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몬스터-121화 (121/174)

< 34. 감정의 정리 (1) >

처음 발원은 진세한의 마지막을 목격한 기사가 새벽페이지에 개재한 토막 글, 기사와 엘프 간의 난데없는 사랑 추측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몇몇 기자들의 소스-엘프가 진세한의 집에 들락날락 했었다 등등-가 더해지고, 그렇게 짧게짧게 올라오던 글을 어떤 가십 좋아하는 여기사가 정리를 한답시고 소설로 완성. 그렇게 두 사람은 아예 실제 결혼을 앞둔 실제 애인사이처럼 꾸며졌다.

그리고 지금 그 소설은 정원이 800명인 기사단에서 무려 640개의 추천을 받고 있으니, 이제 대중 언론으로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라 하겠다······.

“이 사실, 알고 계셨어요?”

TM사가 운영하는 커피숍. 유세정이 참석한다는 선상파티를 구경-사실은 검문-하기 위해 기다리던 중, 시간을 보내기 무료했던 김세진은 근처에 사는 하젤린을 불렀다.

“음··· 조금은요.”

하젤린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갑작스런 그의 부름이 마냥 좋을 뿐이었지만, 김세진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아··· 그게 사실, 보시면 알겠지만 부정을 못하겠더라고요. 세정이가 너무 적극적으로 들이대서··· [저는 그것도 모르고,, 언니 정말 죄송해요] 하면서 이모티콘으로 그렇게 울어 대는데 어떻게 아니라고 말해요.”

그녀는 핸드폰을 직접 꺼내서 문자메시지를 보여주었다.

“···흠.”

확실히, 이렇게 보니 세정이가 조금 감정에 휘어 잡힌 상황에서 보낸 것 같네. 그 소설같은 게시글을 본 직후에 바로 보낸 거라서 그런가? 그런데 이상하게 오타가 많다. 술이라도 마시고 보낸것 처럼.

“그래도 진세한이랑 하젤린 씨가 사귀었던 걸로 할 수는 없잖아요.”

김세진은 짐짓 장난스레 말했지만, 하젤린은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데요.”

“예? 아니, 장난치지 마시고 혹시라도 기자들 찾아오면 오해라고 말하세요.”

그녀는 정수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요? 어차피 진세한 죽었는데 상관없잖아요.”

“···뭐가 상관 없어요. 언젠가 세정이한테 내가 진세한이다- 라고 말해줘야 되는데. 참 잘도 말할 수 있겠네요.”

“그걸 왜 말하지?”

“그럼 왜 안 말해요. 제 애인인데.”

“······”

그 말에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 이후로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손톱으로 책상을 툭- 툭- 두드리기만 한다. 5분, 10분, 15분··· 이상하리만치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하젤린은 연신 뜨거운 한숨만 뱉어낼 뿐이었다.

“···하젤린 씨?”

“예, 예. 세정이는 참 좋겠네요. 당신이 애인이라서.

그제서야 한마디를 툭 내뱉은 그녀는 책상을 팍! 두드리며 거칠게 일어섰다. 김세진은 몸을 흠칫 떨었으나, 아직 확답을 듣지 못했기에 따라 일어나 그녀를 뒤쫓았다.

“어디가세요?”

“저녁이나 같이 하려고요.”

“···누구랑요?”

“당신이랑.”

그녀는 아주 당당하게, 마치 맡겨 놓은 식사권이라도 있는 양 그의 가슴팍에 삿대질했다.

“그게 무슨···”

“어차피 선상파티 시간 남는다면서요. 그럼 그때까지만 같이 있어요.”

“···아니”

“그러면 생각은 해 볼 게요. 말할지 안할지“

김세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손목을 슬쩍 바라보았다. 시계의 시침은 다행히 아직 5에 머물러있다. 그러나 하젤린은 그런 그의 손목을 확 낚아채더니- 로브 아래로 드리운 서리서린 눈빛을 보내왔다.

“갈 거예요 말 거예요?”

“아, 뭐. 시간은 남으니까···”

“따라와요 그럼.”

그리곤 쾅쾅쾅- 김세진의 손목을 꽉 감싸쥔 채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어느새 차 앞에 도착한 그녀는 차 문고리를 잡고 낑낑거렸지만, 꼼짝이 없자 차문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열어주세요.”

“···.”

뾱- 세진은 피식 웃으며 차키를 매만졌다. 그러자 차문이 옆이 아닌 하늘로 승천했다.

“···차 또 바꾸셨나 보네요. 돈이 참 많으신가봐요.”

하젤린은 괜히 투덜거리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뒤이어 김세진도 익숙하게 운전석에 올랐다.

“매번 가던 곳에서···.“

“아뇨. 거기 말고. 다른 곳 가죠. 제가 봐 둔 곳이 있어요.”

그녀는 별안간 네비게이션을 작동시켰다. 위치는 10분거리로 꽤 가까웠다.

“근데···.”

“괜찮아요. 여기 어차피 사람 없어요. 조금 늦게 오픈하는, 제 가게거든요. 세정이도 몇 번 왔었어요”

“아. 예, 뭐 그럼. 예? 세정이도요? 걔가 왜 그 밤에···”

“걔도 놀긴 놀아야죠. 일단 빨리 출발이나 해요.”

“···큼.”

그가 엑셀을 밟자마자 부우웅- 우렁찬 배기음을 울렸다.

그렇게 출발한 스포츠카는 약 3분만에 음식점 앞에 도착했다. 아니, 음식점 인 줄알았다.

“···술집인데요?”

“네. 말 했잖아요. 늦게 오픈한다고”

음식점은 개뿔, 깔끔하고 고급지게 꾸며진 ‘바’였다

“음식도 해요.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그녀가 먼저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김세진은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체내를 마나가 활류하는 이상 술에 취하는 것은 요원하니까.

**

“이거 사실 마법주예요.”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감이 깨지고 불안감으로 돌변했다.

“그건 미리 말을 해주셔야···.”

“모토가 ‘기사도 취할 수 있는 술’이거드뇨. 그래서 바 이름도 유캔드렁크··· 딸꾹!”

다행히 김세진은 아직 알딸딸의 수준이었으나 하젤린의 경우에는 문제가 많았다.로브는 이미 어딘가로 내팽개쳐졌고,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으니.

“···아, 이런! 저 시간이 다 됐네요. 이만 가봐야 할···”

솔직히 술은 불안하다. 가장 위험한 일은 언제나 술김에 벌어지는 법이니까.

“세진 씨. 저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요.”

그러나 하젤린이 일어서려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과, 애절하게 젖은 눈.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술만 안 마시면 되는 거니까-라고 합리화를 하며.

“···뭔데요.”

그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하젤린은 술 한잔을 더 홀짝이고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촉촉한 입술 사이로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정말 언제 들어도 더 없이 아름다운 목소리였으나, 김세진의 얼굴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갈 뿐이었다.

* * * *

태양이 서녘의 저편으로 가라앉은 늦은 오후, TM사가 자랑하는 초호화 크루즈는청룡에 의해 정화된 동해연안에 정박되어 있다. 선상을 수놓는 은은한 불빛과 정갈한 복장의 웨이터, 멀리서 봐도 장려하고 고급스러운 장관이었다.

격년마다 열리는 파티이니만큼 참석자의 명단은 다양했다. 저번 파티에서는 못 봤던 기업도 있는 반면, 저번 파티에는 참석했지만 이번에는 끼지 못한 기업들도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무도회 시작이 가까워져, 웨이터들이 속속들이 도착하는 하객을 맞이하느라 바쁜 와중. 김세진은 바다속을 부유하며 선상 크루즈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다만 원래 그의 계획은 이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인간 김세진으로 파티에 참석해 유세정을 놀래키려고 했다. TM사가 100대 기업에 이름을 올렸기에 참석자격도 충분히 있었으니.

그러나 오늘, 만취한 하젤린의 말이 마음을 조금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말은분명 고백이 아니었다. 허나 그녀의 목소리에 메아리쳤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자신은 바보가 아니다.

“···반갑습니다. 유세정 씨.”

그때 유세정의 이름이 육성으로 들려왔다. 김세진은 천천히 눈을 뜨고서, 수면 위로 스멀스멀 올라갔다.

선상에 세정이가 보였다. 파티 장에 오른지 3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많은사람들이 그녀의 주위로 몰려들어 있었다. 모두 100대기업의 자재들로 보이는 선남선녀들이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잘 보이고자 애썼으나, 그녀는 그저 예의상의 미소로 그들을 대할 뿐이었다. 게다가 그것 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만나야 될 사람이 있다며 자리를 비켜 어딘가로 향했다.

김세진은 수면 아래에서 그녀를 천천히 좇았다. 이제는 하이힐도 많이 익숙해진 듯, 또박또박 걸어 선상의 발코니에 도착한 그녀는 무겁도록 고요한 바다를 굽어보았다.

어딘가 쓸쓸한 모습이었다. 김세진은 그런 그녀를 위해 일부러 약한 파도를 만들어주었다. 바다의 짠내음과 편안한 소리에,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허나 그 고요도 잠시. 그녀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또 한번 쪽팔림을 당할 남자구나, 세진은 처음에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별안간 그녀가 먼저 기다렸다는 듯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돌아섰다.

‘..뭐야 저거.’

순간 바다가 크게 철렁했다. 잠시 평정심을 잃은 김세진의 무의식적이 소행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자신을 대하는 것 만큼의 살가운 태도로 저 이름모를 남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허나 이성이 마비되기 전에, 김세진은 최대한 침착하게 청각과 시각을 극도로 활성화했다. 어두웠던 시야가 밝혀지고, 둘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그림은 잘 그려지시나요 숙부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김세진은 자신의 실낱같은 인내심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여기서 이성을 잃고 뛰쳐나갔으면 제대로 병신취급을 받았겠지.

“그럼. 이번에 열리는 전시회에 한번 놀러오렴.”

“후훗, 네.”

남자의 인상은 고요한 바다를 닮아있었다. 선한 주름과 꽤나 특이한 진남색의 머리카락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세정아 요즘 김세진이랑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더구나.”

“···네. 꽤 오래됐어요.”

유세정은 왠지 모르게 씁쓸하게 대답했고, 뜨끔한 김세진은 바다 속에서 몸을 흠칫 떨었다.

“근데 언론사에서는 아무 말도 없던데.”

“저희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누가 감히 그런 기사를 터트려요. 새벽과 더 몬스터를 동시에 척지면 한국에서는 발붙이고 살 수 없을 텐데요.”

남자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속에 아른거리는 무엇인가를 되새기려는 듯.

“예전에는 네가 연애를 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그때야 많이 건방졌으니까요. 오빠 만나고 사람 된 거죠.”

“아니아니, 그런 거 말고. 나 아니면 결혼 안한다고 했잖니.“

유세정이 기가막히다는 듯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도대체 언제적 일··· 숙부님도 보면 되게 웃겨.”

”하하, 이런 유머러스함에 내 아내가 반한거겠지.”

“절대. 절~대 아닐걸요?”

두 사람은 서로 화기애애한 미소를 지었다.

허나 미소는 잠시, 남자는 얼굴을 굳히고서 세정의 옆모습을 보았다. 걱정어린 눈빛이었다.

“근데, 확실히 '서로' 사랑하는 거니?”

“···네. 저는 사랑해요. 평생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요.”

유세정은 즉시 대답했다. 뿌듯해야 할 말이었으나, 세진에게는 바늘처럼 따끔하게 다가왔다.

“근데··· 오빠의 감정은 저보다는 확실하지 않겠죠. 아마 제가 훨씬 더 사랑해요. 곁에 잡아 두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정도로”

“그러니?”

"네. 그러니까 저는 숙부님이랑 달라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그랬으면 좋겠구나."

남자는 그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이후로는 아무 말도 오고가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서로는 서로에게서 전해지는 편안함을 만끽했다.

때마침 잔잔한 파도가 일었다.

두 사람은 파도가 일궈내는 아름다운 물결을 가만히 서서 감상했다.

* * * *

나흘 뒤, 목요일.

칠흑기사단 본관의 대강단에 많은 기사들은 물론 카메라까지 바글바글했다. 이 많은 인원들은 고작 5~10분 안에 끝날 아주 짧은, 그러나 기사들에겐 무엇보다 관심이 동할 행사, ‘무기 수여식’을 위해서 이 강단에 모였다.

보통 ‘무기 수여식’이라 함은, 명인 정도 되는 대장장이가 만든 무기를 이름 난 기사가 구매할 때. 그 기사가 소속된 기사단이 ‘우리 명인 무기 샀다~’고 대대적인 홍보(자랑)를 하기 위해서 연다.

허나 여태까지는 기사단의 명예다 뭐다 해서 칠흑 기사단에서는 단 한번도 치뤄지지 않았었다.

그만큼 명예 높은 기사단이 자신들의 전통을 직접 깰 정도로 상기된 이유는 역시,이 무기를 단조한 명인이 ‘김세진’이고, 무기의 등위가 무려 또 ‘보물’에 속할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으리라.

"···축하한다."

대강단의 대기실, 칠흑기사단장 김현석이 김유린에게 영혼없는 축하를 건넸다.

"뭡니까. 부하기사가 빚을 내서 좋은 무기를 구매했다는데, 질투라도 하시는 겁니까?"

김유린은 장난스레 웃으며 대꾸했다. 그에 김현석은 살짝 찔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진심으로 축하한다. 근데 그 무기 이름이 뭐였지?"

"김세진 길드장님이 말하시길, 궁니르(Gungnir)라고 하더군요."

"···궁니르?"

궁니르. 아스가르드의 주인이자 신들의 우두머리 오딘의 무구. 김세진, 그가 감히 신화 속 무구의 이름을 또다시 차용했구나.

"하지만 너는 검을 쓰지 않니. 내 잘은 모르지만, 궁니르의 범주가 창이라는 건 확실히 알고 있다만."

"아 그것이.. 창을 대용할 수 있는 검이라고 합니다. 제 특성과 어울리게 정확도 높은 섬전을 쏘아낼 수 있다고 하는군요."

"···그래? 흠. 맞춤제작이라 이거지."

김현석은 턱을 쓰다듬으며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김유린은 그 모습을 보며 살풋 웃었다. 어쩔 때 보면 엄하지만, 이럴 때 보면 참 아이같고 귀여우시네.

“근데, 신화를 따지면 그람과 궁니르, 둘 중 뭐가 더 우위지?”

“그건··· 아, 이제 시작한답니다. 가시죠.”

당연히 궁니르가 우위죠. 김유린은 속으로 웃으며 김현석을 안내했다.

“어? 어어. 그래. 가자꾸나.”

두 사람이 대기실의 문을 열고 강단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자랑스런 칠흑기사들의 박수가 우레와 같이 울려퍼진다.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화답해주던 김유린은 이내 단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진짜배기 ‘보물상자’를 발견했다. 아직 무기는 상자 속에 담겨 그 자태를 드러내지 않았건만, 상자에서부터 전해지는 압도적인 기운에 벌써부터 감격이 차오른다.

저게 내 무기야~ 김유린은 황홀해하며 나풀나풀 그 상자를 향해 날아갔다.

< 34. 감정의 정리 (1) > 끝

ⓒ 지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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