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몬스터-136화 (136/174)

< 40. 겨울나기 (1) >

"···하젤린 씨?“

둘 뿐인 사무실에 김세진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하젤린은 포옹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갑작스런 충동이 일궈낸 행복을 잠시나마 만끽했다.

"···."

김세진은 제 품에 안긴 하젤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녀리게 떨리는 어깨는 뒷수습을 두려워하는 듯하였으나, 허리를 더 강하게 껴안은 두 팔은 그렇지 않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때 수정구에서 릴리아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말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마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지 않을까.

-음··· 아, 오늘 날짜가··· 그럼 이만.

릴리아는 이상한 말을 하더니 송신을 끊었다. 주말인데 오늘 뭐 바쁜 일이 있나?

김세진은 최대한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잔뜩 놀란 몸과 마음을 거듭 진정시켰다.그럼에도 평정이 되찾아지지 않아 심호흡까지 했다.

"후우···."

사실 그녀가 자신에게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완전히 예측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다. 다만 굳이 깊이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

많이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록 연인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그녀는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잃기 싫었다. 그래서 그녀의 감정이 애정일 수도 있다는가능성을 혹시라도 인정하지 않았고, 돈독한 우애이길 바랐다.

허나 누군가 그랬던가. 남녀 사이에 결코 친구사이는 없다고.

"하젤린 씨?“

김세진은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젤린 씨.“

한층 더 단호해진 목소리에, 하젤린이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그제서야 그녀는 포옹을 풀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어느새 붉어진 코를 훌쩍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해요. 지팡이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엄청 고마웠는데······ 갑자기속에서 뭔가 울컥 하고 북받쳤어요. 제가 그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알죠?엘프는 그런거. 그래서 그랬어요······.“

그녀는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을 종족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김세진은 그런 그녀를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하젤린은 소중한 사람이다. 아무리 이기적일지언정, 그녀를 잃기는 싫다.

그러니까······ 굳은 얼굴을 풀고,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어보이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으면서 말하자. 못된 말이지만, 지금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다

"······하하. 이 지팡이가 그만큼, 좋았어요?“

태연한 목소리로, 갈 곳을 잃은 하젤린의 두 손에 마법 지팡이를 쥐어준다.

"엄청 비싼고 좋은 거니까. 잃어버리지 마요.“

"···."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 하젤린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지팡이를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이해도 된다. 근데 밉다. 인정하기도싫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바닥에 시선을 처박은 채 고민했다.

멀리서 지켜보는 것과, 가까이서 함께하는 것.

둘 다 '가질 수 없다'를 전제했을 때, 어느 쪽이 더욱 괴로울까.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다. 아마 두 명제를 천칭에 올려놓으면 평생 동안 수평을 유지하지 않을까.

허나 그녀는 지금 그에게 대답을 들려줘야만 했다. 그리고 엘프로 태어난 이상, 어쩌면 어쩔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같은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고, 적어도 함께 있을 수는 있다. 그것 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 보다는 낫다. 지켜보기만 하는 건 정말, 참을 수 없는 괴로움 일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메인 목을 최대한 쥐어짜낼 수 밖에 없었다.

"······네. 그래야지요. 절대 안 잃어 버릴··· 게요."

가까스로 자아낸 목소리는 예상 외로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하젤린은 고개를 들어 올리지는 않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싶지만, 한사코 눈물을 참아내느라 그렁그렁한 눈매를 보여주긴 싫어서.

그리고 김세진은 그런 그녀의 손을 감싸쥐어주었다. 부드럽고 자상하게.

"고마워요.“

하젤린은 눈물을 왈칵 쏟을 뻔 했다.

그래. 이제 이 정도로만 만족하자.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그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자. 욕심보다는 감사를, 슬픔보다는 만족을. 너무 큰 욕심으로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는 말자.

"뭐가요."

하젤린이 눈가를 훔치고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잔뜩 붉어진 눈과 코는 형편 없겠지만, 그래도 웃어보였다.

"오히려······ 제가 고마워해야 하는걸요.“

* * *

하젤린을 잘 달래서 돌려보내고 나서, 김세진은 밤 늦게 집으로 도착했다. 세정이는 아마 그를 대신하는 길쭉한 베개를 꽉 껴안은 채 쎄근 쎄근 자고 있었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모습이다.

세진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는 약 5분 정도 동안 가만히 그러고 있다가,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물러섰다.

침대 다음의 행선지는 안방 한 켠에 놓인 아담한 책상이었다.

그는 의자에 앉자마자 책상서랍 속 일기장을 꺼냈다.

일기를 쓰는 건 꽤나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습관이다. 매일매일은 아니지만 주에 1~2번 정도, 몬스터의 본능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또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 인간으로서 일기를 쓰는 것.

이 습관은 아마 필름이 끊긴 채 뱀파이어를 살해했던 날 이후로 시작했던걸로 기억한다. 물론 누구에게도 보여지지 않기 위해 일기장에는 특별한 마법처리가 되어있다.

"후우···"

그는 펜을 들고, 한숨을 토해내듯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썼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 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진은 재빨리 일기를 끝마치고서 서랍에 넣었다.

"···오빠. 또 일기 써?“

잠이 가득한 목소리에 뒤돌아보니, 산발의 유세정이 게슴츠레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근데 다 썼어.“

엷은 미소를 지어주고서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간다. 그녀의 몽롱한 눈동자가 그를 멍하니 좇는다. 그는 세정의 뒷목을 잡고서 가볍게 입을 맞췄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그의 가슴팍을 밀쳐내며 거부했다. 그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는 부끄럽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 입냄새나··· 방금 일어났자나 바보야.“

"···풋. 나는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요.“

그를 찌릿 흘겨본 세정은 제 손에다 하~ 숨결을 뱉고 그 냄새를 맡았다. 다행히 그리 고약하지는 않았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 귀엽네 진짜."

그건 실로 참을 수 없는 귀여움이었다. 그래서 김세진은 그대로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잠깐! 나 방금 일어났다니까요··· 아핫, 간지러, 간지러~!“

그녀는 일단은 반항해봤지만, 성감대를 집요하게 공략하는 그의 짓궂음을 이겨낼 수는 없었을 따름이다.

실크로 된 잠옷은 힘없이 찢겨졌고, 그녀는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 날. 김세진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다음 날. 유세정은 월차를 사용해야만 했다.

* * *

─방배동 마법사가 자신이 발명한 새로운 마법 '브레스'를 블로그에 업로드했습니다. 와이번을 단 두 합으로 처단한, 전례 없는 엄청난 위력을 두고 마법계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세계 마탑순위 1위의 미국 '라그랑스' 마탑은 이 마법이 합성이라고 의심하였지만···

김세진이 마법을 업로드하자마자 역시 난리가 터졌다. 그리고 예상대로 처음은 날조 혹은 합성 의심이었다. 허나 전문가의 소견과 몬스터 필드 내부 자료가 그것이명백한 사실임을 증명해주었다.

[서울 마탑 상급 마법사, 엘프 '레멜린']

─이 마법지팡이를 보시면,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루비에 엄청난 량의 마나가 증폭됩니다. 이는 하급 마법사가 중상급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을 정도의 어마어마한증폭입니다. 그러니 방배동 마법사는 이 마법 지팡이라는 도구의 힘을 빌린 것으로······

그 다음은 깎아내리기는 과연 '지팡이'였다. 어쩜 이렇게 예측을 벗어나지 않을까. 김세진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TV뉴스를 바라보았다.

─위의 여러 논란들에도 불구하고, 현재 가장 활발한 마법사 '방배동 마법사'는 세계 마법사 순위 1000위 안에 포함되며 파격적인 행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가 수정하고 발매한 마기서는 세계 여러 유수의 마탑들도 없어서 못 구하는 진귀한 보물이 되었으며, 이번에 발매될 [No.24 방배동 마기서]는 벌써부터 그 내용을 추측하는 여러 루머와 흥분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기와 질투를 받으면서도, 방배동 마법사는 제 명성의 범위와 세력을 늘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저 방배동 마법사도 김세진 길드장 님이었을 줄이야······."

주지혁이 경탄과 외경이 잔뜩 베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곳은 더 몬스터의 길드 사옥 지하, 극비리에 축조된 비밀 회의실. 최고급 아티펙트와 장비, 포션과 여러 편의시설들이 즐비한 이 회의실에는 총 7명의 인원이 모여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와는 달리 다소 자유로운 자세로 소파에 앉아 TV를 째려보는 7인은 차례로 김세진, 유백송, 주지혁, 하젤린, 이혜린, 김선호와 수인 레젠이다.

"저 방배동이 진짜 자넨가?“

주지혁에 이어 유백송이 물었다. 김세진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방배동이 만드는 마기서는 마탑 주식을 들락날락하게 만든다고 들었는데······ 충격이군.“

일례로 18권과 23권을 연속으로 구매하는 데 성공한─김세진이 그럴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유일하게 겸손한 마탑이었기에─ 강원도 소재 '파름 마탑'의 주식은 주당 이만원에서 삼만원으로 치솟았다.

"음? 특별수사대 우두머리가 그걸 모르셨습니까?“

"저희 첩보원이 지키는 정보는 그렇게 쉽게 세어나가지 않습니다.“

김선호가 대신 대답했다. 자부심이 잔뜩 묻어나오는 어조였다.

"참··· 잘나셨네요 잘나셨어······ 나는 뭐하러 20년 동안 마법공부했지······ 특성하나면 다 되는걸······.“

이 힘없는 목소리는 약 20분 전, 김세진의 "내가 방배동 마법사다"라는 고백을 듣고나서부터 넋이 나간 하젤린의 것이었다.

그때, TV 옆에 놓여있던 수정구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주지혁이 재빨리 TV를 끄자 릴리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 무척 힘든 일에 참가하시겠다고 결정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바토리는 최악의 강함을 지닌 여인. 지금, 빠져나갈 수 있을 때 다시 한번 고려해보셨으면 합니다계획은 이미 김세진과 하젤린이 손짓발짓 다해가며 아주 자세히 설명해 놓았기에, 릴리아는 그 각오와 결의만을 되물었다.

"···바토리의 강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 그래서 사태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처치해야 한다는 의견은 동의하는 바야.“

그러자 유백송이 카이저 2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작 카이저 2세는 오직 김세진만을 바라고 있지만.

-네.

"하지만 내 너희들을 믿기도 힘들군.“

-···.

유백송의 눈이 야수의 그것처럼 사선으로 좁혀졌다.

"흡혈귀란 결코 믿을 수 없는 족속인데, 적어도 모습을 드러내는 성의는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녀의 귀가 빳빳이 세워졌다. 그리고 김세진은 그런 그녀의 양쪽 귀 힘껏 움켜쥐었다.

"으아! 뭐, 뭐하는 짓이냐!“

갑작스런 접촉에 팔짝 튀어오른 그녀를 두고, 김세진이 혀를 끌끌차며 말했다.

"신용은 제가 보증합니다. 그리고 로드도 잠에서 깨어난 이 시점에, 세작이 어떻게 밖으로 나옵니까?“

"···무, 물어 볼 수는 있는 것 아니냐. 그렇다고 왜 귀를 꼬집어."

유백송이 쪼끄만한 귀를 어루만지며 입을 삐죽 내뺐다. 그 귀여움에 모인 사람들 모두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다들 결정 하신겁니까? 죽을수도 있는 위험한 일에 참여하기로?“

김세진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모두 각자 다른 말로, 그러나 아주 힘차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당장 문신실로 오세요. 한 달에 하나 씩.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만큼 빡세게 새겨서 강해집시다."

앞으로의 유예는 약 5개월. 김세진은 계획에 참여한 일원들에게 한 달에 한 번 씩, 마나문신을 새기기로 했다.

*

"아프··· 아픈 거 아닌가?“

"할 때는 안 아프니까 좀 가만히좀 있어요.“

"할 때는? 그럼 그 다음으은?"

다른 사람은 모두 어렵지 않게 끝마쳤는데, 유백송만큼은 세진의 손길을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놔, 놔라! 어흥! 어흐으응!"

"가만히 좀! 끝나면 엄청 맛있는거 사줄테니까!"

세진은 먹이를 미끼로 삼아 가까스로 그녀를 붙드는 데 성공했다. 그녀도 입을 꾹다물고 문신을 받으려고 하는 듯했다.

그러나 문신기구가 제 날을 번뜩인 순간. 그녀는 놀란 고양이가 솟구치듯 하늘 높이 도약하더니, 별안간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나는 그런 거 필요 없이도 강하다!“

"······.“

김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그녀의 얼굴에 새하얀 포션을 뿌렸다.

"아악! 뭐 하는 짓이······.“

입에 들어간 액체를 퉤퉤 뱉어내며 소리치던 그녀는, 그러나 고작 3초 뒤에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이건 수면의 효과가 있는 포션의 효능이다. 물론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효과가 5분 정도로 짧겠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후..."

김세진은 한숨을 내쉬며 문신작업을 재개했다.

움찔움찔- 문신을 새길 때마다 그녀의 자그마한 몸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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