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몬스터-123화 (123/174)

< 35. 방배동 마법사 (1) >

요즈음은 정체된 기분이다. 성장이 더디다. 아니, 성장해야 하는 이유를 잃어버렸다. 살면서 설정한 최초의 목적은 그저 인간다운 삶이었다. 하루 세 끼 따뜻한 밥을 먹고, 때로는 웃고 즐기며, 적어도 방바닥에서 잘 수 있는 그런 소박한 생활.

과거에는 그런 것들을 위해 정말 치열하게 살아갔다. 하루에 6시간을 자면서 여가생활 따위는 없이, 물론 사랑은 꿈도 꾸지 못했다. 교육도 못 받고 바보같이 사느라 무시도 많이 당했고, 사기도 많이 당했다.

허나 지금, 그런 모든 과거의 편린들은 사라졌다. 나를 버린 것 같았던 세상은 그 어느 무엇보다 나를 따스하게 품어주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보고, 나를 좋아하고 찬양까지 하는 사람들이 무지 많다.

즐거운 인생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회의감이 일었다. 보상심리로서 원했던, 막연하고 모호한 명예와 명성, 그리고 권력과 재력들은 모두 얻었다.

대한민국에서 김세진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고, 길드 ‘더 몬스터’의 상장사인 ‘TM’은 상장 즉시 국내 기업순위 33위에 이름을 올렸다.

출범한 지 몇 년 지나지도 않은 몬스터 엔터테이먼트에 소속된 연예인, 기사, 가수는 무려 200여명을 넘어간다. 모두 각 분야의 탑 뿐이다. 게다가 좋은 영업력과 대우가 소문이 나 연예계 선망의 대상까지 되었다. 책임자 말로는 이제 스카우트를 할 필요도 없이 알아서 연락을 해 온다고.

그리고 여러 버전으로 나뉜 아탄이는 이제 세기의 아티팩트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오직 ‘아탄이’에게만 적용되는 ‘아탄이 특별법’을 만들어, 더 몬스터의 자의적인 아탄이 해외판매를 막고 정부가 전담하기로 했다.(물론 국내는 여전히 더 몬스터가 전담한다.)더 몬스터로서는 조금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정부의 기업규제 혹은 견제는 아무리더 몬스터라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부분이고, 정부에서 여러 세제감면 혜택까지 주기로 하여서 그냥 따랐다.

그렇게 해서 아탄이는 현재 국가 간 외교 협상카드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들은바로는 관계가 좋은, 혹은 개선하고 싶은 국가에 아탄이를 임대형식으로 빌려주고,뭔가 관계가 삐끗하면 다시 빼앗아 온다고.

뭔가 유치하지만 그게 두려워 대한민국에 빌빌 기는 나라들이 꽤나 많다고 한다. 아탄이 중에는 ‘몬스터의 습격 가능성을 낮추는’ 효과가 있는 놈도 몇몇 있으니까.

그만큼 김세진이라는 이름은 이 나라를 넘어 전 세계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겉껍데기가 커져갈수록 ‘나’라는 자아는 흐릿해져갔다. 무풍(無風)의 망망대해 위를 떠다니는 조각배처럼.

유일한 목적인 어머니, 아버지의 살해에 관한 진실을 알아내고, 또 복수하는 것··· 그러나 아버지가 마인이라는 사실과 어머니가 뱀파이어와 내통했다는 진실은, 어쩌면 뱀파이어에 대한 분노 마저도 앗아간 것처럼, 생각할수록 회의가 일었다.

“···.”

차오르는 상념을 잠시 헤쳐내고서 슬그머니 옆을 바라보았다.

세정이가 품에 안긴 채 새근새근 귀여운 코골이를 하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갑자기 하젤린이 떠올라, 죄책감이 일었다.

그때 그녀는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러나 나는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는 그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고, 회색빛 상념이 계속되었다.

* * * *

봄이 끝물인 어느 날, 김세진은 다시금 훈련에 열중하기로 결정했다.

아닌 게 아니라, 스트레스를 풀 수단 중 남은 것이 훈련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동해를 유영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바토리로 추정되는 여자가 동해의 해변가에서 물장구를 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고, 직접 김선호가 사진까지 찍어서 보내왔으니.

그렇다고 서해나 남해로 가기에는 귀찮고 시비를 걸어올 바다괴수들과는 이제 싸우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는 우선 ‘마나지체’의 활용에 힘을 쓰기 시작했다. 목적을 잃었다고 해서 마냥가만히 앉아 답답한 생각을 하는 것 보다, 억지로 억지로 훈련을 하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 게다가 마나지체가 현재 있는 스킬 중 가장 고급이기도 하고.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셨더군요?”

오늘 마나지체의 훈련을 도와줄 남자는 ‘요한슨’이라는 예명의 2세대 엘프 마법사로, 국적으로 따지자면 토종 한국인이지만 외모는 무슨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처럼 생겼다.

“예. 아무래도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하, 참내.”

그러나 그는 다소 탐탁치 않은 기색이었다.

마탑에서야 그 ‘김세진’이 부른다니 명망높은 마법사를 강사로서 보내주었으나, 정작 그 강사인 요한슨은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프와 마법사가 합쳐진 존재는 세상 그 어느 존재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다. 그런데 그 마법사가 마법 문외한에게 마법을 가르친다? 마탑의 강제가 아니었다면 그는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법은 배워두면 좋은, 그런 운전 따위가 아닙니다. 그저 취미삼아 배우는 것이라면 당장 포기하십시오. 게다가 당신은 배울 수도 없을 겁니다. 마법은 평생을 마법에게 할애한 자에게만 자신을 허락해주는 고고한 존재란 말입니다.”

요한슨은 김세진에게도 참 당돌했다. 말투는 공격적이고, 불쾌한 눈빛은 마치 그를 깔아뭉개는 듯하다. 그러나 김세진은 오히려 그런 그가 마음에 들었다.

“···아니, 뭐··· 안 그럴수도 있지 않습니까. 제가 불세출의 재능일 수도 있는 거고. 특성이 있잖아요 저는.”

일부러 골려주고 싶어 김세진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그에 요한슨의 얼굴이 쓰레기통의 신문지처럼 구겨지고, 새하얀 목덜미부터 천천히 붉은색으로 달아오른다.

“하, 하, 하. 정말 기가 차네요. 마법과 관련된 특성은 몹시 드뭅니다. 피나는 공부와 단련, 훈련을 반복해야만······”

“알았으니까, 일단 저 한테 마법 하나만 쏴 보세요.”

“···뭔.”

일단 맞아야, 즉 피부에 접촉해야만 레비아탄의 고유 스킬이 발동되어 마법을 ‘체화’할 수 있다. 물론 그러려면 레비아탄의 비늘을 활성화해야 하지만, 피격면만 살짝 켰다 끄면 그다지 티가 나지 않을 테니.

“뭐해요. 쏘세요. 강사능력 좀 한번 시험해보게.”

“···.”

김세진의 도발에 요한슨은 진심으로 화가 난 얼굴이 되었다. 새하얀 도화지같던 피부는 이미 시뻘겋게 돌변. 게다가 분노를 억누르려는 듯 심호흡으로 어깨가 들썩인다.

“오세요. 빨리. 혹시 제 성에 안 찰까 겁나나? 걱정 안해도 되는데요 그건.”

그 말에 순간 ‘엘프와 마법사의 자존심’이 깨어지고, 날카로운 파편이 이성의 끈까지 잘라버렸다.

“으랴!”

그는 괴이한 기합을 내지르며 손에 열화를 발생시켰다. 사방에 열풍을 일으키는 마나의 집합체, 겉보기에는 그저 간단한 화염구이지만 그 속내는 다르다. 저것은 화염이 농축되어 그 열기가 극한으로까지 치솟은 순백의 화염, 즉 백열(白熱).

“···오.”

김세진은 그 신비함에 감탄사를 내질렀다. 허나 그 태연한 반응이 오히려 마음에 안들었던 요한슨은, 말 그대로 죽일 기세로 백열을 내던졌다. 휘이이잉- 사방에 아지랑이를 일으키며 쇄도한 백열구는 김세진의 가슴팍에 그대로 꽂히더니, 콰아앙!!공기가 어그러질만큼 대폭발을 일으켰다.

“화염구의 극한, ’백광열’입니다.”

그제서야 화가 조금 풀린 요한슨이 만족스레 설명을 했다. 허나 매캐한 안개 저편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저, 저기요?”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덜컥 겁이 난 요한슨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마법으로 연기를 걷어냈다. 깨끗해진 시야 사이, 바닥에 널브러진 김세진의 모습이 보인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그는 헐레벌떡 달려가 김세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슴팍에 촛농이 녹아내린 듯한 커다란 상처가···

“기, 김세진 씨! 일어나 보세요!!”

계속해서 김세진을 뒤흔들어보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순간 요한슨의 의식에주마등이 스쳤다. 여태 마법사로서, 엘프로서 걸어왔던 과거의 노력들이, 한 순간의 분노로 인하여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는가···.

“크흐흐흐···”

허나 김세진이 먼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요한슨은 이내 얼굴이 시뻘개지더니,

“이만 가겠습니다!”

빼액- 소리를 내지르고서 쿵쾅쿵쾅 발걸음을 옮겼다.

*

김세진의 장난에 길길이 날뛰던 요한슨은, 꼬박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평정을 되찾고서 다시금 교습을 시작할 수 있었다.

“···후. 이건 마기서라고 합니다. ‘마법 기록서’의 줄임말이죠.”

요한슨이 책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헌데 책이 좀 특이하게 생겼다. 책 자체는 무슨 백과사전 마냥 크고 표지도 두꺼운데, 내용물이 고작 5~6페이지가 끝인 듯상당히 얇다.

“마법 등급에 따라 하나하나가 몇 억, 몇 십억, 몇 백억을 호가하는 고급 물건이지요. 지금 여기에는 제가 선보였던 ‘백광열’이라는 마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일반인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거지만···”

어차피 당신은 배우지도 못할 테니- 중얼거리며 그가 책을 열어 보였다.

“음?”

수식을 비롯한 글자가 빼곡히 채워져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종이에는 무슨 인체의 일부분과 그 혈관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혈관 속에는 이상한 화살표가 방향을 가리키고 있고.

“...이게 뭡니까?”

“’마나 순환도’입니다. 마법은 마나의 결합으로 이루어 지는데, 여기에 적힌 방향과 순서대로 해야만 마나가 결합되어 마법으로 발현됩니다.”

“아하.”

김세진이 웃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뜻밖의 이득이 아닌가. 이거면 굳이 마법을 맞아보지 않아도, 직접 이대로 마나를 움직여서 마법을 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혈관 속의 마나를 움직이는게 쉽지 않지요. 그러기 위해 ‘영창’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자기 마나에 암시를 거는거죠. 여기로 움직여, 저기로 움직여, 이렇게. 또한 마법은 술사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마법에 자기가 죽을 수도 있으니.”

“그렇구나.”

김세진은 일단 순환도는 무시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백열구를 시전하기 위해 마나를 움직여보았다.

확실히, 처음에는 여기 있는 순환도 대로 마나가 흘러가기는 한다. 그러나 시간이지날수록 조금 달라지더니,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틀린’ 수준이 된다.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체화’를 한 레비아탄이 틀릴 리는 없으니, 이 순환도가 틀렸다. 실제로도 이 순환도 대로 하면 마나가 너무 복잡하게 엉키면서 흘러가지않는가.

“근데 이건··· 조금 이상한데요? 마나가 너무 엉키지 않나? 되게 부자연스러운데.”

“···하. 뭐요?”

요한슨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공격적이었던 눈빛도 이제는 ‘벌레를 보는 듯한’으로 한층 더 매서워졌다.

“이건 세계 최고의 대마법사라 불리는 ‘토라큐 폰 레하임스’ 하이엘프 경께서 만든 최고의 마기서라고요. 근데 이게 틀렸다? 하, 하하하. 아이고 이거 참 헛웃음이 다 나오는군요.”

“아.. 이게 최고의 마법사가 만든 겁니까?”

확실히 사람과 레비아탄은 다르다. 레비아탄은 마나 그 자체를 체화하고 이해한 일명 ‘전지적 마나 존재’인 반면, 사람은 그저 마나를 체내에 쑤셔넣을 뿐이니, 레비아탄의 마법을 사람이 따라할 수는 없겠지.

“그럼 세계 여러 마기서 중에서 틀린 게 되게 많겠군요. 아니, 대부분은 틀렸겠네.”

그러나 지금 자신은 ‘인간’인 상태로 마법을 이해하고 체화했다. 그런 만큼 엘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방법을 따라할 수 있겠지. 더욱 자연스럽고 훨씬 몸에 맞을 방법을.

“이보세요!”

허나 유한슨은 그의 발언을 마법계에대한 무시로 생각한 듯,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신이 뭔데 여태 우리···..”

목이 터질듯이 핏대를 세우는 유한슨에게, 김세진은 말 보다 행동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는 우선 기존 마기서에 적힌 방식대로 백열구를 시전했다.

"어때요?"

별안간 그의 손에 새하얀 구체가 둥둥 떠다니자 요한슨의 입이 떡 벌어졌다. 두 주먹을 동시에 집어넣어도 될 만큼 크게.

“······어···.”

“그런데, 이건 너무 복잡하고 힘들어요.”

김세진은 유한슨의 손에 들려진 마기서를 뺏고서 그의 로브 윗주머니에 들어있는펜까지 낚아챘다.

그러더니, 무려 단가 30억 짜리의 책에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멍하니 있던 유한슨은 금세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는, 구멍이란 구멍은 모조리 확대시키며 고함을 내질렀다.

“뭐하십니까!!!!! 안돼!!!!”

유한슨이 짐승처럼 달려들었으나, 김세진의 빼어난 손재주는 고작 2분만에 모든 수정을 완료해버렸을 따름이다.

“아··· 아···. 내··· 3년치 연봉이···”

유한슨은 낙서 된 마기서를 내려다보며 하염없이 좌절했고, 김세진은 피식 웃었다.

“한번 따라해보세요. 이게 더 쉬울 겁니다.”

“······이런 미친놈이!”

결국 욕설까지 뇌까리며 스프링처럼 튀어오른 유한슨이 김세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물어내! 네가 물어내라고!”

이미 이성은 폭사한 지 오래, 유한슨의 절박한 외침에 김세진은 그저 웃으며 백광열을 시전했다.

방금전, 그저 둥실둥실- 아른거렸던 백열광과는 '격'이 다르다. 방금이 모닥불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로케트의 연료가 분사되듯 파아아앙-! 터져나오는 백색의 초고열. 그 눈이 멀 듯한 빛의 세기에 순간 유한슨은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어때요. 제가 낙서한 대로만 하면, 당신 백열광도 이렇게 될 겁니다.”

“···”

유한슨은 멍하니 김세진의 손에서 화르륵- 미친듯이 타오르는 화마를 관찰했다.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유한슨에게는 그런 생각조차도 불가능했다.

문자 그대로, 그는 그저 멍했다.

“가까이 와서 관찰하셔도 돼요. 아군과 적을 구별하게 만들었거든요.”

< 35. 방배동 마법사 (1) > 끝

ⓒ 지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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