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기묘한 일 (1) >
집으로 돌아오니 세정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 번져있긴 하지만, 다행이다. 기사단에 있는 줄 알았는데.
"오빠, 요즘 무슨 일 하는거야?“
팔짱을 끼고있던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나는 그저 웃으며 대답했다.
"여러가지. 근데 오늘로 끝났으니까, 이제 계속 같이있을 수 있어.“
"···그래?“
그녀의 화가 살짝은 풀린 듯했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허나 그 섣부른 안도가 그녀의 심기를 거슬러버렸다.
"아직 화 풀린거 아니거든. 오빠 요즘 한 달간 외박만 몇 번인줄 알어?“
"···미안해.“
사과를 읊조리며 세정이를 꼭 안는다. 그녀는 "이런 걸로 넘어가려고 하지마"라고 소리치며 발버둥을 쳤지만, 포옹을 풀지는 않았다. 그렇게 3분정도 지나니 그녀도 잠잠해졌다.
"······오빠.“
"응?“
귓가를 간질이는 세정이의 목소리에는 불안이 짙게 베어나왔다. 역시 여자의 직감이란 것일까. 나는 최대한 평온하게 대답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두려워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바람피는 거 아니지?“
"······.“
그래, 빗나갈 때도 있으니까 직감인 법이지. 내가 약간은 허탈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녀는 더욱 불안해하며 말을 이었다.
"만약 바람피는 거라면······ 걸리지만 마.“
얘는 또 뭔 소리를 하는 거냐. 나는 한숨을 내쉬고서 그녀의 이마에 꿀밤을 박아 넣었다.
"으앗!"
앙증맞은 비명이 울려퍼진다.
"그게, 나 좋아하는 여자는 되게 많거든?“
짐짓 허세를 부리며 그녀를 내 가슴팍에 안았다.
"···자랑이시네요 증말.“
볼멘소리가 흘러나온다.
"······.“
"뭐야. 말 안해? 오빠 좋아하는 여자 되게 많은데, 그러고 뭐.“
"그냥. 네가 좋아하는 건 너밖에 없다고.“
같은 공간에서 오랜시간 동안 함께 지내왔다. 그만큼 무척 익숙해져서 인생에서 없어지면 안 될 것 같은 사람, 그게 세정이다.
물론 거창한 설렘이 동반하는 격정적인 사랑은 아니다. 허나 나에겐 그런 불길 같은 감정보다, 잔잔한 노랫말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녀가 더욱 소중하다.
"···뭐야. 그게 다야?“
유세정이 짐짓 눈을 흘기며 내 양 볼을 움켜쥐었다.
"겨론하자.“
그 탓에 조금 발음이 세긴 했지만, 문득 하고싶었던 말은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볼을 잡은 손을 내려놓더니,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도 아니고, 올해도 아니고 내년도 아니지만, 언젠가는. 마음 편안히 결혼식을 올릴 수 있을······“
짜악!
한쪽 뺨에서 강렬한 통증이 화르륵 타올랐다.
"악! 뭐야, 왜!“
"그, 그런 소리를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하면 어떻게 해! 이 바보야!"
그녀는 울먹이면서까지 말을 이었다.
"아, 이런 프로포즈가 어딨어 진짜···"
"어? 아.. 아 이거 프로포즈 아니야. 그러니까, 프로포즈 프로포즈지. 곧 있으면 프로프즈를 하겠다는 프로포즈······"
"시끄러! 비켜!"
세정이는 나를 밀어내고는 쿵쾅쿵쾅 부엌으로 걸어갔다. 화가 많이 난건가 싶었지만, 다행이 부엌에서 들려오는 말을 보면 그건 아닌 듯했다.
"오빠. 배 안고파? 케잌 있는데 먹을래?"
* * *
12월 25일, 성탄절의 늦은 밤.
김세진은 유세정과의 짧은 만남을 마치자마자 동해로 나왔다. 그리곤 레비아탄으로 변해, 목 윗부분만을 빼꼼 내뺀 채 동해를 유영한다. 갑자기 3배 가까이 거대해진 크기에 바토리가 흥미를 잃거나 도망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스산한 바람이 스치고, 잔잔한 물결소리 마저도 불길하게 느껴지지만 걱정할 것 없다. 이곳은 바다. 그 어느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그가 물길을 가르던 어느 순간이었다.
뇌리에 서늘한 인기척이 스쳤다.
굳이 육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는 알 수 있다. 허나 세진은 내색 않고 헤엄만을 계속했다. 릴리아가 설치한 결계가 있는 곳으로.
뒤따라오는 움직임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김세진은 천천히 바다를 유영하며, 놈을 잡을 덫으로 스물스물 움직였다.
결계가 설치된 위치는 세 개의 돌섬을 꼭지점 삼아 만들어내는 삼각형의 안. 김세진은 바토리가 따라오길 고대하며, 돌섬 너머로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때마침 그가 결계의 중심부에 다다랐을 때.
허공에 적색 돌풍이 일었다.
돌풍은 점차 그 크기를 불려나가며 물길을 휘젓다가, 일순 멈췄다.
적색 바람이 흩어지고 물길이 잔잔해진다. 그렇게 시야를 가렸던 바람이 개이자, 환한 미소를 짓는 고혹적인 미녀가 그 우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바토리였다.
"안녕?"
청룡에게 인사를 건네는 바토리 뒤에는, 이쪽을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로스한델의 모습이 보였다. 김세진은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어주었다.
"어머어머. 쟤 웃은거니 지금?"
바토리는 청룡의 입가에 새겨진 호선을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맞지? 나 좋아하는 것 같은데?"
로스한델이 열정적으로 동의했다. 허나 그녀의 마음 편한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순간. 심해의 저변에서부터 마나가 부글거리더니, 물길과 함께 하늘로 치솟아 세 사람을 감쌌다. 돔 형체의 결계였다.
"으음······? 아가야. 이게 뭐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청룡의 능력이라고 밖에는······.“
"그래? 근데 너는 왜 그쪽에 가있는 걸까?“
바토리는 애써 미소를 유지한 채 로스한델을 응시했다. 그는 이미 청룡의 뒤에 꼭꼭 숨어 있었다.
파바밧-!
이윽고, 결계에 내재되어있던 여러 이동진이 발동하면서 많은 인원들이 전송되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마법사들은 이미 고위마법을 격발하기 위한 영창을 외워둔 채였다.
살짝 당황했던 바토리는, 그러나 이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노스페라투······ 역시, 너네들이었구나. 그럴 줄 알았어. 잡종들이 순혈에 어울릴 수 있을 리가 없지."
바토리는 조소를 나부끼며 전신에 마나를 끌어올렸다.
아니, 끌어올리려 했다.
그러나 마나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혈관이 꽉 막힌 것처럼.
일순 다급해진 그녀는 이 기묘한 술식을 부리는 대상을 찾아헤맸다. 허나 모두 똑같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분간이 불가능했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분노한 바토리는 부지불식간에 발을 굴러 돌격했다. 마나 따위는 필요 없다. 오직바토리로서 지닌 육체, 그 탁월한 강골만으로도 저 잡종 년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터이니······
채앵!
그러나 어디선가 나타난 우람한 대검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주지혁이었다. 그는 바토리를 약 2초간 막아내는 성과를 세웠지만,
"꺼져!"
진노한 그의 격공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콰앙! 대검이 힘없이 밀려나가고, 주지혁은 결계의 구석탱이에 처박혔다.
허나 기사는 주지혁이 끝이 아니었다. 튕겨나간 주지혁의 머리 위에서 뱀처럼 휘는 날카로운 검격이 흘러나와, 바토리의 머리카락을 살짝 베어낸다.
샤륵-
적색의 머리카락이 결계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친 바토리는 얇게 베인 자신의 머리카락을 확인하고는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Kobac Grohack!]
정체불명의 언어를 뇌까리며, 그녀가 이혜린에게 쇄도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수많은 마법이 바토리에게로 쏘아졌다.
암적색의 섬광, 패기가 응집된 구체, 원한서린 저주까지. 극렬하게 치닫는 마법의 해일에─ 바토리는 일순 동작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쏴아아아─!
마법의 위력은 결계에 흠집이 새겨질 정도로 대단했고, 일렁이는 폭발은 모인 인원들의 귓전에 피가 날 만큼 거대했다.
허나 아직, 필살기라 형언하기 부족함이 없는 공격이 하나 더 남아있었으니.
지금 청룡의 입가에 모이는 '기공포'가 바로 그것이다.
레비아탄의 비늘을 섭취함으로써 알아낸 필살기. 체내의 마나는 물론 바다의 마나까지 모조리 끌어올려 발사함으로써, 궤적에 놓인 모든 대상을 말살하는─ 필멸(必滅)의 기술.
대상이 무엇이든, 기공포에 닿는 만물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진다. 형체의 유무, 성질의 차이, 속성의 구분도 없다.
심지어 '빛'마저도 소멸되어, 기공포가 지나간 경로에는 세계마저도 새까맣게 물들고 만다.
그러니 아무리 바토리라도 레비아탄의 기공포를 버텨낼 수는 없으리라.
"···!“
헌데, 전투가 시작된지 10초가 지났을 때.
별안간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마법사 중 한 명이 쓰러졌다.
동시에, 마법사들의 마법폭격이 집중되었던 지점에서 마나가 용솟음쳤다.
바토리, 그녀는 시뻘건 마나를 온 사방으로 내뿜으며 녹아내린 피부와 토막난 신체를 복구하고 있었다.
"저지를!“
누군가가 소리치자 이혜린과 유백송, 레젠이 동시에 나섰다. 허나 이혜린의 마나는 바토리에 닿자마자 힘없이 바스라졌고, 그녀의 가슴으로 새빨간 채찍이 향했다. 채찍에 직격당한 이혜린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크아아아─!"
유백송이 신수화를 취하고서 달려들었다. 백호가 거대한 앞발을 휘둘렀으나, 바토리는 한 손으로 막아내고서 백호의 옆구리에 섬전을 쏘아냈다.
바로 그 순간, 백호의 가랑이 사이로 레젠이 튀어나와 바토리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었다.
"읏!"
바토리는 재빨리 마나를 재조정하여 레젠의 두 팔을 베어냈지만, 콰아앙! 동시에백호의 앞발이 그녀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아프잖니"
허나 바토리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백호의 거대한 목을 움켜쥘 뿐.
그으으으──
백호는 괴로워하며 연신 바토리의 대가리를 가격했다. 그러나 바토리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더욱 강하게 백호의 목을 옥죄었다그 때.
"비키세요!“
총 20초.
전장에서는 지독하리만치 길었던 시간이 지나 기공포의 충전이 완료되고, 릴리아가 크게 외쳤다. 유백송은 재빨리 신수화를 해제하고 뒤로 크게 물러났다.
그리고, 백색의 굵다란 섬광이 바토리를 집어삼켰다.
이후. 결계 안의 소리가 절멸된 듯한 착각이 일었다.
숨쉬는 소리도, 침을 삼키는 소리도 존재치 않았다.
다만 멍하니 기공포가 휩쓴 공간을 바라볼 뿐. 마치 세계가 까맣게 그을린다면 이러할까. 결계 안의 모두가 공간에 새겨진 부자연스러운 흑색면을 감상하던 와중, 다급한 외침이 찢어지듯 울렸다.
"잠깐! 손가락!“
릴리아가 바닥에 나뒹군 손가락에 마법창살을 쏘아냈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리고 말았다.
바토리의 손가락 한 마디는 마나를 거칠게 뿜어내며 적들의 공격을 막고, 순식간에 재생을 거듭하더니──
"······이상한 마법 하나에 네 번이나 죽었네.“
다시금 원래의 바토리로 복구되었다. 바토리는 관절을 풀며 그들을 스윽 훑었다.
"너네, 용용이랑 돈독한 관계인가봐?“
바토리가 그네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겪은 죽음은 총 다섯 번. 이곳에 있는 잡종들을 모조리 찢어죽이고 싶지만, 이제 한 번만 죽으면 끝. 결계도 부숴버려야 함을 생각하면, 안타깝게도 더 이상의 위험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게다가······ 저 용용이는 지금 바다에서 마나를 끌어올리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지체하면 방금의 무지막지한 공격이 한번 더 쇄도할지도 모른다.
"근데 뭐··· 상관 없어. 난 남에 걸 뺐는게 더 좋거든.“
바토리는 복구가 덜 되어서 너덜너덜한 옆구리를 움켜쥔 채, 결계에 화력집약형 단발마탄을 쏘아냈다. 결계를 유지하는 술사들의 마나가 쇠잔해진 지금, 야구공만한 마탄은 결계를 쉽게 뚫어내었다.
마법사들의 낯빛이 절망으로 물든다.
허나 바토리도 이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그 즉시 레비아탄에게 쇄도하여 놈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뿅!
사라졌다.
영창과 마법진이 모두 필요 없는 술식, 마법보다는 마도라는 말이 어울리는 '순간전이'였다.
"······어?“
모두의 생각이 잠깐동안 끊겼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지? 에 대한 이해도 쉽지 않았다.
결계가 쩌저적 갈라지고 나서도, 그들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