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창해(滄海)의 왕, 레비아탄 (6) >
레비아탄이 형성한 거대한 돔 내부, 마나의 흐름이 꽉 막힌 이곳에서는 뱀파이어 특유의 이동마법도 무용지물이었다.
게다가 균열 안을 가득 채우던 수백의 인형도 이제 소환할 수 없어, 남은 뱀파이어는 고작 열 둘의 사도 뿐······.
[어떻게 할까요.]
[바토리님 호출 한번 해봐.]
그분을 귀찮게 했다가는 사지의 절반이 찢겨지겠지만, 저기 분노에 눈이 먼 괴수는 아마 자신의 몸 전체를 갈기갈기 찢어 먼지로 만들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팔 다리 각각 하나를 잃는 것이 그나마 낫다···
[아 그게··· 이미 해봤는데 안되네요? 이게 바닷물로 만들어진 거 치고는 빈틈이 없는 결계같아요. ]
[···]
[후훗, 저희 망했는데요?]
너는 웃음이 나오냐. 사도는 여자를 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허나 그들에게는 서로 힐난을 할 시간조차도 주어지지않은 듯했다.
쿠구구구궁- 그들이 딛고 서있는 수면 전체가 거칠게 일렁이더니, 곧 그 어느 무엇보다 패악적인 흉기로 돌변하여 덮쳐왔다.
사도들은 어쩔 수 없이 마법의 영창을 외웠다. 아무리 태양 앞에 반딧불이라도 조용히 죽어주는 것은 바토리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으니.
[뭐. 저희는 여기서 죽을 테니까 사도 님만 빠져나가요. 인형사는 중요한 인력이기도 하고, 아시다시피 저희는 당신의 인형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잖아요?]
여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사도들 또한 결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남자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리고 별안간, 사도들이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수면 위로 넘쳐흐르는 선혈은 전방에 쇄도하는 거친 해일을 방어하는 배리어가 되었다.
[나중에 보자꾸나.]
[네. 최대한 빨리 부탁드려요.]
활로를 트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혈토를 하였다. 이번에는 자신들을 에워싼 바다의 돔 쪽으로.
츠스스스? 부식성 혈액이 닿은 아주 찰나, 바닷물이 녹아내리며 먼지도 겨우 지나갈 만한 몹시 작은 빈틈이 하나 생겼다. 그리고 남자 사도는 즉시 먼지로 화하여 그 틈을 넘어 사라졌다.
그렇게 하나는 무사히 빠져나갔으나, 비틀거리던 여자는 수면 위에 서있을 마나도 없어 깊은 바다 아래로 잠겨갔다.
[아픈건 싫은데···.]
용의 형상으로 응집된 해수가 포악하게 쇄도하는 장관을 바라보며, 여자가 조용히 읊조렸다.
채애앵-
사도들이 생명력을 소모하여 만든 배리어는 용의 아가리에 닿자마자 깨어지고?
레비아탄의 거센 창파(滄波)가 거칠게 휘몰아치며 그들을 집어삼켰다.
* * *
전투가 끝난 뒤.
김세진은 기다란 고개를 천천히 숙여 하젤린의 요트와 눈높이를 맞췄다. 조금은 남자다워진 레비아탄의 얼굴에는 그래도 여전히 귀여운 구석이 조금은 남아있었다.
“하하...”
그녀는 힘없이 미소지으며 몸을 일으켜, 그의 촉촉하고 말랑한 코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레비아탄은 눈을 감고 그녀의 가만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일단 고맙다는 감사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하젤린은 갑자기 쓰다듬기를 멈추더니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인간으로 변하셔도 되거든요? 세진씨.”
레비아탄이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한 작은 몸짓에도 바다는 거칠게 뒤틀렸다.
“지금 당신 때문에 동해에 강풍, 격랑경보 내려졌거든요? 너무 움직이지 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고속요트의 바닥에 드러누웠다.
더 이상 말할 힘도 없다. 균열을 조성하는 매개를 찾아내고 깨부수느라 너무 많은마나를 소모했다. 빌어먹을 놈들은 무슨 잠수함을 타고 가야 될 정도로 해저 깊은 곳에 부적을 설치해 놓았으니.
“후우···.”
그녀가 한숨을 내쉰 순간에 첨벙- 물소리가 울리더니, 레비아탄이 김세진의 모습으로 변하여 고속요트 위로 올라왔다.
“···알고 계셨어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죠···. 세상에 세진 씨 말고 사람 도와주는 몬스터가 어딨어요? 되게 신기하네요. 용이라니. 그 특성 대체 한계가 어디까지예요?”
하젤린이 세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괜히 멋쩍어진 그는 뒷목을 긁적이며 요트의 의자에 앉았다.
“근데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예?”
그의 지극히 간단한 질문에 하젤린은 잠깐 당황했다.
요즘 나는 거의 맨날, 당신을 보기 위해 바다 위를 드라이브한다. 그리고 오늘 또한 바다 위를 떠돌며 드라이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마나흐름이 느껴져서 부랴부랴 와봤다··· 라고 말할 수는 없고.
“요즘 바다괴수도 없어졌잖아요? 그래서 그··· 이게 마법사들 취미가 됐거든요. 왜, 바다는 자연 그 자체라 마나 농도도 무지 높거든요. 그래서 가만히 바다바람만 들이마시고 있어도 마나가 회복되고 사회가 안정되고 세상이 밝아지며······.”
“그러다가 우연히 발견하셨다고요?”
“······예. 이 이상 말 걸지 마요. 저 죽을 것 같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을 잘라내고서, 더 이상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듯 아예 엎드려 누웠다. 그래서 세진은 그녀 대신 요트를 둘러보았다. 적당한 크기의 회색빛 요트의내부는 그녀 답게 깔끔하고 정갈했다.
“근데 이거 어떻게 운전하죠?”
그가 조타석의 타륜을 매만지며 물었다. 특별한 시동장치가 없는 걸 봐선 마나로 움직이는 마법물품 같은데···.
“저기요?”
허나 아무런 대답이 없어,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쿨쿨.
하젤린의 쌔근쌔근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그녀는 숙면에 빠진 채였다.
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에 흠뻑 젖은 로브는 그녀의 온몸에 바싹 달라붙어 아름다운 굴곡을 자랑하는······
“크흠.”
너무나도 고혹적인 모습. 헛기침을 내뱉은 김세진은 재빨리 시선을 돌려 다시 타륜에 주의를 집중했다.
역시 고블린의 손재주는 이런 부분에서도 적용이 되는 듯, 대충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잡혔다.
위이이잉-
마나를 불어넣자 고속정이 슬며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행히 마나는 충분하다. 레비아탄이 갑작스레 10%나 성장한 덕에 마나통은 지금 마나로 넘쳐 흐를 정도니까.
쿠구구궁.
헌데 그는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하여 있는 힘껏 마나를 불어넣어 버렸고, 고속정은마치 미사일이 발사되는 것처럼 콰과과광-! 힘차게 치솟았다.
“와우.”
김세진은 감탄하며 쾌속의 드라이브를 즐겼지만 별안간 뒤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크게 울렸다. 깜짝 놀란 그가 운전을 멈추고서 뒤돌아보자··· 하젤린이 머리를 부여잡고 꺽꺽대고 있었다.
“끄아앙··· 으으으···.”
아무래도 그녀는 갑작스런 급발진에 몸이 위로 붕 떴다가 추락하여 얼마간의 데미지를 입은 듯했다. 세진은 괜히 미안한 마음에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괜찮아요?”
“···저, 저리가요.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를 물리쳐낼 뿐이었다.
“어디 봐요.”
“안돼요. 얼른 가요.”
“아니···”
“가라니까요!”
그녀가 소리까지 내지르며 머리를 격렬하게 뒤흔들자 턱을 타고 피 한방울이 뚝 흘러내렸다. 김세진은 그 핏방울의 경로를 좇다가 이내 피줄기가 코에서부터 시작됨을 확인하곤···
“···여기요.”
재빨리 비상용 포션을 건네고서 조타실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적절한 양의 마나를 불어넣어, 적당한 속력을 유지하여 배를 운전한다.
그렇게 한 10분정도 지나니 그의 옆으로 하젤린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포션으로 외상은 물론 내상도 완전히 회복한 듯, 멀쩡한 모양새였다.
“흐으응 흐으으음~”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를, 김세진은 힐끗 바라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 신이 사력을 다해 빚어냈음이 분명한 이목구비, 그리고백옥같은 피부까지. 그야말로 절경이라 형용하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하젤린 씨?”
그가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그에게로 돌렸다. 별안간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몸을 크게 떨었지만, 그래도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네, 네?”
“오늘, 고마웠어요. 덕분에 살았네.”
그가 웃으며 말한다. 그러니까, 이 미소는 나를 향하고 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멍하니 보다가, 이내 짧은 웃음을 터트리며 타륜에 올려진 그의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고마우면 나중에 밥 한번 사세요. 그리고 타륜은 이렇게 자동차 핸들 쥐듯이 쥐는 거 아니에요.”
손의 모양새는 물론 손가락까지 하나하나 직접 교정해주며?
하젤린은 자신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 따스한 충만감이 차오름을 느꼈다.
“아 이렇게 쥐는··· 어?”
헌데 그 낭만적인 상황은 금세 끝났다. 저 멀리, 그들이 돌아가야 할 육지 위에는,거친 파도와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으니.
“···제가 말했죠. 당신 때문에 강풍이랑 풍랑경보 내려졌다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젤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또 저렇게 됐네. 레비아탄이 되게 세서 힘조절이 잘 안되거든요.”
“아, 레비아탄이면 충분히 그럴······ 뭐요? 레비아탄?!”
별안간 그녀가 크게 소리쳤다. 휘둥그레진 눈동자에는 경악이라는 두 글자가 가득 담겨있었다.
“네. 근데···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아니에요. 그냥. 청룡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레비아탄이라니.”
하젤린은 짐짓 장난스레 그에게서 슬그머니 멀어졌다. 허나 김세진은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런 가벼운 스킨십에도 얼굴을 붉히며, 어쩔수 없는 척 그의 곁으로 바싹 붙었다.
* * * *
그 사건 이후로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레비아탄이 일으킨 때아닌 기상이변에 태풍 ‘슈프림’이 생겨나 한반도 전역에 청량한 비싸라기가 떨어졌고, 강원도 최고의 고급호텔 ‘Romance of dawn’에 갑작스런 폭발사고가 발생해 최상층의 일부가 무너져내렸으며, 플러쉬 골렘을 처단한지 채 1개월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보스 몬스터가 출몰했다.
“이번에도 강원도라는데··· 가실 겁니까?”
김선호가 말했다. 김세진은 공문 한 장을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협조 요청서’, 요 근래 사태의 심각성을 절실히 느낀 정부가 김세진과 ‘더 몬스터’에 보낸 요청서다. 여기에 적힌 참석 명단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김세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상급 사냥꾼도 부른답니까?”
“예? 아, 예. 길드장님이 전투하는 모습까지 다 녹화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뭐···.”
사실 상관이 없긴 하다. 보스 몬스터는 경험치와 보너스 노다지나 다름이 없고, 인간인 상태로 레이드에 참여한다면 스킬을 얻을 확률이 높으니까.
“선호 씨 생각은 어떠십니까?
“저는··· 참가하시는게 옳다고 사료됩니다. 물론 이게 정부의 견제일 수도 있겠지만 길드장님께서 레이드에 참가하시면 그것이야 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주’, 대외 이미지를 드높일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이번 기회로 완전히 세느님이 되시는 겁니다.”
“···흠.”
“게다가 이번 보스 몬스터가 괴조에 비해서 훨씬 약한 놈이랍니다.”
김세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괴조보다 훨씬 약해요? 그럼 그때처럼 소수정예로 가면 되잖아요.”
“아, 플러쉬 골렘 이후로 모든 보스몬스터는 정부가 전담하기로 해서 이제는 불가능합니다.”
“···아하.”
위잉- 그때 마침 핸드폰에 알림이 울렸다. 김선호가 괜찮다며 눈짓했기에,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저 밖이에요. 어디세요 세진 씨?
“유세정 기사님이십니까?”
김선호가 흐뭇한 미소로 물었다.
허나 김세진은 차마 대답하지는 못하고, 어물쩍 넘기고 말았다.
액정에 적힌 이름은 유세정이 아니라 하젤린이었으니까.
< 32. 창해(滄海)의 왕, 레비아탄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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