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사냥을 위한 준비 (2) >
김세진은 크라켄을 소환하기 앞서 우선 해안가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동해는 피서온 사람들로 가득하니, 목적지는 남해.
부우우웅-
최고급 스포츠카의 청량한 배기음을 즐기며 요선동을 지난다.
거리 구석구석마다 로브를 뒤집어 쓴 연금술사들이 있어, 요즘 세계적인 연금술의 메카라 불리는 요선동의 활황이 새삼 실감되었다.
근데 이 모든 변화가 고블린 연금술사 덕분이라는 사실에 괜히 뿌듯해지네? 김세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핸들을 꽉 쥐었다.
그렇게 천천히 요선의 시내를 구경하며 가던 와중,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세진이 직접 만들어 준 새하얀 로브라서 단박에 눈에 띄었다.
그러나 걸음걸이가 이상하다. 비척비척 비틀비틀, 술이라도 취한 양 힘없고 맥아리 빠져있다. 세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아는 하젤린의 걸음걸이는 도도함의 끝판왕인데.
김세진은 속력을 줄이고 하젤린으로 추정되는 여인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하관이 힐끗 보였다. 여느 때와는 달리 입술이 건조하게 부르텄긴 했지만, 하젤린이확실했다.
어느새 미소를 지은 김세진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하젤린 씨.“
"어, 엄마야! 꺄악!“
그러나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일까, 하젤린은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쾅!
면상이 맨홀쪽에 그대로 내다꽂혔기에, 세진은 화들짝 놀라 차에서 내렸다.
"허, 괜찮아요?“
"······.“
세진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세우자, 로브 아래 살짝 드러난 어두운 눈 한 쌍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아래, 빨갛게 부어오른 콧구멍에서 새빨간 핏물 두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우. 아프겠다."
그는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그 피를 닦아주었다. 그녀는 제 얼굴을 이리저리 닦아주는 그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다가, 일순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정말. 깜짝 놀랐잖아요······ 왜 갑자기 사람 이름을 그러케 크게 부르는건디요.“
"아, 미안해요. 갑자기 넘어질 줄은 몰랐어요."
"···흐읍. 진짜 너무하다······."
별안간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였다. 이따금씩 흐느끼는 듯한 소리도 세어나와, 주변의 시선이 콱콱 꽂힌다.
"저, 잠깐! 이, 일단 타세요. 저 이래봬도 알아보는 사람이 많거든요.“
"아뇨. 저 집에 갈거거든요. 이거 놓으···.“
"그럼 데려다 드릴게요."
세진은 하젤린을 조수석에 밀어넣고서, 재빨리 운전석에 앉았다. 다행히 주변의 행인 대부분이 연금술사인지라, 별 관심 없이 물 흐르듯 지나갔다.
"후··· 집이 어디시죠?“
"······.“
하젤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뚱한 얼굴로 흘러내리는 코피를 집어삼키고 있을 뿐.
"..휴지 드릴까요?"
"···마법 쓸거니까 필요 없어요.“
"아.. 예."
근데 왜 자꾸 코피를 삼키시는지··· 그러나 농담을 던지기에는 상황이 안맞았다.
"어.. 일단 알케미 하우스 쪽으로 갈까요?"
세진의 물음에 하젤린은 엉뚱하게 대답했다
"왜 답장 안했어요?“
"···예?“
"전화도 안 받고. 요 한달동안.“
"···아.“
그는 순간 낭패어린 얼굴이 되었다. 갇혀있는 동안 핸드폰이 없었고, 탈출하고 나서는 업무와 직원들의 문자만 무려 2000개 이상 와있어서 누가 문자를 보냈는지 확인하지도 못했다.
"그게 사정이 좀 있어서.. 일이 바빴거든요. 오, 오늘 집에 가신 다음에 문자 보내보세요. 5분만에 답장할테니까.“
"···“
하젤린은 그런 그를 어이없다는 듯 노려보았다.
'이 나쁜 사람이 진짜···.'
요 한 달 간 내가 무슨 고민과 번민으로 밤을 지새웠는지 알기나 할까.
혹시나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서 거리를 두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귀찮아진 건지, 얼마나 절망했었는데.
"세정이가 말 안했어요?"
"걔가 그걸 저한테 왜 말해줘요."
상당히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크흠. 어디로 갈까요?"
“김세진 씨는 어디 가시는데요."
"예?“
"당신이 가는 곳으로 가요. 어차피 세정이도 근무시간인데, 혼자 가는거잖아요. 말 벗이라도 되어 줄게요.“
* * *
김세진은 남해, 일반인 출입금지지역에 도착했다.
쏴아아-
바다소리를 내며 출렁이는 남해는 동해와 또다른 매력이 있었다.
'뭐지 이 기분?'
그런데, 묘하게 익숙했다. 기시감(旣視感)이라고나 할까. 바다가 익숙한 게 아니다. 바닷결을 타고 어디선가 흘러오는 낯익은 기운이 그 원인.
"저기요?"
김세진이 기이한 감회에 빠진 채 한참동안 남해의 머나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그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하젤린이었다
"뭐하세요?“
"···아, 뭔가 이상하게 익숙해서요.“
그제서야 김세진은 정신을 차리고 마나석을 꺼냈다.
"남해 와본적 있으신가봐요?“
하젤린은 마나석을 힐끗 살폈다가 다시 김세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뇨. 없는데······ 저 멀리, 아주 깊은 곳에서 뭔가 동질감이 느껴져요.“
바다의 내음 속에서 희미하고 아련한 기운이 전해져온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익숙하고 편하면서, 동시에 불편하고 께름칙하다. 모순되는 형용이지만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아마, 그때 말하셨던 몬스터와 동화되어가는 부작용인가보네요. 바다괴수에 동질감을 느끼시는거 맞죠?“
"···예?“
하젤린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것과는 다른 감각이지만, 그러나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어 세진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가보네요.“
"···조심하세요.“
그러자, 별안간 하젤린이 그의 팔을 걱정스레 끌어안았다. 여태 로브에 가려져있던, 차원이 다른 볼륨감이 전해졌다.
"아, 예. 괜찮습니다. 일단······ 보여드린다고 한 것부터 보여드릴게요.“
김세진은 짐짓 웃으며 팔을 빼냈다.
"갑니다."
축구공의 절반 크기만한 마나석에 마나를 불어넣는다. 그러자 크라켄의 마나석이흑색 기운으로 산화하여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이후 한 번의 호흡, 안개처럼 넓게 퍼져가던 모든 기운이 그의 심장으로 흘러들어간다.
[신화 속 괴수 '크라켄'을 흡수합니다!]
[전사의 심장에 크라켄이 스며듭니다.]
[소환수 목록에 크라켄이 추가됩니다.]
[주인의 현재 능력치에 따라, 크라켄의 위상이 상향조정됩니다.]
[현재 크라켄의 강함 등급은 (측정이 불가능한 최상급)수준입니다. 그러나 술사가 인간형인 지금은 (상등급)으로 격하됩니다.]
떠오르는 알림창을 느끼며, 그는 바다 한 가운데에 크라켄을 방류했다.
촤아아아-!
물살을 가르며 거대한 오징어가 크게 치솟았다.
태양을 가릴 듯 웅장한 높이, 매끈하고 쌔끈한 여덟 개의 다리, 그리고 왠지 모르게 나른한 두 눈까지.
과연 선원의 재앙, 크라켄 다웠다······.
"와··· 이거 뭐··· 뭐야?“
크라켄이 만들어낸 그늘 속에서, 두 사람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젤린은 충격 속에서 헤엄치고, 김세진은 '최상급'이라는 등급에 만족하고 있는 와중에.
촬싹!
크라켄이 제 다리로 해수면을 강타해 물이 쏟아부어졌다.
"으어, 하지마!“
김세진이 소리쳤으나 크라켄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반복한다.
첨벙! 첨벙! 첨벙! 첨벙!
"하지마라고 했다! 어푸, 푸, 퓁!“
"푸 세진 씨 쟤좀. 푸우 푸우, 푸우, 아 나 숨을 못쉬게써!"
특히 하젤린을 집중공격을 하는건지, 그녀는 아예 전신이 물에 흠뻑 젖어선 눈도 뜨지 못하고 있다.
"야이 개색··· 푸웹!"
"아읏, 너 어디에 물을 쏘는거.. 프흡! 하지마! 하지마라고 했다!"
하젤린의 사타구니 사이로 물길이 휘어들자, 크라켄의 눈이 호선으로 휘었다. 진짜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치명적인 눈웃음이었다.
"세진 씨, 아, 아니 이 미친 오징어새끼가!“
외침이 사자후처럼 들끓었다.
동시에 크라켄이 몸을 담근 해수가 살벌하게 얼어붙어갔다. 당황한 크라켄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으나, 바다 전체가 깡깡 얼어붙어 옴짝달짝할 수 없을 따름이다.
"일단 교육부터 해야겠네······. 저기 세진 씨,“
그녀는 겁에 질린 오징어의 두 눈을 응시하며 서늘하게 읊조렸다.
"혹시 오징어 다리 좋아하세요?“
*
잠깐동안의 끔찍했던 체벌이 끝난 이후.
”이름을 짓는게 어때요?“
"···이름이요?“
얌전히 고개를 숙인 오징어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래도 애완동물이나 마찬가진데, '사랑이‘로 하죠?“
"저 몸집에 사랑이라고요?“
"네. 저와 당신의 사랑이."
"···예?"
갑작스런 고백'같은' 말에, 김세진이 흠칫 뒤로 물러섰다.
"풋, 뭐가 그렇게 예민해요. 그냥 사랑이로 하죠? 태풍같은 경우도 그렇게 이름 짓잖아요. 흉폭할수록, 더 보드라워지라고 유한 이름을 붙이는데. “
"아······ 흠.“
잠시 고민하던 김세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그렇게 합시다.“
"그럼 사랑이로 된거네요? 야, 사랑아 일로 와보렴. 너 방금 왜그랬니?“
하젤린이 미소지으며 오징어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오징어의 시야에는 또 다시 악귀가 도래하는 모습이었고, 사랑이는 절망에 몸을 떨었다.
* * *
서유럽, 이탈리아에 악마 '아스모데우스'가 출몰했다. 지옥에서 막 걸어 나온 모양새의 놈은 대지와 사람과 하늘을 불사지르며 거침없이 진군했다. 놈이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타오르는 지옥의 업화만이 흔적으로 남았고, 하늘마저 어둡게 물들어 태양조차도 놈에게는 대항할 수 없는 듯하였다.
"···근데 그걸 왜 저한테 부탁한답니까?“
그리고 그 사건 때문에, 유백송은 김세진과의 만남을 추진했다.
"청룡을 구슬러 달라고 하네. 상성 쪽에서도 청룡이 우위이니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을 테지.“
야옹-
그녀의 품에 안긴─이라 쓰고 갇힌이라 읽는다─ 고양이가 발버둥치며 울었다. 그러자 유백송이 우쭈쭈- 거리며 고양이를 달랜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김세진은, 자신의 무릎에 고양이처럼 누운 유백송의 모습을 잠시 상상했다.
꽤나 귀여웠다···.
"크, 크흠. 근데 제가 청룡을요?“
"시치미떼지 않아도 돼.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으니까. 청룡 사이트, 그거 네가 운영하는 거잖아.“
"···아. 들켰네.“
"그렇지. 그래서 각하께서 직접 나한테 부탁하셨어. 너를 만날 수 있는 건 나 뿐이라면서.“
으쓱으쓱- 유백송의 어깨가 신명나게 춤을 췄다.
"···거절하면요?“
"어? 어··· 독일에서 아스모데우스의 전리품과 1억 유로를 준다는데도?“
"흠.“
김세진은 생각했다. 바토리와 일전을 앞 둔 이상, 아마데우스의 전리품은 탐나지만 직접 가기에는 싫다.
그러나, 대신 보낼만한 존재가 지금은 있다.
'크라켄'
야옹!
그때, 그녀의 품에 갇혔던 까만 고양이가 유백송의 손가락을 깨물고 세진에게로 날아왔다.
"어이구. 니 주인보다 내가 더 좋아?“
갸르릉- 고양이는 몸을 비비적거리며 격이 다른 애교를 표현했다.
"아니 저게 진짜···"
"이름이 뭐예요?“
"···킹 오브 시베리아, 세비지 블랙 레오폴드 타이거 카이저 2세“
"······.“
김세진은 말 없이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할짝- 할짝- 고양이는 혀로 보답했다.
"그래 까망아. 옳지.“
"이름 제대로 불러.“
"···카이저 2세.“
"풀네임을 불러야 좋아하는데.“
유백송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근데 얘가 이렇게 애교 부리는 건 처음이네. 역시 체취가···.“
'킹 오브 시베리아, 세비지 블랙 레오폴드 타이거 카이저 2세'가 이런 애교를 피우는 건 유백송으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모습이었고, 그녀는 세진의 배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카이저를 귀여워 죽겠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김세진은 카이저에 정신팔린 그녀의 쫑긋 솟은 귀와 머리카락을 은근슬쩍매만졌다.
"옳지. 귀여워 귀여워···“
쓰다듬을수록 새하얀 꼬리와 귀가 쫑긋쫑긋 반응한다.
"제 무릎에 올라오실래요?“
"···응? 뭐라고 말했나?“
"···아, 아니 그··· 독일에 크라켄 말고 청룡.. 아니, 청룡 말고 크라켄을 보내도 되냐고 물었어요."
세진의 품에서 벗어나기 싫어하는 카이저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유백송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크라켄? 너 그런 것도 조종 가능해?"
"아 조종은 아니고... 뭐 맞다고 할 수도 있겠네. 제 노예에요."
< 38. 사냥을 위한 준비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