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Heroic (3) >
꼭 들어오고 싶었던 기록실에 막상 들어오긴 했으나··· 이 광활한 곳을 둘러보고 있자니 머리가 하얘졌다.
평생 책이라곤 담을 쌓고 살았는데, 이토록 넓은 곳에서 도대체 뭘 어떻게 찾아야하는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심지어 모든 정보가 기밀이기 때문에 서기조차도 없다.
“···흠.”
김세진은 일단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기기가 있나 한번 기웃거려 보았다. 그러나역시 있을 리가 없었다. ‘검색가능한 기밀’은 평생 들어 본적이 없는 단어였으니.
결국 그는 이 서고에 쌓인 정보들을 하나 하나씩 뒤적이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이뤄진 문서들에는 여러 사건이 적혀있었다.
균열이 그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사실 무려 60여년 전이었다는 진실부터, 30년 전 발생한 폭발테러가 사실 테러가 아닌 국가의 소행이었다는 점까지··· 음모론자들이 본다면 눈이 튀어나올 만한 정보였으나 그가 찾는 정보는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연신 정보를 탐독해가고 있는 와중에, 띵- 하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까지. 그는 일단 읽고 있던 정보를 보관함에 집어넣었다. 때마침 발소리가 멈추고, 세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너는 누구지?”
유려한 목소리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벽안 금발의 서양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은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김세진은 그녀에게서 인간이 풍겨선 안될 냄새를 맡아버렸다.
“진세한입니다.”
어렴풋이 풍겨 나오는 혈향. 만약 자신이 부분 야수화 상태인 진세한이 아니었더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희미한 냄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 그 오늘 중상급기사 된 진세한?”
“···예.”
세진은 일단 최대한 평정을 유지했다. 당장 정보도 아직 못 찾았는데, 괜히 예민하게 반응해봤자 오히려 이쪽이 손해일 테니.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아니 그것보다 너, 여기 오는 건 너무 이른데?”
여자의 목소리에는 미진한 적의가 담겨있었다.
“저도 중상급 기사입니다만.”
“알지. 알아. 그러니까 출입 자격은 있는데, 너는 들어오면 안돼”
“···무슨 소립니까?”
김세진의 날카로운 반응에 여자가 짧게 웃었다.
“불문율이라고 보면 돼. 이곳에는 워낙 충격적인 정보가 많아서··· 물론 에덴의 서약에는 기밀유지도 있지만, 보통 중상급이 되고서 반년 뒤에 고위기사와의 개인면담까지 끝내고 나서야 방문하는게 보통이야.”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김세진은 말 없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불만있니?”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당신이 누군지.”
“아, 너는 잘 모르겠네. 나는 에덴의 상급기사 첼린 메리. 영국에서 활동하다가 여기로 넘어왔어.”
첼린 메리. 뭔가 애매한 이름이다.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이름부터가 느낌이 구리네.
“그래도 조금 더 있고 싶네요. 어차피 권고사항이지 강제사항이 아니잖습니까.”
“···그래? 뭐··· 당돌하네.”
순간 아주 미약한 살기가 퍼져올랐으나, 그녀는 늦지 않게 살기를 갈무리했다.
"..흐음."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실마리로, 그는 영감을 하나 얻었다. 진세한이 어떻게죽어야 하는지.
“하지만 뭐··· 아리따운 기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는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웅의 죽음에 대한 시나리오는 어렴풋이 떠올랐으나 아직 할 일은 많이 남아있다. 부모님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알아내고서, 또 놈들이 어떻게 에덴에 까지 스며들었는지도 파악해 낸 다음에.
“좋은 선택이야.”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김세진을 바라보는 메리의 표정은 뭔가 미묘했다. 웃는건지화난건지 분간이 잘 안되는, 어딘가 섬뜩한 얼굴이었다.
***
탑을 나선 김세진은 터덜터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행이 따라붙었다. 그 때문에 그는 김세진으로 복귀하지도 못하고, 진세한인 채로 진세한의 월셋집으로 향해야만 했다.
진세한이 거주하는 것으로 되어있는 신축빌라에 도착한 그는 태연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상층에 있는 집의 비밀번호를 누르고서 그 안으로 돌아갔다.
“···음?”
집 내부는 거진 반 년 동안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잘 정돈되어 있었는데, 사람의 향기까지 살짝 느껴졌다.
‘하젤린 씨가 해주셨나?’
아무래도 이 신축 빌라 자체가 하젤린의 소유다 보니···
그는 일단 겉옷을 벗고서 창문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오피스텔 앞에 부자연스런 음영현상이 보였다. 거기에 더해 바깥을 서성이는 흐릿한 기척 또한 여전하다.
“아직도 안 갔네.”
아마 두 놈, 피냄새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현혹마법에 걸린 인간이거나 ‘인형’이겠지.
커튼을 친 그는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 뒤 TV를 켰다. 그리고 소파에 몸을 파묻으니, 이상하게 몸이 나른해지고 마음이 안정되었다. 집에서는 매일 유세정과 함께 있기 때문일까. 이렇게 ‘혼자’ 있다는 것이···
덜컥-
그때 갑자기 비밀번호가 풀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화들짝 놀란 그는 그 즉시 문간으로 뛰쳐나가 문을 연 누군가의 멱살을 부여잡고서,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꺄아악!”
쾅! 둔탁한 파쇄음과 동시에 여인의 비명이 울려퍼진다. 김세진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손으로 그녀의 두 팔을 옥죄인 뒤, 여자가 뒤집어쓴 로브를 벗겼다.
브레이크를 밟을 틈도 없이 몸이 알아서 움직였지만? 사실 이성은 이미 이 여자가 뭔가 몹시 낯익다는 것을 느꼈다.
“아악! 아파! 아프다고요!”
벗겨진 로브 아래, 흐드러진 금발과 고통에 찬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
하젤린이었다.
“놔, 놔 줘요 빨리···!”
“하젤린 씨가 왜···?”
“청소하러 왔는데!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제서야 김세진은 억압을 풀어주었고,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원망과 분노가 서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아프잖아요. 이 정도면 이미 골절.. 아으 참 사람이 왜 이렇게 폭력적인지..”
벌겋게 부어오른 손목을 매만지며 쏘아붙인다. 김세진은 그저 미안하다는 듯 뒷목을 긁적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근데 왜 갑자기 그 로브까지 입으시고..”
TM사에서 특별 제작한 그녀의 로브는 ‘기척은폐’를 비롯한 수 많은 기능들이 달린 만능 로브로, 감각이 예민한 상태에서 이렇게 아무 기척도 없이 갑자기 등장하면의심을 할 수 밖에 없다.
“말 했잖아요 청소하러 왔다고. 그리고 이 로브가 뭐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로브라서 입은 거거든요? 아니, 청소는 자기가 시켰으면서 왜 이렇게 난리에요?”
“아니 제가 언제 시켰다고···”
“진세한이 안 들키게 도와달라면서요.”
하젤린이 눈가에 살짝 고인 눈물을 훔쳐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녀는 진세한이 김세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니, 들켰다는 표현이 옳다.
항상 덥수룩한 수염에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지만 그래도 김세진과 진세한은 서로비슷한 면이 미묘하게나마 있었고, 미립자 수준의 약재들도 걸러내는 엘프 연금술사 겸 마법사의 눈썰미까지 속여낼 수는 없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그녀가 떠보는 의미로 [진세한 씨, 뭐하세요? ^^] 라는 문자를 보냈을 때 식겁하고서 어떻게 알았냐며 전화를 걸었던 김세진 자신이지만.
“이, 일단 앉으세요. 커피 내올게요.”
그는 하젤린을 소파에 앉히고서 부랴부랴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하젤린은 아직도 아려오는 손목을 문지르며 그런 그의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참.. 어이가 없네."
“블랙으로 해드릴까요?”
“···네. 블랙 좋아요.”
그러나 하젤린은 곧 입가를 씰룩이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되다니. 오늘은 운수가 좋네. 저도 모르게 발장구까지 칠 정도로, 그녀는 이 갑작스런 만남을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 * * * *
그 날 이후. 약 이주일 동안 김세진은 계속해서 에덴의 기록물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기록실으로 들어간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각기 다른 기사들이 찾아와 그를 만류했다. 대부분은 인간 기사였으나, 뱀파이어도 2~3명은 있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놈들의 신경을 거스르게 하면 할수록, 진세한에게 뻗어오는 위협도 점차 진해지기 시작했다.
미행의 빈도수가 늘어나고, 갑작스럽게 몬스터가 습격하기도 하였으며, 정신이 홀린 시민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다.
뭔가 켕기는게 있는 놈들의 뻔한 작전이었다.
-에덴에는 그들이 싫어하는 정보가 다수 보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 또한 위험을 무릅쓰고 에덴에 잠입을 했겠지요. 허나 마법으로 기록된 정보들은 소멸되거나 이동되지 않으니 그렇게 훼방을 놓는 것일 겁니다. 그건 그렇고, 찾으시려던 정보는 찾으셨습니까?
아주 오랜만에 듣는 김유손의 목소리였다.
“가까워져 가는 것 같아요. 이제서야 관련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콜록.!
듣기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상당히 건조한 기침이었다.
“저 근데··· 몸은 괜찮으십니까?”
-예. 물론입니다. 늙은이의 몸은 자주 오락가락 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김유손이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허나 그 목소리는 과거에 비해 너무나도 맥아리가 없었다. 그에 김세진은 무어라 걱정의 말을 건네려 했지만···
“저기, 근데 제가 보낸 포션은···”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다른 내용은 선호와··· 쿨럭. 말씀을 나누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크읏···
그가 그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김유손이 수정구의 송신을 끊어버렸다.
위잉- 그와 동시에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힐끗 보니 오늘도 진세한의 집에 올 것이냐는 하젤린의 문자였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진세한으로 자주 활동하는 바람에 그녀와의 만남이 상당히 잦아졌다. 거의 일주일에 3번정도로, 미행을 피해 집에서 쉬고 있으면 그녀가 먹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직접 찾아온다.
그리고 그건 요즘 제대로 만나주지 못하는 세정이에게 죄책감이 들 정도라서··· 그는 짧은 문자를 보냈다.
[아니요. 오늘은 안 갑니다.]
그러나 문자의 내용과는 달리, 김세진은 진세한으로 분해 에덴의 탑으로 향했다.
*
에덴의 기밀 기록물 보관실 안의 구석, 문서를 움켜쥔 김세진의 손이 떨린다. 등허리에 땀이 절로 고이고, 머리가 통째로 저려온다.
드디어, 이주간에 걸친 노가다 끝에, 드디어 발견했다.
어머니, 진소영. 그리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아버지, 김재혁의 정보가 담긴 문서를.
“···하아.”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서 천천히 마법 문서를 오픈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한 줄 한 줄 심혈을 다해 읽어내려간다.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5분동안 고작 한 장을 읽은 그가 다음 장을 넘겼을 때.
“진세한?”
어디선가 스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문서에 너무 집중했기 때문일까. 김세진은 누군가가 다가온다는 기척 조차도 느낄 수 없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예의 ‘첼린 메리’가 서있었다.
“그건 네가 봐서는 안되는 거야. 돌려 주렴.”
그녀는 위협적인 살기를 흩뿌리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살기에도 색이 있다면, 그녀가 풍기는 기운은 분명 선명한 핏빛일 것이었다.
“···싫습니다.”
허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그럼··· 네 마음대로 하렴. 나는 분명 경고를 한 거야.”
그 즉시 전투를 준비하려던 김세진이었지만, 그녀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뒤로 돌아설 뿐이었다.
< 33. Heroic (3)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