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겨울나기 (2) >
더 몬스터 지하의 회의실에는 단원들이 일신의 성장을 착실히 도모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마나문신을 길들이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하젤린은 인공심장을다루는 데 차츰차츰 익숙해져갔다.
"와. 그러면 완전한 신수화도 가능하신 겁니까?“
"흐흠. 그렇지. 비록 짧은 시간동안이지만, 백호의 현신은 그 어느 무엇도 두렵지않다네. 신수계통 수인이 괜히 세계의 주목받는게 아니야. 예전에는 나를 자기 나라로 서로 데려가겠다고 알력다툼까지 벌였을 정도라니까.“
서로 간에 전력을 다했던 대련 이후의 휴식시간.
주지혁이 유백송을 떠받들자,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자부심 넘치는 콧김을 씩씩 내뿜었다.
저렇게 유세를 부리는 그녀는 어딘가 괜히 괴롭혀주고 싶은 구석이 있어, 세진은 슬그머니 다가가 팔랑이는 꼬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흐앗!“
하늘로 폴짝 솟구쳐오른 유백송이 별안간 뒤 쪽으로 발길질을 했다. 그러나 짧은 다리는 긴 팔의 김세진에게 닿지 않았을 따름이고···
"놔, 놔라!“
그녀는 분기탱천하여 소리쳤으나, 세진이 손바닥으로 꼬리를 문지를 때마다 서서히 적의를 잃어갔다. 좋은 냄새가 나는 인간한테 꼬리가 만져진다는 건, 묘하게 기분 나쁘면서도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놔, 놔······ 으아.“
결국에는 뭍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허우적거리며 눕는다. 김세진은 음흉한 미소를지으며 자그마한 몸체에 비해 쓸데없이 기다린 꼬리를 앙- 깨물었다. 그러자 다시금 격렬한 반응이 터져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백송 씨 괴롭힘 받는걸 즐기는 것 같은데요?“
유백송이 김세진이라는 마수에서 겨우 헤어나왔을 때. 이혜린이 놀리는 투로 말했다.
"그건 무슨 개소리냐.“
"아니 뭐··· 저기 백송 씨. 혹시 S랑 M이라고 아세요?“
"···그건 또 뭐야.“
"그냥 알파벳인데··· 아, 한번 골라보실래요? S랑 M중에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왠지 모를 의심스런 태도에 유백송이 미간을 좁혔다. 허나 이혜린은 능글맞게 웃으며 선택을 종용할 뿐이었다.
"빨리요."
단원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래서 꼭 해야되는 건가? 싶었던 유백송은 찬찬히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M?"
동시에 많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유백송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고, 김세진은 웃음을 참고서 그녀의 옆에 섰다. 그리곤 그녀의 쬐끄마한 정수리를 툭툭 두드리며 엄숙하게 말한다.
"그만하세요. 애기 놀리는게 그렇게 재밌습니까?“
"···누가 애기라는거냐. 물어 죽이기 전에 적당히 해.“
"···크흠.“
그렇게 서로 재미있게 웃고 떠드는 와중에, 오른편의 '결계실' 문이 열렸다.
터벅터벅- 잔뜩 초췌해진 하젤린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이 걸어나온다.
"하젤린 씨. 괜찮아요?“
그는 미리 준비해둔, 활력회복포션 겸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한번만안아주면괜찮아질것같은데.“
머그잔을 받은 그녀는 주위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속사포처럼 속삭였다.
"아 그······.“
허나 그녀의 마음을 아는 김세진은 마냥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 하젤린이 먼저 웃으며 말해주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하젤린은 머그잔을 홀짝이며 단원들이 모인 소파로 다가갔다. 보통 다크엘프들은사람을 꺼리는 편이지만, 그녀는 그네들과 썩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워낙 착하고 배려깊은 사람들 뿐이니 당연하겠지만.
"근데, 김유린 기사님은 지금 뭐하고 계신답니까? 벌써 두 달가까이 지나지 않았나요?“
주지혁의 말이었다. 일순 머그잔을 쥔 하젤린의 손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동해의 오두막에서 편히 쉬고 계셔요. 아무래도 평생동안 쌓였던 피로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역류한 것 같아요. 대장님, 17살에 기사단 입단했으면서 지금까지 휴가 한 번도 안가셨거든요.“
"···흐음“
김세진은 복잡한 얼굴로 머그잔에 커피를 내렸다. '오두막'이라는 단어가 괜히 신경쓰였다.
"찾아가보셨어요?"
"그럼요. 가서 엄청 놀렸죠. 갱년기가 온거냐, 애완동물 못 키운게 한이 되었느냐, 아니면 영웅 오크한테 차여서 이렇게 침울한거냐···.“
흠칫. 김세진이 몸을 살짝 떨었다. 마지막 게 상당히 찔리네.
"근데 뭐··· 그냥 씁쓸하게 웃으면서 아무 말도 안하던데요. 부정도 안하고, 긍정도 안하고. 그냥 쉬고 싶을 뿐이라고 하면서 같이 밥먹자고 밥상을 차려주더라고요.“
김세진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설마 상사병은 아니겠지.'
"아, 그 얘긴 나중에 하고. 길드장님. 길드장님 특성은 언제 가르쳐주실 거예요?"
그때 이혜린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예? 아.. 내 특성."
김세진은 아직까지 이들에게 자신의 '특성'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일단은 김선호와 하젤린 만이 알고 있다는 뜻.
허나 밝히더라도 레비아탄 폼 이외의 다른 건 말할 생각이 없다. 아니, 밝힐 수가 없다. 늑대 폼은 '라이칸'이고, 오크 폼은 김유린과의 관계가..
"한 두 달 쯤? 뒤에 알려드릴게요."
김세진은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었다.
"예? 그게 뭐에요~ 우리는 다 밝혔는데~"
이혜린의 야유를 뒤로하고, 김세진은 방금 하젤린이 들어갔던 결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와우.“
과연. 하젤린의 마법훈련 성과인지, 결계실에는 성한 구석이 없었다. 모두 긁히고 패이고 드러나고 박살나는 등···.
"흠흠.“
그는 우선 바닥에 패인 크레이터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에 늑대의 손톱을 드러내고서 스킬창을 띄운다.
[체인 클로] [숙련등급: B+]
여기에 더해서, 한 손에는 전격마법을 응집시킨다. 파지직- 눈이 멀 듯한 순백의 전광이 터져올랐다. 그런데, 상태창은 이 중급 '마법'에도 적용되었다.
[라이트닝 볼트] [숙련등급: A]
이렇듯 상태창은 참으로 편리하여서, 스킬이 아닌 마법도 기록되어 여러 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게 도와준다.
예를 들어 스킬조합 이라던가, 마나문신 이라던가······
그리고 지금 사용할 것은 '스킬조합'이다.
꽤나 오래전에 몇 번 사용했는데,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 '결과물'의 등급에 비례하여 쿨타임이 길어져서 많이 사용하지는 못했다.
이 스킬 조합의 사용법은 간단하다. 그저 조합하고싶다- 는 의지를 마음에 품고, 두 스킬을 맞댄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타오르는 전격을 번뜩이는 손톱날과 합치면─끼이이이이이익─!
무슨 칠판을 긁는 것 같은 불쾌한 전기의 소리, 뒤이어 펑!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스킬 조합이 완료되었습니다.]
[결과물 : 라이트닝 체인 클로]
- 손톱 모양의 전격을 쏘아내거나, 손톱 자체에 전격의 속성이 깃듭니다. 숙련도에 따라 전격이 대기중에 포함된 전자를 무한동력삼아 끊임없이 퍼지게 할 수 있고,상대방의 혈액과 감응하여 상대의 감전사를 도모할 수도 있습니다.
- 등급 판정(중상)에 따른 재사용 대기시간은 [99일 23시간 59초]입니다.
"오우.“
그저 방배동 마법사의 No.24 마기서에 기록할 마법을 조합할 의도였는데, 예상보다 너무 좋다.
"뭐··· 대충 위력 낮춰서 발매하면 되겠지.“
그러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서 텅 빈 마기서 한 권을 꺼넸다.
펜을 쥐고 인체 구도를 쓱싹쓱싹 그려가며─고블린의 손재주 덕분에 아주 세세한 표현도 가능하다─, 마나의 효율적인 이동경로와 마법을 편히 사용할 수 있는 팁까지 적는다.
참고로 이건 여태 방배동 마법사가 해왔던 수정작업이 아니라 마법의 '창조'다.
[전격]이라는 마법이 기초가 되긴 하였지만, 탄생한 마법은 전격따위와는 격이 다른 위력을 발휘할 테니까.
"허허.“
헌데 이렇게 쓰다보니 자꾸 입가에 미소가 곁들어졌다. 승부욕도 슬그머니 끓어오른다.
맨날 표절가, 수정가, 이따구로 염병하며 깎아내리던 마탑 놈들이 이 마법을 두고는 어떻게 말할까. 아마 이번 만큼은 그렇게 잘하던 정신승리도 못하게 될 터.
'마법사는 말이 아니라, 마법으로 말한다.'
***
시간은 참 유수와 같아,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흘렀다.
푹푹 찌는 듯했던 한여름의 태양은 어느새 시들고,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 찾아왔다.
그리고 서늘한 바람에 꽃잎이 쓸쓸하게 낙화하는 전경이 TV에 비춰지는 날.
방배동 마법사의 No.24 마기서 [연쇄번개손톱]이 발매되었다.
이는 여태 기존에 있었던 마법서들을 수정, 보완, 향상하여 내놓았던 것과는 달리,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마기서였다. 다시금 블로그에 업로된 마법 시연장면과, 흠을 잡을래야 잡을 수 없이 완벽한 마기서의 구성.
마탑은 다시 한번 충격을 겪어야만 했다.
허나 이번은 양상이 조금 달랐다. 마법의 수정은 몰라도, '창조'만큼은 수위의 마법사들도 해내기 힘든 업적이기에.
여러 마탑은 마기서에 오류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매달렸지만, 먼저 마법서를 공급받은 '파름마탑'의 탑주가 일주일 동안 연구한 끝에 마법을 문제 없이 -미약하게나마- 구현해내자,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보통 '새로운 마법'은 1년에 5~6개 정도가 탄생된다. 물론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그래도 대개 두 자리 언저리에서 맴돈다. 한국에서만 5만이 넘는 마법사의 수를 생각해보면, 창조야말로 마법사가 언제나 꿈꾸는 영광스런 업적이라 할 수 있겠다.
헌데 그 어려운 걸, 마탑소속도 아니고, 심지어 마법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않았다는 '방배동 마법사'라는 우스꽝스런 이름의 마법사가 해내버렸으니..
마탑의 마법사들은 압도적일 만큼의 재능차이에 이번에야말로 좌절했다.
─방배동 마법사가 창조한 마법, [연쇄번개손톱]은 현재 마기서를 최초로 발주한 파름마탑이이 심사를 진행중이고······ 문제 없이 새로운 '마법'으로 판명이 날 것같습니다. 1년 새에 23권의 마기서를 효과적으로 수정한 것은, 물론 새로운 마법까지 창조한 건······ 대단한 재능이라고 밖에 형언할 수 없겠군요.
방배동 마법사에게 특히 적대적이었던 서울마탑-서울마탑은 특히 출신 마법 아카데미와 혈통을 따진다-의 탑주, 엘프 '로메인'이 직접 나서서 인터뷰를 했다.
김세진에게는 항복선언이라고 들려질 법한 헌사였다.
그 항복선언 이후, 방배동 마법사의 블로그에는 세계 여러 유명 마탑의 간부들이 작성한 축하댓글과 마기서의 구매를 간청하는 글로 가득차게 되었다.
허나 그 뿌듯함을 오랫동안 만끽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결전의 날이 성큼 다가왔으니.
"저기, 저거 맞지?“
그리고 이 곳은 동해.
김세진은 꽤나 오래간만에 레비아탄 폼을 취하고 나들이를 나왔다.
"청룡······ 어?"
김세진의 언질을 받고서 미리 취재를 나온 기자들은, 그러나 별안간 청룡의 비늘색이 변해있자 어리둥절하 얼굴을 지었다.
참고로 이건 계획의 일부다. 바뀐 청룡의 모습을 보여주어, 바토리의 호기심과 소장욕구(?)를 더욱 부풀리게 하는 것.
"뭔가 많이 바뀌었는데?“
리포터와 기자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곧 프로의식을발휘하여 본업에 집중하였고, 김세진 또한 자태 뽐내기에 들어갔다.
자신을 찾아온 물고기를 보며 해맑게-최대한 귀엽게- 웃어도 주고, 파도를 살짜쿵 일으켜서 서핑도 하였으며, 짐짓 근엄한 얼굴로 태양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카메라들은 그 보물같은 한 컷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담았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동해의 수호신은 모습이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비늘의 색깔이 명량한 청색에서, 은은하지만 고고한 은빛으로 바뀌었지요. 청룡이 한 층더 성장한 것인지, 아니면 털갈이와 비슷한 비늘갈이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물고기와 어울리는 청룡은 더욱 믿음이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그러고 있다 보니, 드디어 기자의 클로징 멘트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연기의 피로가 몰려왔다.
"됐다."
기자는 땀을 닦으며 일을 끝냈지만, 카메라맨은 계속해서 청룡을 담았다.
그 탓에 김세진은 조금 더 연기를 해야 했다.
< 40. 겨울나기 (2)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