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주었다.
"괜찮니? 그래도 계속 쉬고 있······.“
"놔요!“
그러나 유세정은 냉정하게 내팽개쳤다. 순간 분통과 억울함이 치밀었다. 김세진의 연인은 난데,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인데, 왜 그가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자신이 제일 늦게 알아야 한다는 말인가.
"세정아? 일단 진정하고···“
"진정을 어떻게 하느냐고요! 오빠가 납치당했다는데, 그것보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있어요? 당장 불러와요!“
이를 갈며 소리치는 그녀의 피부 위로 마나가 들끓었다. 심상치 않은 흐름, 이것은 '마나폭주'의 전조다. 혹시라도 폭주한다면 여태 모아둔 모든 마나를 잃고 생명마저도 위독해지는, 기사나 마법사에게 가장 치명적인 현상.
하젤린이 미간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세정아, 진정해. 그런 태도는 지금 아무런 도움이 안 돼.“
"도움은 개뿔이! 알고 있었으면서 왜! 왜 안 알려줬어요!“
"그건 네가 걱정할까봐······.“
"걱정도 걱정 나름이지! 저리 비켜요!"
몸을 일으킨 유세정은 비틀거리면서도 출구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숨을 내쉰하젤린은 결국 품 속에서 포션병 하나를 꺼냈다.
수면포션이다.
뚜껑을 따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길길이 날뛰는 그녀에게 쏟아붓는다.
"아악! 야! 너 지금 뭐하는·········“
방금 뭔가 기분나쁜 반말을 들은 것 같지만, 유세정은 이내 힘없이 스르르 쓰러진다.
뒤이어 벌컥! 문이 열렸다. 장로로 추정되는 뱀파이어와 팀원들이었다.
그들은 우르르 밀려들어오다가 상황을 발견하곤 우뚝 멈춰선다.
정체모를 포션에 당해 쓰러진 유세정과, 포션통을 들고 있는 하젤린.
김유린이 슬그머니 허리춤에 손을 가져간다.
"······날뛰길래 재운거야. 의심하지마. 손 때 유린아. 손 때. 그거면 나 진짜 죽어."
* * *
장로를 설득하는 것은 쉬웠다. "한 방 한 방마다 정신력을 갉아먹는다"는 목적이 담긴 김유린의 펀치로 팡팡팡팡 때리다 보니 장로의 정신이 헤롱헤롱해졌고, 그 틈을 탄 하젤린의 정신마법이 치명타를 가한다.
그렇게 장로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건 성공 하였지만······
"얘는 어떻게 하죠?“
이혜린이 덤으로 끌고온 김종혁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이 밥 로스. 오늘 있었던 일, 잊어버리게 할 수 있나?“
"물론입죠.“
김유린의 요구에 로스한델은 싹싹하게 나서 놈의 뇌 속으로 마나를 불어넣었다.
"됐습니다. 이 놈은 술 진탕 마시다가 기억을 잃은 걸로 기억할 겁니다.“
"다행이군. 잘 했다 밥 로스.“
"······ 근데 밥 로스는 도대체 누굽니까? 전 로스한델입니다."
밥 로스의 투정은 가볍게 무시한다.
김유린은 침대에 누워있는 유세정을 힐끗 바라보았다.
"새벽 쪽 집사는 언제 와서 데려간대?“
"곧 온답니다."
유린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지금 세정이의 정신상태는 방해만 될 뿐이다. 게다가 하젤린의 말로는 마나폭주의 기미까지 보였다고 하니..
"그래. 그럼, 모두 다 준비는 됐겠지? 세정이한테 용서받으려면, 김세진 길드장은 무조건 데리고 와야 한다!“
"예. 물론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대답을 힘차게 내보였다.
***
부우우웅- 가파른 산길을 내달리는 넓적한 승용차엔 8명의 인원으로 득실거렸다.
김유린의 운전은 최고였지만, 동시에 너무 거칠어 모두 괴로운 얼굴이었다. 특히 감각이 예민한 유백송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앞 시트에 대가리를 콩콩콩 처박는 등 자해를 하고 있다.
"이쪽이면 동해인데? 여기 맞아?“
"예. 조금만 더······.“
트루드가 멍한 얼굴로 대답한다.
"직진?“
"예.“
"오케.“
비포장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엑셀을 세게 밟는다. 그 반작용으로 내부가 흡사 대지진이라도 발생한 양 뒤흔들린다.
"잠깐, 잠깐만, 나 진짜루 토할거가타······.“
얼마 지나지 않아 맨 뒷자리에서 유백송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안 돼, 안 돼! 너 토하기만 해봐. 난 안 된다고 말 했어 분명!“
급히 발광하는 사람은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하젤린.
"아니, 아니, 나 더 이상 못 참아. 나 이제 못 견뎌. 죽을지도 몰라. 아니, 죽어. 이미 죽었어. 죽었다고 생각해.“
"참아. 참아. 참으라고 했다. 분명히 나······"
"구웨에에엑!“
"꺄아아악!“
맨 뒷좌석에는 난리 브루스가 펼쳐지지만 김유린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김세진을 구해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과, 오랜만의 오프-로드-드라이브에 신난 마음이 합쳐져 끝도 없이 가속할 뿐.
"아, 이 로브 세진씨가 선물해준건데에! 다 묻었잖아 이 고양이새꺄!"
"······구웨에엑!“
"이런 썅··· 읍, 멈춰! 잠깐 멈춰바 유린아, 유린아?! 멈춰! 이러다 나도 토해······ 우웁! 그에엑!“
"······밥 로스 씨? 맨 뒷좌석에 쉴드좀요. 냄새 넘어올라“
"이미 쳤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밥 로스 아니라니까요.“
이혜린과 김선호, 주지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뒷좌석의 일은 뒷좌석에 맡기자.
* * *
약 40여분의 괴로운 드라이브 끝에, 일행은 드디어 장로가 안내한 장소로 도착했다. 과연, 살면서 평생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을 으슥한 지대였다.
"뭐, 혹시 문제있는 사람 없지?"
김유린이 물었다.
서로간의 토사물로 범벅이 된 하젤린과 유백송이 문제라면 문제였으나, 로스한델이 청결마법으로 그 둘을 깨끗이 씻겨주었다.
"이런 거 있으면 진작에 쳐 써주지······ 하여간 마음에 들지가 않아.“
"저거군요. 와따, 역시 바토리. 결계 단단하게 생긴거 봐.“
투덜거리는 하젤린은 가볍게 무시하고, 로스한델은 저 멀리 반구형으로 되어있는 새까만 결계를 가리켰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대장님“
"결계는 아마 궁니르로 파괴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그 다음이 걸려. 어떻게 바토리를 상대해야 할지.“
"······흠, 저기 이 방법은 어떻습니까?“
그때 김선호가 손을 들었다.
"뭔데요?"
"TM사에서 몬스터 방산을 담당하는데··· 무인 석궁이나 포탑같은 독창적인 발명품이 많습니다.“
"······아?“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뜬 김유린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간이 촉박해요. 길드장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구출해내야 합니다.“
"용병단을 동원하면 되니까 반 나절, 아니 1시간이면 될겁니다.“
"······.“
김유린은 동료들의 반응을 살폈다. 이혜린은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를 하고는 한 마디 덧 붙였다.
"하젤린 언니, 그때 그거 가능하시죠? 마나 없앴던 마법.“
"어? 어, 어··· 근데 아마 10초가 최, 최선일거란다.“
갑작스런 '언니'라는 호칭에 당황한 하젤린은 더듬더듬 대답했다.
"······후. 그럼 용병단을 불러 설치합시다. 선호 씨?“
어차피 바토리의 목적은 청룡을 길들이는 것. 그렇다면 적어도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고, 김세진 또한 자신들이 희생당하는 걸 원치 않을 터.
"그래도 포탑은 배제하고 석궁만 설치하도록 하죠. 혹시 길드장 님이 휘말릴 수도 있으니."
"예, 알겠습니다.“
김선호는 급히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
그로부터 고작 30분 뒤.
콰콰콰콰콰! 무려 열 두대의 헬리콥터가 하늘 위를 수놓더니, 수십의 용병들이 관련 물품을 들고서 낙하했다.
"······와 뭐야. 되게 빠르네.“
길드원들의 감탄 속에서, 용병들은 고작 20분만에 수 십대의 석궁을 설치했다.
"뭐라고 설명하셨습니까?“
"결계 안에 몬스터를 가둬뒀다고 했습니다.“
"좋네요. 이제 물러가라고 하세요.“
어차피 바토리는 '정예'가 아닌 이상 통하지 않는다. 물론 몬스터 용병단의 역량이 높다고는 하지만, 필요 없는 죽음은 언제나 지양하는 것이 옳다.
"예.“
김선호가 돌아가라며 박수를 치자 용병들이 쏜살같이 물러난다.
< 42. 구출 (3)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