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실타래 (2) >
입지조건만 굉장히 특이할 뿐, 뱀파이어가 안내한 곳은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한 마을 속의 아늑한 가정집이었다. 거실에는 편안한 소파와 아기자기한 탁자가 놓여있고, 부엌에는 고소한 냄새와 함께 냄비가 보글보글 끓는다.
“앉으시지요.”
뱀파이어가 그렇게 말하며 로브를 벗었다. 김세진은 살짝 놀랐다. 탁하고 음울했던 목소리는 분명 노인의 그것이었는데, 드러난 맨 얼굴은 고혹적인 미녀였으니.
그 그림같은 얼굴에 회색빛깔 머리카락과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피부가 더해지니 인외(人外) 특유의 신비까지 느껴진다.
“마법로브입니다. 체형은 물론 목소리와 하관의 주름까지도 조정이 가능하지요.”
의문은 빠르게 해소되었다.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 뱀파이어는 손님 접대를 위해 부엌으로 총총 걸어갔다.
“차, 드릴까요?”
김세진이 레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쫑긋거리는 귀와 벌렁거리는 코가 알려주었다. 저 향긋한 차를 어서 내게 달라고.
“···주세요.”
이런 곳에서 마음 편히 차를 마셔도 되나 싶긴 하지만, 적어도 저 뱀파이어게는 어떠한 적의도 느껴지지 않으니 괜찮겠지.
“네. 기다리세요.”
3분 뒤, 뱀파이어는 세 잔의 차가 담긴 쟁반을 들고 탁자 앞으로 돌아왔다.
“저희 사회에서는 없어서 못 마시는 차랍니다.”
흠칫- 차를 홀짝이려던 김세진이 순간 행동을 멈췄다. 뱀파이어 사회에서 없어서못 마시는 것이라 함은···
“혈액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큼.”
괜히 무안해진 김세진이 차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예상외로 무척 맛있었다. 레젠에게는 더더욱 그랬는지, 그녀 등허리의 꼬리가 산들바람처럼 살랑살랑 흔들린다. 괜히 붙잡고 싶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마음 편한 티타임을 즐길 때가 아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서 얼굴을 무겁게 굳혔다.
“근데. 일단 우리, 해야할 말이 있지 않나?”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세진은 탁자 위에 올려진 달력을 힐끗 바라보았다. 오늘, 5월 4일에 앙증맞은 동그라미가 하나 쳐져 있었다.
‘내가 올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가?’
“일단 자기소개부터 할게요. 제 이름은 ‘릴리아 폰 노스페라투.’ 이 거주지의 책임자입니다.”
릴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김세진과 눈을 맞췄다. 여느 뱀파이어처럼 혈색(血色)의 눈동자였으나, 그들과는 달리 생기가 넘쳐 새빨간 루비를 연상시켰다.
“저희, 노스페라투 일족은. 김세진 씨와 협력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태연자약했다. 김세진 또한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말이었기에 커다란 동요는 없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희는 다른 뱀파이어들과는 달리, 지구가 만족스럽거든요.”
“···내 어머니도 그런 식으로 회유했나?”
릴리아가 슬리슬쩍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아뇨, 그분은 직접 미래를 봤습니다.”
“무슨 소리지?”
“그건 나중에 당신 또한 직접 알게 되실 겁니다.”
“···.”
아리송한, 아니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뭔 소린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협력하고 싶다는 건 확실하지?”
“예.”
“그럼 읊어봐. 지금 뱀파이어들이 무슨 계획인지. 또 어떤 수단을 쓰려 하는지.”
그는 다소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허나 릴리아는 아무런 불쾌한 내색 없이 말을 이었다.
“우선, 균열이 무엇인지는 아실거라 믿습니다.”
“세계와 세계 사이의 틈이지.”
“네. 맞아요. 그런데 그 균열이 어느 정도 이상 벌어진다면, 새로운 ‘통로’가 생겨납니다. 이 통로는 두 세계가 서로 엉겨 붙어서 탄생한 불완정한 세계입니다. 그 곳에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불규칙하게 뒤엉켜 있지요. 뱀파이어들은 이 통로를 열어 자신들의 세계로, 더 구체적으로는 저들이 살아왔던 ‘과거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뭘 하려고?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어차피 멸망할 세계이지 않나······ 아?”
순간 김세진의 머리속에 전구가 번쩍 뜨였다. 릴리아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들은 과거로 회귀하여, 훗날 있을 세계의 멸망을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하지만 그러기에는 가능성이 너무 낮아요.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버려, 이제는 성공할 수 없는 계획입니다. 그저 점점 사그라드는 자신들의 입지를 인정하지 못한 뱀파이어들의 도착적인 집착일 뿐이지요.”
릴리아가 잠시 말을 멈추고 차를 홀짝였다.
“그러나 저희는 다른 뱀파이어들과는 다릅니다. 저희는 인정하고, 현실과의 타협을 할 자세가 되어있습니다. 이미···.”
그녀는 김세진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아른거리는 과거를 그 속에서 찾아내려는 듯.
“많은 것을 보았고, 들었고··· '구세주'를 만났거든요.”
릴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세진은 늑대의 동공을 발현했다. 별안간 사선으로 좁혀지는 눈동자에 그녀가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본능적으로 느낀 종족적 공포 때문이었다.
“거짓말은 아니네.”
이들에게는 어떠한 적의도 없다. 다만 현재를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만이 엿보일 뿐.
“좋아. 그럼, 놈들의 계획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
릴리아는 품 속에서 허름한 공책을 한 권 꺼냈다. 다 헤진 공책의 구석탱이에는 ‘······일기’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현재의 전력으로서 통로가 열리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통로가 열릴 때를 대비하여, 전체적인 사회의 무력을 상황평준화 시켜야겠지요.”
그녀는 그 책 속에서 말라 비틀어진 비늘을 하나 꺼냈다. 김세진은 눈을 커다랗게떴다.
“그건···”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 해야할 일은, 훗날 가장 큰 걸림돌이 될 바토리를 솎아내는 것입니다.”
그녀가 비늘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확실하다. 건조하고 먹먹하지만 심해의 빛깔만은 여전히 남아있는 저것은, 레비아탄의 비늘.
“가져가세요. 바토리와 조우하셨을 때 삼키신다면, 충분히 대적할 수 있을 정도는 되실 겁니다.”
“······.”
김세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비늘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은 즉, 자신의 특성 또한 이미 알고 있다는 뜻.
“그러나 이것 만으로는 부족하실 수도 있으니···.”
그녀는 수정구를 하나 꺼냈다. 그 안과 밖에 기이한 마나가 먼지처럼 떠도는 구슬이었다.
“그년을 속박시킬 수 있게, 저희가 도와드리지요.”
그녀의 입가가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다.
* * * *
몸길이 2.3m, 몸무게는 미스릴보다 단단한 비늘 탓에 측정불가. 평상시에는 귀를 뒤로 접힌 강아지를 닮았으나, 인상을 찌푸리면 꽤나 무서워진다. 현재는 청룡 혹은 동해의 수호신이라 불리고 있으며, ‘하해(夏海)와 청룡(靑龍)’이라는 요즘 들어 생겨난 신앙이 추앙하는 대상.
···여기까지가 레비아탄-김세진-의 스펙이다. 그만큼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레비아탄은 전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요즈음 청룡이 잠시 자취를 감춘 것을 두고, 정부에서 ‘청룡관찰팀’을 직접 꾸렸을 정도로.
철퍽- 철퍽- 철퍽-
그리고 현재 그는 오랜만에 동해유영을 하고있다. 그런 그의 뒤꽁무니에는 박쥐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참으로 티나게 쫓아오고 있었는데, 아마 바토리의 도구 혹은 애완동물, 뭐 그런 건 듯했다
‘바토리는 청룡을 애완동물 삼고 싶어 합니다. 허나 이미 실패한 전력이 있는 만큼, 부하를 믿지 않고 직접 나설 가능성이 크죠. 그 때를 노리면 될 것 같습니다.’
릴리아의 말을 떠올린 세진은 일부러 꼬리를 흔들며 첨벙첨벙 물장구를 쳤다. 엉덩이도 씰룩씰룩 흔들어 주고. 그래야 뒤에서 보고있는 바토리가 군침을 삼키던 뭘 하던 할 것 같아서.
‘안 오네.’
그러나 신중을 기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부하들이 필사적으로 뜯어 말리는 것인지, 바토리는 오지 않았다. 약 두 시간 동안의 수영 동안 만난 대상은 카메라와 크루즈, 웬 낚시를 하는 여러 요트들 뿐.
“흠.”
오늘은 아닌가 보다, 김세진은 저 멀리서 자신의 사진을 찍고 있는 금발의 여자 엘프에게 윙크를 날려주고는 수면 아래로 잠수했다.
*
같은 시각.
“아, 봐봐! 없어졌잖아!”
연신 발을 동동 구르던 바토리가 결국 소리를 빽 내질렀다. 그녀 앞에 놓인 수정구에는 잠잠한 바다의 모습이 비쳐지고 있었다.
“방금 갔어야 했다고!”
“···요즘은 동해에 너무 이목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러면 니들이 그때 일을 잘했어야지.”
거의 한달만에 나타난 용용이-바토리는 직접 이름까지도 붙였다-는 더 귀엽고 교태로워져서, 몬스터 애호가인 그녀로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저걸 가져와서 저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쓰다듬어 주고 싶단 말이다······
“죄송합니다.”
“내가 뭐 내 사심 채우려고 이러는 줄 아니? 이게 다, 저 용용이를 길들이면 우리 계획이 더 편안해지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맨날 나오자마자 척살당하는 보스 몬스터보다는 쟤가 몇 백배는······”
그 이후로도 바토리는 약 한 시간 동안 부하들을 갈궜다. 고개를 아무리 조아려도그녀의 히스테리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지금 이 유일한 취미가 아니라면, 파괴와 가학을 제외하고선 그녀의 지루함은 풀리지 않을 테니.
* * * *
[방배동 마법사가 C등급 마법 ‘쉐도우 컨벌젼(Shadow Conversion’과 ‘리플랙션 글래스(Refelection glass)’의 개정판을 발행한다고 블로그를 통해 알려왔습니다. 방배동 마법사는 우선 한국 소재의 마탑에 우선적으로 판매하겠다고 공언하였으나, 이에 여러 해외 마탑들이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심지어 원 마법을 개발한 포든 가문의 적자, 하이 엘프 ‘크리스텔 포든’ 경은 조상이 개발한 마법을 함부로 수정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며 노발대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들려오는 뉴스의 한 토막이었다. 김세진은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들어갔다.
“어, 오빠, 왔어?”
요즈음 꽤나 이슈를 몰고 다니는 마법사에 관한 소식이기 때문일까, 유세정은 뉴스에 집중하고 있었다.
”기사님이 마법사 일에 뭐 그렇게 관심이 많지?”
그는 짐짓 태연하게 말하며 유세정을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기사이기 전에, 새벽의 외동이거든요. 이런 소식들은 놓치면 안 돼.”
“···어차피 새벽 정보원들은 이미 다 알고있는 사실 아니었어?”
“그건 새벽이고, 뉴스는 대중들의 생각까지 알 수 있거든.”
그때 뉴스 화면에 중후한 중년 엘프가 나타났다. 전문가 인터뷰인 듯했다.
[콜린 렉스 ‘서울마탑 A등급 마법사, 마법학교 교수 역임’]
-천재입니다. 원래 있던 마법의 가지를 쳐내어 효율을 기하급수적으로 향상시키는 것, 언뜻 듣기에는 쉬워 보일지라도, 새로운 마법을 발명하는 것 만큼이나 힘듭니다. 아마 마나를 움직여본 경험이 있는 마법사와 기사라면 제 말을 이해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 ‘방배동 마법사’의 정체가 누군지는 불분명하지만,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 만한 재능임은 분명합니다.
-그럼 이 마법사가 앞으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흠··· 아시다시피 마법사는 실전과 이론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론’ 쪽에서 만큼은··· A급 이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A급 이상은 대마법사밖에 없지 않나요?
-허허··· 그런가요?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갑자기 유세정이 물어왔다.
“뭐, 뭐가?”
“그냥. 저기 방배동 마법사. 저 사람이 수정한 마법이 벌써 10개래. 그 성능이 최대 2배 가까이로 불어나서 거의 새로운 마법이 된 거나 다름이 없다고 하니까, 거의마탑 1분기 수준의 업적이야.”
“그래? 근데 뭐··· 조금 난리법석 아닌가?”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난리법석이라니······ 으휴. 우리 오빠도 공부 좀 해야 될 텐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것이 뭔가 기분이 나쁘다. 공부보다는 일단 너 먼저 혼내줘야 될 것 같은데.
“···한국대 다닌다고 사람 무시하고 그러면 못쓴다.”
“그런거 아니거든요. 상식적··· 꺄악!”
세진은 TV를 끄고서 그녀를 소파 위에 눕혔다. 그리곤 얼굴을 붉히며 미안, 미안- 거리는 그녀의 입을 입으로 틀어막는다.
“나 오늘 할 일 많··· 아, 안 돼.. 아, 앙, 흐앙!”
그녀는 발버둥치며 도망가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김세진은 그녀의 성감대를 집요하게 공략했다.
그렇게 어느새 불은 꺼지고, 바닥 위에는 옷가지가 널브러졌다.
뒤이어 삐걱 삐걱- 소파의 격렬한 움직임과 쾌락 섞인 희미한 교성이 방 안을 가득 매웠다.
< 36. 실타래 (2)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