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사냥을 위한 준비 (4) >
브레스.
마나를 가장 순수한 원소로 분출해내는 '마법'.
과거 드래곤이 애용했다 하여 고귀함으로 남았으나, 정작 그것이 행하는 파괴는 패악과 더욱 닮아있다.
김세진은 레비아탄폼과 인간폼의 핵심적인 무기가 될 그 '브레스'를 단련하기 위해 몬스터 필드로 나왔다. 난데없는 로브를 뒤집어 쓴 채, 카메라-드론-와 고상하게 생긴 작대기까지 들고서.
고목이 쭉 뻗어져나가다가 끄트머리에서야 원형으로 휘어진 모양새의 이 작대기는 김세진이 직접 단조하여 만든 '마법지팡이'다. 멀리서 보면 그저 나뭇가지를 꺾어서 만든 걸로 보이나, 가까이서 보면 꽤나 빈티지한 멋이 있다.
게다가 '마나증폭', '위력강화'를 새긴 루비까지 붙여놓았으니, 아마 시가로 따지면 못해도 300억은 넘지 않을까. 마법사 놈들의 씀씀이는 장난이 아니니까.
"···음.“
그는 오늘 만큼은 방배동 마법사로서, 중상급 지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블로그 업로드 용 드론이 잘 날아다니고 있나 확인도 하고.
일부러 해가 지는 시간대에 왔기에 헌팅 중인 사람은 적었다. 그럼에도 세진은 로브 후드를 더욱 깊게 푹 눌러쓰고서 몬스터 필드를 돌아다녔다.
끼에에엑-!
30분정도 배회했을까. 드디어 하늘에서 제 존재감을 자랑하는 와이번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리핀이라면 몰라도 와이번은 보통 상급 몬스터인데··· 요즈음 얼마나 몬스터들이 날뛰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잘 걸렸다."
김세진은 지팡이를 와이번에 향한 채, 체내의 마나를 지팡이로 집결시켰다. 그러자 루비에 붉은 마나가 모여든다. 선홍빛의 마나기류는 점차 화염으로 변해가며 들끓더니─콰아아아아아!
창공의 와이번에게로 굽이치며 내달렸다.
지상의 김세진이 쏘아낸 업화의 브레스가 와이번에게 닿기까지는, 찰나, 1초면 충분했다.
끼에에엑-!
업화가 와이번의 전신을 뒤덮어갔다. 놈은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며 날개를 퍼덕였다.
그러나, 업화는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다.
우우우웅-
그는 지팡이에 다시금 마나를 끌어모았다. 이번에는 붉은색이 아닌, 얼음을 닮은 새하얀 마나였다.
지팡이에 고인 혹한의 마나는 세상을 급격히 냉각시켜갔다. 공기가 서리분진이 되어 흩날리고, 로브에 성에가 짙게 서린다.
쩌저적-
김세진이 디딘 땅까지 하얗게 얼어붙었을 때, 이번에는 혹한의 브레스가 분사되었다.
창천을 얼리며 와이번에 당도한 혹한의 브레스는, 콰아아앙! 업화와 감응하여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하늘을 가릴만큼 거대했던 와이번은, 그렇게 얼음의 서리와 화염의 재가 되어 지상으로 하롱하롱 가라앉았다.
"···호오.“
사체가 전부 소멸되어 전리품은 안남았지만, 술사인 김세진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위력. 인간 폼으로도 이럴지언정, 레비아탄은 이보다 얼마나 강대할까.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녹화 잘 됐나?“
그러다 돌연, 그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드론을 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반응을 할라나."
콧대가 높고 고집도 드럽게 쎈 마법사들이 놀라워하는 모습이, 그리고 질투와 시기로 방배동 마법사 깎아내리면서도 속으로는 방배동의 마기서를 탐하는 이중적인 면모가, 요즘은 너무나도 즐겁다.
이 영상을 올리면 그들이 또 무슨 반응을 할까.
다 지팡이 덕이다─ 라고 부르짖으며 현실을 외면할까, 아니면 격의 차이를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까. 물론 여태 마법사 놈들이 내비쳤던 행패들로 미루어보면 거의 대부분이 전자겠지만.
"···음?“
그렇게 그가 만족하고 있던 때, 하젤린에게서 문자가 왔다.
[세정이 갔어요. 이제 얘기해도 돼요.]
김세진은 짧게 답장을 보내고서 출구로 향했다.
* * *
김세진은 하젤린과 만나 모든 이야기를 자세하고 세세하게 늘어놓았다.
김유손이 봤던 앞으로 펼쳐질 끔찍한 미래와, 그것을 막기 위해 뱀파이어 '분파'라 할 수 있는 노스페라투와의 협력해야 한다고.
아주 민감한, 결코 발설해서는 안 되는 기밀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상대가 하젤린이라 그렇게 큰 부담이 있지는 않았다. 그만큼 그녀는 믿을 만한, 믿어도 되는 인물이었으니.
"······.“
모든 얘기를 들은 하젤린은 붕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만 뻐끔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입장에서 김세진이 한 말은 모두 초현실적인 공상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도와주실 수 있나요?“
"······예? 아니··· 자, 잠시만요. 그, 그러니까 한번 세진 씨가 해준 얘기를 정리를 해 보면..“
하젤린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별안간 흘린 식은땀 때문인지 왕창 젖어있었다.
"앞으로의 미래가 뱀파이어 때문에 멸망 직전까지 흘러가는데.. 그걸 막기위해 뱀파이어와 협력해서 뱀파이어의 거두를 죽여야 한다.. 맞죠?“
"흠··· 그렇긴 한데, 일단 노스페라투는 뱀파이어와 구분해서 말해주세요. 헷갈리니까."
노스페라투, 물론 아직 믿기 힘든 족속이기는 하다. 허나 '레비아탄의 비늘'을 건네주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틀림없는 진퉁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협력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들은 아니다.
게다가 본진에 정보원 파견을 허용하면서 "만약 배신할 기미라도 보이면 비늘먹은 레비아탄으로 저희를 다 죽여 주세요" 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근데 노스페라투는···.”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하젤린에게 뱀파이어는 다 똑같은 뱀파이어였다.
"저희도 뱀파이어랑은 원수관계인데.."
그녀는 괴로워하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마피아, 삼합회, 야쿠자, 반란군, 정규군 등등··· 다양한 진영에서 많은 의뢰를 받아왔던 그녀로서도 이런 원대한 스케일, 그리고 뱀파이어와 '협력'해야하는 경우는 난생 처음이었으니.
“···영 아니다 싶으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근데, 들으신 모든 내용은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김세진이 말했다. 그러자 하젤린이 얼굴을 감싸던 손을 내려 턱을 괴더니, 뭔가 모호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비밀이요?“
"예. 당연하죠. 제가 이 사실을 하젤린 씨 말고 누구한테 말해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하젤린 씨가 처음이에요.“
'엘프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종족적 특성의 덕도 크긴 하지만, 김세진은 하젤린을 믿었다. 굳이 늑대의 동공으로 속을 꿰뚫지 않아도, 그녀는 가장 오랜 세월동안 이어진 인연이니까.
"···세정이도 몰라요?“
"네? 아··· 네. 그, 그렇죠.“
그러나 이 대답을 하기에는 조금 눈치가 보였다. 세정이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이 일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사람차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터.
"그래요..?“
허나 평안을 되찾은 눈매와 씰룩이는 입가, 그리고 작게 벌렁이는 콧구멍까지. 하젤린은 묘하게 기분 좋은 낯빛이 되었다.
김세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한번 물었다.
"결정 하셨나요?.“
"···근데, 참여한다고 결정하면 자주 보고 그래야 되지 않나~? 계획을 짜야 한다면서요.“
하젤린은 제 머리카락을 베베 꼬며 짐짓 지나가듯 물었다.
"네. 그래야 되겠죠? 근데 원하신다면 원격 수정구로 참여하셔도···“
"아뇨. 할거면 본격적으로 해야죠. 저는 이 세상에서 대충대충을 제일 싫어하는걸요.“
하젤린이 갑자기 엄숙한 얼굴로 일어났다.
"하겠습니다. 세진 씨가 부탁하시는데, 게다가 이런 일은 언젠가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세상을 구한다, 폼 나잖아요? 여자 엘프로 태어나서 그 정돈 해야지.“
"···.“
김세진은 하젤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리고는 서랍 속에서 수정구를 꺼낸다.
"릴리아? 마법사 님이 응낙했습니다.“
"···예? 지, 지금 바로?“
"앉으세요. 계획 설명 해드릴게요.“
"..네.“
하젤린이 앉자마자 릴리아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감사드립니다. 마법사 님. 저희는 아주 위험한 바다를 건널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그 첫 해협은 뱀파이어의 차기 제왕이 될 여인을 죽이는 것이지요.
"예··· 알아요. 이미 세진 씨에게 자세히 들었는걸요“
-다행이군요. 그럼 우선 계획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계획의 내용은 이렇다.
우선 노스페라투 일족이 동해와 세계를 격리시키는 결계를 비밀리에 설치하고, 그 결계 안에 여러 마법함정들과 마나석을 준비해놓는다.
그리고 만약 김세진이 바토리를 잘 유인하여 바토리가 결계에 갇힌다면 그 함정이 발동되고, 그 다음이 바로 하젤린의 차례다.
그녀가 사용해야할 것은, 김세진이 과거 뱀파이어의 인형을 처단하고서 얻어낸 '인공심장'.
인공심장 안에 담긴 '일순간 마나를 다루지 못하게 하는 마법'을 바토리에게 시전하면, 아주 한 순간 바토리가 무척 취약해진다. 그러면 그때 여러 마법들을 쏟아 부어 놈을 죽인다.
이론적으로 계획의 시행과 마무리까지는 아주 찰나, 고작 3초 남짓에 불과하다. 허나 릴리아 폰 노스페라투는 그 3초동안 바토리를 사살하지 못하면 계획의 70%가실패한 것이라 생각하라고 덧붙였다.
-근데 아쉽게도 저희 노스페라투는 대부분이 마법사인지라······ 조금 더 물리적으로 시간을 끌어줄 기사가 한명 더 있으면 좋을텐데요.
릴리아는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기사요?“
그에 김세진이 눈을 밝혔다. 기사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하다. 몬스터 사태로 복잡한 이때에, 수술 후유증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며 동해로 휴가를 떠난 김유린.
-네. 어차피 많아봤자 어중이 떠중이라면 방해만 될테니, 제대로 된 기사 한 명이요.
"···흠.“
김세진은 고민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 하젤린은 안절부절을 하지 못했다.
그는 유세정은 이 계획에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남는 기사 중 가장강력한 기사는···
다음 이어진 말에, 하젤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김유린 기사님한테 한번 넌지시 물어볼까요?“
물론 인간 김세진과 김유린 간의 관계는 그리 돈독하지 않다. 영웅오크라면 몰라도.
그러나 그녀는 정의감과 기사도 정신이 투철한 여인. 바토리를 사냥하는 것이 이 몬스터 사태를 끝낼 수 있는 일이라고 설득한다면 흔쾌히 승낙할 만한······
헌데 갑자기 하젤린이 고심하는 김세진의 팔을 붙잡았다.
"···저기, 세진 씨?“
"네?“
그러나 그녀는 불편한 얼굴로 몸을 베베 꼬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비단 과거 그 사건이 부끄러웠을 뿐만 아니라, 김세진의 앞에서 지나간 사랑 이야기를 하기 싫어서였다.
"왜요? 혹시 김유린 기사님이랑 불편하세요?“
끄덕.
"그러면야······. 기사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기사보다 강한 사람이 있는데, 그 분은 어때요?“
-괜찮아요. 어차피 바토리를 조금이라도 버텨줄 만한 사람이 필요한 거니까요.
게임의 포지션으로 치자면 탱커. 김세진은 피식 웃으며, 결코 탱키하지 않는 것처럼 생긴 쬐그마한 흰색 고양이-유백송-를 떠올렸다.
"주지혁 기사님은 어때요? 상급기사로 승격했던데.“
그때 하젤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오··· 맞네요. 지혁 기사님도 있었네.”
-주지혁이라면, 그 대검사(大劍士) 말하시는 건가요?
"네.”
-그 분이면 괜찮겠네요.
내 인맥의 질이 새삼 어마어마하구나. 김세진은 흡족해하며 노트에 명단을 적어내려갔다. 물론 그들이 이 위험천만한 일에 참여해줄 지는 아직 모르지만.
"휴우···.“
안도의 숨을 내쉬는 하젤린을 뒤로하고, 김세진은 먼저 주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이 전에. 까먹을 뻔 했네.“
그러다 돌연 생각난 사실, 김세진은 영체화 된 채 몸속에 스며있던 마법지팡이를 꺼네 하젤린에게 건넸다.
자신의 것과 비슷하지만, 그녀에게 어울리도록 더욱 깔끔하고 아름답게 세공한 지팡이다. 보석도 루비가 아닌 다이아몬드가 달려있고.
"자, 받으세요."
"···이거는··· 뭐예요?“
"선물이에요. 승낙하셔서 주는 거예요. 엄청 좋은 증폭기능이 달려있거든요.
"아··· 근데 이거 많이 비싸보이는데···."
그녀는 무척 아름다운 지팡이를 넋이 나간 채 바라보다가, 이내 침을 굴꺽 삼키고서 제 품으로 소중히 껴안았다.
"하하. 앞으로 걔랑 친해지세요. 엄청 좋은 거라 잘 길들여질 거예요. "
'엄청 좋은거다'라는 걸 강조하며 생색내는 김세진은 무척이나 귀여웠고, 하젤린은 순간 그를 껴안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어······?"
아니, 실제로 그렇게 해버렸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녀는 김세진을 품에 꼭 안은 채, 천천히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 39. 사냥을 위한 준비 (4)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