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영웅의 흔적 >
오크는 김유린에게 정체불명의 '뱁새'에 대해 정확히 알릴 것을 당부하고서 도르래 위에 올랐다.
“오, 올라가겠습니다.”
구조하기위해 온 두 기사는 도르래를 움직이면서 오크를 힐끗힐끗 살폈다. 정확히는 그의 방어구와 무기를 살폈다. 모두 척 보기만 해도 탐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는 명품들이었으니.
오크는 그런 그들에게 손목 아대와 건틀렛 한 쌍 씩 던져주었다. 두 기사는 서로 눈치를 살피며 창을 든 사내는 아대를, 주먹이 무기인 기사는 건틀렛을 손에 집어 들었다.
주먹. 기사 중 한 명의 무기는 주먹이었다. 가슴팍에 진(眞)이라는 문양이 황금색으로 박여진 것으로 보아, 진세한의 후예라고 봐도 되겠지.
“···고, 고맙습니다.”
기사들은 갑작스런 선물에 감사를 표했다. 동시에 햇볕이 따스하게 비쳐왔다.
“10분이면 곧 도착할겁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알겠습니다.”
김유린은 다소 사무적이고 위엄있는 태도로 그들을 대했다. 오크는 들릴 듯 말 듯한 코웃음을 쳤다. 그 조소에 미간을 좁힌 그녀는 다시금 기사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질투유발같지 않은 질투유발이었다.
“헌데, 진(眞)무도파 이신가 봅니다?”
“아. 예. 부족하지만 9개월 전에 전향했습니다.”
“전향한지 9개월 만에 중상급이라. 재능이 빼어나시군요.”
“하하.. 감사한 말씀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스승님의 면면들을 관찰하고 배꼈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 운 좋게 재능과 기질이 맞았을 뿐이지요. 특성도 저를 도와줬구요.”
진세한. 그는 사후 상급기사로 승격되었고, 명예 고위기사로 위촉되었으며, 기사로서 최고의 영예라는 ‘명예의 전당’에 자신을 묻었다.
그런 진세한이 세상에 선보인 무예를 쫓는 생도는 현재 전세계 약 10만명에 이르고, 1000여명의 기사가 원래 쥐던 무기를 내려놓고 주먹을 선택했다. 그들은 모두 과거에 남겨진 진세한의 영상을 보며 학습과 복습, 단련과 훈련을 하며, 진세한을 영원한 스승이라 추종한다.
그가 수업용 영상을 남기는 것에 관대했던 덕에 그의 전투 스타일과 권법, 보법 등 값진 체술은 온전하고 자세하게 남아 수많은 제자의 등불이 되었다.
영웅의 흔적이 세계에 깊이 새겨진 것이다.
“그렇습니까.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을 두셨군요.”
김유린이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오크는 괜히 코끝을 긁었다. 그저 한낱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허비했던 ‘진세한’이라는 존재가 끼친 영향이 예상보다 훨씬 지대했기에, 뭔가 부끄러움도 일었다.
그러는 사이 도르래는 어느새 지상의 목전까지 도달했다. 위치가 상급지대였기에많은 사람과 취재진은 없었다. 그저 서른 명 정도의 기사와 마법사만이 있었을 뿐. 그들은 영웅오크와 거대한 늑대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가실 겁니까?”
오크가 콘락의 등 위에 올라타자, 김유린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크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콘락에게 신호를 보냈다. 콱! 도르래를 딛고 하늘로 도약한 콘락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렇게 하염없이 멀어지는 오크를, 김유린은 쓸쓸하게 바라보았다.
* * * * *
김세진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유세정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진심으로 화난 그녀는
“나도 한달 동안 안 들어 올거야!”
라고 소리치고 집을 나났다.
그날 김세진은 목걸이를 세공하느라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그녀를 찾아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선물했다. 길드의 숙직실에서 내심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녀는 내키지 않는 척 그를 용서해주었다.
“···오?”
어쨌든 극적화해를 타결한 당일. 김세진은 진세한 관련 내용으로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다 흥미로운 사이트를 발견했다.
진세한 사후 만들어진 '공식' 진(眞)무도유파를 자칭하는 사이트였는데, 그 위에 걸려진 [이유진 23세, 단장]라는 문자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약력에 前(전) 에덴 기사가 적혀있는걸로 보아, 그녀는 진세한이 사망한 후 유지를 잇기 위해 에덴을 떠나 협회와 도장을 설립한 듯했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사이트를 구경하던 김세진은 문득 김유손이 대신 써준 유서에 적혔던 내용을 하나 떠올렸다.
“재산을 제외한 나의 모든 것들은 아끼는 동료인 이유진에게 넘기겠다.”
‘그게 사람 한 명 인생을 바꾼 거였네.’
뿌듯해야 할 지, 아니면 미안해야 할 지··· 일단 김세진은 사이트를 찬찬히 살폈다. 다행히 ‘후원’ 부문이 있었다. 이거라면 제대로 도와줄 수 있지. 김세진은 [후원] 칸을 터치했다. 위잉- 이유진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대문짝만 하게 퍼져 올랐다. 영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진(眞) 무도유파의 단장 이유진이라고 합니다.”
씩씩하고도 그리운 얼굴이 김세진을 맞이했다.
*
“후···.”
같은 시각. 이유진은 복잡한 머리를 움켜쥐며 기다란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의 앞에는 난잡한 숫자들이 뒤얽힌 장부가 놓여있었다. 이익은 파란 펜으로, 손해는 빨간펜으로 썼다. 흔치 않은 수작업이지만 컴퓨터에 문외한인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걸 어떻게 메꾸냐······.”
그러나 장부에는 오직 시뻘건색 뿐. 이익은 없고 유지비, 관리비, 인건비 등등 비용만 가득하다.
물론 억지로 이익을 내려면 낼 수 있다. 수강료를 비싸게 받고, 자신에게 귀속된 진세한의 저작권을 단속하여 유료로 전환하면 어마어마한 수익이 쌓일 터. 그렇게 하면 대중들은 진세한을 팔아먹는다고 비난하겠지만, 여러 기사 지망생들은 꾸준히 구매할 것이다. 진세한이 독자적으로 쌓아올린 무예는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허나, 이유진은 그러기 싫었다. 그럴 수 없었다. 진세한이 왜 하필 자신에게 모든 유지를 맡겼는지, 그녀는 그 누구보다 자기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진세한은 언제나 자신에게 “너는 나와 닮았다.”고 말했었다. 그러면서 “너는 무기가 아니라 주먹을 쓰는 게 낫다.”라고 덧붙였다.
당시에는 누구 인생 망칠 일 있냐며 짐짓 삐댔지만, 막상 그가 죽은 뒤 무기를 놓고 주먹을 쥐니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자신의 특성 “레벨 마스터리”가 그의 무예에 놀랍도록 절묘하게 감응한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에게 귀속된 진세한의 모든 영상을 자양분 삼아 가파르게 성장했다. 두 달 만에 모든 체술을 익혔다. 에덴의 대우도 달라졌다.
그러나 진세한이라는 영웅의 달콤한 혜은을 경험한 에덴은 그 맛에 중독된 듯, 이유진에게 그의 분신이 되어 언론에 노출할 것을 요청했다. 그녀는 그에 실망해 에덴을 퇴사하고, 독자적인 진(眞)무도유파 도장을 차렸다.
이미 여러 기사 아카데미에서 관련수업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진세한의 뜻을 이은 공식적인 도장은 이쪽이었기에 처음부터 화제가 일었다. 에덴 기사로서 이유진의 명성도 영향이 컸다. 차린 즉시 200여명의 수강생이 몰려들었다.
허나 그게 다였다.
수강료는 터무니없이 쌌고, 스승이 될 무예가들의 월급은 한없이 비쌌다. 도장을 차린 지 3개월만에 모아두었던 돈과 대출받은 돈을 모두 탕진했다. 그러나 곧 ‘후원’이 들어올 것이란 기대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진세한의 진짜 이름을 걸고 하는 도장이니까.
허나 기업과 기사단은 냉정했다. 그들은 후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후원줄을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진세한의 저작권을 팔 것을 강요했다. 만약 그걸 판다면 기사단이나 기업은 자신들이 독점하여 이익을 창출할 테고, 관련된 욕은 오롯이 이유진이 감당하게 될 것이었으니. 장사치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 리스크 하이 리턴, 그 점 때문에 기업과 기사단은 한없이 추악해졌다.
“유진아, 괜찮아?”
그때 옆에서 스승 겸 직원인 고윤종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이유진은 짐짓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언제 이런 드러운 놈들한테 고개 숙이는 거 봤냐.”
“이번에 네가 영상 올리고서 개인후원이 늘었어. 그러니 조금만 참자, 우리.”
“···그래. 그래야지.”
삐위용삐위용- 삐위용삐위용-
갑자기 전화기가 요란한 벨소리를 뱉어냈다.
“야 고윤종. 내가 그거 벨소리 바꾸라고 몇 번을 말했냐. 단장 말을 개떡같이 알아들어 진짜.”
“···미안. 이거 어떻게 하는 지 몰라서.”
고윤종이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진(眞) 무도유파’ 중앙 도장 부단장 고윤종입니다.”
전화를 받는 고윤종을 뒤로하고, 이유진은 다시 장부에 시선을 옮겼다.
“···예? 아··· 네? 아··· 네? 아니···. 네? 아 그게··· 네?”
근데 고윤종이 거슬렸다. 무슨 치킨이라도 시키는지 자꾸 네네거리는 것이···
“너 뭐해?”
“아니··· 잠깐만요. 잠시만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고윤종은 어벙한 표정으로 이유진을 바라보았다.
“후원하고 싶대.”
“그래? 좋은 일이네. 바로 정부에 적어야겠다. 얼만데?”
이유진은 별 생각 없이 물었다. 허나 고윤종의 대답은 이유진의 상식을 크게 벗어났다.
“······100억.”
“···.”
자기가 뭘 들었나- 고개를 갸우뚱한 이유진은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또 장난전화구나.
“누군데?”
“잠깐.”
고윤종이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저··· 혹시 어디신가요? 기업 이름을··· 아. 예에? 정말요? 아, 잠시만요.”
다시 수화기를 슬그머니 내려놓은 고윤종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김세진 이라는데? 더 몬스터 길드장.”
“하아··· 윤종아. 요 몇 달 새 김세진이 몇 번 전화 왔었지?”
“아··· 한 스무 번 정도 왔었지 아마.”
“그래. 그냥 잘 타일러서 끊어.”
“으응··· 저, 아 죄송한데.. 뜻은 잘 알지만.. 저희가 장난을 받아드릴 여유가 없어요..”
하지만 조곤조곤 타이르는 고윤종이 답답해, 이유진은 수화기를 낚아챘다.
“저기요. 누구신지 모르겠는데, 이런 장난전화 하지 마요. 이럴 시간에 공부나 하세요 공부. 가뜩이나 세상이 흉흉한데 이러고 싶습니까? 진짜 이런 말 하긴 싫지만 한심하다고요 한심해!”
-···하하하하······
잔뜩 곤두선 이유진은 두다다다 말을 쏘아냈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훨씬 여유로운 미소가 흘러나왔다.
-한심해서 죄송합니다. 근데, 이건 받기 싫어도 받아 줘요. 100억만 이라도. 더 드리고 싶어도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현금이 그 정도 밖에 없거든요? 일단 계좌 불러봐요.
“하아··· 사이트에 계좌 적어 놨거든요? 제발 장난전화를 할 때도 좀 뭘 알아보고하세요. 뭐든 최선을 다해서. 예? 알겠습니까?”
-아··· 그래요? 잠시만요.
이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전화를 끊으려 했다.
띠링-
근데 핸드폰에 짧은 알림이 울리며 액정이 밝아졌다. 이유진은 무심코 액정을 확인했다가, 돌처럼 굳어버렸다.
문자의 내용은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이유진 님의 계좌(260483-38*****)에 10,000,000,000원이 이체되었습니다.]
“어······.”
부우우웅- 동시에 여러 자동차의 배기음이 창 틈 너머로 흘러 들어왔다.
-아마 곧 있으면 더 몬스터 직원이 갈 겁니다. 얘기 나눠서, 후원 파트너쉽 체결하세요.
이유진은 말이 끝나자마자 헐레벌떡 뛰어가 창문에 달라붙어 바깥을 바라보았다.웬 최고급 세단 네다섯대의 문이 촤르륵 열리더니, 정장을 입고 수트케이스를 든 남자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
이유진은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트케이스에 ‘TM’, 즉 더 몬스터의 문양이 찬란하게 새겨져 있었으니···
그녀는 문득 자기가 방금 이 남자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 이 남자가 김세진이 맞다면······
심장이 터질 듯 박동하고 의식이 순간적으로 몽롱해진다.
똑똑-
뒤이어 도장의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울리고, 철푸덕!
이유진은 눈을 까뒤집고서 바닥에 쓰러졌다.
* * *
-병원에 가고 있습니다.
“···갑자기 병원은 왜요?”
-단장님께서 쇼크로 쓰러지셔 가지고··· 정신적인 문제인지 포션을 먹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풋.”
김세진이 피식 웃었다. 예상 외로 유약하네.
“일단 오늘은 냅두시고, 내일 찾아가세요. 씩씩한 여자니까 곧잘 나을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뚝- 전화를 끊은 김세진은 찢겨진 이불보 위에 나체로 누운 유세정에게 새로운 이불을 덮어주고서 지하실로 향했다.
때아닌 조난 탓에 시간이 지체되어 버렸으나, 더 이상 상황이 나빠지기 전에 본격적으로 ‘몰이’를 시작해야 될 때다. 이제 지체할 시간이 없다.
“우선 레비아탄이 입을 갑빠부터···.”
그는 최고의 금속 미스릴 두 괴를 꺼냈다. 어느새 소환된 콘락이 헥헥거리며 다가왔다.
“네가 입을 갑빠도 만들어 줄게. 기다려.”
이제 곧, 바토리를 잡으러 간다.
< 38. 영웅의 흔적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