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오크와 여기사 (3) >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머물기를 어림잡아 18시간 정도 되었을까.
김유린은 오두막에서, 오크는 돌 침대 위에서 잠을 청했다. 허나 둘 다 머릿속에 각기 다른 복잡함이 부유하여 쉽사리 잠에 들 수 없었다.
먼저 김유린의 경우에는 막상 자려고 누우니 오크에 대한 궁금증과 의심, 그리고 폭발에 작게나마 휘말렸을 부하기사들에 대한 걱정이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발이 가벼운 애들이니까 괜찮겠지? 괜찮아야 할텐데···.’
그에 반해 오크는 다소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계속 같이 있는 건 위험할지도 모른다. 최대한 빨리 탈출을 하거나, 떨어져야 한다···.’
우선 오크로서의 일차적인 욕구. 물론 전체적인 욕구를 억제하는 포션은 영체화를 이용하여 항상 문신처럼 담아두고 있다. 오크의 힘이 나날이 강성해짐에 따라, 갑자기 몬스터가 시비를 걸거나 하면 이성을 완전히 잃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까.
당연 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시비를 걸어올 몬스터가 존재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가 바로 옆에 있다.
오크가 고개를 돌려 슬그머니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일단 최대한 튼튼하고, 내부에서 문을 닫으면 자동으로 잠기게 만들었다. 허나 재료가 겨우 암반이라 자신이 훼까닥 돌아버리면 통째로 부숴버릴 수 있는 것도 사실.
‘사흘 분··· 괜찮겠지. 이정도면.’
남은 포션 량을 확인해본 오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로 저마다의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며 뒤척이던 두 사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찾아온 다음 날, 어쩌면 아침이 되었는지도 모를 어둠 속.
김유린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펑! 펑! 하는 파열음과, 속에서 부르짖는 꼬르륵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말랑말랑한 돌침대-뭔가 모순적이지만 사실이다-를 짚고 일어나 창밖을 확인한다.
콰아앙! 콰아앙!
오크가 메이스로 애꿎은 땅을 후드려 패고 있었다.
“···뭐야?”
김유린은 의아해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오크가 고개를 돌렸다.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녀가 눈을 비비적거리며 물었다.
“진폭을 만들고 있었다. 구조대가 오려면 위치를 알려야 하니까.”
“···아.”
나지막이 인정한 그녀는 어느새 바닥에 새로 생겨나 있는 돌의자에 앉았다.
김유린은 잠도 깰 겸 오크의 공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튼튼한 근육과 청량한 메이스의 소리. 흩날리는 땀방울과 땀에 젖은 머리카락······
흐뭇하게 관찰하고 있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두두두두! 무엇인가가 거세게 달려오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깜짝 놀란 김유린은 퍼뜩 오크의 옆으로 달라붙었다.
“몬스터인 것 같습니다! 전투준비!”
김유린은 그렇게 소리치며 허리춤에 메인 궁니르를 움켜쥐었다.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용감하게 검을 뽑아 거대한 늑대에게 그 예리한 날을 향했다.
“무기 드세요!”
“···아니.”
잔뜩 긴장한 김유린은 전투자세를 취했다. 허나 오크는 살풋 웃음을 터트리고는 늑대에게 천천히 다가갈 뿐이었다.
“뭣! 조심하십시오! 느껴지는 기백이 심상치 않······.”
기겁한 그녀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오크는 정말 태연자약하게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늑대는 마치 자기가 강아지라고 착각하는 듯 교태어린 몸짓으로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고, 귀는 바짝 접혀졌으며, 꼬리는 살랑살랑 흔들린다.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배는 클 것 같은 험악한 몸체는 누가 봐도 몬스터임이 분명하지만···
“애완동물이다.”
순간 그녀는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예?”
“이름은 콘락이지. 내가 타고 온 걸 봤을텐데?”
“······아하.”
믿기 힘든 말이지만, 상황을 보면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김유린은 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 놓고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햝샱햝샱-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리는 늑대를 가만히 지켜본다.
참고로 그녀는 인형이나 작고 조그마한 것을 좋아한다. 귀엽기 때문이다.
물론 이 늑대가 작지는 않다. 그러나 늑대주제에 여우처럼 애교를 부리는 저 모습은······
“저, 저기 오크 씨.”
참다 못한 김유린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새 홍조가 발그레 떠올라 있었다.
“음?”
“저도, 저도 그 콘샐러드를 만져봐도 됩니까?”
“콘락.”
“아. 콘락. 죄송합니다.”
오크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콘락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김유린은 슬그머니 일어나 콘락에게 다가갔다. 처음에는 으르렁거리던 콘락이었으나, 오크가 눈치를 주자 온순히 바닥에 엎드렸다.
김유린은 그런 콘락의 등을 슬며시 쓸었다. 그리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두 단어로 표현하자면, 맨들맨들과 몽실몽실. 보통 늑대의 털은 뻣뻣하기 마련인데, 이 아이는 차원이 다르다.
마치 신생아의 살결을 쓰다듬는 것만 같은 보드라움. 만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평생 느껴본 적이 없었던 신세계······.
“···와.”
그녀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계속해서 콘락을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손으로만 만지작거리더니, 이제는 아예 달라붙어 볼을 비롯한 전신을 부비적거린다. 그만큼 차원이 다른 중독성이었다.
-낑낑.
별안간 그녀에게 유린당하는 처지에 놓인 콘락은 제 주인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으나, 그는 다만 참으라고 눈짓을 할 뿐이었다.
* * * *
애완견 한 마리와 두 지성체만이 남은, 아무것도 없는 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수다 뿐이었다.
김유린은 콘락의 품에 안긴 채 오크의 눈치를 살피며 여러 질문들을 던졌다.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때는 왜 자신을 쫓아냈는지, 한국어는 어떻게 배웠는지, 이 거대한 늑대는 어디서 발견한 건지, 그리고 여태 어디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건지······
오크는 모두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가 싫어서 쫓아냈고, 그 이외의 것은 네 알바가 아니라고.
“···.”
그리고 그 냉정하고 짧은 말때문에 지금 그녀는 삐쳐있다. 댓 발 튀어나온 입으로모닥불을 째려보며, 애꿎은 콘락의 등만 벅벅 긁어댄다. 저러다 비듬 떨어지겠다.
“근데.”
콘락이 슬슬 지쳐갈 때쯤 김유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김세진이라고 아십니까?”
그녀는 퉁명스런 눈으로 오크를 흘겨보며 물었다. 약간 움찔한 오크는 잠시 고민했다. 이 여자는 확실히 무언가를 의심하고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그래.”
“..어떻게요?”
“그건 네 알 바가 아니다.”
순간 그녀가 콘락의 털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깜짝 놀란 콘락이 고개를 들어올리자, 그제서야 미안미안 중얼거리며 보드랍게 매만진다.
“제가 알 바가 아니긴 합니다만··· 그분은 아직도 부족지에 들락날락 하는 것 같아서 한번 물어봤습니다.”
“···.”
오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유린은 이 침묵 또한 “네 알바 아니다” 따위로 해석한 듯 불만스레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 그녀는, 여태 머릿속으로만 의심했던 내용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당신이 그분에게 무기를 만들어서 줬습니까?”
“···?”
갑작스런 개소리에 오크가 김유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기민한 몸놀림으로 오크의 옆에 놓인 메이스를 빼앗았다.
“무슨···”
“잘 보십시오. 여기, 이 문양과.”
김유린은 메이스의 철퇴에 새겨진 희미한 문양을 가리켰다. 그리곤 허리춤에 메워진 궁니르를..
“제 검··· 뭐야. 어디갔어”
뽑으려 했지만 없었다. 그녀는 허둥지둥하며 제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왜, 왜, 왜 없을··· 설마 잃어버리지는, 아니 방금까지는 있었는데···.”
횡설수설하며 얼굴이 점차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유린에게, 오크는 말 없이 콘락을 가리켰다. 그녀가 슬며시 눈을 옮겨 콘락을 보았다. 그의 아가리에는 칼자루 하나가 삐죽 솟아나와 있었다. 그녀는 그 즉시 안도의 한숨을 푸우욱 내쉬었다.
“어후···”
주인의 무기가 빼앗기자, 충신 콘락은 상대의 무기를 역으로 빼앗았던 것이었다······.
“아, 깜짝 놀랐잖니 아가야. 어서 주렴.”
그제서야 낯빛을 되찾은 김유린은 칼자루를 잡고 빼내려 했으나, 콘락은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락콘의 화신(化神)이나 다름없는 콘락의 치악력은 최대 10톤의 수준. 제 아무리 혹독한 훈련을 거쳐온 기사라 하더라도, 마나가 없이는 이겨낼 수 없을 정도다.
“아가야 장난치지 말고······ 으! 으! 아니, 야! 너 왜이러니!”
한참동안을 칼자루를 잡고 낑낑거리던 유린은 별안간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제 손에 쥐어진 메이스를 오크의 허벅지로 휙 던졌다.
쑤욱-
그러자 콘락은 귀신처럼 칼을 놓아주었다.
“···자, 여기 보십시오.”
그렇게 보검을 돌려받은 김유린은 콘락의 이마에 딱밤을 넣고서 칼자루의 아랫면에 새겨진 문양을 보여주었다.
순간 오크도 깜짝 놀랐다. 보통 이런 무의식적인 습관은 자기자신도 모르는 법이기에.
“당신이 봐도 똑같지요?”
“···.”
오크는 김유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그녀는 오크가 김세진이다, 라는 등식까지는 떠올리지 못한 듯했다. 당연하지. 누가 오크랑 인간이랑 동일인이라고 생각을 하겠는가.
“근데?”
그래서 오크는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괜히 쓸데없는 말 없이, 평생 그런 쪽으로 고민하고 의심하게 놔두려고.
“···예?”
“근데. 어쩌라고.”
“아니···. 저 이거 당신이 만든···.”
“김세진이 만들었을 수도 있지. 내가 그 남자의 무기를 빌려서 쓰는 것일 수도 있고.”
오크가 짐짓 얼굴을 굳히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뭐가 되었든, 김세진은 너보다 곱절은 믿음직스러운 인간이다. 그러니 이것도 네 알바가 아니야. 더이상 네 주제를 넘지 말라는 뜻이다.”
···자기 자신을 믿어야지 누굴 믿겠는가.
그에 김유린은 뭔가 할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한숨과 함께 자리에돌아가 앉았다. 그리고는 침울한 얼굴로 콘락을 껴안은 채 가녀린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저 오크 말고 우리 집에 가지 않으련···?”
“···흠.”
오크는 조소를 흘리며 메이스를 허리춤에 맸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한동안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렇게 10분, 20분, 한시간···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 애꿎은 콘락만 강제 털갈이를 당하고 있을 때였다.
휘이이잉-
어두운 평지 안에 바람이 불었다. 구조대인가? 두 사람은 동시에 바람이 불어온 방면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곳에는 구조대가 아니라, 작은 새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삐약! 삐약!
병아리처럼 삐약대는, 오목눈이-혹은 뱁새- 처럼 생긴 새하얀 새. 똘망똘망하니 동그란 눈알과 좁다란 부리. 새 치고는 몸집이 크지만, 적당히 큰 강아지만해서 무척이나 귀여웠다.
“···뭐야. 저건.”
오크가 저 귀여운 외모 속에 담긴 묘한 기운을 헤아리고 있는데, 벌떡! 갑자기 김유린이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일어섰다.
-삐약! 삐약!
그녀는 울부짖는(?) 뱁새에게 멍하니 걸어갔다.
그러나 그 순간 오크의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놈의 주둥이에서 고이는 위협적인 마나의 기류, 저건 일종의 브레스···
-쀄에에에에엑!
삐약삐약거리던 놈이 별안간 새하얀 불줄기를 내뿜었다. 화염 중에서도 가장 맹렬한 겁화(劫火), 백열(白熱)이었다.
파아아아앙-! 백열의 브레스는 그 파괴력을 온 사방에 과시하며 반원형으로 넓게퍼져갔다. 어두웠던 동굴에 비로소 새하얀 빛이 들어선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