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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하는 몬스터-122화 (122/174)

< 34. 감정의 정리 (2) >

김유린은 어두운 천에 쌓인 보물상자를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요리보고 저리봐도 이 속에서 풍기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은 진짜 중에 진짜, 확실한 보물이다.

드디어 내가 두 번째 보물의 소유주가 되는구나, 그렇게 행복해하던 김유린은 그러나 순간 자신의 허리춤에 메인 검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과 오랜 세월동안 함께 해온 명검 ’백야’.

최연소 중상급기사로 승격한 기념으로 칠흑기사단에서 하사해준 명품. 이걸로 수없는 난관을 헤쳐왔고, 많은 인명을 구했다. 그만큼 김유린이라는 기사의 피와 땀과노력, 그리고 기사로서의 지난 날이 담긴, 적어도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값진 보물.

‘···너도 박물관에서 편히 쉬는게 더 좋을거란다.”

그녀는 새하얀 보검을 쓰다듬으며 씁쓸함을 삼켰다. 백야와 함께 했던 나날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쳤다.

“오오. 오셨다.”

그렇게 김유린이 백야와의 결별로 인한 시원섭섭함을 느끼고 있을 때, 단상 위로 남자 한 명이 더 등장했다.

고급스럽지만 너무 화려하지는 않은, 정갈한 슈트 차림의 김세진이었다.

그의 등장에 몇몇 여기사들은 얼굴을 붉히고, 남기사들은 혹시라도 친해질 수 있을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며 환호를 내질렀다.

열화와 같은 반응이었지만, 요 근래의 고민 때문에 심신이 다소 피로한 상태였던 그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김유린과 김현석에게 다가갔다.

“반갑소.”

김현석이 먼저 손을 건넸다. 김세진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와 악수를 했다.

“한국 최고의 기사를 만나 영광입니다.”

“···오히려 내가 영광이지. 그대는 현재 최고의 20대가 아니던가.”

“아니요. 옆에 김유린 기사님께서 서계시는데, 그런 말은 부담스러울 뿐입니다.”

“으음? 아. 여기 김유린 기사는 이미 삼십줄에 진입했다네. 20대는 오래전에 벗어났지.”

그것이야말로 심장을 파헤치는 갑작스런 치명타, 유린이 어깨를 크게 떨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방금 김현석의 폭언(?)이 다른 기사들의 귀에 들어갔을까, 경악한 얼굴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녀와 눈을 마주친 몇몇 기사들이 눈치껏 고개를 숙여주었다.

“···그걸 왜 말하신거죠···?”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살벌해져서는 제 아버지이자 상관에게 적극적으로 대들었다. 죽일 기세로.

그만큼 여자에게 나이와 몸무게는 민감한 종류의 것이었다······.

“하하.”

“왜 말하셨냐고요··· 제가 김현석 단장님을 50대 영감님이라고 하면 기분 좋습느끄···?”

“아하하하하.”

어금니를 꽉 깨문 김유린의 분노어린 중얼거림을 연신 웃음으로 넘기며, 김현석은 김세진과 함께 보물상자의 옆에 섰다. 이른바 포토 타임이었다.

“찍겠습니다~!”

김현석과 나란히 선 김세진은 카메라를 향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찰칵- 플래쉬가 터져오른다.

“조금 많이 찍을 것 같은데, 괜찮나?”

“예? 에. 뭐, 상관 없습니다.”

찍어 봤자 얼마나 찍는다고.

허나 김세진은 자신의 낙관이 명백히 잘못되었음을,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최고의 명인 김세진이 만든 보물을 두개나 가지고 있다~"

는 사실을 널리 자랑하기 위해, 그들은 정말 수도 없이 많은 사진을 찍었다.

처음에는 오직 김현석과 함께. 그 다음에는 김현석과 김유린. 그 다음에는 김현석과 김유린을 포함한 간부들. 그 다음에는 김현석과 김유린을 제외한 간부들. 그 다음은 기사단의 여러 팀장들.

예전의 칠흑 같았으면 결코 벌이지 않았을 난리였는데, 이것은 비단 턱 끝까지 추격해온 새벽 때문만이 아니라, 요즈음 몬스터 사태의 일환으로 파견근무가 잦아진 탓에 기사단의 국적경계가 모호해졌기 때문이었다. 경쟁해야 하는 기사단이 대한민국을 넘어 전세계로 확대되어 버렸으니.

어쨌든 그렇게 그저 사진을 찍는 것만 해도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허나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말도 참 많았다. 김세진의 순금명함을 어떻게든 받기 위해 억지로 억지로 자기 명함을 건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근데 이거 아직 상자 개봉도 안했는데.’

설마 개봉하고 나서 또 저러는 건 아니겠지? 김세진은 일말의 불안을 느끼며, 마지막 사진까지 찰칵- 찍으며 약 서른 장의 명함을 품 속으로 쑤셔넣었다.

“수여식 시작합니다.”

그제서야 시작된 수여식. 김현석을 비롯한 모든 간부들이 단상 아래로 내려가고, 남은 것은 김세진과 김유린, 그 사이에 놓인 보물상자 뿐.

“감사합니다. 이런 경탄할 만한 보물을···.”

“아직 열지도 않았는데, 뭘 그렇게 금칠하시고 그래요.”

김유린의 말에 김세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언제는 무기보다 인형이 더 좋다더니, 역시 ‘보물’과 ‘무기’는 격 자체가 다르구나.

“그럼 이제 봅시다.”

휘이이익-

그가 상자를 가리는 베일을 걷어냈다. 순간 상자에서부터 찬란한 빛이 퍼져올랐다. 아마 이 상자의 가격도 어마어마 하지 않을까, 김유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상사병은 극복하셨죠?”

“···예?”

멍하니 상자를 바라보던 김유린이 화들짝 놀라 되묻는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오크. 영웅오크. 이제는 아니죠?”

“무무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이제는’ 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니었습니다!”

단상 위의 김유린이 갑작스레 빼액-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닙니다. 정말로.”

괜히 무안해진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다시 말했다.

물론 가끔씩 꿈에서 나오기는 한다. 오크 답지 않게 잘생긴 낯짝과 중후한 매력을지닌 목소리, 그리고 듬직한 뒤태와 완벽한 근육까지···

“그런 적 없습니다.”

게다가 이제 못 만난 지 3개월도 더 넘어가 가끔씩 보고싶다는 그리움이 일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괜찮다.

“그러면 진심으로 다행이네요.”

김세진은 그렇게 읊조리며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상자가 내뿜은 것보다 몇 백배는 더욱 찬연한,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뚜렷한 섬광의 색을 발하는 고고한 무기 하나가 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칼끝날에서 칼자루까지 길게 쭉 뻗은 검을 멍하니 훑어보던 김유린은, 그러나 뭔가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문양’.

김세진이 일에 초집중한 상황-일명 삘 받았을 때-에, 오직 ‘보물’ 혹은 '1~2등급 명품'에 준하는 무기를 만들 때에만 무의식적으로 새겨 넣는 조금은 특이한 문양.

“···.”

그녀는 그 문양을 보며 오크의 메이스를 떠올렸다. 패악적인 메이스의 동그란 타격부분에? 저것과 비슷한 문양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착각은 아니다. 자신은 그와 수백번의 대련을 해왔으니까.

“그렇게 좋나요?”

허나 넋이 나간 김유린의 모습을 착각한 듯, 김세진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이제 김세진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그 의심스러운 눈빛이 향함에도,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이번 무기 수여식을 두고 세간에서는 기사 김유린에게 방천화극이 주어졌으며, 남은 건 이제 적토마 뿐이라고들 많이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하.. 딱 상황에 맞는 말이지요. 근데 적토마, 그러니까 그리핀의 경우에는 칠흑기사단에서도 그리핀을 10년임대 형식으로 추진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이건 사실 전적으로 김세진의 결정에 달린 것이라 불확실하죠.]

[그런가요? 현재 그리핀을 임대하고 있는 기사단은 새벽밖에는 없지요?]

[네. 아무래도 김세진과의 관계가 가장 좋은 기사단이니··· 아무리 다른 기사단이김세진의 환심을 사려 노력한다 하더라도,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출발한 끈끈한 우애는 이겨낼 수가 없죠. 게다가 새벽을 대표하는 기사 유세정에게는 보물 급의 무기를 무상으로 수여하지 않았습니까. 돈 받고 판 칠흑과는 다르게요.]

[오호. 몰랐던 사실이군요. 그런데 그건 그렇고, 참 대단하네요. 고작 사람 한 명으로 인해 기사단의 명성과 기사의 지위가 뒤바뀔 정도라니. 예전에는 명문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했던 대백 기사단도 김세진과의 인맥을 십분 활용하여, 고려기사단의 자리를 턱끝까지 추격할 정도로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예. 괜히 대중들이 세느님 세느님 하는게 아닙니다. 물론 처음에는 좋은 특성을 타고난 것을 비꼬는 의미로 시작되었지만··· 이제 대한민국은 김세진과 더 몬스터가 없으면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어요. 아티팩트와 무기, 포션 시장의 지분을 50%가까이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하젤린은 어두컴컴한 침대 속에 파묻혀 그저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거의 일주일 째. 그녀가 하는 행동이라고는 잤다가, 일어났다가, 핸드폰 확인했다가, TV봤다가,배고파서 밥 한끼 먹었다가······ 거의 산 송장처럼 생활하고 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때 술김에 충동적으로 저질렀던 일이. 계속 떠오르고 후회가 되어서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언제나 이랬다. 순간의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저지른 뒤 미칠 듯이 후회한다.

게다가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그러는게 불가능하다. TV를 보라. 맨날 김세진이다. 정말 맨날. 게다가 김유린에게 무기를 줬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또 뭔가 섭섭하기까지 하네. 나도 마법지팡이나 좀 만들어 주지.

“······와, 나 진짜 구제불능 병신이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서 퍼뜩 TV를 껐다.

김세진을 향한 감정, 처음에는 호감이라 단정지었던 그것은 이제 호감이 아니게 되었다.

일주일에도 서너 번 씩, 진세한의 탈을 쓴 김세진과 어울렸던 것이 그 근본적인 원흉이었다. 바보처럼 매번 찾아갔다.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이성은 감정에 잠식되어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커질대로 커진 감정이 저질러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진짜 다행히 직접적인 고백은 하지 않았지만···

-근데 진세한 왜 죽이셨어요? 안 죽였으면, 나랑 계속 있을 수 있었는데.

-한 여자만 오래동안 만나면 조금 질리지 않나..? 남자들은 그렇다던데.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요. 진세한이 뿅- 하고 살아나면··· 그러면······

“꺄아아아악!!”

차마 마지막 말은 떠올릴 수 없어서 대신 비명을 내질렀다.

이성과 논리가 완전히 결여된 그때 그, ‘합법적인 바람’ 운운하던 개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

병신. 미친년. 또라이년. 술이 웬수인 년.

그렇게 이불이 터질 때까지 뻥뻥 자책하고 후회하던 하젤린은 이내 핸드폰을 스리슬쩍 올려들었다. 메신저를 들어가 프로필 사진 염탐을 시작한다.

허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 위로 내팽개치고 말았다.

구석에 처박힌 핸드폰에는 유세정의 프로필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김세진의 어깨에 기대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셀카.

“···부럽다.”

그녀는 그저 세정이가 부러웠다. 또 분하기도 했다.

분명 그를 일찍 만난 건 나다. 그러니 그때의 내가 조금 더 적극적이었다면 그의 옆자리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게 아쉽고, 분하고, 억울하고, 또 쓸쓸했다.

‘···보고싶다.’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가 다시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의 프로필 사진을 크게 확대했다.

이번에는 잡 티 하나 없는 김세진의 얼굴이 액정을 가득 메웠다.

* * * *

벚꽃이 만발하는 봄. 김세진은 다시금 김유손을 찾아왔다.

“노스페라투, 말입니까?”

“예. 한번 직접 만나봐야겠어요.”

“···혼자서요?”

김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선호는 뭔가 불안한 듯 하였으나, 그가 진지해도 너무 진지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번 정보원들을 시켜 찾아보겠습니다.”

“아뇨 직접 찾을 필요 없이, 아마 예전에 익명의 제보자에게 온 정보가 있을 겁니다. 김유손 용병단장님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예전에 분명 익명의 제보자가 ‘뱀파이어의 은신처다’라며 산 내부에 꾸려진 마을의 좌표와 사진을 보내온 적이 있었다. 헌데 바토리를 비롯한 여러 다른 뱀파이어들은 시내에 머물고 있으니, 아마 거기가 노스페라투의 생츄어리일 터.

“예. 알겠습니다.”

“좋아요.”

김세진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김선호는 그런 김선호는 그런 그에게 당부를 건넸다.

“아, 길드장님. 요즘 바토리가 해안가까지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소식이 종종 들려옵니다. 아무래도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아요. 직접 나서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니··· 청룡으로 헤엄은 조금은 자제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김세진은 탐탁잖은 기색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바로 스트레스도 풀 겸 헤엄을 치려고 했기 때문에.

“···예, 뭐. 그럴게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바토리가 그토록 강력한 여인이라는데, 알아서 기어야지.

< 34. 감정의 정리 (2) > 끝

ⓒ 지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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