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희미한 실타래 (1) >
4월의 오전. 하젤린은 아주 오랜만에 더 몬스터의 사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책이라고 합리화를 했지만, 사실 차마 먼저 연락을 걸 용기가 없어, 마지막으로 우연의 힘이라도 빌려보자는 것이었다.
“···으음?”
헌데 막상 도착하니 사옥은 물론 부지 자체가 통째로 바뀌어 있었다.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길드 부지는 안 그래도 넓은데,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대여섯채가 늘어서 있으니 도대체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게다가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직원들도 엄청 많고.
바삐 움직이는 직원들 사이에서 쭈뼛쭈뼛거리던 그녀는 이내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건물 쪽으로 슬금슬금 발걸음을 움직였다.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애써 참아내고 게이트 앞에 선다.
여기는 아마 사원증을 대는 곳 같은데··· 고민하던 하젤린은 주섬주섬 길드원증을 꺼내 센서에 갖다 댔다. 근데 순간 [길드원 ‘셰나린’입니다]이라는 여성분의 목소리가 큼지막하니 울려퍼졌다.
'길드원'. 이 간단한 세 글자 때문이었다.
동시에 떠들썩했던 내부에 적막이 들어서더니, 주변 직원들의 모든 시선이 집중된다.
“···.”
하젤린은 센서기에 카드를 댄 자세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아무리 선망과 존경, 부러움과 동경이 담긴 시선이라 하더라도 관심의 집중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녀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 어쩌면 광장 공포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셰나린 님?”
머리속이 새하얘진 하젤린에게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네, 네. 나 셰나린, 저, 저 좀 살려주세여.”
혓바닥도 잠시 굳어버린 듯하다. 그 모습에 직원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아··· 그, 이곳은 TM사의 본사입니다. 원하신다면 들어가실 수야 있지만··· 혹시 길드의 사옥을 찾으시나요?”
“예, 예. 네. 맞아요. 거기.”
하젤린은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쓰고는 여직원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의지할 사람이 그녀밖에는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직원은 약간 당황한 듯 했으나, 이내 어딘가에 연락을 넣고는 하젤린을 데리고 사옥 밖으로 나갔다.
“이곳입니다.”
5분 정도 걸으니 길드의 사옥이 나왔다. 다행히도 꽤나 한적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하젤린은 자국이 날 정도로 꽉 붙들어 맸던 직원을 놓아주고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마워요. 예전에 온 적은 있는데··· 너무 심하게 바뀌어서.”
“괜찮습니다. 안내를 원하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하젤린은 방금 받은 직원의 명함을 품에 갈무리하며 길드사옥 안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로비에는 카운터 직원 한 명 뿐이었다.
하젤린은 일단 지잉- 카운터 직원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일단 귀가 뾰족한 것으로 보아 엘프, 동족이네. 근데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알아서 기어야지? 따위의 의미를 담아서 혼자만의 눈싸움을 하는 와중에, -오늘 훈련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도 이 정도면 쉬운거야.
옆의 통로에서 소란스런 목소리들과 함께 몸이 촉촉히 젖은 기사들이 도란도란 나타났다. 총 다섯명의 여자였는데, 유세정과 이혜린을 제하고는 모두 신입길드원이었다.
“어? 언니, 무슨 일이에요?”
하젤린은 유세정의 얼굴을 본 즉시 몸을 돌려 도망가려했으나, 유세정이 먼저 그녀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아···.”
“이분은 저희 창립멤버, 마법사 셰나린 님이에요.”
하젤린이 당황하는 사이에 자기소개까지 대신 해준 유세정,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하젤린의 손을 잡았다.
“밥먹으러 가요. 저희 구내식당이 엄청 맛있거든요.”
*
얼떨결에 식당까지 끌려온 하젤린은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얘내들은 뭐 이렇게 서로 친하지? 내일 귀에서 피나겠네.
“아, 맞다. 마법사님. 혹시 방배동 마법사가 누군지 아세요? 마법계에서 요즘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던데. 그 분 스카우트하려고 해외 마탑에서도 방배동을 배회하고 있대요.”
“아··· 그게 누군지는 저도 몰라요. 유명한 마법사가 장난을 치는 것 같기는 한데··· 마법계는 이미 오래전에 등진 터라.”
방배동 마법사는 요즘 대한민국에서 아주 핫한 마법사다. 그 이유야 단지, 한국인마법사가 전세계의 매스컴을 탔다는 이유였다. [완벽하게 수정된 마기서, 연금계에이어서 마법계에도 한류열풍이 부나?] 뭐 이런 식이다.
“그렇구나... 근데 말 놓으세요! 편하게 하셔도 돼요! 나이도 많으신데.”
".."
하젤린은 정말 진심으로 닥쳐-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 저, 근데 언니. 진짜로··· 아니에요? 진세한?”
허나 마법사가 아닌 유세정은 다른 것에 더욱 관심이 있었다.
진세한. 한 달이 넘게 지나긴 했지만, 그는 아직도 대중들의 관심거리다. 진세한의 이름을 딴 진(眞) 무도학파는 현재 수강생이 만명이 넘어가고, UN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진세한 상(부제: hero of the world)’도 제정했으니, 적어도 일년 이상은 지속될 쓰나미라 하겠다.
“아냐, 진짜 아니라니까. 그냥··· 친한 사이야.”
“아··· 정말요?”
“응. 근데···.”
왠지 모르게 실망하는 유세정을 보며, 하젤린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근데 내가 많이 좋아하긴 했어.”
“···.”
별안간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이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하젤린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아니 농담농담. 그건 그렇고, 세정아, 반지··· 샀나봐?”
화제전환거리를 찾던 하젤린은 자기가 물어보고서도 순간 아차했다. 이건 자신을위해서라도 물어봐서는 안되는 거였는데······.
“아, 네. 오빠가 줬어요.”
“와, 역시. 엄청 비싸 보이는데. 얼마래?”
하젤린이 씁쓸함을 삼키는 사이 이혜린이 호들갑을 떨며 물어왔다.
“그게··· 직접 만들어준 거예요. 세계에 하나밖에 없죠.”
“진짜? 어머어머, 대박. 엄청 부럽다. 그거 아티펙트 효과도 있지? 무슨 효과야?”
“···네. 피부랑 주름개선.”
“헐.”
여자에게는 그 무엇보다 치명적인 아티펙트 효과였다······.
하젤린은 오고가는 대화를 들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도 저런거 갖고싶은데, 따위의 소유욕은 아니었다.
'나이는 내가 제일 많은데···.'
···조금은 있었지만,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속에서 무언가가 차올랐다. 울화일까, 분노일까, 부러움일까, 질투일까, 어쩌면 모두 다일지도 모른다.
“그래? 음··· 그렇구나. 그데 그거 아니?”
그녀가 수저를 탁- 내려놓았다.
“세진 씨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나일 걸? 그분이 아무것도 없을 때, 내가 50억인가 빌려줬었어. 그때 나한테 엄청 의지하셨었는데······.”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하젤린은 꼭 말하고 싶었다.
다른 기사들은 아, 그렇구나-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유세정은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한 마디를 툭 내던졌다.
“···언제요?”
“그때가 아마··· 세진 씨 사냥꾼 되기도 전에?”
“···.”
나보다 전이네. 입술을 깨문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났다.
“저는 어렸을 때, 엄청 어렸을 때 오빠 닮은 사람 봤어요. 한 7살인가 8살 때. 햇수로 치면 14···”
“그건 닮은 사람이잖니. 왜 그래 유치하게.”
“······.”
두 사람은 타오르는 눈길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뭐, 만난 시기가 중요하지는 않죠.”
“······.”
“지금 당장 옆에 누가 있는지가 중요하지.
이번에는 하젤린의 눈가가 경련했다. 주변의 신입기사들은 갑자기 돌변한 두 사람의 분위기를 힐끗힐끗 살피더니,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혜린이 막았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같이 봐야된다는 이유였다.
**
하젤린과 유세정이 다소 예민한 싸움을 벌이던 때.
김세진은 두 명의 용병과 함께 녹음이 울창한 산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고요한 산세를 스치는 바람에 나뭇잎이 스산하게 울고, 이따금씩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의 때를 타지 않은 이 순수한 자연 속에 뱀파이어가 있다. 김세진은 약간 긴장한 채 용병에게 눈길을 돌렸다. 김세진이 극비를 원했기에 동행한 용병은 단 두 명, 남자 하나 여자 하나 뿐이었으나, 이들은 김선호가 고르고 고른 용병단의 최정예. 길잡이 역할에는 차고 넘친다.
“···길 안내를 부탁합니다.”
김세진의 명령에, 자신을 레젠이라 소개한 여용병이 발을 앞으로 크게 내딛었다.
“따라오시지요.”
김세진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녀를 따라갔고, 남자 용병은 그 둘의 뒤를 경호했다.
그렇게 적막한 숲을 약 10분 정도 걸은 끝에, 김세진이 멈춰선 곳은.
푸스스-
보기만해도 위협적인 단애절벽이었다.
“이거 지금 뭐하는···”
왠지 모르게 네비게이션이 절벽으로 길을 안내했다는 괴담이 떠오른다. 김세진의의심스런 눈길로 노려보자, 두 용병은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아래로 떨어지시면 됩니다. 일반인이라면 힘들겠지만, 김세진 씨는 가능하잖습니까.”
레젠이 그렇게 변명(?)하며 절벽에 섰다.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이번에는 남자용병의 말이었다. 왠지 자기만 편한 거 하는 것 같은데. 김세진은 다소 불편한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았다. 남자용병은 짐짓 딴청을 피우며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진짜 그냥 떨어지면 됩니까?”
의심스런 말을 건네며 절벽 아래를 굽어본다. 문자 그대로 까마득하다. 저 끝에 대지가 있을지, 바다가 있을지, 아니면 불구덩이가 있을지 아무도 모를 정도로.
“갈 수 있겠습니까? 도와드릴까요?”
레젠이 걱정스레 보며 물었다.
“아뇨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김세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허나 순간 현기증이 일만큼 아찔한 높이였다. 게다가 바람까지도 웅웅- 거리며 올라오는 것이···
“도와드릴까요?”
때마침 레젠이 재차 물어왔다.
“···어,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데요.”
김세진은 일단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다.
“꽉 잡으세요.”
레젠이 변함없는 무표정으로 김세진의 허리를 감쌌다. 그제서야 그녀의 후드 속에 숨겨져 있던 동물의 귀가 보였다. 아, 수인이었구나?
그러나 종족에 관한 상념은 금세 끊겼다.
김세진을 붙잡은 그녀는 그가 준비를 하기도 전에, 험난한 절벽 아래로 폴짝- 아주 앙증맞은 점프를 해버렸으니.
으아아아아·········.
뭔가 애처로운 비명소리가 웅웅 메아리를 쳤다. 남자 용병은 슬그머니 그 절벽으로 다가가 아래를 한번 굽어보더니,
“휴우···”
진심이 담긴 안도의 한숨을 내뿜으며 가슴을 쓸었다.
*
“···후.”
아직도 정신이 없는 머리를 움켜쥐고서, 김세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애써 세웠다. 늦지 않게 마나를 사용한 덕에, 다행히 별다른 외상은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되죠?”
“저곳입니다.”
레젠이 가리킨 곳에는, 누가 봐도 수상한 기암괴석이 절벽의 한 구석탱이에 박혀 있었다. 허나 마냥 허술하다 할 건 아니다. 일단 입지조건자체가 최악의 험지니까.
김세진은 침을 꿀꺽 삼키고서 괴석 앞에 섰다. 단지 그 뿐. 별 다른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구우우웅- 괴석이 절벽 안으로 밀려들어가며 통로가 생겨났다.
“···”
그가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어느새 후드를 벗어던진 레젠은 귀를 쫑긋하며 그 내부를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갑시다.”
“···가도 되나요?”
“대화할때만 빠져있어 주세요.”
일단 순순히 문을 열어준 것 자체가 대화의 의지가 있다고는 보여지니까. 레젠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총총걸음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어두컴컴하고 기다랬다. 또한 걸을 수록 피냄새가 진해졌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쪽의 냄새는 여타 뱀파이어와는 확연히 달랐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누가 옵니다.”
그때 앞서가던 레젠이 귀를 뻣뻣하게 세우며 손을 쭉 뻗었다.
“누구냐!”
살쾡이같은 외침, 그러자 어둠속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형상이 하나 솟아올랐다.
뱀파이어였다. 김세진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허나 뱀파이어는 태연하게 이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목소리를 꺼넸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 김세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 소리야?”
“아, 아 이런. 죄송합니다. 닮은 분과 착각을 했군요.”
“···.”
닮은 분, 아마 자신의 아버지를 일컫는 것이겠지.
“어쨌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오시겠습니까?”
가만히 그를 노려보던 김세진은,
“···그래.”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36. 희미한 실타래 (1)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