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오크와 여기사 (1) >
노스페라투는 균열이 '통로'의 수준으로 넓혀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최대한 빨리 바토리를 솎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 또한 훗날 있을 재앙을 인정하고군사력확충에 집중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나 통로가 완전히 열리면 어느 정도의 위험이 도래할지, 김세진은 솔직히 잘 와닿지가 않았다. 무엇이든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그것을 제대로 알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그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기로 했다.
우우우웅-
온통 마나의 푸른 빛으로 물들여지고, 유일한 소리라고는 마나의 공명음 뿐인 밀폐공간 내부. 김세진은 자신의 특질 ‘마나지체’을 조금 참신한 방법으로 활용하려는시도를 하는 중이었다.
“···끄으으으.”
그 새로운 활용법은 몸 안의 마나를 뽑아내어, ‘광석’혹은 ‘결정’의 형체로 밀집시키는 것. 어찌 보면 인공적으로 ‘마나석’을 만드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마나석은 몬스터의 마나석과 전혀 다르다.
우선 세진의 입맛대로 성질변형이 가능하기에, 마나석의 경도와 강도를 금속처럼 조절하여 ‘마나 그 자체’인 병장기를 만들 수 있다. 또한 그 뿐만 아니라, 사람이 마나석을 그 자체로 복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보통 몬스터의 마나석은 무기로 만들 만큼 단단하지 않고, 독기가 함유돼 있어 직접 복용이 불가능한 것에 비하면, 그야 말로 혁명적인 마나석이라 하겠다.
“어으, 이러다 죽겠네.”
허나 그런 만큼, 마나를 뽑아내어 유의미하게 응집시키는 행위는 무척 힘들었다. 고작 세 개 만들었는데 현기증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흠.”
찬물을 들이 삼킨 그는 탁자 위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세 개의 마나석을 바라보았다. 티 한점 없이 푸른 돌, 이 마나석들의 활용방안은 무궁무진하다.
몇 개를 더 만들어서 새로운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할 수도 있고, 이 그대로 기사나 마법사들에게 ‘마나영단’이랍시고 팔아도 천문학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겠지. 마나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족속들이니까
“..하.”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요즘 인터넷 보면 맨날 자기를 두고 사기특성 사기특성 말이 많던데, 확실히 그 말이 골백번은 옳다. 말이 안되잖아. 옛날에는 하나 주우면 인생역전이라 생각했던 마나석을, 지금은 자의적으로 만들어 내다니.
-구우우웅
자화자찬을 하는 와중에 핸드폰에 알림이 울렸다. 슬쩍 보니 유백송이었다.
“여보세요?”
-···어. 나야.
“네. 갑자기 웬 전화예요? 요즘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김세진의 최측근’이라는 타이틀을 당당히 유지하는 몇 안되는 인물인 그녀는, 요즘 정계에서 단연 최고로 촉망받는 인물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극진한 대접을 받느라 바쁘시다. 아마 그녀가 거절한 청탁만 해도 웬만한 빌딩 스무 채는 살 수 있지 않을까.
-너가 먼저 부탁한 거 있었잖아.
“···음?”
김세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핸드폰 너머에선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마나석 구해달라고 했었잖아. 돌연변이 흑색늑대. 인도에서 받아왔어.
“아하.”
그제서야 떠올랐다. 자신은 여태 묵혀 두었던 스킬이 하나 있다. 몬스터의 사체 혹은 마나석을 이용하여, 그 몬스터를 환수로 부릴 수 있는 스킬. 허나 부릴 수 있는한계가 고작 3개체 뿐이라, 어떤 몬스터를 선택할까 신중하게 고르다가 까맣게 잊고있었다.
“시기도 딱 좋네요. 지금 만납시다.”
-···지금?
“예. 뭐 일 있어요?”
-아니. 약속 하나 있지만 캔슬 할 수는 있어 근데······ 나 방금 씼었는데.
“···”
분명 그녀는 별 생각 없이 할 말일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애인도 있다.
그러나, 남자로서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리는 말이었다······
“..갑니다. 지금.”
통화를 끊은 즉시 출발한 김세진은 유백송의 자택으로 한 달음에 달려왔다.
굳이 촉촉히 젖은 머리결, 뭐 그 따위 걸 보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다.
흑색늑대의 돌연변이, ‘락콘’. 인도의 히말라야 등지에서 ‘락콘’이라는 악명으로 널리 퍼졌던 놈은, 늑대답지 않은 무력과 명민함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중상급 기사와 상급 사냥꾼의 파티를 대적하고서도 무사히 살아남아 유유히 도망갔다고.
그리고 김세진은 그 놈을 자신의 애완견(?)으로 간택했다. 헌데 약 6개월 전 일이라서 까맣게 잊고 있었지.
“와우. 저희 용병단도 못 해낸 일인데··· 어떻게 해내셨습니까?”
유백송은 마나석만 구해온 것이 아니었다. 마나석 아래에 덩그러니 널브러져있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락콘의 시체까지.
“인도와 아탄이 외교를 했었잖아. 내가 스리슬쩍 끼워 넣었지. 락콘이를 잡아서 줄 수 없겠느냐고.”
“오, 그래요?”
“응. 그 이후로 국가적인 토벌작전이 시행됐을 걸? 아마 얘 잡으려고 기사가 1000명은 동원됐을거야.”
해맑게 웃으며, 마치 나 잘했지?라고 말하는 듯한 귀여운 얼굴. 김세진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고마워요. 역시 일처리는 유백송 씨 만한 사람이 없네.”
“···크, 크음. 내가 괜히 백호겠느냐.”
쑥쓰러웠는지, 유백송은 그의 손길을 슬며시 쳐내면서도 차마 잔뜩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는 못했다. 게다가 킁킁- 콧구멍은 연신 냄새를 탐하고, 귀는 한 줄기의 칭찬이라도 더 담으려는 듯 쫑긋쫑긋 거린다.
“그럼, 나중에 또 봅시다!”
그러나 그녀에겐 아쉽게도, 김세진은 그 이상의 칭찬을 하지 않았다.
늑대를 타겠다- 는 일념에 사로잡힌 그는 락콘의 마나석과 가죽을 짊어매고 집안을 바삐 빠져나가버렸으니쾅!
그리고 홀로 남겨진 유백송은 거세게 닫힌 문 너머를 지긋이 노려보며 입술을 비죽 내뺐다.
"더 칭찬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
김세진은 유백송의 집을 나오자마자 몬스터 필드에 도착했다. 영웅오크의 폼이기때문일까, 이제 TV화면으로만 봤던 진짜배기 야수 ‘락콘’을 타고 달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유달리 들끓는다.
“흠흠.”
심호흡을 한 그는 조심스레 마나석을 쥐고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검은색 마나석과 락콘의 가죽이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한 줄기의 기운으로 변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전사의 심장에 흑색늑대(돌연변이)가 스며듭니다.]
[소환수 목록에 흑색늑대(돌연변이)가 추가됩니다.]
[주인의 현재 능력치에 따라, 흑색늑대의 위상이 상향조정됩니다.]
[현재 흑색늑대의 강함 등급은 (상급)수준입니다.]
마나석이 원활히 받아들여졌음을 상태창이 알려주었다.
오크는 눈을 감고 스킬을 사용했다. 간단했다. 그저 마음속으로 ‘소환’을 읊조리는 것 뿐. 뒤이어 그의 심장에서 탁한 마나가 우우웅- 흘러나오며 푸른색과 흑색이 뒤섞인 형체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마치 입체적인 그림이 그려지듯, 두 가지 색의 마나기류가 한데 모여서 이뤄진 형체는 마나와 주술로 인해 되살아난 거대한 늑대, ‘락콘’이었다.
고작 늑대주제에 영웅오크와도 맞먹는 웅대한 몸체를 지녔고, 전방을 째려보는 형형한 눈빛은 전사의 동행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크는 흡족해하며 그 등을 쓰다듬었다.
그릉- 그릉-
락콘은 주인을 알아보고 만족스레 갸르릉거린다. 오크는 피식 웃으며 놈의 등 위에 준비해온 안장을 올렸다.
“이랴!”
안장에 올라탄 오크가 늑대의 등을 두드렸다. 방향을 가리키지는 않았다. 허나 늑대는 그의 뜻을 찰떡같이 알아듣고서, 지축을 크게 박차 그가 생각하는 방면으로 쇄도했다.
쏴아아아-
모든 풍경을 한없이 흘려 보내는, 가공할 만한 쾌속이었다. 뒤로 일렁인 소닉붐에나무가 꺾여나가고 흙먼지가 휘몰아친다. 상급지대의 몬스터 마저도 놀라 도망갈만큼 위압적이고 압도적인 신속(迅速)이었다.
그런데, 그 예상보다 몇 곱절은 빠른 속력에 김세진이 감탄하고 있을 때.
“모두 물러서!”
어디선가 결연하고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사냥중인가? 힐끗 바라보니, 키 큰 나무들 속에서 어떤 거대한 백조가 모가지를 크게 들어올리더니···
빼애애애액-!!!!
난데없이 불유쾌한 비명을 내질렀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것보다 이천배는 거대하고, 사천배는 기분 나쁜 소리였다.
귀에서 피가 날 것만 같은 소리에 순간 화딱지가 팍 치밀었다. 그 어떤 도발보다 더욱 화가나는 소리여서 락콘도, 오크도 참지 못했다.
그가 고삐를 거세게 움켜쥐자, 락콘이 저 멀리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
인도 정부가 증여한 특이한 몬스터의 마나석과 사체를 유백송에게 인계한 뒤.
김유린은 "상급지대에 유의주시 해야하는 몬스터가 출몰했다" 는 정부의 전언을 받았다. 이름은 자이언트 스완. 문자 그대로 ‘거대한 백조’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하는 성장형 몬스터이기에 전언을 받은 즉시 팀을 꾸려 출발했다.
처음에는 괜찮을 줄 알았다. 자이언트 스완은 상급몬스터이지만, 이쪽은 상급기사 열 둘로 이뤄진 팀이었으니까.
그러나, 놈의 성장조건이 ‘피학’일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런 미친.. 어떻게 하죠 대장님?”
몇 번 검에 베이더니, 지금은 사방으로 갈퀴를 휘날리며 진화를 준비하고 있다. 느껴지는 포악한 기운은 상급을 아득히 선회하는 수준.
“···모두 물러서!”
김유린은 결국 모든 기사들을 물리고서 손에 쥐어진 궁니르를 ‘창’의 형태로 변환했다. 그리곤 남은 마나와 담을 수 있는 목적을 서로 비교해본다. 기절은 불가. 그렇다면 적어도 팔이나 다리 한 쪽은 받아가겠다······
빼에에에엑-!
그녀가 창대를 으스러져라 움켜쥐었을 때.
별안간 스완이 기괴한 소리를 내질렀다. 예상치 못한 소음이 마나강기를 뚫고 귓전을 강타하여 마나를 흐트러트린다. 갑작스런 기습비명에, 기사들의 귓가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그러나 스완은 소음공해 멈추지 않았다.
“저 씨··· 끄으.”
끼에에에에엑?!!
김유린은 비틀거리면서도 굳건히 일어섰다. 목표는 저 크게 벌려진 입. 시야가 어지러이 흔들리지만, 그래도······
크어어어어어!!!
그때 또다른 거대한 포효가 스완의 비명을 뒤덮었다.
그 직후, 퍼어어엉!
어디선가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뒤이어 스완의 쫙 벌려진 아가리를 향해 메이스 하나가 치닫는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김유린에게는 그 모든 광경이 느리게 보여졌다.
스물스물 날아가는 메이스와 전사의 포효는 분명히······.
크와롸!
숲의 왼편, 높은 수풀을 헤치고 한 명의 오크가 튀어나왔다. 장엄한 육체를 자랑하며, 위압적인 늑대에 올라탄 그는, ‘영웅오크’였다.
김세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김유린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그러나 그보다는 분노가 컸다. 저 미친 백조년이 내지르는 비명소리는 그 어떤 도발보다도 더 짜증났으니.
-뼤에에에엑!
방금 메이스를 처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조는 다시 한번 소리를 내질렀다.
“크롸롸롸!!”
“크어어어어!!”
김세진과 락콘은 똑같은 포효로 응수했다.
-삐에에에엑!!
그러나 스완은 결코 지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오크는 온몸이 붉어진 채, 놈을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